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1864)

 


성명
이진우(李震雨)
본관
경주 이씨[1]
생몰
1864년 2월 16일 ~ 1925년 12월 6일
출생지
경상도 의령현 화곡면 중교동
(현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2]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이진우(李震雨)는 1864년 2월 16일 경상도 의령현 화곡면 중교동(현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태어났다.
1914년부터 시작된 토지조사사업 이전부터, 의령군 정곡면 중교동 동쪽 일대의 토지는 정곡면 죽전리·성황리·예리·중교리 4개 마을의 주민들이 개간을 끝내고 지세(地稅)를 납부하며 경작해오던 민유지(民有地)였다. 그러나 일제는 관행을 무시한 체 이 지역을 인근의 토지와 함께 국유지로 편입하여 조선농업주식회사에 불하하였고 1914년 8월에는 임시토지조사국원을 파견하여 해당지역의 측량을 강행하였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알게되자 당시 정곡면장으로 재직 중이던 남상순을 비롯한 전중진·남병우·남종우 등의 지역 유지들과 함께 토지측량이 실시되면 모두 국유지로 편입되어 조선농업주식회사의 관할로 이관되고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할 것이 명백할 것이므로 토지측량을 극력 저지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700여 명의 주민을 집결시켜 해당 토지측량은 마을 주민의 권리를 무시한 압제의 작업이니 단연코 방해해야 한다고 취지를 설명한 후 8월 26일 및 27일 이틀에 걸쳐 경찰관을 대동하고 진행된 임시토지조사국원의 토지측량을 방해하고, 이를 안내하던 박기양(朴璂陽)을 구타, 응징하는 등 격렬하게 항쟁하였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4년 10월 12일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며#, 이에 항소하여 1915년 1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소위 소요 및 공무집행방해, 상해 혐의로 다소 감형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상고하였으나 3월 25일 2심에서의 징역 2년형 판결이 그대로 적용된듯 하며#,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옥고의 여독으로 고통받다가 1925년 12월 6일 별세하였다.
200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38세손 우(雨) 항렬.[2] 경주 이씨 판전공파 사정공파 집성촌이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