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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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Wilhelm II[2]
생애 : 1859년 1월 27일 ~ 1941년 6월 4일 (82세)
재위기간 : 1888년 6월 15일 ~ 1918년 11월 9일
독일 제국의 3대 황제이자 독일의 마지막 군주.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사실상 강제 퇴위당했다. 대전 이후 네덜란드로 망명하였고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의 손에 떨어진 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2. 가족관계
뜻 자체도 황제지만, 근대 역사에서 '카이저 황제'라고 하면 이 사람을 칭하는 고유명사 비슷한 것으로 굳어져 있다. 독일이 제국으로 통일된 후 3명의 카이저(황제)가 있었지만 전임 카이저들이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정치와 외교를 일임하고 뒤로 물러나 있었던 것과 달리,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를 실각시키고 친정을 하여 외교 전면에 나섰으므로 존재감이 크기 때문이다. 이른바 카이저(카이젤) 수염이라는 것도 이 사람의 수염에서 유래됐다.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이자 빌헬름 1세의 손자. 이 때문에 영국의 조지 5세와는 외사촌,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 최후의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와 이종사촌 관계이다. 빌헬름 2세의 어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공주,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어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모드 메리 공주. 니콜라이 2세는 조지 5세와 이종사촌 사이이지만, 빌헬름 2세와는 사촌지간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제1차 세계 대전은 사촌들 사이의 전쟁으로 봐도 된다.
빅토리아 여왕은 가장 사랑했던 맏이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공주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특히나 예뻐하였다. 빌헬름 황자가 17세가 되던 해에 생일 선물로 아프리카의 최고봉인 킬리만자로 산을 선물로 주었을 정도이다. 친척들 사이의 애칭은 '''빌리'''.[4] 특히 전쟁 직전에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개인적인 전보문을 보냈는데, 여기서는 끝날 때마다 "사랑하는 윌리가"라고 썼다. 니콜라이는 "사랑하는 니키가".
보수적인 할머니 아우구스타의 품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자유주의적이었던 부모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졌다. 어머니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와 떨어져 자랐기 때문인지 몰라도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후두암으로 재위 99일 만에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곧바로 제위를 이어받았다. 이 탓에 한국에서는 프리드리히 3세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다수이며, 빌헬름 1세의 아들인 줄 아는 사람도 많다. 그래도 재위 초기의 행보만 놓고 보면 아버지 수준은 아니더라도 꽤나 개혁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는 했다.
여하튼 황제가 된지 얼마 안 된 1889년에 베스트팔렌 지역에서 광부들이 파업에 나서자 강경 진압을 주장한 비스마르크와 다르게 파업 문제에 온건책을 주장하면서 손수 중재를 해주었으며 이후, 총선에서 비스마르크파가 패배하자 이를 계기로 비스마르크를 총리에서 해임하고, 반사회주의자 법을 폐기하며 전권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내치는 자유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도 어느 정도 받아줄 정도로 꽤나 유연했지만 외치에서 소탐대실해서 제대로 말아먹었다. 그런 점에서는 프랑스 제2제국의 나폴레옹 3세와도 유사하다. 즉 내수용 정치인.
2.1. 조상
2.2. 자녀
3. 재위
3.1. 정책 노선
'''세계 정책(Weltpolitik) '''
그의 정책은 유럽을 안정시키고, 그 안정 속에서 균형자 / 중재자로서 독일의 권리를 챙기는 것을 중시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는 정반대로 해외로 적극적인 진출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당시 세계 정세의 주도권을 독점하던 대영제국에 버금가는 독일 제국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노선에 반대해 계속 진언을 했지만 빌헬름 2세는 듣지 않았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재상에서 물러난다. 비스마르크가 해임될 당시만 해도 독일 내 여론은 극단적 보수주의자들 빼고 찬양 일색이었다. 집권 말기 독선적인 비스마르크의 행태에 거의 모든 독일인들이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9]
아무튼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의 실각(1890년) 이후 팽창정책에 몰두했다. 덕분에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약간의 식민지를 얻기도 했지만, 독일의 팽창 정책에 위기를 느낀 영국이 고립을 포기하고, 영국 - 러시아 - 프랑스의 삼국협상이 완성되어 독일은 포위당하게 된다. 해군을 육성하며 식민지를 팽창하는 정책으로 영국과 대립각을 세웠다.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의 공화국과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싸운 보어전쟁에서, 빌헬름 2세는 보어인 공화국들을 지지하는 전문을 발표하는데, 이 전문은 영국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것이어서 영국이 발칵 뒤집혔다. 말만 앞세운 것은 아니라서, 보어인들이 캐낸 금과 다이아몬드가 독일산 총포로 바뀌는 걸 본 영국이 충격을 받기도 했다.
