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페탱

 




<colbgcolor=#002395> '''이름'''
'''Henri Philippe Benoni Omer Joseph Pétain'''
앙리 필리프 베노니 오메르 조제프 페탱
'''출생'''
1856년 4월 24일
프랑스 제2제국 파드칼레
'''사망'''
1951년 7월 23일 (95세)
프랑스 제4공화국 일드외 섬 감옥
'''신체'''
169cm
'''복무'''
프랑스 육군
'''최종 계급'''
프랑스 원수(Maréchal de France)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역임'''
프랑스국 국가원수
1940년 6월 11일 ~ 1944년 9월 19일
프랑스 제 119대 총리[1]
1940년 6월 16일 ~ 1940년 7월 11일
프랑스 국방장관
1934년 2월 9일 ~ 1934년 11월 8일
프랑스 국무부 장관
1935년 6월 1일 ~ 1935년 6월 7일
'''서훈'''
레지옹 도뇌르 훈장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기타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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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군인, 정치인.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베르됭 전투의 영웅'''이자 조제프 조프르, 페르디낭 포슈와 함께 1차대전 종전 당시 단 3명 뿐이었던 '''프랑스군 원수(Maréchal de France)'''이다.
이처럼 명망이 있는 인물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나치 독일에 무력하게 굴복함으로 역사에 그 오명을 남겼다. 그러나 피에르 라발 같은 악질적인 부역자는 아니었기에 지금도 평가가 꽤나 엇갈린다. 영웅과 비겁자의 두 인생을 살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생애



2.1. 초기


1856년 4월, 파드칼레 지방의 작은 농촌 마을의 자영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큰할아버지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이탈리아 전역에 종군하였고, 그의 아버지와 삼촌이 이 무용담을 열심히 아들에게 전파하여, 페탱은 어릴 적부터 군대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자라났다. 여기에다가 그가 자라나던 무렵 터진 1870~71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참패와 그로 인한 제2제국의 붕괴, 독일에 대한 전국가적인 굴욕감까지 더해지면서 페탱은 인생의 진로를 군대로 결정, 1876년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고, 1887년에는 우수성을 인정받아 군사 부분의 그랑제콜에 진학할 수 있었다. 병과는 보병이었다.
페탱은 이 과정에서 프랑스 육군 내부에 만연했던 무조건적인 공격교리 '''엘랑 비탈#s-2'''을 거부하고 화력제일주의를 설파했으나, 이에 대한 육군 주류의 반발로 꽃을 피우진 못했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군을 비롯하여, 당시 유럽 제국주의 열강 군대의 출세 루트라는 식민지 파견근무 기간은 매우 짧았다. 당시 식민지 파견근무가 출세 루트인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전공을 세울 기회이기 때문이다. 소규모이긴 해도 식민지에서는 늘 독립주의 세력들과 교전이 발생했고, 특별한 연줄이 없는 장교들에겐 이것이 곧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반면 유럽 대륙에선 보불전쟁 이후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열강간 군사충돌이 전무했다.[2] 덕분에 1890년에야 대위로 진급했고, 1900년에야 소령 계급을 달았다. 이후 대령까지 진급하긴 했지만 사실상 인생의 끝자락이나 다름 없었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는 퇴역 이후 노후를 보낼 준비와 함께 군 생활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이 시기에 주목할만한 점이 있다면, 1911년 그가 육군 제33보병 연대장이었을 때 연대에 소속된 젊은 장교 중에 '''샤를 드골'''이 있었다.

