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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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6년 7월 1일부터 동년 11월 18일까지 벌인 영국군의 대공세. 1918년 아라스 전투와 비교하기 위해서, 1차 솜 전투라고도 부른다.
2. 소개
1916년, 서부전선에서 펼쳐진 대규모 전투 중 하나. 철조망과 기관총 앞에서 수많은 군인들의 목숨이 증발해버린, 제1차 세계대전 중 최대, 최악의 살육이 벌어진 전투다.
작전 개시 당일, 영국 육군에서만 5만 8천 명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부대로 환산하면 대략 '''4개 보병사단이 하루 만에 없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영국 미디어들은 지금도 매년 7월 1일이 되면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 기사를 내보낸다.
최초의 전차 투입, 이동 포격 탄막 전술의 전개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3. 전투 이전
1916년에 접어들 당시, 협상국 측은 러시아 제국 육군의 피해가 컸던 동부전선에서는 수세로 전환하고, 서부전선에서는 영국-프랑스-이탈리아 3국이 대규모 공세를 시도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독일 제국군 육군이 베르됭 전투를 걸어오면서 무산된다. 베르됭 전투로 인해 공세의 주력을 담당할 것으로 여겨졌던 프랑스군이 대거 빠져나갔고, 반면 영국은 병력 증강을 위한 대규모 모병 활동의 결과로 비로소 프랑스 육군에 필적하는 규모의 육군('키치너 육군') 병력을 갖추게 되면서 솜 전투는 1차 세계대전 역사상 최초로 영국군이 주도하는 공세가 되었다. 실제로 이 전선에서 프랑스 육군 총사령관인 조제프 조프르 장군은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헤이그 장군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
또한 최초 계획이었던 8월 1일에서 7월 1일로 공세 일자가 앞당겨졌는데, 이는 베르됭 전투의 전황이 급박하게 전개되면서 프랑스 측이 공세시기를 앞당기기를 강력하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쪽에 브루실로프 공세를 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어떻게 해서든 베르됭에 가해지는 독일군의 압력을 줄이고자 하였다.
초기 전투 목표는 베르됭 전투의 독일군과 비슷한 것이었다. 즉 독일군의 예비병력을 최대한 고갈시켜 버리겠다는 것. 그러나 독일군의 주력이 베르됭으로 향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공격의 주도권을 쥔 영국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 장군은 '이참에 여길 뚫어서 독일군 서부전선을 확 붕괴시켜 버리자'는 야심찬 목표를 품게 되었다.
4. 전투 경과
영국 육군은 8일간의 준비포격에 이어 7월 1일 오전 7시 30분에 돌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독일 육군의 종심방어망은 소나기처럼 뿌려댄 포격에도 대부분 남아있었다. 포병이 다 때려부쉈으니 총 들고 유유히 걸어가 깃발만 꽂으면 된다고[2] 교육받았던 영국군의 보병들은 개전 첫날부터 대량학살을 당한다. 단 하루만에 5만 8천 명의 인명이 사라졌는데, 심한 곳에서는 기관총반 1~2분대에게 대대급 병력이 쓸려버린 곳도 있었다고 한다.
공격준비 포격이 효과를 거두지 못한 까닭으로는 여러 요인이 제기되었다.
- 영국 육군 포탄의 품질이 불량하여 불발탄이 많이 나왔다.
- 솜 지방의 무른 토질 때문에 포탄이 제대로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실제로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에서는 경작지 개간 중에 불발탄이 심심찮게 나온다고 한다.
- 독일 육군의 참호의 깊이가 수미터에 달해서 모두 제압할 수 없었다.[3]
- 독일군이 포격 시 기관총을 해체시켜 안전한 곳으로 신속하게 옮기는 훈련을 통해 대비하였다.
- 무작정 많은 수의 야포를 동원하다 보니 심각한 사거리 격차가 발생하였다. 프랑스 육군의 포는 목표거리를 달성했지만, 영국 육군이 끌고 온 소구경 야포의 포격은 목표점에 닿지 못하고 중간에 떨어졌다.
- 영국 육군이 쓴 포탄의 대부분은 구조물을 효과적으로 부술 수 있는 고폭탄(High Explosive-HE)이 아니라, 참호나 철조망 등의 시설물의 파괴를 기대할 수 없는 인마살상용 유산탄(shrapnel)[4] 이었다.
