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됭 전투

 

'''베르됭 전투'''
제1차 세계대전서부전선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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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916년 2월 21일 ~ 1916년 12월 20일
'''장소'''
프랑스 베르됭, 뫼즈 강
'''교전국'''
<^|1> [image] 독일 제국
<^|1> [image] 프랑스 제3공화국
'''지휘관'''
<^|1>[image] 빌헬름 2세
[image] 에리히 폰 팔켄하인
<^|1>[image] 필리프 페탱
[image] 로베르 니벨
[image] 조제프 조프르
'''결과'''
프랑스군의 승리
'''병력'''
125만 명
114만 명
'''피해규모'''
사상자 33만 6,000명 ~ 43만 4,000명
사망자 14만 3,000명
사상자 37만 9,000명
사망자 15만 ~ 16만 2,000명

"'''지옥도 이보다 더 참혹할 수는 없다.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미쳤다.'''"

- 프랑스 육군 알프레드 주베르 보병 중위가 사망하기 전에 적은 일기(1916년 5월 23일).[1]

"'''Ils ne passeront pas(그들은 지나갈수 없다.).'''"

- 프랑스 육군 중장 로베르 니벨이 일선 지휘관들에게 하달한 훈시의 마지막 문장

1. 개요
2. 소개
3. 1915년말 - 1916년초의 전략적 상황
4. 독일 제국군의 대공세
5. 양측의 피해
6. 그 외
6.1. 게임


1. 개요




1916년, 베르됭 전투 당시 촬영된 영상
제1차 세계 대전서부전선에서 독일 제국군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군 간에 1916년 2월 21일부터 동년 12월까지 벌어진 전투.
앞선 마른 전투, 이후 솜 전투와 더불어 제1차 세계 대전의 가장 유명한 대전투들 가운데 하나다. 특히 '''소모전의 시초'''이자 참호전의 전형적인 양상을 나타내며 공격자인 독일, 방어자인 프랑스 양측 모두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살육을 강요했다.

2. 소개


독일의 슐리펜 계획이 1차 마른 전투의 패배로 실패로 돌아간 후, 육군 원수 소(小) 몰트케 장군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에리히 폰 팔켄하인 장군은 1915년에는 동부전선에 주력한 후, 1916년 서부전선에 공세를 기획하게 된다. 그는 극적인 전선 돌파에 따른 신속한 전쟁 종결이 실패로 돌아간 이상,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사실상 요새가 된 전황을 타개해야 한다고 봤다. 우선 최단 거리로 요새를 돌파해서 파리로 나간다는 작전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게 실패할 경우에 대비한 대체 작전이 엄청났다. 일명 '사형터 작전'이라는 것인데 전선의 한곳에 적군을 끌어들여서 적을 '''소모'''시키고 그걸 바탕으로 전선을 붕괴시킨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쪽이 공격하면 저쪽도 물량공세로 밀어붙일 것이 뻔하니, 그걸 이용해 병력을 전부 고갈시켜서 파리까지 진격하자는(덤으로, 영국은 철수하도록 유도하고) 것[2]
당시 프랑스 육군 대위로 참전했던 샤를 드골의 말을 빌리면 "20세기30년 전쟁". 기간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잔인했다는 이야기다.[3]
소모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런 전략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효과적인 교환비로 깎아먹어 아군은 덜 죽고, 적군은 많이 죽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정말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규모는 전쟁에서 질적인 우위를 무력화하는 데 유용하다.[4]
이 작전은 모든 것이 계획대로 잘 되었을 경우에 적과 아군 피해 비율이 5:2라는 극단적인 소모전으로 계획되었으며, 독일 육군 참모본부는 프랑스군에게 최대한의 병력 손실을 강요할 장소로 요새 지대인 베르됭을 선택, 공세를 펼치게 된다. 베르됭은 전통적으로 프랑스 육군 최고의 요새 지대였으나 대전 초 벨기에 육군의 리에주 요새 지대가 대구경 공성포의 포격 앞에 힘없이 무너짐으로써 가치가 평가 절하된 상태였다. 그밖에도 당시 서부전선의 중심이 벨기에에서 프랑스로 넘어가 파리로 향하는 서부전선의 중북단 지역이었기에 개전 초 프랑스군의 공세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 상대적으로 소강상태에 놓인 서부전선의 남부 일대 전역은 비교적 고요한 편이었다.