이 외에도 독일이 1890년대 이후 대외적으로 불협화음을 일으키면서, 국제사회에서 독일의 평판은 악화일로를 달렸다. 결국 영국은 '영광스런 고립(Splendid Isolation)'으로 대표되는 고립외교 노선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는 1902년의 영일동맹과 1904년의 영불 화친조약으로 현실화되었다.[10] 또한 빌헬름 2세는 청나라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을 시기 영국, 프랑스, 일본, 미국과 더불어 진압군을 파견함으로써, 독일 또한 제국주의 노선을 추구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전까지 비스마르크의 교묘한 외교 정책으로 독일에게 유리하게 유지되던 유럽의 균형은 빌헬름 2세의 이러한 대외 정책 때문에 무너지게 되었다.
반면 외치와는 다르게 내치에선 상당히 유연한 정책을 펴기도 했었다. 비스마르크와 본격적으로 충돌했을때가 루르 광산 파업 때였는데 이 때 비스마르크가 강경 대응을 주장하며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때려잡아야된다는 의견을 피력한 반면에 빌헬름 2세는 파업을 중재하자는 의견을 보였다. 비스마르크가 총리에서 물러나자 비스마르크가 금지시킨 사회주의 정당도 허용하고 사회 보장도 확충하고 만 13세 이하 어린이의 노동을 금지시키고 청소년과 여성들의 노동 시간을 규제시켰으며 노동 재판소를 설치해서 노동 관련 업무를 맡기게 하는 등 사회 안정을 위해서 노동자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정책을 폈고 비스마르크가 탄압에 나섰던 가톨릭 중앙당과도 어느 정도의 화합을 이루기까지 하면서 재임 초기에는 '''노동 황제'''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었다. 후의 에피소드를 생각하면 의외지만 당시 독일에서 싹트던 반유대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11] 그렇지만 재임 중기를 넘기면서 점차 보수화되기 시작해서 자유주의 성향의 총리로 평가받는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재상 재임을 시작으로, 비스마르크급은 아니었지만 국방 예산을 늘리기 위해 세금을 올리는 등등 보수적인 행보를 보였다.
재위 시절 자신의 정치 슬로건을 "Deutschland uber alles(그 무엇보다 독일)"로 내밀었다. 사실 이는 독일의 국가인 '독일인의 노래' 1절의 가사 중 일부인데 여기서 슬로건을 따온 듯 하다.[12] 아래는 빌헬름 2세의 초상과 그의 슬로건이 씌어 있는 선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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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욕은 우리를 몰아붙이지 못하며,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선사한 영토를 수호하려는 불굴의 의지만이 우리를 고양시킨다.
Uns treibt nicht Eroberungslust, uns beseelt der unbeugsame Wille, den Platz zu bewahren, auf den Gott uns gestellt hat.
3.2. 해군력 증강
거함거포주의에 심취한 것인지, 해군을 열심히 육성했다. 해군원수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을 기용하고 1898년에 함대법을 성립시켜 해군 육성에 대한 예산과 법적 지원을 확실하게 보장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는 초반에 프랑스 해군에 의해 독일의 해안선이 봉쇄당하여 장기전을 갔을 경우에는 오히려 독일 본토에 프랑스군이 상륙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1898년의 시점에서 독일을 가상 적국으로 삼은 것이 확실해진 러시아 발트 함대와 프랑스 대서양 함대를 모두 대응할 수 있는 해군의 육성은 정말로 필요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영국을 자극하여 양국간 건함 경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영해가 좁은 독일이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을 따라잡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영국도 프-독-러 해군의 성장에 긴장했지만, 보불전쟁을 계기로 프랑스의 1적수가 독일이 되고, 러시아 발트함대가 동해에서 꼬르륵하며 마음놓고 독일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즉 1:1 상황이 된 것인데...)'''독일은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제국이다. 독일은 빠르게 팽창하고 있는 세계적인 교역지역이고, 우리들은 그 구역을 계속 넓혀갈 것이다. 독일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전함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영국도 지속적인 건함경쟁은 부담이 되었고, 1913년에 육군 장관이던 홀데인을 파견하여 서로 건함 경쟁을 중지하자는 제안까지 하였다. 그런데 황제와 티르피츠 제독이 이걸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영국이 두 손을 든다!" 착각하고 무시한 것이 문제였다. 1914년 영국과 독일의 군함 총배수량의 비는 약 2.2:1이었다. 결국 영국 따라잡기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영국과 싸울 맘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존에 비스마르크가 만들어 놓은 동맹 관계를 말아먹고는 '그 넘들은 필요 없고, 이참에 영국과 새로 동맹 맺자!!'며 정책을 펼쳤는데, 그 과정 중 해군 육성을 추진해서 오히려 영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애초에 해군 육성을 건의했던 티르피츠 제독의 의도부터가 영국으로부터 독일과의 자발적 타협을 이끌어내는 것이었으니.[13]