다만 공세을 거듭하는 동안 영국 육군의 공격 능력은 조금씩 성장했다. 대표적으로, 공세 후반기인 9월 15일에 전선 돌파를 위해 최초의 전차인 Mark I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아직 전차 운용을 뒷받침할 기술과 작전술이 미성숙했기 때문에 전투에선 쓸 만해도 전술적이나 전략적인 돌파를 성공시키진 못했다. 전차는 신뢰성이 최악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다수가 고장나 퍼지게 되었다. 전차를 처음 본 독일 육군은 큰 정신적 타격을 입었지만 얼마 안 가 대처 방법을 찾아냈다.[5] 전차는 훗날 제병협동 전술이 확립된 뒤에야 실질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5. 결과
1916년 7월 1일에 시작된 이 공세는 사실 1917년까지 지속되었다. 참호전의 특성상 정확한 종전일은 없으나 보통 11월 18일로 잡는 이유는 이날 첫 눈이 내려서 전투가 일시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이 그친 후에 전투가 다시 재개되었다. 영국 측에서 11월 18일을 종전일로 잡는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하여 연합국이 뭔가 이루어 낸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솜 전투의 목표는 바폼(Bapaume)의 점령이었고, 11월 18일까지 연합국은 목표에 절반도 다다르지 못했다. 연합국에 비해 부족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 독일은 숫적 열세의 상황속에서 적의 목표를 저지하기 위해 전략적 지연 후퇴를 하였다. 11월 18일 일시적으로 전투가 중단된 후 다시 재개되었지만 이후 연합국은 이듬해까지 단 한발짝도 전진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솜 전투는 바폼이라는 전략적 요충지를 획득한다는 연합국의 목표가 실패한 전투였고, 독일은 바폼을 지키는데 성공한 전투였다. 하지만 연합국쪽은 이러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패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독일의 점령지를 약 10km 차지했다는 점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최종적으로 연합군은 6마일(9.66km) 앞으로 전진했는데 이때 발생한 인명 손실은 영국 육군(영연방군 포함) 42만 명, 프랑스 육군 20만 명. 이를 막기 위해 싸웠던 독일 육군의 인명 손실은 43만~53만 명가량이었다. 독일군의 피해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 정확한 기록은 1940년대에 불타서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이에른 왕세자나 전간기 독일군 측 연구를 통해 추산을 할 뿐이다. 양측 피해를 합치면 1km당 대략 10만, 전체 약 12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셈이다. 이쯤 되면 '''공격으로 얻은 땅이 전사자 매장하기도 부족하다'''라는 참호전의 평가가 실감이 나는 수치다. 덕분에 1차 대전의 지옥 같은 참호전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전투가 되었다.
다만 이 전투는 장기적으로 연합군에게 이득을 준 전투가 됐다. 솜에서의 공격 자체는 실패했지만 독일의 병력을 솜에 집중하게 해 다른 곳(베르됭 등)의 압력을 줄인다는 것에는 성공했고 서부전선의 주도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영국은 솜 전투를 기점으로 실수를 분석하며 참호전 공격 능력을 꾸준히 상승시켰다. 비록 피로 얻은 경험이었지만 그 경험을 꾸준히 발전시켜나가 전쟁 말기에 연합군의 주축이 될 수 있었다. 반면에 독일은 이 전투에서 입은 병력 손실을 메꾸지 못했다. 그렇잖아도 베르됭에서의 도살 작전으로 큰 병력 손실을 입은 상황에서 솜 전투까지 더해지면서 확연히 약화되기 시작한 것. 루프레히트 바이에른 왕세자는 이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전쟁이 시작할 때 있었던 정예 병력들의 다수는 베르됭에서 쓰러졌고, 살아남은 나머지는 전부 솜에서 쓰러졌다."
'''물론 6마일의 땅을 얻으려고 지불한 대가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지만 말이다.'''
6. 기타
- 당시 영국 육군은 Pals(팔스, 지역연대)라고 해서 한 부대에 같은 지역/구역의 사람들을 몰아서 배치하는 방식을 사용했다.[7] 예를 들면 맨체스터 출신들만 '맨체스터 팔스'로 명명한 연대로 묶는 식이다. 이는 과거 영국 육군이 지역 영주들이 자기 영지에서 직접 징병 혹은 모병해 연대를 꾸려 와 왕이 소집령을 내릴 때마다 이들을 끌고 오던 전통의 영향, 서로들 잘 아는 사이니까 전투력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 징병 행정의 편의성 확보 차원 등에서 했던 것.