3. 1915년말 - 1916년초의 전략적 상황


1915년 전역에서 연합군은 서부전선 공세, 동부전선 수세의 전략을 유지했는데 그 전력과 별개로 전황은 영 시덥잖았다.
1915년 서부전선에서 프랑스가 중심이 되어 전선을 동쪽으로 밀어내기 위해 여러 차례 대규모 공세를 실시했으나 독일군의 방어에 막혀 모조리 말아먹고 말았다. 1915년 전역에서 필리프 페탱이 대장으로 진급한 이유가 이 대차게 실패한 공세에서 유일하게 진격에 성공했다는 건데, 그 진격거리가 3~4km다. 즉, 프랑스군은 어떠한 전략적, 전술적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지중해 방면에서는 갈리폴리 전투가 대실패로 끝나가고 있었으며 동부전선에서는 동맹군이 대규모 공세에 나서서 러시아령 폴란드를 거의 쓸어버리고 전선을 동쪽으로 크게 밀어냈으며 러시아군의 피해는 가공할 수준으로 치솟았다. 이 시점에서 연합군에 유일하게 긍정적인 요소는 1915년에 이탈리아가 연합군으로 참전했다는 것 하나였다. 오스만 전선에서 러시아 군이 에르주룸을 함락했다는 뉴스가 나오긴 했지만 에르주룸 함락은 전황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때문에 1915년말 연합국간 회의를 통해 1916년에도 프랑스와 영국이 서부전선에서 대공세를 펼치고, 러시아는 방어에 전념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동맹군이라고 해서 사정이 나은 건 아니었다. 동부전선에서 대승을 거두긴 했지만 러시아의 평원은 너무나 넓었고,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까지 진격하는 것은 공상 속의 일이었다. 때문에 독일군 수뇌부는 동부전선에서의 결정적 승리를 허황된 것으로 치부했다. 충분히 합리적인 생각인게, 차량화된 25년 후의 독일군이 레닌그라드(페트로그라드의 러시아 혁명 이후 개칭명)까지 진격하고 포위하긴 했는데, 서부전선이 사실상 종료된 상황에서 그조차도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군의 허리가 부실해진 소련군을 상대로였다. 서부전선이 유지중인 상황에서, 보병 중심의 군대로 동프로이센에서 페트로그라드까지 진격한다는 건 엄청난 무리였다.
단순히 지도에서 거리를 재도 동부전선의 경우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페트로그라드까지의 직선거리가 800km가 넘는데, 서부전선의 경우 이미 최전선에서 파리까지 직선거리 200km 이내로 들어온 상황이었다. 즉, 동맹군 입장에서는 동부전선에서의 승리는 허황된 것이었고 현실적으로 서부전선에서 파리를 점령함으로서 프랑스를 이탈시키는 것이 전략적으로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이게 어디까지나 그나마 합리적인 거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리가 훨씬 짧은 대신 서부전선의 병력밀도는 동부전선을 훨씬 상회했다. 프랑스는 전국의 병력을 긁어모으고 식민지군까지 동원하여 있는 족족 전선에 투입하고 있었으며 영국의 대륙원정군도 시시각각 증강되고 있었다. 거리를 무시하고 단순하게 병력밀도만 놓고 생각하자면 차라리 동부전선에서 기동전으로 러시아군 주력을 포위섬멸하고 페트로그라드를 공략하자는 말이 더 합리적이었다.
즉, 독일군 입장에서는 서부전선을 뚫긴 뚤어야겠는데 마땅한 묘수가 안나오던 입장이었다. 그리고 독일군 총참모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개전 이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지역에 주목하게 된다. 베르됭이었다.
그런데 프랑스군은 공세 준비에 정신이 팔려서 독일군의 베르됭 공략 시도를 놓치고 말았다! 독일군이 막대한 병력과 물자, 중포를 베르됭 공격 준비를 위해 은밀하게 코앞까지 옮기는 동안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제프 조프르는 프랑스군 전열을 가다듬고 1916년의 새로운 공세 준비에 몰두했으며 베르됭 일대는 주전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말았다. 더구나 주전장이 아니었기에 베르됭 지역의 병력과 장비들이 하나둘 차출되어 전투가 개시될 무렵 이 일대 프랑스군의 방어력은 크게 허술해진 상황이었다. 사실 독일군의 보안이 철저하긴 했어도 워낙 대규모 군세가 동원되는지라 몇몇 징후가 사전에 노출되어 대비할 기회가 있긴 했는데 조프르와 프랑스군 수뇌부는 이를 일종의 역정보공작으로 판단했다.
때문에 현장지휘관인 정치인 출신 에밀 드리앙 예비역 대령이 방어준비가 허술하다, 독일군의 공세시 막아낼 수 없다, 무언가 심상찮은 징후가 보인다고 몇 달 전부터 보고했지만 조프르는 이를 씹었다. 사실 드리앙 대령은 본래 군 출신으로 군무에 문외한이 아니었으며, 전역한 뒤 정계에 진입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 개전 후 현역소집되어 부대를 지휘 중이었는데, 보고가 씹히자 열받아서 정식 보고계통이 아닌, 자신의 정치권 인맥을 활용해 동료 국회의원에게 편지를 보내어 언론과 정치권을 통해 조프르에게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일로 괘씸죄를 당해 조프르는 '''정식 지휘계통 외의 보고는 인정하지 않겠다!'''며 전군에 엄명을 내렸고, 드리앙이 원했던 베르됭 방어력 강화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5]