2.2. 제1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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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의 페탱
한창 퇴역을 준비 중이던 1914년 여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페탱은 전장에 나섰다. 개전 초 프랑스 육군이 독일 제국군 육군의 공세에 고전하는 동안 페탱은 무의미한 보병 닥공 중심의 엘랑비탈을 거부하고, 효율적인 지휘를 하며 최소한의 피해로 독일군의 진격을 여러번 저지하였다. 이 공으로 개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준장으로 진급하여 '''장군'''이 되었고, 제1차 마른 전투에 참여하였다.
1914년 말에서 15년 초에 이르러 프랑스 군은 초기 전선붕괴를 평가하면서 엘랑 비탈을 고집하다 신나게 털리고 부대를 말아먹은 무능한 지휘관들을 모조리 갈아엎었고 그렇게 생긴 지휘관 공백을 동 시기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을 진급시키는 것으로 해결했다. 페탱 역시 이때 주목받은 장군 중 한 명으로 중장으로 진급하여 '''군단장'''으로서 1915년 전역에 참가한다. 그리고 1915년 전역에서는 프랑스군이 아르투아 공세 중에서 신나게 병력만 말아먹고 참패하는 동안, 페탱의 군단만 홀로 성공적으로 공세를 펼쳐 '''3~4km정도 진격'''을 해냈다. 이 전공을 인정받아 1916년에는 대장이 되어 '''제2사령관'''까지 진급하였다. 그리고 1916년 독일군에 의해 개시된 대규모 공세인 베르됭 전투에서 마침내 전면에 등장한다.
페탱은 베르됭에 부임하자마자 아군의 보급로를 열고, 전투에 지친 부대들을 뒤로 빼며 그 자리를 휴식을 취한 부대와 새 부대들을 투입해서 전력을 최상으로 유지하는 동시에 포대 위치를 재조정하여 독일군에 최대한의 타격을 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실제로 독일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강요했으나, 이는 잃어버린 영토를 당장 되찾으려 한 당시 프랑스 육군 총사령관 조제프 조프르 장군의 의도와는 크게 달랐다. 페탱의 방식에 불만을 가진 조프르는 페탱을 후방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하며 베르됭에서 빼냈다.[3]
당시 베르됭 전투에서는 패탱과 질긴 인연으로 엮인 '''샤를 드골'''이 중위로 참전했다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워낙 대규모 전투라 프랑스군이나 독일군 쪽에서 이 전투에 참가한 인물 중 훗날 유명한 사람이 많다. 대표적으로 역시 중위였던 독일 육군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있다.
해가 비뀐 1917년 페탱을 대신해서 베르됭에서 승리를 거둔 로베르 니벨 장군이 주도해서 벌인 니벨 공세가 대실패로 끝나자, 실패의 책임을 지고 경질당한 니벨의 후임으로 '''프랑스 육군 참모총장'''이 되어 전쟁을 지휘했다. 개전시 퇴역을 준비하던 말년 대령이 전 프랑스군의 총지휘를 맡게 된 것이다.
당시 페탱은 내외부 양쪽으로 적을 두고 있었다. 외부의 적은 당연히 독일군이었고, 내부의 적은 전쟁의 장기화와 니벨 공세의 대실패로 인해 폭발한 프랑스 육군 장병들의 한계에 다다른 분노였다. 실제로 서부전선 곳곳에서 프랑스군은 집단항명과 탈영, 폭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페탱은 이런 항명 및 폭동을 엄벌로 다스리면서도 엄벌만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정확히 인지했다. 그리고 불만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전선의 장병들에게 좀 더 많은 휴가일수를 약속하고 실제 이를 보장하였으며, 1917년 전선에서 추가적인 대규모 공세를 중단하여 장병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조금이나마 덜게 해주었다. 또 전선 전체를 방어전으로 재편하면서 투입부대들을 순환시키며 전선에 투입된 부대가 전선에서 빠진 다음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끔 해주었다. 후방에서도 페탱의 개혁은 계속되어 '''전 사병 1인 1침상'''이 바로 페탱에 의해 확립되었다. 이런 일련의 조치로 프랑스군은 장병들의 불만을 억누르면서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4]
하지만 페탱의 조치로 인해 프랑스군의 공세가 중단되자 영국군의 불만을 샀으며, 이로 인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1918년이 되자 포슈 장군에게 총지휘권을 넘겨야만 했다. 이후 제2차 마른 전투에서 다시 한 번 독일군을 저지했으며, 미군과 함께 대대적인 반격작전, 백일 전투에 나서 궁극적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양측간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10일이 지난 1918년 11월 21일, 페탱은 영예로운 '''프랑스 원수가 되었다'''.