국내에서는 군함 덕후라는 얘기가 들려온다. 해군을 중요하게 본 것은 안목이 좋았다. 로마도 해군으로 카르타고를 찍어눌렀고 당대 영국도 해군으로 세계를 제패했다. 문제는 아무리 키워봤자 제정이 폐지되기 직전까지 영국을 해군력으로 이겨낼 수는 없었다는 것이었다. 산업이나 예산 면에서 독일이 영국과 겨뤄볼 수는 있어도, 프랑스-러시아에 맞서기 위해 육군 예산을 뺄 수는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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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2세와 독일 제국의 주요 장성들. 합성 사진이라서 방향이 좀 어색하다. 맨 앞에 다리 꼬고 앉은이가 빌헬름 2세, 맨 오른쪽에 수염을 두갈래로 기른 이가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 그리고 오른쪽에서 4번째 앉은 이가 육군 원수 파울 폰 힌덴부르크 육군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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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서. 뒷줄 왼쪽부터 노르웨이 왕국 국왕 호콘 7세, 불가리아 왕국 국왕 페르디난트 1세, 포르투갈 왕국 국왕 마누엘 2세, 빌헬름 2세 본인,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 벨기에 국왕 알베르 1세다. 앞줄은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 영국 국왕 조지 5세,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
3.3. 제1차 세계 대전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의 긴장이 커지는 가운데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사라예보 사건 직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과의 외교적인 해결보다는 군사적 응징을 하려 했다.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요구 조건 10가지 중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 2가지를 빼고 모두 들어줬음에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외교 관계를 끊고 선전포고했다. 빌헬름 2세는 이 때 1914년 7월 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특사인 호요스와의 대담에서 '''"독일 제국의 완벽한 후원을 믿어도 된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군사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지금과 같은 좋은 기회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라고 말한 후 자신의 개인 요트를 타고 노르웨이로 연례 휴가를 떠났다.
빌헬름 2세가 이렇게 말했던 것은 전제군주제 국가인 러시아 제국이 세르비아의 왕실 인사 살해범을 돕기 위해 군대를 움직이진 않을 것이며, 중부 유럽의 유일한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자제시킨다면 최악의 경우 오스트리아가 동맹에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을 것이란 판단도 있었다.[14]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빌헬름 2세의 예상과 달리 즉각 참전했다. 러시아는 세르비아 왕국과 동맹을 맺고도 정작 도와준 게 제대로 없어서 이번에도 세르비아를 도와주지 못하면 발칸 반도의 유일한 동맹국을 잃어 지중해로의 확장이 완전히 무산될 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비스마르크가 베를린 회의에서 러시아의 발칸 진출에 제동을 걸 때부터 러독관계는 망가져가고 있었고, 러시아는 독일에 반감을 품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빌헬름 2세는 제1차 세계 대전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별다른 대책을 실행하지 않아서 전쟁으로의 사태 악화에 공범이 되고 말았다.
개전 후에도 빌헬름 2세는 전시지도자의 면모가 부족했다는 평을 받는다. 최고사령관이자 제국총리를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있는 황제로서 승리에 눈먼 장군들을 제어하거나 아니면 전쟁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일찍 종결시킬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학자 존 키건의 말마따나 '''황제는 전쟁 매커니즘을 통제하는 방법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특히 전쟁 후반기에 황제를 뒷방으로 몰아넣고 폭주하는 제국군의 실권자 노릇을 하던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과감히 내쳤어야 했지만 그러한 단호함이 부족했다.
예를 들어 1918년 1월 루덴도르프는 황제에게 하극상을 범했는데, 러시아와의 강화협상에서 러시아 측에 적은 영토를 요구했다는 이유였다. 이때 루덴도르프가 황제에게 폐위하겠다며 호통을 치는데도 빌헬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처럼 전쟁에서 빌헬름의 위치는 대외적인 것과는 다르게 얼굴마담에 불과했다.