4. 독일 제국군의 대공세


하여튼 독일 육군은 이 지역을 선택, 1916년 2월 21일 최정예 사단들을 투입해 공세에 나서고 프랑스 육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2월 25일에는 최후의 전방 보루인 두오몽 보루(Fort Douaumont)가 독일 육군에 함락되었다. 이 때 전술이 우선 1,500여 문의 야포에서 30만 발을 쏟아붓는 압도적인 포격으로 요새를 마비시키고, 그 뒤를 이어서 보병이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대략 1km 단위로 포격과 진격을 반복하였고 그 결과 프랑스 육군 사상자가 10만 가까이 나오는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6]
그나마, 드리앙 대령이 자신이 지휘하던 2개 대대를 이용해 필사의 지연전을 펼쳤고, 독일군도 철저하게 선 화력제압 후 진격 방식을 선택하여 신중히 진격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귀한 시간을 벌을 수 있었다. 덕분에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전투 당일에 이미 독일군이 뫼즈 강과 베르됭 요새까지 도달했어야 할 정도의 전력비였음에도 실제 독일군의 진격은 느린 편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드리앙 대령이 지휘하던 2개 대대는 거의 전멸했고 드리앙 대령 본인도 2월 22일, 후퇴전을 지휘하며 아군을 엄호하다가 전사한다.
그러나 뚝심 하나만큼은 최고였던 조제프 조프르 장군은 당황하지 않고 필리프 페탱 장군을 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해 방어전에 나서게 했다. 전선에 도착한 페탱 장군은 프랑스군과 독일군의 전력비가 1:3까지 벌어진 것을 알게 되었고, 독일군을 격퇴시키기 위해선 독일군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안겨서 스스로 물러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최단기간에 20만 병력과 그에 필요한 군수 물자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7] 그리고 병력 보강이 끝나는 즉시 일선에서 지쳐있던 부대는 뒤로 빼고 보강된 병력을 전투에 투입했으며, 그 병력들이 지치면 후방에서 휴식을 취했던 병력들과 교대시키며 전투에 들어갔다. 이렇게 페탱은 독일군에게 무지막지한 피해를 주었으며, 덕분에 프랑스 육군을 제압하기 위해 이쪽도 치명타를 입지만 어쩔 수 없다던 팔켄하인의 5:2 플랜까지도 깨져서, 마지막 순간에는 5:4까지 근접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페탱을 임명한 조프르는 잃어버린 영토를 당장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페탱의 방식에 불만을 갖게 된다. 일단은 페탱이 거둔 성과가 컸기 때문에 그를 승진시키며 후방부대를 맡게 했으며, 그 후임으로 '''로베르 니벨'''을 임명한다. 공격적인 니벨은 부임하자마자 바로 공세를 명령했으며, '''그 뒤부터는 철조망기관총으로 병력이 증발하는 전형적인 참호전이 벌어지게 된다.''' 특히 독일측의 참모장 슈미트 폰 크노벨스도르프도 니벨처럼 공격적인 인물이어서 프랑스군의 공세에 공세로 맞불을 놓았다. 그야말로 동반자살에 가까운 상황. 이렇게 되자 더 이상의 공세는 의미가 없어졌다. 게다가 동부전선러시아 제국까지 상대해야 하는 독일은 인구 문제도 있었기에[8] 결국 공세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동년 6월에 러시아군의 브루실로프 공세, 7월에 영국군의 솜 공세가 실시되자 독일군은 베르됭 공세를 취소하게 된다. 최종적인 인명 손실은 독일 육군 '''43만 4000명~35만 3000명''', 프랑스 육군 '''37만 9000명''' 정도였다. 전사 및 실종자는 이 가운데 각각 10~15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9][10] 오죽 지독했으면 프랑스군은 이 전투를 '''분쇄기'''라고 불렀다.[11]