2.3. 전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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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의 페탱
종전 직후인 1919년에는 전국민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프랑스 대통령을 꿈꿨으나 이내 출마를 포기한다. 그러나 여전히 군부와 정계에 영향력이 강했기에 베르사유 조약이나 로카르노 조약 체결 등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군부의 여러 현실적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대표적으로 그는 '''전차와 항공기 전력의 증강'''을 강력 주장했고 독립된 군종으로서 '''공군'''을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페탱의 후원으로 30년대 초 프랑스에 독립 공군이 창설되었다. 전차 및 항공기 전력에 있어서도 20년대에는 예산이 부족하여 실행에 옮기진 못했지만 30년대에는 결국 실현되어 대대적 증강이 이루어졌다.[5] 그리고 훗날 있을지 모를 독일과의 전쟁에서 부족한 인구로 인한 병력 열세 및 1차대전의 전훈을 살려 강력한 요새지대를 구축하자는 제안에 적극 찬동, 마지노 선 건설에도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
1925년에는 모로코 주둔군 사령관으로 리프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이끌고 리프 공화국을 멸망시키기도 했다. 1934년에는 가스통 두메르그 내각에서 국방장관을, 1935년에는 뷔송 내각에서 내무장관을 역임했다. 그리고 1939년 3월, 스페인 내전이 끝난 스페인에 대사로 부임했는데, 이는 그의 제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새로운 집권자가 되었기에 내려진 인사였다.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로부터 전시내각 참여를 제안받았으나 나이를 이유로 거절했다. 이에 대해서는 달라디에 총리의 내각이 좌파연합 내각이어서 우파였던 페탱이 이에 반감을 가져 불참했다는 의견도 있다.

2.4. 비시 프랑스


1940년 10월 24일, 아돌프 히틀러와 만나는 페탱

'''"영광의 날에도,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있었습니다. 어려운 날에도, 저는 여러분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


1940년 6월, 나치 독일의 전격적인 프랑스 침공으로 패전 직전에 몰린 폴 레노 총리는 수습을 위해 페탱을 급히 본국으로 소환한다. 프랑코의 만류를 뿌리치고[6] 귀국한 페탱은 드골 등 항전파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레노의 뒤를 이어 새 총리가 되고 독일에 항복한다.
이후 독일 군정지역이 된 파리 대신 비시를 수도로 하는 정통정부 비시 프랑스의 수반이 되어 패전으로 혼란에 빠진 프랑스를 빠르게 안정시키려 했다. 의회는 스스로 모든 권리를 페탱에게 넘겼고 프랑스의 입법, 사법, 행정권은 모두 페탱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페탱은 평소의 보수적 신념을 바탕으로 패전은 '''나약한 좌파 탓'''이며 1차대전 이후 약해진 프랑스 전통사회와 국가를 이전으로 복원시키고 다시 한 번 강력한 프랑스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에서의 '이전'은 패전 이전이 아니라 1936년의 인민전선 집권 이전, 1870년의 프랑스 제3공화국 이전, 1791년의 프랑스 대혁명 이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피점령국의 지도자인 페탱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반독 저항세력을 적극적으로 탄압하였으며 달라디에 전 총리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북아프리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수립, 항전을 계속하려 하자 식민지 총독들에 명령하여 이를 체포, 본국으로 송환시키기도 했다. 달라디에가 체포되지 않았으면 드골의 런던 자유프랑스 정부 대신 이들의 북아프리카 정권이 더 대표성이 있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비시 프랑스의 관할 지역은 독일의 간섭과 수탈 없이 비시정부의 통제에 안정된 상태였다. 