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드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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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k Drake (1948~1974)
1. 개요
2. 젊은 시절
3. 커리어의 시작
4. 활동
5. 디스코그래피
6. 이후
7. 죽음
8. 사후
9. 특징
10. 여담


1. 개요


영국 출신 포크 가수.
당대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으나, 사망 후 지지가 늘어난 전형적 '''천재 컬트 뮤지션'''의 길을 따른 남자. 마약우울증에 시달리며 3개의 걸작을 완성하나 시대를 잘못 만나 인정받지 못하고 사고에 가까운 항우울제 과용으로 방년 26세에 요절한다. 하지만 후일 침울하고 내성적인 가사, 소박하고도 아름답게 빛나는 기타와 현악기들로 인해 사망 이후 팬층이 늘어났으며, 재평가도 이뤄졌다. 대략 '서정적인 현악이 가미된 포크' 같은 음악은 모두 이 사람의 영향권에 있다 해도 무방하다.

2. 젊은 시절


버마에서 태어난 닉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영향을 받아 피아노를 배웠고 작곡을 해서 녹음하기도 했다. 그의 부모님들 다 작곡을 즐겼으며 특히 그의 어머니 몰리 드레이크의 음악은 아들이 유명세를 얻자 발굴되어 그 유사성이 지적되기도 했다. [1]
고등학교 시절엔 이미지에 안 어울리지만 럭비팀의 주장을 하기도 했으며 두 학기 정도 동안 주장을 맡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성적표에 '''그를 잘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라는 말이 실리기도. 그 외에 학교 오케스트라와 친구들과 만든 밴드 등에서도 활동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영국의 고등학교 졸업시험 격인 O 레벨은 잘 못 본 듯 하다.
2년 동안 공부를 열심히 했는지 케임브리지 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게 된 닉은 기타를 들고 마르세유에 잠시 거주하며 친구들과 거리 공연을 하는 등 기타 실력을 연마하게 된다. 이 시절에 모로코 등지를 여행하면서 마리화나LSD 등등의 마약류도 접하기 시작한다.

3. 커리어의 시작


케임브리지에 들어왔지만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닉은 방구석에서 마리화나나 피며 하루 종일 음악만 듣고 지낸다. 음악에 대한 열정을 느낀 닉은 당시의 포크 씬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서 세션으로 일하는 한편 작은 커피 샵 등지에서 혼자 공연을 하기도 한다. 이때 페어포트 컨벤션, 애슐리 허칭스 등의 포크 뮤지션들을 알게 된다.
닉이 방구석에서 연마한 현란한 스트러밍, 온갖 기타 튜닝에 대한 이해 등에 감탄한 애슐리 허칭스는 그를 이미 페어포트 컨벤션을 발굴하고 나중에 바시티 버넌[2], 핑크 플로이드등 네임드 뮤지션들의 커리어에도 관련된 당시 25세의 미국 출신 프로듀서 조 보이드에게 소개시켜준다. 닉이 만든 데모 테이프를 듣고 감탄한 그는 즉시 앨범을 만들자고 제안하게 되고, 그의 레이블인 아일랜드 레코드에서 앞으로도 닉의 다른 앨범들도 발매해주며 그의 멘토가 되어준다.

4. 활동



4.1. Five Leaves Left



4.2. Bryter Layter



4.3. Pink Moon



5. 디스코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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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k Drake Disc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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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1971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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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ve Leaves Left
Bryter Layter
Pink Moon

6. 이후


처음엔 다른 직업을 택하는 걸 생각해 봤지만, 우울증 때문에 그는 전보다 더 비사회적이 되었고 부모의 집에 돌아와 살게 된다. 집에 있는 게 견딜 수 없다고 여러 번 어머니에게 말했지만, 집 밖이 더욱 괴로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1972년에 신경쇠약으로 입원을 했다 나온 후에는 나아져서 돌아다니게 되었는데, 그냥 집에서 나가 여러 친구들의 집에 지내다가 지하철에서 지내거나 하다가 몇 달 만에 오거나, 부모의 차를 타고 나가서 기름이 떨어질 때까지 아무 데나 가다가 전화로 데려가달라고 연락하기도 했다.
조금 나아진 후에는 직업을 가지려는 결심도 했다. 스튜디오에서 일해보려고도 했고, 군대(!)에 입대하려고 하기도 했지만 인터뷰에서 떨어졌다. 뜬금없이 당시에는 매우 생소했던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려는 시도도 해서 그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런던의 회사에 취직하기도 했지만 호텔에 살며 혼자 다녀야 한다는 말을 듣고 바로 때려치웠다.