5. 양측의 피해


베르됭 전투 전체의 양측 손실 비율은 5:4였지만, 초기 공세 기간의 급격한 손실을 제외한 나머지 전투 기간 동안의 프랑스와 독일 양측의 병력 손실비는 거의 1:1에 근접하게 된다. 이는 이전까지 독일군에게 밀리던 프랑스군의 전투력이 독일군과 비등해졌으며 더 이상 독일군이 우월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공세를 통해 프랑스군에 소모전을 강요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베르됭 전투 이후 솜 전투, 제2차 아라스 전투, 니벨 공세, 제2차 이프르 전투 등 1917년 내내 독일군은 수세적 입장에서 전쟁을 수행하게 된다.[12]
이 작전의 실패로 팔켄하인 장군은 참모총장에서 물러나 동부전선으로 가게 되었고, 베르됭 방어전을 성공으로 이끈 페탱 장군은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페탱은 후일 2차대전 초 나치에게 항복하고 수립된 괴뢰 정부 비시 프랑스의 수반이 되어 베르됭에서의 명성을 무색하게 했으며, 전후에는 반역죄로 여생을 감옥에서 마쳤다.[13]
페탱을 변호하는 쪽에선 이 베르됭 전투 당시의 경험이 페탱으로 하여금 비시 정부의 수반으로 활동하며 독일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취하게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베르됭 전투 당시 프랑스군이 입은 엄청난 피해가 페탱에게 큰 충격으로 남았고 또 다시 그런 희생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전챙 초반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과연 설득력이 있냐는 의문이 있다. 또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페탱이 내린 조치도 어디까지나 프랑스의 승리를 위한 것이었지, 병사들 개개인의 목숨을 소중히 여겨서가 아니었다는 것도 유념해 둘 필요가 있다.

6. 그 외


본래 연합국 주요 4개국(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 이탈리아 왕국, 러시아 제국) 회담에서는 1915년에 큰 피해를 입은 러시아를 배려하여 동부전선에서 현상 유지를 하고 나머지 3국이 일제히 서부전선에서 총공세를 펼치기로 합의가 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공세에 나서기도 전에 독일이 베르됭 전투로 선수를 쳤고, 상황이 급해진 프랑스는 기존의 합의를 제쳐두고 러시아에 급히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러시아가 이에 호응하여 벌어진 것이 제정 러시아 최후의 공세 작전 브루실로프 공세이다.
당시 패탱과 함께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끈 니벨은 조프르의 뒤를 이어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된다. 그리고 해가 바뀐 1917년 '''1차대전에서 프랑스군 최악의 참패를 만들어내고 만다.'''

훗날 프랑스 해군 원수가 되는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위관급 장교로서 해군 육상 포병 부대의 일원으로, 프랑스 대통령이 되는 샤를 드골 육군 보병 대위가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고, 독일군에서도 귄터 폰 클루게, 발터 모델 등 제2차 세계대전에서 원수의 지위에 오르는 자들이 위관급 장교로 참전했다가 중상을 입었다. 드레퓌스 사건의 주인공이자 피해자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 육군 포병 소령도 참전했다. 얼마나 참호전이 처절했던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베르됭 일대의 지형은 포격으로 패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을 정도. 그리고 아직 일부지역은 출입 통제지역이라고 한다. 이유는 아직 발견되지 못한 불발탄 및 지뢰.

현재 베르됭 인근의 마을 모습. 지도상에도 존재하며 시장도 뽑지만, 실제로는 잔해조차 없는 숲으로 변해버렸다.

스웨덴 록밴드인 Sabaton에서 이 전투를 주제로 한 노래가 나왔다고한다. 제목은 'Fields of Verdun'.
프랑스 노래로 "Verdun! On ne passe pas!" (베르됭! 너희는 못 지나간다!)가 있다. 자세한건 해당 항목참고
이 전투로 '''1,200년전 동아시아에서 벌어졌던 동원 병력 규모의 세계기록'''이 갱신되었다.[14] 당시 서양에서 그 전투의 존재나 역사상의 의의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의문이고, 지금도 관심이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6.1. 게임