수탈은 없었다. 페탱은 독일군의 협조 문서가 들어오면 군말없이 사인하고 그 문서에 의해 독일군이 물자를 넘겨받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요구로 유대인들을 넘겨주었고, 자원병들을 모아 독소전쟁에 파병하기도 했다. 페탱의 비시 프랑스는 '''적극적인 대독 협력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페탱은 유대인 탄압에도 적극적이었다. 1940년 7월 11일(페탱 취임에서 한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 유대인 법이 발효되어 유대인들을 모조리 공직에서 내쫓고 프랑스계 유대인들의 국적을 박탈했다. 페탱은 나중의 재판에서 이 법이 독일의 강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제정된 법임을 인정했다.
이는 페탱의 신념과 가치관이 전통적 보수주의였음과 동시에, 히틀러와 나치를 절대악으로 보지 않고 그냥 강성한 이웃국가 정도로 인식했음에서 일어난 문제였다. 오히려 페탱이 보기에는 전간기동안 3공화국을 혼란으로 빠트린 '''좌파야말로 프랑스가 약해지는데 일조한 패배의 원흉'''이었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독일과 힘을 합쳐 '''좌파들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강력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프랑스를 재건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던 것이다. [7]
그렇게 페탱은 친독 독재자가 되어갔고, 패전의 책임을 3공화국 시기 좌파 정치인들(에두아르 달라디에, 레옹 블룸, 조르주 망델[8], 모리스 가믈랭[9]등)에게 모조리 돌리는 이름뿐인 재판인 리옹재판을 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1942년에 독일군이 휴전협정을 무시하고 비시 프랑스 영내로 진입하면서 끝나버렸고, 이후 비시 프랑스는 이름뿐인 정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페탱은 일방적으로 끌려다닌 것만은 아니었다. 페탱은 지속적인 히틀러의 참전 요구를 거절했고 비시 프랑스는 끝까지 중립국으로 남았다. 히틀러는 200만명의 노동자를 요구했지만, 페탱은 11만명의 프랑스인 전쟁포로를 석방한다는 조건으로 64만 1천명의 지원자들을 보냈으며, 프랑스인 포로 100명을 사살하겠다는 통보에 "나를 먼저 죽이라."라고 뻗대고 나와 철회시킨 적도 있었다. 거기다 페탱은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런 문제는 횃불 작전에서 비시 프랑스의 소극적인 저항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이는 페탱이 19세기적 인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관점에서 독일과의 정전협상을 맺은 다음에는 굳이 독일의 요구를 모두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런저런 문제에서 뻗대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훗날 괴링은 히틀러 최대의 실수는 프랑스와 정전협정을 맺은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으며, 처칠 역시 정전협정으로 인해 북아프리카를 지킬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19세기 인물이라 일단 전쟁 끝났는데 왜 이래라 저래라 하냐 이해 못한다기엔...인류역사 수천년은 전쟁에서 졌으면 주권을 뺏기는게 당연한 수천년이었다. 멀리볼거 없이 본인들도 베트남 정복하고, 옆에선 폴란드가 정복당하는 상황에서 본인이 괴뢰국 얼굴마담인 걸 몰랐을까?)
히틀러는 횃불 작전 당시 비시 프랑스의 소극적인 태도에 분노하여 이탈리아 왕국과 함께 안톤 작전을 실행, 프랑스 전역을 점령했다. 페탱은 마지막 순간에 나치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프랑스를 모두 내어줬는데, 페탱은 나치의 남프랑스 점령에 대해 적극 저항하지 않은 것에 대해 "죽은 프랑스의 시체를 지켜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어떻게든 프랑스의 숨을 붙여놓으려고 했다"라고 항변했다. 만약 저항했다면 독일이 프랑스를 철저히 파괴하였을 것이라는 의미의 발언이다.
페탱은 이후 1944년 독일 본국으로 압송되었으며, 히틀러에게 조국에서 죽게 해달라고 탄원했지만 히틀러는 묵살했다. 이후 종전과 동시에 석방되었으나 이번에는 프랑스의 국가 반역자로서 체포되었다.

