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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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남정성은 1916년 12월 10일 강원도 울진군 원남면 금매동(현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금매리)에서 영양 남씨 목사공파[4] 17대 종손인 아버지 남계원(南啓源)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매(尹梅)[5]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39년 10월 28일 남원수, 노하순, 임시헌, 전원강, 주영석 등과 함께 창유계(暢幽稧)를 조직했다. 창유계는 한국의 독립을 실현하고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겉으로는 상호친목을 목적으로 매년 3월과 9월에 계회(契會)를 열기로 했지만, 실제로는 비밀결사 형태를 띠고 있었다. 계원들은 각자 2원씩 계비(契費)를 냈으며, 비밀을 엄수하고 단결을 공고히 하여 동지를 획득하자는 행동방침을 정했다. 그리고 울진농민조합에서 활약했던 최학소(崔學韶)의 지도를 받았다. 창유계는 1942년 5월까지 64회에 걸쳐 계회를 열었는데, 남정성은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창유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43년 3월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와 합류하기 위해 만주로 향하던 남원수가 도중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연이어 충칭으로 출발했던 장세전도 출발 전날인 3월 19일에 발각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 경찰의 대대적인 창유계 검속이 이뤄져 102명이 검거되었는데, 그 중엔 남정성도 있었다. 그는 1944년 7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공소했지만 10월 12일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8.15 광복 직후 석방되었다.
남정성은 해방 후 좌익 계열에 합류해 공산주의 운동을 지속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후 전향을 선언하고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그러나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5일 정부가 보도연맹 회원들을 모두 척살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바람에(보도연맹 학살사건) 울진군 죽변면 죽변리 죽변등대 앞에서 수십 명의 보도연맹 회원들과 함께 국군에게 총살당했다.
남정성의 후손들은 1991년부터 대한민국 정부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지속했지만, 정부는 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그러다가 2018년에야 비로소 남정성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고 남정성의 손자인 남상균(南相均)씨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