[1] 출처: <참호에서 보낸 1460일>.[2] 전투 전체에 걸쳐서 베르됭 고지 대부분을 장악하고 요충지인 보 요새까지도 장악하는 등 독일이 유리하게 싸웠으나, 결과는 프랑스군의 전투력이 점차 보강되어 독일 쪽의 인적, 물적 피해가 커지고, 다른 곳에서 추가 전선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독일이 발을 빼게 된다.[3] 몇몇 역사학자들은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과 그 사이의 기간을 합하여(1914~1945년, 대략 30년 정도 된다.) 제2의 30년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4] 물론 근대전에 접어들며 무기, 훈련 등의 질적 우수성으로 물량의 우위를 어느정도 상쇄시킬 수 있지만, 이것도 병력비가 2~3배 이내까지의 이야기이며, 4배만 넘어가도 장비의 우위만으로는 버티기 힘들어진다. 이를 잘 보여준 예시는 2차 세계대전의 겨울전쟁이 있다.[5] 베르됭 전투 종료 직후 드리앙 대령의 진언을 생깐 게 문제가 되어 조프르도 결국 경질된다.[6] 이 방법을 1차 솜 전투에서 영국군이 그대로 재현하려고 시도했으나 대차게 실패했다. 사거리를 고려하지 않고 포만 쏴댄 결과로 유효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굳건히 방어선을 형성한 독일군 참호 앞으로 보병을 들이민 꼴이 된 것이다. 지휘부는 작전이 당연히 성공했을 것이라고 보고, 중간 결과 파악이 안 된 상황에서 병력을 진격시켰으나 피해를 입지 않은 독일군 방어선 앞에서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반면 영국군이 이런 삽질을 할 동안 솜 동부에서 조공을 맡은 프랑스 육군은 솜 강을 도하해야 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순조롭게 공세를 진행해 주공인 영국 육군보다 더 많이 진격했다.[7] 이 계산을 전장에 도착한 지 반나절 만에 계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8] 이후 독일이 러시아 전선에서 입은 손실은 미국 참전과 겹쳐 결국 패전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9] 이게 얼마나 거대한 피해인지를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한국전쟁을 벌였을 때 대한민국 국군 전체 사상자가 3개월간 49만 명으로 추산되었을 정도(이 숫자는 확인이 필요하다. 국가 기록원에 따르면 한국전쟁 3년간 한국군 전사자가 137,899명, 부상자가450,742명인데 첫 3개월간 사상자가 45만이 되기는 어렵다.).''' 그마저도 북한군 포격을 굉장히 과대평가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은 3개월 동안의 사상자이고 베르됭 전투는 10개월 동안의 사상자이기에 한국전쟁이 더 끔찍했다고 해석할수 있지만(민간인 피해와 전후 남북에 끼친 피해를 생각하면 매우 끔찍한 전쟁인 것은 사실이다)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 전역 전체에서 3개월 동안 발생한 국군의 전체 사상자와 고작 가로세로 10Km 남짓한 베르됭 전역에서 10개월 동안 발생한 사상자가 비슷한 것이다. '''전쟁'''에서의 사상자와 '''전투'''에서의 사상자와 맞먹는다는 것만으로도 베르됭 전투가 얼마나 끔찍한지 보여준다.[10] 최근 나온 프랑스군 서적에서는 프랑스군의 피해가 37만 9,000명 정도였다고 주장하며, 윈스턴 처칠이 추산한 44만이라는 수치는 다른 전선에서 죽은 것까지 계산했다며 많다고 비판하는 마당이다.[11] 훗날 제2차 세계 대전독소전쟁에서 벌어지는 르제프 전투소련군독일 국방군 양 측간 인명 손실이 막심하여 르제프 전역의 별명은 르제프 고기분쇄기(Meatgrinder)였다.[12] 이 상황에 대해 독일 황태자 빌헬름은 이런 말을 남겼다. "전쟁 전부터 우리가 보유한 정예병은 대부분 베르됭에서 죽었고, 그나마 남아 있던 병사들마저 전부 솜에서 죽었다."[13] 그나마도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 종신형으로 감형된 결과였다.[14] 고구려-수 전쟁에서는 수나라 전투병력만 113만 3,800명이었으며, 보급부대는 그 배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근대국가치고 규모가 너무 거대한 탓에 일각에서는 실제 규모는 훨씬 적었다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기록이 워낙 자세한 탓에, 100만 대군에 회의적인 측도 전투병력의 합이 아니라, 보급부대를 전부 포함해서 110만 명이며, 그 배라고 하는 보급부대는 군대라기보다 잡부라는 식으로 당시 기록을 토대로 추산하고 있다. 200만 명이라는 기록은 수나라 당시 전체 인구의 7%에 육박하는 규모로 통일된 중국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이며,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까마득한 고대 전쟁의 동원병력 규모 기록이 왜 현대 총력전의 시초인 베르됭 전투에 이르러서야 깨질 수 있었는지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추가로 일격에 고구려를 멸망시키지 못한 수나라가 필연적으로 자멸하게 된 이유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