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벨 공세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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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벨 공세(Nivelle Offensive) / 2차 엔 전투(Second Battle of Aisne)는 1917년 4월16일 엔(Aisne)지역에서 시작된 프랑스군의 공세를 말한다.
단 24시간만에 이 공세작전에서 프랑스군은 무려 10만명이라는 전사자를 냈다. 결국 4월 20일에 1차 공세를 중지하고 2차 공세는 프랑스 장군단과 정치논쟁으로 무산되게 된다. 이 공세로 프랑스군은 18만명 이상의 전사자를 냈으며 목표했던 전선돌파는 실패했다.
2. 1917년초 분위기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달았을 1916~1917년에 연합국은 상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왜냐하면, 동부를 지탱하던 러시아 제국이 볼셰비키 혁명에 몰락하는 상황이었고 심지어 동부전선의 러시아군은 집단항명과 탈영이 일어나고 있었다. 영국-프랑스는 각각 집권세력의 변화가 일어났기에 장기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지도층이 성립되었다. 물론 이 시점에 오면 유럽 전선의 모든 국가의 국민 여론은 염전(厭戰) 사상이 만연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에 힘입은 서부전선의 연합국은 새로운 전세를 뒤집을 새로운 전략을 요구받고 있었다.
영국의 경우 로이드 조지 수상이 취임하면서 유럽원정군 사령관이자 참모총장인 헤이그 대장을 불신하며 관심을 중동으로 돌리는 바람에 헤이그 대장의 계획을 모두 무산시키고 프랑스군의 지휘에 협조하라는 입장을 내보였다.
그리고 서부전선의 핵심인 프랑스의 변화가 가장 컸는데 브리앙 수상이 물러나고 대신해서 알렉산드르 리보가 수상이 되었으며 국방장관 역시 폴 팽르베가 새 국방장관이 된다. 문제는 수상과 국방장관 모두가 프랑스군 총사령관 로베르 니벨(Robert Nivelle)과 사이가 무척 안 좋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니벨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확고히하고자 단기간에 전략적 승리를 약속하며 준비한 공세의 일환에 맞춘 전략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 될 니벨 공세의 서막이 된다.
3. 니벨의 공세작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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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벨의 공세안은 조공(영국군)은 아라(Arras)·노용(Noyon)에서 주공에 앞서 공격을 하여 독일군의 예비전력을 흡수하고 주공인 프랑스군은 엔(Aisne) 강을 도하하여 셰망 드 담까지 진격하여 전선을 돌파하여 독일군의 서부전선을 무너뜨리겠다는 계획이었다.
4. 니벨 공세에 대한 프랑스군의 평가
총사령관 니벨은 정치인들에게 1916년 2군 사령관으로서 이동탄막사격을 활용하여 베르됭 전투에서의 독일군의 공세를 좌절시킨 실적을 내세우며 이동탄막사격 전술에서 서부전선의 해답을 찾았다고 자부심을 내보였다. 따라서 이번 공세만큼은 이전과 다를 것을 정치인들에게 역설했고 계속되는 소모전에 지친 정치인들도 니벨의 자신만만한 선전에 넘어가게 된다. 특히 오랜 전쟁에 지쳐가던 전선의 병사들에게도 이것은 귀가 솔깃한 이야기였다. 당연하게도 니벨 공세가 발표된 시점은 바로 그 처참한 살육전으로 알려져 있는 베르됭 전투가 끝이 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벨의 이러한 공세작전안에 프랑스 고위장교단은 회의적인 시각이 강했다. 예비집단군 사령관 조제프 미셸러(Joseph Micheler) 대장은 미친짓이라고 생각했고 중부집단군 사령관 페텡 대장 역시 랭스 동쪽에 위치한 독일군 돌출 부위를 중부집단군 주도로 돌파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예비집단군을 중부집단군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프랑스군 고위장교단에서 니벨 공세작전안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더욱이 고위장교단이 이랬으니 정치가들이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니벨에게 반대입장을 보였고 그러한 간섭 등으로 인하여 니벨은 공세가 '''실패'''하면 '''48시간 이내로 종결'''하겠다는 입장을 거래로 작전을 허가받게 된다.
