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석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남석태'''
'''南錫台'''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남태석(南台錫)
'''자'''
순보(順輔 또는 舜輔)
'''본관'''
영양 남씨[1]
'''출생'''
1879년 4월 4일
경상도 청송도호부 현동면 상월매
(현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월매리)[2]
'''사망'''
1961년 4월 12일[3]
경상북도 청송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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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남석태는 1879년 4월 4일 경상도 청송도호부 현동면 상월매(현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월매리)에서 월매리 입향조 겸와(謙窩) 남수(南邃)의 9대손인 아버지 남영철(南永喆)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병규(李炳奎)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정용기의 의병대에 가담해 의병 모집의 임무를 맡고 청, 장년 28명을 모집했으며 총기 등을 수합했다. 이후 정용기가 1907년 9월 1일 입암 전투에서 전사하자, 서종락과 함께 의병대를 재편성했지만 고와실 전투에서 패전한 후 이름을 바꿔 은신했으나 끝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향에서 은거했다가 1961년 4월 1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남석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송정공파(松亭公派)-청송 문중 15대손 석(錫) 항렬. 영양 남씨 23세.[2] 인근의 도평리·거성리·개일리와 함께 영양 남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남복수도 이 마을 출신이다.[3] 남씨대동보 2권 대광공후 송정공파(영양 본관) 233쪽에는 1953년 3월 15일에 별세했다고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