2.5. 최후


"나의 삶은 중요하지 않다. 내 삶은 이미 프랑스에 봉헌된 것이었다. 만약 여러분이 나를 단죄하려 한다면, 나를 그 단죄의 마지막이 되게 해달라. 그러나 나는 세계를 향해 말하려 한다. 여러분은 정의의 이름으로 죄없는 사람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라고. 판결 후에는 하느님과 후손들의 심판이 올 것이다. 나는 프랑스를 믿는다."

- 페탱의 변론. 페탱은 재판이 시작되던 날에 처음으로 이렇게 말한뒤, 아무런 변호를 하지 않았다.

"오늘, 이 법정에 서있는 피고인은 오랫동안 가장 다양한 국민감정을 촉발시킨 장본인이다. 여러분들이 잘 기억하듯, 그는 정열적인 찬미와 국민적인 사랑을, 다른 한편 이에 반해서 극단적 증오와 적대감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 여기서 우리가 피고인을 재판한 뒤, 후일 어느날 역사가 다시 이 재판부를 심판할 것이며 또한 재판의 과정에 따라서 이 재판의 분위기 역시 평가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몽지보 재판장

사실, 1944년까지만 해도 페탱의 인기는 굳건했다. 사람들은 드골을 프랑스 바깥의 '창의 영웅', 페탱은 프랑스 안의 '방패의 영웅'이라 부르면서 두사람의 합작이 프랑스를 나치의 손아귀에서 구했다고 보고 있었다.[10] 하지만, 무장투쟁을 주도했던 공산당, 사회당계 레지스탕스와 드골이 힘을 합치면서 드골은 친페탱 세력과 확실히 선을 그었고, 자신과 페탱이 합작한 일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페탱 처벌 여론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페탱의 재판은 전후처리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페탱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면 적극적인 나치협력자 청산의 열기가 식을 수 있다는 것, 또 아직 페탱파[11]가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반면, 사형선고를 내릴 경우 페탱에 대한 동정여론이 강해져서 역시 나치 청산이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드골은 페탱에게 스위스로의 망명을 권유하지만 페탱은 이를 거부하고 프랑스로 출두한다.
훗날 드골은 회고록에서 페탱은 용감한 결정을 내렸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페탱에 대해 '''"우리 조국과 군에 그토록 큰 승리, 영광을 안겨주었고, 나의 모범이자 상관이셨던 각하는 어디로 사라진 것입니까?"'''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표했다.
페탱은 프랑스에 돌아온 뒤, 큰 충격을 받았다. 그를 호송하는 헌병 중에서 그 누구도 자신에게 경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탱은 마리피에르 쾨니그(Marie-Pierre Koenig) 장군[12]에게 악수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으나, 거절을 당했다. 그는 파리로 돌아오는 도중, 2천여명의 시위대를 만났고 그들은 페탱을 사형시키라고 외치면서 그가 탄 객차에다 돌팔매를 던졌다. 페탱은 파리교외 몽루주의 감옥에 구속 수감되었으며, 그의 재판이 열리기까지 3달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이미 89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쳐있는 상태로 법정에 들어섰다.
이렇게 지쳐있었음에도 페탱은 육군 원수 정복을 입고 재판정에 서는 등 시종일관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그가 재판정에 입장하기 전까지 방청객들은 "반역자 페탱을 죽여라"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으나, 재판장에 입장한 페탱이 청중을 향해 경례를 하자 청중들이 모두 일어서서 답례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소식을 들은 드골은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 어쩌다가..."'''라고 촌평했다. 영관급 시절 드골의 직속상관이 페탱이었고 페탱은 드골을 매우 아꼈으나, 결국 두 사람은 정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재판에서 페탱의 변호인들은 페탱을 필사적으로 변호하였으나, 이들은 페탱의 완전한 무죄를 주장하는 것을 전략으로 삼았고 페탱에게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좌익 계열 레지스탕스가 주된 권력을 잡은 시점에서 이는 달성 불가능한 전략이었다. 레지스탕스가 다수 존재했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프랑스 국내에서는 나치 점령 시기 나치에 어느정도 협조적인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들 역시 페탱의 무죄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페탱을 처벌해 자신들의 과거를 가리고 싶어했다. [13] 그리고 드골을 비롯한 자유 프랑스 지도부에게 페탱은 본인이 원치는 않았지만 결국 반역자로 볼 행동을 한 인물이고, 또한 제3공화국을 파괴한 '''명목상 괴뢰정부의 지도자'''였기에 어쨌건 그 정통성을 무너뜨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따라서 매국노로 볼지 부역자로 볼지에 대한 행동에 대한 평가. 그리고 처벌 수위에 대해 논란이 있는 정도일 뿐 대체로 처벌 자체는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그렇기에 페탱 측은 재판을 상당히 불공정하게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변호인들은 증거를 모집할 시간도 얼마 주어지지 않아 밤을 새면서 자료를 모았다며 재판부에 기한 연장을 요청했다. [14] 페탱에게 유리한 증언을 끊었다 혹은 증인에 대한 질문을 불공평하게 배정했다는 클레임 역시 제기되었다. 처벌에 대한 투표는 오직 즉각적인 사형에 대한 찬반투표만 시행했다. 몇몇 배심원들은 사형선고에는 동의하지만, 그 집행시기는 따로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대해 배심원 중 한 명이었던 페트뤼스 포레 의원[15]은 정당성이 의심스러운 정치재판의 전형이라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대전의 영웅 페탱의 권위는 아직 남아있었고 유죄를 찬성하는 사람들 중에도 사형에 반대하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증언대에 선 증인들 중 달라디에와 레노는 1940년의 항복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며 어느 정도 옹호하는 증언을 했고[16] 재판의 분위기가 동정론으로 기울었을 때 레옹 블룸[17]이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막 해방되어 돌아와 재판정에 서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블룸은 '전쟁영웅이자 승리의 상징이던 그가 맺은 굴욕적 휴전협상이야말로 거대하고 잔인한 도덕적 배신, 이것이 국가반역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운을 떼며 통렬한 비판을 가했고 이를 시작으로 페탱에게 탄압받은 이들이 하나둘씩 증언하며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결국 치열한 재판 끝에 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18] 사실, 페탱은 1940년에 정권을 잡고서 정치적인 재판을 통해서 이전 정권과 반대파에게 패전 책임을 뒤집어 씌운 적이 있는데 인과응보로 자신이 이제 그 재판을 돌려받게 된 것이다.
다만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즉각 사형이라고 판결은 내렸으나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에 다들 주저하고 있었고, 드골이 총대를 들고 나서서 과거의 상관에 대한 연민의 정이자 베르됭의 영웅에 대한 예우로서 사형만은 피하게 해주자고 하면서 종신형으로 직접 감형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페탱에게 사형을 내리는 것은 드골로서도 정치적인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또한 청산 과정에서 부역자들에 대한 처분을 행위에 따라 달리하기로 이미 결정했는데, 페탱의 행위는 아무리 엄하게 처리해도 사형에 해당한다고 보기에는 무리였기 때문이다. 페탱은 방데 주에 있는 일드외 섬의 교도소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51년에 죽었다. 향년 95세. 시신은 일드외 섬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위키백과 영어판에 따르면, 1973년 2월 경에 베르됭 전몰자 묘지로의 이장을 주장하는 극우파에 의해 관을 도난당했으나, 프랑스 경찰이 이를 되찾아 당시 대통령이었던 조르주 퐁피두 명의의 화환과 함께 일드외 섬에 재매장했다고 한다.[19]