5. 생각지도 못한 문제의 발생
이러한 프랑스 정치권의 개입과 간섭, 그리고 군부 고위층간의 파벌갈등의 본모습을 보여준 니벨 공세안이 어찌어찌 통과되긴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하여 공세작전에 최악의 비극을 자초하게 된다. 바로 로베르 니벨(Robert Nivelle) 자신이 이 작전에 대해서 사교클럽등에서 말해선 안되는 것까지 떠들어댔던 것이었다. 굳이 니벨의 행동을 변호해보자면 공세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정치행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동시에 그 당시에는 군사기밀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었던 점도 감안할수 있다. 하지만 이미 1916년 솜 전투에서 그 문제로 실패를 당해놓고 같은 실수를 그것도 태연스럽게 했다는건 문제가 큰 것이었다. 덕분에 이 소식은 당연히 일파만파 퍼져서 독일군의 귀에 들어오게 되었고 당연하게 독일군은 니벨 공세에 맞추어서 철저한 방어대비태세에 들어가게 됨으로서 공세의 이점은 고사하고 최악의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6. 독일군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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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벨이 공세작전안을 정치권과 사교클럽에 떠들어대면서 독일군은 신속하게 니벨공세의 계획을 파악하고 대응준비에 들어가게 된다.
우선 연합군 측으로 커다랗게 반원을 그리고 있던 노용 돌출부를 스스로 포기하고 30㎞ 후방의 지크프리트선(Siegfried Line:Hindenburg Line)으로 철수, 전선을 직선에 가깝도록 조정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일군의 방어 정면은 축소됐고 여유가 생긴 13개 사단을 예비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철수한 지역은 초토화함으로써 전략적인 거부작전을 실시했다. 게다가 모든 교량과 도로·건물을 파괴하고 우물을 메우는 등 급수원을 오염시켰으며 수목은 넘어뜨려 장애물로 이용하고 각종 부비 트랩을 설치했다. 그리고 사전에 준비된 지크프리트선은 철근 콘크리트 진지와 철조망·지뢰 등이 매설되고 기관총이 숨겨져 있는 반 요새화한 진지를 구축하고 철저한 화력유도점까지 확보하는데 프랑스군의 공세에 대비를 철저하게 대비했다.
솜 전투때와 마찬가지로 독일군은 준비가 완료된 상태에서 적군을 맞이하기만 하면 되었다.
7. 비극의 시작
독일군의 이러한 준비를 프랑스군이 모를리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북부집단군 사령관 데스페레 대장은 철수하고 있는 독일군을 공격하여 공세의 시점으로 삼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니벨은 독일군이 자신의 계획을 알리 없다고 자만심에 빠져서 이를 거절하게 됨으로서 공세작전의 노출속에서의 성공가능성은 완전히 날려버리게 된다. 결국 니벨의 계획대로 지크프리트선 북단의 아라 지역에 대한 영국의 견제공격이 실시됐고 그후 1917년 4월 16일 엔 지역에 대한 프랑스 주력부대의 대공세가 시작됐다. 40㎞의 정면에 120만 명의 대병력과 7000문의 야포전력을 집중시킴으로서 공세에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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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구호와 함께 시작된 공세의 시작은 프랑스 5군과 6군의 3800문의 대포의 엄호 아래 독일군 힌덴부르크 선 엔강 교두보를 공략에 들어갔고 이때 쯤이면 프랑스군도 전차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세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독일군은 말단 중대장들까지 니벨 공세의 계획을 알고 대비하고 있었고 1차 방어선은 극소수의 전력을 남긴 후 사실상 적군에게 내준 후 후방에서 안전하게 대기하고 있던 강력한 예비대로 역습을 가하겠다는 기본 전략을 수립해둔 상태였다. 덕분에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1차 방어선은 큰 희생없이 점령했지만, 2차 방어선에 도달하자 곧 전선은 대량살육의 현장으로 변하게 된다. 프랑스군은 독일이 지독할 정도로 만들어둔 장애물 때문에 막대한 출혈을 강요받으면서 진격은 계속 지체되었고, 병사들은 무섭게 돌격하며 용맹성을 과시하였지만 얼마 뒤에 문자 그대로 시체가 산을 이루는 형국이 되면서 단 24시간만에 전사자 10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희생을 내었다.'''"L'heure venue! Confiance! Courage! Vive la France!"'''
(시간이 왔다!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프랑스 만세!)
'''그래픽 노블 제 1차세계대전(Putain de Guerre!)''' 中.}}}공격의 선두에 세워졌던 세네갈 사수들은 수천 명씩 허무하게 쓰러졌다. 비탈길은 급경사였다. 운이 좋아 철조망을 건넌다고 해도 다시 경사로를 올라가야 했다. 수류탄을 던지면 다시 우리에게 굴러 내려오는 바람에 재빨리 뒤로 돌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했다. 다시 올라가고 또 올라갔지만 고지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비탈 아래로는 푸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질퍽한 내장 사이를 걸었다. 일급 살인자로 분류된 무능하고 고집 센 인간의 다리 사이에 버려진 셈이었다. 벙커에 숨은 독일 병사들은 우리가 지나가게 내버려 두었다. 뒤에서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빨래처럼 널린 전우들의 검게 변한 시체가 보였다. 들것병을 찾거나, 어머니 혹은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는 병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총사령관이 자기들 신세가 된 모습을 보기를 바랐을 것이다. 말이 되나. 죽음 앞에서 정신이 돌아 헛소리를 하는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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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만에 공세가 좌절되는 상황속에서 약속했던 작전중지는 나오지 않은채 4일간 작전이 계속되었지만 프랑스군은 독일이 일부러 비워둔 1차 방어선에서 더는 진격하지 못하고 4월 20일 공세를 포기해야했다. 물론 2차 공세가 준비되어있었지만 참담한 실패에 정치권의 강력한 간섭으로 니벨의 2차 공세는 무산되었고, 프랑스군의 사기는 그야말로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병사들은 장교들을 불신하다 못해 하극상과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형국이 되었다. 1916년 러시아군에서 발생한 대규모 항명과 하극상 사태가 프랑스군에서 재현된 것이었다. 게다가 병사들이 집단으로 평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까지 벌어지는 사태가 벌어졌고 명령체계가 가동되지 않는 그야말로 총체적인 마비상황에 오게된다.