4. 퇴위와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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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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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처 헤르미네와 함께. 오른쪽의 여자아이는 헤르미네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딸 헨리에테로, 후에 빌헬름 2세의 친손자이자 빌헬름 2세의 6남인 요아힘 왕자의 아들 카를 프란츠와 결혼한다.[15]
결국 전쟁 막바지 킬 군항 수병들의 킬 군항의 반란으로부터 시작된 독일 11월 혁명으로 인하여 위기를 맞은 가운데,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왕조마저 무너지자 결국 다음날 퇴위했다. 그 직후 네덜란드로 망명한다. 기차 안에서 영국제 커피를 마시며 머리를 식혔다. 그리고 망명지인 위트레흐트 주 도른에서 저술 활동에 힘썼다고 한다.
빌헬름 2세는 독일 제국이 급격히 멸망으로 치닫던 11월 초에 스페인 독감에 걸렸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건강했는지 네덜란드 망명 직후 인플루엔자에서 완치되었고 회복했다. 독감으로 앓았던 날짜는 대략 열흘(10일) 정도.
본래 승전국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빌헬름 2세를 처벌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정부는 이를 거부했고 대신 이후 정치 활동을 일절 금하겠다는 빌헬름 2세의 약속을 받아낸다. 사실 1차 대전의 근본 원인은 빌헬름 2세보다 막나가는 각국 군부 및 정계, 여론의 책임이 더 크긴 했다. 게다가 19세기적 마인드가 아직도 팽배하던 시절 황제를 전범으로 처벌한다는 건 너무나 불경하고 생소한 개념이었다. 덕분에 오스트리아나 오스만 제국의 왕가가 재산을 거의 다 빼앗기고 국외로 도망쳐야 했던 것과 달리 대부분의 재산을 보전했다. 이 재산으로 빌헬름 2세는 위트레흐트 인근에 해자와 29개의 방이 딸린 도른 하우스(Haus Doorn)란 성을 구입했고 독일에 있는 자신의 옛 성에서 가구와 책, 제복, 그리고 값나가는 예술품들을 58대의 화물차에 실어 도른 하우스로 옮기고 50명의 시종들이 묵을 숙소로 건물을 한 동 더 짓는 등 네덜란드에서도 21년간을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왕조를 잃고 국가를 패망으로 몰아넣은데 대한 도의적인 책임감 및 주변의 눈치까지 없을 수는 없었겠지만.[16]
아들 빌헬름 황태자는 '''1945년'''에 자유 프랑스군 소속 모로코 부대에게 체포되어 무려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쟁 범죄자로 구속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에도 생존한 상태였다. 제정 복고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나치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히틀러에게 비스마르크의 역할을 맡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1차 대전의 책임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하던 아돌프 히틀러는 그를 고깝게 여겼다. 정확히는 패망에 대한 100% 책임이 아니라 '''유대인의 간계에 놀아난 책임''' 때문이었다. 군대도 융커 귀족과 통일 이전 왕국들의 왕족들을 중심인 독일 제국군에서 평민층의 국민군으로 만들려고 하는 등 나치스는 국가'사회주의'를 내세운 집단답게 이렇게 계몽주의의 근대 민족주의를 받아들였다. 덕분에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도 크게 남아 있던 제국색 빼기를, 히틀러 정부는 엄청나게 했다.
어쨌거나 히틀러가 빌헬름 2세를 고깝게 여긴 것을 직감한데다, 갈수록 미쳐가는 나치를 본 그도 점차 나치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열렬한 나치 지지자로 나중에 슈츠슈타펠로 들어가는 4남 아우구스트 빌헬름을 외인 취급했다. 그렇다고 독일 황가에 나치의 지지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매제인 헤센카셀 가문이나 그의 둘째 부인 등은 열렬히 지지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인 앞에서는 정치 이야기를 조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빌헬름 2세는 영국이 프리메이슨 치하에 놓여 있다는 음모론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에는 긍정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파리 점령 이후엔 우울해하면서, 딸 빅토리아 루이즈에게 보낸 편지에는 "평생에 처음으로 독일인인 것이 부끄럽다"고 쓰기도 했다.[17] 일설에는 "이렇게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시각이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아들 아우구스트에 대해 쓴 글에 비슷한 내용이 있다고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네덜란드가 항복하자 히틀러에게 전보를 보내 축하하며 그를 '총통 각하(Mein Führer)'로 부르며 군주제 복고를 희망한다는 내용을 보냈는데 히틀러는 카이저의 전보에 기쁨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며 수행원인 하인츠 링게에게 빌헬름 2세를 멍청이라고 욕했다. 빌헬름 2세를 욕한 것과 별개로, 히틀러는 빌헬름 2세한테 '신중하게 작성한' 답전을 보냈다. 하지만 그 전보 내용이 2020년 현재 남아있지는 않다. 이는 어쨌거나 프랑스의 필리프 페탱 원수도 비시 프랑스 수립 과정에서 어디까지나 그냥 19세기식으로 한 판 붙어서 진 거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지, 프랑스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독일을 이해하지 못했듯이, 빌헬름 2세 역시 어디까지나 19세기적인 인물이 전쟁을 보는 관점이었을 수 있다.