그러나 이는 솜 전투에서 최악의 결과를 내버렸다. 한 지역의 젋은 남자들이 한꺼번에 몰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런 팔스에 소속되어 참전한 어떤 젊은이는 전쟁이 끝나고 동네에 돌아와 보니 동네에 자기 또래의 남자가 모두 죽어 자기만 남는 암울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몇 년간 죽도록 싸워서 겨우 살아남아서 고향에 돌아갔더니, 어린시절부터 알던 수백 명이나 되던 동네 친구들, 형, 동생, 심한 경우 삼촌, 아저씨들까지 말 그대로 죽거나 상이군인이 되었고, 멀쩡한 사람은 많지 않은 상황이며, 반겨주는 건 가족뿐이고 주변사람들은 자식이나 형제, 남편 잃은 분노에 생존자들을 겁쟁이라서 살아남았다고 매도한다. 이들의 더 심한 비극은 그렇게 가까운 사람들 몇 백 단위로 계속 죽어나가는 걸 바로 옆에서 계속 지켜봤다는 것이다. 멀쩡히 살아 견뎌낸 사람이 비정상인 지경이다. 영연방 캐나다군 소속의 뉴펀들랜드 연대는 공격개시 20분 만에 총원 780명 중 712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영국 정부는 뒤늦게 이 편제의 문제를 파악하고, 이후에는 가능하면 한 부대에 다른 지역 사람들이 고루 배치되도록 육군의 방침을 바꾸었다. 동네 주민들이 생환자들을 겁쟁이라 매도하는 분위기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민간인도 폭격 등으로 전쟁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면서 사라졌다. 하지만 이 문제점은 영국 육군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독일 육군[8] 과 유럽의 군제를 그대로 베낀 일본 육군[9] 도 이랬다. 그나마 전국에서 몰려든 수병들을 각 부대마다 분산시킨 해군에선 이런 일이 없었다.
영국 정부는 뒤늦게 이 편제의 문제를 파악하고, 이후에는 가능하면 한 부대에 다른 지역 사람들이 고루 배치되도록 육군의 방침을 바꾸었다. 동네 주민들이 생환자들을 겁쟁이라 매도하는 분위기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민간인도 폭격 등으로 전쟁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면서 사라졌다. 하지만 이 문제점은 영국 육군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독일 육군[8] 과 유럽의 군제를 그대로 베낀 일본 육군[9] 도 이랬다. 그나마 전국에서 몰려든 수병들을 각 부대마다 분산시킨 해군에선 이런 일이 없었다.
- 당시 솜 전투를 비롯한 1차대전 참호전의 참상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종류가 전해지는데, 그 중에는 식인 풍습이 남아 있는 오지의 원주민과 선교사의 다음과 같은 얘기도 있다.
>원주민: "그렇게 많이 죽습니까?"
>선교사: "그렇습니다."
>원주민: "그러면 백인도 죽인 적의 시신을 먹나요?"
>선교사: (질겁을 하며)"아닙니다."
>원주민: "백인들은 참 이상하군요. 먹지도 않는다면서 사람을 왜 그렇게 많이 죽입니까?"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TV 드라마인 인디아나 존스에서도 나왔는데, 거기에선 좀 다르게 원주민들이 말하는 한 번의 전투에서 가장 많은 전사자 수가 10명으로 나온다. 일명 '문명인'이 오히려 '미개인'보다 잔혹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10]
>선교사: "그렇습니다."
>원주민: "그러면 백인도 죽인 적의 시신을 먹나요?"
>선교사: (질겁을 하며)"아닙니다."
>원주민: "백인들은 참 이상하군요. 먹지도 않는다면서 사람을 왜 그렇게 많이 죽입니까?"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TV 드라마인 인디아나 존스에서도 나왔는데, 거기에선 좀 다르게 원주민들이 말하는 한 번의 전투에서 가장 많은 전사자 수가 10명으로 나온다. 일명 '문명인'이 오히려 '미개인'보다 잔혹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10]
- 반지의 제왕의 작가로 유명한 J. R. R. 톨킨도 영국군 장교로 이곳에 왔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그의 작품인 반지의 제왕에 여러 영향을 끼친 일 가운데 하나.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참호 독감(Trench Fever)에 걸려서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하지만 후송 직후 톨킨의 동창이자 친구들, 대대원들 그리고 자신의 부대를 지휘한 임시 부대장까지 전사했다. 이 때문에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작중에 나오는 죽음늪도 여기서 영감을 따온 것으로 보이는데 비가 오면 크레이터가 연못이 되어 양쪽 전사자들의 시체가 둥둥 떠다녔다.