3. 평가


페탱은 오늘날에도 프랑스에서 뜨거운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페탱이 세상을 떠난 뒤 그를 추모하는 모임이 결성되었으며 그에 대한 재심이 여러 번 청구, 기각되기도 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나치 청산 분위기가 좀 가라앉은 1950년대 이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을 적극 탄압하는 한편 부역자들에 대해서도 악질 매국노와, 좌파 탄압을 위해 나치에 협조한 일반 우익 성향 부역자를 분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데 페탱은 명백한 후자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현대 프랑스에서도 매국노[20]는 아니라는 데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고, 단순한 나치부역자 평가를 내리는 데도 상당히 신중한데 아래의 사진을 보면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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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지 40년이 지난 후에도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심지어 프랑수아 미테랑도 그의 무덤에 헌화를 했었으니....
프랑스 내에서 페탱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유보적이며, 상당한 민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뜨거운 감자같은 주제이다.[21] 영웅으로 평가하자니 나치 부역이 걸리는데, 어찌됐건 그 때문에 희생된 프랑스인들이 너무 많은 건 사실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공인들은 아예 유보적으로 그에 대한 평가를 피하기도 하는데,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2018년 11월, 1차대전 종전 100주년 추모에 즈음해 페탱을 "위대한 군인"[22]이라고 언급했다가 상당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나치 부역자 중에서도 수괴급이지만 열렬한 나치 동조자라기보다는 시대를 잘못 읽은 사람일 뿐이고 적극적인 매국 행위를 하기는 커녕 오히려 비시 프랑스 치하에서 자국민을 나름 보호하려 들다가 나치에게 끌려가기까지 했던 인물이다. 단지 오판으로 나치에 협조하여 결국 많은 프랑스인들을 희생시킨 죄가 있을 뿐인데, 주력군이 궤멸된 상태에서 나치군과 계속 싸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고, 나름 프랑스를 건지겠다는 생각과 히틀러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군사학자들 간에 많은 논쟁이 오고 가는 중인데, 페탱의 선택이 바람직하다는 학자들의 의견은 적색 상황(독일군의 파리 진격, 프랑스 내륙 진출)과 파리 점령 이후 상황에서 '프랑스 병력의 대다수가 자제력을 잃고 와해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더 큰 피해를 감수하기 전에 독일에게 항복한 페탱의 선택이 바람직했다.' 이고, 반대 학자들의 의견은 '충분히 병력들을 재집결하여 프랑스 중부에 전선을 만들거나 리옹-보르도-마르세유 축선으로 전선을 축소시켜 저항할 기회가 있었다.' 이다. 어느 의견도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당시 적색 상황이 벌어지기 직전 후퇴할 때 모리스 가믈랭이 사령부 야전군이 사용하던 장비들을 세느 강 북부에 죄다 버려두고 와서 막상 반대 의견 학자들의 의견을 따른다고 해도 연합군이 지원 올 때 까지 지구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 확실한 건, 이탈리아가 재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찬반 의견을 떠나서, 페탱의 선택에 대해 매국노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에 대해 프랑스의 다수의 국민들이 좌시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 말인 즉슨, 암묵적으로 동의하거나 동의하진 않지만 말려들기 싫거나, 골치아픈 문제이므로 아예 생각하기 싫다는 것이다. 다만, 페탱이 점점 인지력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논란이 가세되면서 페탱의 정신문제에 대해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중이다.
페탱이 1940년부터 인지력 상실 등의 증상을 보였음을 토대로 그가 치매환자였다는 주제의 논문도 나왔다. #