나치는 빌헬름 2세에 대해 시종일관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국론 결집 및 왕당파의 지지 확보를 위해 그에게 독일로 귀국할 것을 요청했고 그가 죽은 다음엔 독일에 매장되길 바랬다. 실제로 이들 왕당파 상당수가 막나가는 나치에 질려 나중에 히틀러 암살 및 나치당 전복 음모에 가담한다. 발키리 작전을 활용하여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주도한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나 녹색 작전이 실행되면 방첩국 국장보 한스 오스터 소장이 히틀러를 축출하고 빌헬름 2세를 복위시키려 한 오스터 음모사건 등.
그러나 그는 결국 1941년 6월 4일,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에서 자신이 끝내 꺾지 못한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국의 전성기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면서 만 82세로 생을 마감한다. 빌헬름 2세는 독일이 제정 복고가 될 때까지는 독일에 묻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네덜란드에 있는 그의 저택 정원에 마련한 영묘(가옥형 묘소)에 안장된다. 그는 두고두고 자신이 가문의 최대 수치이자 독일 제국의 수치라고 생각했다. 독일 정부는 제3제국의 정통성, 계승성 등을 고려하여 장례식에 독일 국방군 육해공군의 장교들과 의장대를 지원해 주었다. 왕당파 인물들 또한 독일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 시절의 공무원 및 군인의 예복을 착용하고 참석했다.
빌헬름 2세의 장례식 동영상.
그 후 나치의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독일 언론에 다음과 같은 보도지침을 내렸다.
옛 황제와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정선의 거리를 유지한 셈.빌헬름 2세는 패배한 체제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가 최선을 다했던 것은 인정하지만, 이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의도가 아니라 성공적인 결과다.
5. 개인사
5.1. 친영(親英)과 반영(反英) 사이
그가 추진했던 정책은 분명 반영적인 것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영국을 좋아했다. 본인도 영어가 유창해서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는 영어로 했다. 가끔은 영국에서 휴가를 보낸 적도 있다. 심지어 퇴위 후 망명할 때에도 망명지에 도착하자마자 '좋은 영국 차 한잔 부탁한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전쟁 직전까지도 종종 영국에서 선물한 해군 원수의 예복을 "넬슨 제독의 옷"이라며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기도 했다. 그의 영국 사랑은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 계속되어, 독일을 베네룩스와의 전쟁으로 인도하고도 그 때문에 영국이 프랑스와 힘을 합칠 것이 확실해 보이자 독일 제국군 참모총장 小 몰트케 장군을 불러 갑자기 침공 중단을 선언, 몰트케를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었다. 중단을 명한 바로 이 시점에 슐리펜 계획에 따라서 독일 육군은 이미 룩셈부르크에 진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한 영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독일 국민들은 반영(反英)적이지만, 나는 친영(親英)적"이라고 발언한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당연히 독일 사람들 반응은... 그러면서 인터뷰 초반에 "영국인들은 3월의 토끼만큼 미쳤다"고 막말한 건 덤. 본인 스스로 친영(親英)적이라면서 영국 국왕인 외삼촌 에드워드 7세 보고는 사탄이라고 했으니 어불성설.
5.2. 장애인
한쪽 팔을 못 썼다고 한다. 역아로 태어나는 바람에 태어날 때 왼쪽 팔이 어머니의 자궁에 걸려서 신경을 다친 바람에 왼쪽 팔이 상대적으로 짧았고, 그것에 컴플렉스를 가진 그는 항상 흰 장갑으로 왼쪽 팔이 짧은 걸 감췄다고 한다. 그래서 왼팔을 부끄러워하면서 감추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다. 사진을 찍을 때 항상 살짝 왼쪽에 치우쳐서 찍거나, 왼손을 주머니에 넣는 행위를 해서 왼팔을 똑바로 펴는 사진이 없다.[18] 심지어 할아버지와 사진을 찍을 때도 왼팔을 주머니에 넣어서 감췄다.
