남상순(1878)
전중진, 남병우, 이진우 등과 함께 토지측량을 저지하기로 뜻을 모았다.
1914년 8월 26일과 27일, 그는 700명의 주민을 집결한 뒤 경찰관의 입석하에 진행된 임시토지조사국원의 토지측량을 방해하고 이를 안내하던 박기양(朴璂陽)을 구타했다. 이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4년 10월 1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요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는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49년 2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남상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02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남상순은 1878년 5월 23일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성황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곡면장으로 재직 중이던 1914년 8월 일제가 정곡면 죽전리, 성황리, 예리, 중교리 등 4개 동리의 주민들이 경작해오던 정곡면 중교동 동쪽 일대의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하고 조선농업주식회사에 불하한 뒤 임시토지조사국원을 파견해 해당지역의 측량을 감행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를 허용한다면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할 것이 명백하다고 보고 1914년 8월 26일과 27일, 그는 700명의 주민을 집결한 뒤 경찰관의 입석하에 진행된 임시토지조사국원의 토지측량을 방해하고 이를 안내하던 박기양(朴璂陽)을 구타했다. 이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4년 10월 1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요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는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49년 2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남상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02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