4. 기타


  • 페탱과 그의 재판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사람들은 박원순이 저술한 책인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23], 앙리 루소의 <비시 신드롬>, 주섭일의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존 레프런드의 <나는 죄 없이 죽는다>[24]를 참고하길 바란다.
  •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는 <세계사 산책> 단행본 수록 에피소드 '애국자와 매국노' 편에서 그를 다뤘는데, 작가는 페탱의 행보를 통해 "지도자들은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뼈 아픈 교훈을 가르쳐줬다.
  • 1차 대전기 연합군의 동료 장성이며 미국의 영웅인 존 조지프 퍼싱과 친하게 지냈다. 1944년 미국을 방문한 드골은 옛 전우인 페탱의 안부를 묻는 퍼싱의 질문에 당혹해했다고.

5. 둘러보기



[1] 항복 이후인 7월 10일, 프랑스 상하 양원은 내각에 헌법개정의 전권을 부여하는 총투표를 실시, 찬성 569표, 반대 80표로 압도적 지지로 내각, 정확히는 내각 수반인 페탱 총리에게 헌법개정의 전권을 부여한다. 현재 프랑스에서는 이 헌법개정권을 불법으로 규정하여 페탱의 합법적 총리 임기를 헌법이 개정되는 7월 11일까지로 국한하고 그 이후를 불법내각으로 규정하고 있다.[2] 이런 식으로 고속출세한 대표적 케이스가 페탱의 제자이기도 한 스페인 육군의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인데, 무려 33세의 나이에 장군이 되었는데 이는 전유럽을 통틀어서 가장 젊은 나이에 장군이 된 케이스였다.[3] 정작 베르됭 전투의 책임은 조프르에게 있다. 현지 지휘관들이 1915년 말엽부터 베르됭 방면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있으며 아군의 방비태세는 허술하다고 직보했으나 이걸 다 씹은게 조프르였다. 결국 조프르는 베르됭 전투 종료 후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된다.[4] 이렇게 될 수 있던건 페탱이 프랑스군 장병들 중 제일 인기가 높은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출세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엘랑 비탈을 거부했던 페탱은 무모한 공격으로 의미없는 희생이 나오지 않게 했는데, 이것이 그의 인기 요인이었다.[5] 의외인 사실이지만 프랑스군은 1940년 프랑스 침공 당시 기갑 및 항공전력이 독일군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다만 공군은 신형기가 부족했고 장기전을 대비한답시고 그마저도 후방에 쟁여두고 있던 실정이라 정작 최전선에 투입된 기체는 질을 따지지 않고 양적으로만 따져도 심하면 비율이 1:3까지 벌어져 각개격파당했으며, 전차는 하나같이 둔중하였으며 무전기가 없는 경우도 많았고, 무엇보다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항공전과 전차전에서 특히 란체스터 법칙이 강하게 작용하는 걸 생각해보면... 결국 프랑스군은 충분한 전력을 확보하고도 이를 보병 화력 지원에 국한시키는 우를 범한건데, 페탱 본인도 충분한 화력을 제공한다는 원칙으로 전차와 항공기 전력 증강을 지원했던 것이니 페탱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6] 프랑코는 "장군님, 가지 마세요. 저 자들은 자신들의 실책을 모두 당신에게 떠넘길 작정입니다. 여기에 계세요. 가시면 안됩니다."라고 간곡히 만류했지만, 페탱은 '''"알고 있습니다, 장군. 하지만 이것이 제가 조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라 대답하고 돌아온다.[7] 유대인 탄압 역시 유대인을 프랑스를 약하게 만든 원흉 중 하나로 판단함에 따라 일어난 일이었다. 그 외에 외국인(망명객, 식민지인 등), 프리메이슨 역시 이 원흉의 일원으로 지목했다.[8] 좌파가 아니었지만 적극적인 반독파였고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후 친독 민병대에게 처형[9] 피고 중 유일한 군인이었다. 정치인이 아니었지만 페탱 정권에 반대했기 때문에 체포되었다.[10] 당시 페탱과 드골이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드골은 페탱의 부하였고, 드골이 당시 전쟁내각에 합류하면서 자주 만났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드골이 프랑스를 떠나기 직전에 보르도에서 페탱과 같은 식당에서 식사하는 우연이 겹쳐 둘이 말없이 악수를 나누기도 했었다. 이 만남이 6월 14일에 있었고, 드골은 15일편 비행기가 없어 16일에 영국에 도착한다.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드골이 영국으로 가기 직전에 의기투합한 페탱과 말없이 이별인사를 나누는 장면으로 오해하기 쉬웠다. 