5.3. 성적 취향
'''마조히스트였다.''' 창녀에게 돈을 주고 '''비단 스타킹으로 자신을 묶고 가죽 채찍으로 때릴 것을 요구했다고.''' 이런 성적 취향은 어린 시절에 장애를 가진 팔을 치료하기 위해 전기 치료를 받았을 때 생겨났다고 한다. 또한 나중엔 '''군사대신 디트리히 폰 휠센헤슬러에게 핑크색의 여성 발레복을 입고 발레를 추게 했다. 정부 고관이 지켜보는 파티장에서.''' 헤슬러는 결국 심장 발작으로 죽었다. 하지만 이건 딱히 그를 망신시키려고 한 건 아닌 게, 당시에는 파티의 여흥으로 귀족이나 고관 혹은 파티의 주최자 등이 우스꽝스런 복장으로 깜짝 등장하여 사람들을 재밌게 해주는 일이 간혹 있었는데 이때는 군사 대신 휠센헤슬러가 그런 역할을 맡은 것이다. 다만 헤슬러가 갑자기 심장발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이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히는 등 큰 소동이 일어났다.
양성애 성향도 다분해서 가까운 양성애 친구들과 있을 때 가장 행복해 했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런 사람이 낳은 자식만 해도 7명이라는 사실. 독일의 오스카 와일드 사건이라 불리는 측근 오일렌부르크 후작이 동성애 스캔들에 휘말렸을 때 황제도 그 대상으로 떠올랐으나 자세한 내막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5.4. 성격
겉으로는 강한 척을 했지만 사실은 매우 소심하고 유약한 성격이어서 군인들과 어울려 그들을 호령하고 망신 주는 걸 즐겼다고 한다.
쎈 척의 가장 최고봉은 황태자 시절에 일어났는데, 서부식 공연으로 유명했던 '버팔로 빌 쇼'의 여성 멤버 애니 오클리는 입에 물린 시가를 정확히 권총으로 맞출 수 있었던 걸로 이름 높았는데, 빌헬름 2세는 여기에 자진해서 나갔다. 오클리는 훗날 1차 대전 발발 후에 "다시 한 번 시가를 물어주시면 안 될까요?"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황제는 당연히 무시했다.
5.5. 그 외
전쟁으로 지친 제국 전체가 들끓을 때도 상황 판단을 못했다. 군대는 끝까지 황제를 지지하며, 그 힘으로 시위대를 진압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아연실색한 황제는 '''"명령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겠다던 깃발의 맹세는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답변은 '''"폐하. 오늘날, 깃발의 맹세는 한낱 단어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해외로 망명하는 것밖에 없었다.
청일 전쟁 말기에 '''앞으로 황인종이 서구의 백인(白人) 사회를 위협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황화론(黃禍論)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고, 그것을 뒷받침한다고 만든 말이 더욱 더 괴이하게 변한 것이 바로 '''혈액형 심리학'''. 자세한 내용은 카이저와 황화론 참조.
위의 황화론은 다분히 영국을 견제하고 독일이 팽창하기 위함이었다는 분석 역시 존재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며 팽창중하여 러시아까지 꺾은 동방의 일본 제국을 주 적으로 삼고[19] , 일본과 청나라의 근대화가 완료된다면 온 유럽이 그 무시무시한 인구에 눌려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주장이었다. 이를 통해 주요 유럽국 중 러시아 제국을 제외하면 가장 동방에 있는 독일이 국력을 키워 튜튼 기사단의 전례와 같이 동방의 위협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명분을 만들고, 겸사겸사 독일을 견제하고자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동양에 힘을 실어주는 영국을 매도했다는 것이다. 당장 황화론 문서의 최상단에 있는 그림을 보자. 용을 타고 날아오는 부처(일본)를 막아야 한다며 유럽을 선동하는 강인한 모습의 독일이 묘사되어 있다. 반면 뒤에서 소극적으로 방패를 땅에 받쳐놓은 영국이 대비된다. 황화론이 누구에 의해 주장되었는지, 누구를 매도하기 위해 쓰였는지를 한번에 알 수 있다.
여담 항목에서도 자세히 서술하겠지만, 그의 이러한 황화론과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시각으로 인해,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을사조약 이후에 서구 열강의 지도자들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당시 열강 중 사실상 유일하게 '카이저 폰 코레아(Kaiser von Korea)'라고 쓴 답장까지 써주면서, 관심과 공감을 표현해주기까지 했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 같은 개념. 그 이상의 조치는 어려웠지만 말이다.
6. 독일에서의 평가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우선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갈등을 빚다 그를 강제로 쫓아낸 점, 또한 외교의 실패로 인해 독일을 고립시켰고 1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과 그로 인해 독일을 폭삭 망하게 하고 이때문에 히틀러가 나올 여건도 만들었다는 점 등이 그의 부정적 평가에 한몫 한다.[20] 비록 빌헬름 2세 본인이 아돌프 히틀러처럼 금기시되는 건 아니지만, 빌헬름 2세의 실책이 독일이 쾨니히스베르크(칼리닌그라드), 단치히(그단스크), 포젠(포즈난) 등 동유럽 쪽 영토를 영원히 잃어버리는 참혹한 나비효과로 이어졌기 때문에 히틀러만큼 아니지만 나름대로 빌헬름 2세를 금지어로 취급하는 독일인들도 존재한다.