8. 공세 후
니벨 공세가 중지되면서 프랑스군은 혼란을 수습해야 했고, 5월 2일 (아군을 하도 많이 죽여서) 도살자라는 별명을 가진 샤를 망쟁 장군[2] 이 해임되고 5월 15일에 로베르 니벨이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된다. 니벨을 대신해서 총사령관에 오른 페탱은 최악의 프랑스군 상황을 수습해야하는 위치에 오게 되면서 성공적으로 프랑스군 병사들에게 사기진작과 동시에 반란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함으로서 군기와 사기를 회복하게 된다.
9. 비극의 이유
니벨 공세의 실패는 니벨 한사람에게만 묻기에는 사실 프랑스군의 파벌 싸움이 큰 몫을 했다. 총사령관인 니벨의 작전안에 많은 장군단이 회의적 입장을 품으면서 니벨에 대한 비난이 강화되었고, 무른 성격을 가진 니벨은 휘하 지휘관들을 리드하기보다는 그들에게 끌려다녔다.게다가 날씨마저도 프랑스군에게 비극이었는데 12월의 눈보다 기나긴 겨울을 거쳐간 4월의 눈이 훨씬 더 큰 지장을 주는건 자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전략적 기습에 대한 효과를 완전히 상실했었다는 점이다. 정치권의 개입과 군부의 갈등으로, 작전 계획을 입안하기 위해서 총사령관이 너무 작전에 대해서 떠들어댔던게 화근이었다. 덕분에 전략적 기습은 고사하고 독일군의 말단제대 지휘관들까지 적의 계획을 몽땅 다 알고 대비하는 형국이 된 것이 프랑스군 지휘부가 저지른 크나큰 실수였다. 덕분에 용감하게 싸우던 프랑스군 병사들만 대량으로 독일군에게 학살에 가까운 살육을 당해야했다.
주공인 프랑스군을 지원하며 서쪽에서 동남쪽으로 진격하던 영국군은 공세를 부분이나마 성공시키며 독일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했으나 위에서 보시다시피 애초부터 조공으로 짤짤이만 넣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큰 역할을 할수도 없었으며, 그나마 진격한 영토도 나중에 독일군의 공세 때문에 버려두고 후퇴할수밖에 없었다.
http://cafe.naver.com/booheong/113369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빨아 먹은 방어선(4) - 니벨 대공세
상세한 실패 이유가 나와있다.
10. 가상 매체 속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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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언트 하츠의 마지막 미션이 바로 이 니벨 공세다. 상당한 난이도와 동시에 어마어마한 살육의 현장[3] 과 더 이상 암울할 수 없는 배경에 하나씩 죽어가는 동료 병사들, 권총으로 협박해대는 장교까지(...) 그동안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에밀은 장교 앞에서 결국 마지막 이성을 놓고 만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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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필드 1에서 맵으로 나왔다.
[1] 비록 독일 제국도 큰 피해를 입긴 했으나, 압도적인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방어에 성공했으므로 결과적으로 독일 제국의 승리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2] 일례로 아무런 준비나 작전도 없이 요새 앞으로 무조건 돌격을 지시하여 일주일만에 1개 사단을 말아먹은 막장 인물이다.[3] 산처럼 쌓인 시체, 그것도 아군 시체를 방패로 삼는건 기본이고 아예 지형 삼아서 타넘고 다닐 정도의 마경이다! 만화같은 그래픽이라 이정도 묘사에서 끝나는게 다행일 지경.[4] 이 작품에서 에밀의 유일한 살해장면이다. 평소의 플레이에선 삽으로 때리면 기절로 그치는 묘사로 이어졌기 때문에 플레이어들도 이를 두고 장교를 죽였다고 생각하기 힘들었으며, 에밀도 장교를 공격했지만 죽이려 한 것은 아니었다고 유언장에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