즉 드골의 무장투쟁과 페탱의 항복이 연계되었다고 본 것인데 그런 일은 없었다.[11] 주로 1차대전 참전용사들로 구성되었다.[12] 쾨니그는 제 2차 세계대전 때 샤를 드골 장군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에서 활약했던 주요 지휘관 중의 한 사람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와 전후에 북아프리카에서 군 복무를 마친 뒤, 제 2차 세계대전 초 노르웨이와 프랑스 전선에 참가했으며 1940년 6월 영국으로 철수한 그는 드골 운동에 가담해 자유-프랑스군에서 계속 진급했으며, 1940년 가봉 점령과 1942년 북아프리카에서 독일에 맞서 비르하케임을 방어하여 유명해졌다. 그뒤 프랑스가 아이젠하워 장군 사령부에 파견한 보조 군대 참모장이 되었으며, 1944년 6월에는 점령된 프랑스의 반(反)독일 게릴라 부대인 프랑스 국내군 총사령관이 되었다.전쟁 말기 독일에 있는 프랑스 군대를 지휘하던 쾨니그는 1949년 북아프리카 검열관이 되었으며, 1950년에는 전시비상의회의 부의장이 되었다. 곧 은퇴해 국민의회에서 드골파 대표로 뽑혔고, 1954~55년의 짧은 기간 국방장관으로 재직했다.[13] 전쟁 직후와 종전 이후의 여론은 이를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다. 파리 해방 직후인 1944년 9월엔 페탱이 사형이나 종신형을 받아야 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3%, 무죄거나 재판 자체가 부당하다고 응답한 이가 58%였으나 1945년 8월엔 사형 혹은 종신형을 받아야 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37%, 무죄를 주장한 사람은 17%에 불과했다. 이는 전쟁 직후 나치협력자 청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14] 재판부는 지금까지 페탱의 모든 행위가 곧 증거자료이며 증거는 차고 넘친다고 밝혔고 요청을 거부했다.[15] 1940년 페탱에게 정권을 넘기는 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진 이력이 있다.[16] 물론 두 사람도 항복 이후의 결정에 대해서 페탱을 비판했으나, 매국행위라고는 볼 수 없으며 엄벌에 처할 사유는 아니라는 입장이었다.[17] 유대인이자 사회주의자였고 덕분에 프랑스 함락 이후 숱한 죽음의 위기를 넘겨왔다. 동생인 르네 블룸은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했다.[18] 몽지보 재판장은 5년형을 제안했으나, 배심원단이 이를 거절한다. 그리고 사형 표결 결과 13대 14로 사형선고가 확정되었다. 판사조차도 사형을 언도하면서 "이 형이 집행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끝을 맺었다.[19] 페탱의 무덤엔 퐁피두 이외에도 드골, 지스카르데스탱, 미테랑 명의의 화환이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출처: 위키백과 프랑스어판)[20]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나라와 국민을 적극적으로 나치에 팔아넘긴 피에르 라발 같은 자들을 의미한다. 페탱은 당연히 이런 자들과는 거리가 있었고, 비시 정부의 핵심 지도자들 중에 그에 대한 재판만이 유일하게 논란이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21] 이원복 교수의 교양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편 후반부(1998년판부터 추가)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오는데, 프랑스 사람이랑 역사 얘기를 하려면 페탱이나 비시 프랑스에 대한 언급은 꺼리는 게 낫다고 언급했다.[22] 정확히는 '''1차 대전기 동안'''은 훌륭한 군인이었으나 2차 대전기에 그가 내렸던 결정은 재앙 이라고 언급하며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고 평했다.[23]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가, 소설가인 토마스 모어가 사형당하기 전 사형집행관을 향해 한 말[24] 책제목이 정말 선정적으로 번역된 경우다. 원제는 정치적 재판의 역사인데 한국에 들어오면서 나는 죄 없이 죽는다가 되었는데 여기에 소개되는 사람들이 나치 전범들, 일본 제국 전범들. (루이 16세, 찰스 1세, 에리히 호네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비롯하여 다른 케이스도 많다.) 이 책도 전범들 변호가 아닌 전범들을 다루던 재판 과정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법률적인 문제인데 제목 한번 예술적으로 번역한 셈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