그와 더불어 개전의 책임은 없지만 사라예보 사건 당시 위에서 언급한 안일했던 일처리 또한 비판받고 있다.
7. 여담
열강이 청나라를 갈라먹기 위해 서로 이전투구를 벌이는 풍자화에서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 그리고 먼 친척인 니콜라이 2세[21] 와 청나라를 갈라먹기 위해 서로 대립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고종 황제가 일본제국에게 먹히기 직전의 대한제국 상태를 세계 각국에 호소했을 당시에 "카이저 폰 코레아(Kaiser von Korea)", 즉 "한국의 황제"라고 반응해 준 유일한 양반이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빌헬름 2세가 고종의 서한에 반응을 보인 이유는 당시 영일동맹을 포함해서 영국이 세계 열강과 맺은 군사 동맹이 궁극적으로는 독일을 포위하여 고사시키려는 거대한 음모로 보았기 때문이다.[22] 하지만 실제적인 행동은 아무것도 없었다.[23] 그나마 보낸 편지도 중간에 일본 측이 가로채는 등 조직적으로 훼방을 놓았다.
빌헬름 2세 시기에 독일이 중국의 칭다오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러나 큰 의미는 없었고, 독일을 고립시키는 데만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점령은 1차 대전 초기까지 이어졌지만, 이후에 남긴 영향은 칭다오 맥주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 정도. 그런데 이 칭다오 공격이 러시아의 강경파를 자극했으며, 이 때문에 러시아는 청의 뤼순과 다롄을 점령하여 세계적으로 왕따가 되었으며, 그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러시아는 일본과의 협상에서 저자세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하였으며,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이기면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말로만 떠드는 것은 한참 부족하다. 그리고 그 칭다오는 훗날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그 일본에게 정복당한다.
빌헬름 2세는 해당 시기의 영국 국왕인 에드워드 7세를 상대로 공식석상에서 '''사탄'''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에드워드 7세는 다름아닌 그의 외삼촌[24] 이었는데 외삼촌이고 뭐고 없었나 보다. 빌헬름 2세가 자신을 독실한 기독교도라고 생각하고 자신에 반대하는 자를 '''기독교의 적'''이라고 공공연히 언급했던 것을 생각하면, 빌헬름 2세가 당시 영국의 독일 따돌리기 정책과 그에 편승하는 영국의 동맹국 및 우호국들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종에게 실질적 도움은 안 됐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아돌프 히틀러도 하지 못한 러시아 정벌을 성공한 황제이다. 1918년 3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독일에게 막대한 양의 물자와 영토를 바친다. 표면상으로는 휴전이었지만 명백한 항복이었다. 하지만 서부전선에서 밀려 항복하는 바람에 의미가 없어졌다. 독일 제국이 항복하자 볼셰비키들은 조약을 파기해 버리고 영토 회복에 나섰지만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던 붉은 군대는 폴란드에게도 지는 추태를 보여 결국 그 영토를 회복하지 못했다.
미국을 침공할 계획을 세운 황제이기도 하다. 카이저 빌헬름 2세의 미국 침공 계획 참조. 빌헬름 2세가 얼마나 호전적인 인물이였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
1938년, 히틀러의 수데텐란트 요구로 녹색 작전이 실행되면 방첩국 국장보 한스 오스터 소장이 히틀러를 축출하고 빌헬름 2세를 복위시키려 한 오스터 음모사건이 계획된 적이 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가 뮌헨 협정으로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들이며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한국어 위키백과의 항목
빌헬름 2세의 전기 작가 요아힘 폰 퀴렌베르크의 증언에 따르면 미국을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들을 접시닦이로나 보내 버릴 머나먼 미지의 땅'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재위기간 중 자동차가 첫 선을 보였는데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긴 모양. 일시적인 유행 정도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8. 대중매체에서
-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선 아예 직접 출현. '813'에서는 '위엄은 있지만 좀팡이' 황제로 '포탄 파편'에선 허세쩔고 못된 야심이 넘치는 딱 독재자의 그 모습으로 묘사된다.
- 심슨 가족에서는 빌리 더 키드 일당이 부활해서 마을을 점령하는 에피소드에 등장. 스프링필드에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하는 말은 위피, 위피!...심슨 가족 아니랄까봐 찰진 고인드립.