- 이처럼 처참했던 1차 대전 뒤 예술가와 지식인들 사이에 만연했던 충격은 우연이 아니었다. 1차 대전 뒤에 나타난 다다이즘 미술 사조와 허무주의적인 문학은, 전쟁을 거쳐 드러난 물질문명의 추악한 모습(기관총, 독가스)을 반영했다고 보면 충분하다.
- 영국 육군에서 전투의 준비 및 초반을 기록영화로 촬영했고, 이것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도 했다. 홍보영상이라 당연히 전쟁의 참상이 아닌 깔끔하고 해맑게 웃는 육군 장병들만 나오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얼마 후 전쟁터에서 죽거나 불구가 되었으니 안타까울 따름.#
- 2014년 8월 14일 영국 BBC3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기념 다큐드라마 '아워 월드 워(Our World War)', 2화로 솜 전투를 그린 "Pals"를 방영하였다(상술했던 팔스와 관련한 드라마이다).#
- 아돌프 히틀러가 참여한 전투였다. 당시 직책은 전령으로, 전투 중 파편에 맞아 베를린 부근의 베일리츠 요양소로 후송되었다.
- 안네 프랑크의 부친인 오토 프랑크도 이 전투에 참전했다.
[1] 비텔스바흐 가문 당주로 반나치 성향 때문에 1939년에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헝가리에 있던 가족은 1944년에 나치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연합군의 진군 이후 풀려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은 자코바이트 기준에서 보면 영국의 왕이 될 수 있다. 윌리엄 1세의 후손이고, 찰스 1세의 딸인 헨리에타의 후손이기 때문. 정작 본인은 전후 독일에 군주제가 복구되면 독일의 군주가 되리라 기대했다고 한다. 1955년 사망.[2] 심지어 어떤 부대는 독일군 참호까지 절대 뛰지 말고 대열을 맞추어 천천히 행진(...)하라거나 축구공을 차면서(...) 걸어가라는 명령을 받기까지 했다. 결과는 당연히... 그리고 이따위 뻘짓거리 외에도 격렬한 포격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무거운 건설자재들을 나르던 공병부대들도 진격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복구는 커녕 건설자재들과 함께 떼죽음 당했다. 이는 모두 그 형편없는 수준의 포격으로도 독일군이 전멸했을거라 판단한 무능한 지도부의 오판으로 인한 것이었다.[3] 참호 깊이가 그렇게 깊다면 방어사격은 어떻게 할까도 싶은데, 일반적인 참호는 사격 시 발을 디뎌 서기 위한 발판이 있었기 때문에 참호 깊이가 수미터에 달해도 사격엔 전혀 지장이 없었다.[4] 적은 폭약과 대량의 파편을 탑재한 포탄. 개활지의 보병을 공격할 때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지만 참호나 시설물에는 아무런 힘을 못 쓴다.[5] 기술적 한계로 장갑이 얇아서 소총탄만 막는 수준이고 포에는 간단히 뚫렸다.[6] 출처는 영어 위키백과.[7] 이렇게 병력을 출신 지역별로 편제하는 것은 당시 세계 각국에서 많았다. 다만 프랑스 같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오래 유지한 국가는 병력을 적당히 섞어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영국의 경우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 등 4개국이 지역색도 다르고, 서로 전쟁을 하며 지역감정도 많아서 지역별 편제가 부득이했던 건데...[8]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도 나왔듯이 신병들을 같은 지역끼리 묶어서 전선으로 보냈다.[9] 근위사단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단의 병력들은 각 사단의 사령부가 위치한 지역에서 징집한 신병으로 충원했다. 예를 들면 2사단은 사단 본부가 센다이에 위치했었고 징병도 도호쿠 지방의 장병들로 충원했다. 뉴기니에서 전멸한 20사단의 경우 조선의 경성 주둔 사단으로 사단의 10%가 조선인 병사들이었다.[10] 다만 이 부분을 더 진지하게 고찰해보면 "선량한 미개인"의 오류에 빠진 이야기이다. 원시부족을 연구한 결과로는 인구 숫자가 적어서 그렇지 인구비율로 따지면 오히려 현대인보다 더 잔인한 전쟁을 한다고... 현대인과 원시부족은 "다른 방식의 전쟁"을 할 뿐이다. 위에서 전사자수가 10명인 예시에서, 부족 전체 인구가 천 명이라면 한 번의 전투에서 1%의 사망자를 낸 것이다(!). 1차대전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프랑스가 인구 3960만 명에 사망자 136만 명으로 4년간 3.4%가 사망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