-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 나치즘이 아닐 때 권위주의 독일의 지도자로 집권시킬 수 있다. 2편과 3편은 지도자 목록에 있으나 치트 없이 집권시키기 힘들고, Hearts of Iron IV에서 Waking the Tiger DLC가 있다면 라인란트 대신에 히틀러 축출 루트로 진행해서 나치를 몰아낸 뒤에 중점 선택지에 따라 빌헬름 2세가 복위한다.[25] 또한 Man the GUNS가 있다면 네덜란드로 플레이할 때 빌헬미나 여왕이 친정하는 루트로 진행할 경우 독일의 제정복고파를 지원해서 복위시킬 수 있다.[26]
- Hearts of Iron 시리즈의 모드인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독일 제국이 1차대전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빌헬름 2세가 제위에 계속 앉아있다. 독일 제국은 전쟁으로 얻은 벨기에, 벨라루스, 핀란드 등의 영토에 괴뢰국을 세우고 빌헬름 2세의 일가 친척들을 왕으로 꽂아놓고 이전의 협상국들이 가졌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강탈해 세계 최강대국으로 등극해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게임이 진행되면 경제 대공황과 적대국의 성장으로 이런 위치가 위협받게 되고 카이저의 선택에 따라 독일이 패권을 유지할 수도,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 적대국의 공격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왕실은 망명하게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독일이 살아남으면 1941년 이후에는 서거 이벤트가 뜨면서 황태자가 즉위한다.
- 도미네이션즈에서 카이저 빌헬름 2세의 피켈하우베가 유물로 등장한다.
9. 빌헬름 2세의 육성
1914년 8월 6일 전쟁의 당위성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지지를 호소하는 내용이다.#
An das deutsche Volk
독일 민족에게 고함.[27]
Seit der Reichsgründung ist es durch 43 Jahre Mein und Meine Vorfahren heißes Bemühen gewesen, der Welt den Frieden zu erhalten und im Frieden unsere kraftvolle Entwickelung zu fördern. Aber die Gegner neiden uns den Erfolg unserer Arbeit.
제국 건국 이후 43년 동안 세계의 평화와 평화적인 우리들의 힘찬 도약을 이룩하기 위해 나와 나의 조상들의 뜨거운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적들은 우리들의 업적 달성을 방해하고 있다.
Alle offenkundige und heimliche Feindschaft von Ost und West, von jenseits der See haben wir bisher ertragen im Bewußtsein unserer Verantwortung und Kraft. Nun aber will man uns demütigen. Man verlangt, daß wir mit verschränkten Armen zusehen, wie unsere Feinde sich zu tückischem Überfall rüsten, man will nicht dulden, daß wir in entschlossener Treue zu unserem Bundesgenossen stehen, der um sein Ansehen als Großmacht kämpft und mit dessen Erniedrigung auch unsere Macht und Ehre verloren ist.
우리들의 동과 서, 그리고 바다 건너에 있는 모든 잠재적이고 비밀스러운 적대 세력들은 현재까지 우리의 의무와 힘의 의식속에 건재하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려 한다. 적들이 사악한 침략을 위해 스스로를 무장하면서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방관을 고대하고 있다. 강대국으로의 도약을 위해 싸울 그들은 동맹의 이익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신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으로 하여금 굴욕과 함께 힘과 명예를 잃도록 할 것이다.
Es muß denn das Schwert entscheiden. Mitten im Frieden überfällt uns der Feind. Darum auf! zu den Waffen! Jedes Schwanken, jedes Zögern wäre Verrat am Vaterlande.
그러므로 칼날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적은 평화시에 우리를 침공할 것이다. 따라서 일어나라! 무장하라! 주저하고 마다하는 모든 이들은 조국의 배신자일 뿐이다.
Um Sein oder Nichtsein unseres Reiches handelt es sich, das unsere Väter sich neu gründeten.
우리 아버지들이 세운 우리의 제국의 존속을 위해.
Um Sein oder Nichtsein deutscher Macht und deutschen Wesens.
독일인들의 힘과 독일인들의 생존을 위해.
Wir werden uns wehren bis zum letzten Hauch von Mann und Roß. Und wir werden diesen Kampf bestehen auch gegen eine Welt von Feinden. Noch nie ward Deutschland überwunden, wenn es einig war.
우리는 사람과 말의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 우리를 지켜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싸움에서 살아남을 것이고 적들의 세계를 대항해 이겨낼 것이다. 하나였던 독일은 패배한 적이 없었다.
Vorwärts mit Gott, der mit uns sein wird, wie er mit den Vätern war.
하느님과 함께 전진하라.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