7. 죽음


이렇게 잉여인간이 되어있는 닉을 보고 존 보이드는 재능을 낭비하지 말라며 다시 믿음을 줬고 그렇게 닉은 다시 한번 기타를 들게 된다. 4곡을 새로 써서 가진 세션에서 그는 존 보이드와 존 우드를 다시 한번 감탄시킨다.

저런 천재가 유명하지도 않고 부자도 아니라니 말이 되지 않아. 분명히 그는 그것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 존 보이드

모든 일은 잘 돼가는 것처럼 보였고, 닉의 부모도 닉이 다시 생기를 찾아 즐거워하는 것에 대해 기뻐하고 있었다. 닉은 여자친구도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1974년에 이르러 닉은 존 우드에게 연락해 네 번째 앨범을 만들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11월 25일 1974년에 닉 드레이크는 그의 집 침대 위에서 죽은 채로 어머니에게 발견되었다. 그는 평소에 마약과 우울증 때문에 잠에 쉽게 들지 못했는데 그럴 때 주방으로 나와 간단한 요기를 했다고 한다. 생활 패턴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그가 늦게 일어나는 것을 알았지만, 그날은 12시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방에 들어가보았고, 사망한 그를 발견했다.
사인은 그가 평소 잠에 들기위해 섭취했던 항우울제로 알려졌다. 그의 옆에선 1주일 전에 차였던 여자친구 소피아 라이드로의 편지만이 발견되었고,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자살인지 실수로 너무 많이 복용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의 우울증이 거의 나았고 런던으로 가서 다시 앨범을 만들 계획이 있던 시점의 사망이었다는 점에서 자살은 아니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8. 사후


1979년엔 컴필레이션 앨범을 그의 모든 앨범 수록곡들이 들어간 Fruit Tree가 나왔지만 역시 판매율은 저조했다. 이후 코어한 팬들만 아는 매니악한 뮤지션으로 알려졌지만 1980년대 후반에 언론 등에서 불운한 천재 등의 재조명을 받기 시작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다른 컴필레이션 앨범 Way To Blue가 나왔고 이번엔 10만장이 팔리면서 대성공을 거뒀다. 이후로 가디언, 피치 포크, 롤링 스톤즈 등등의 평론가들에게 찬양받으며 전설적인 포크 뮤지션으로 인정받는다.

9. 특징


닉 드레이크의 음악 중 가장 큰 특징은 특이한 기타 튜닝으로 연주되었다는 점인데, 온갖 변태적인 세팅으로 커버 한번 해보려고 하면 줄 끊어먹기 일수로 악명이 높다(...). 놀라운 점은 이런 튜닝들을 실험하고 배우는 걸 독학했다는 점이며 특이한 튜닝으로 나오는 불협화음을 보컬 멜로디로 상쇄했다는 점이다.
닉 드레이크가 영향을 많이 받은 뮤지션 중 한명은 당시 전성기를 달리던 밥 딜런이라고 한다. 음악적으로 별로 비슷하지는 않지만...
케임브리지 영문학과 출신의 위엄인지 가사를 쓰는 능력도 남달랐으며, 자신을 시인으로 보기를 좋아했다. 달, 별, 밤, 공기 등등 자연으로 은유를 주는 것을 특히 즐겼다.

10. 여담


다크 나이트조커, 히스 레저가 무척 좋아했던 가수였으며 심지어 닉 드레이크 전기 영화 제작과 주연을 하고 싶어했다. 그가 비슷한 최후를 맞이했기에 더욱 비극적이다.

[1] 여동생 가브리엘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지 역시 어머니 음악 취미에 상당히 협조적이었다고 한다. 어머니나 가브리엘 모두 닉의 음악 활동을 도와줬던걸 보면 집안 전체가 상당히 화목했던 걸로 보인다.[2] 여성 포크 뮤지션으로 딱 한 장 내고 잠적했다가 재발굴된 드라마틱한 사연이 있는 뮤지션이다. 음악적으로 닉 드레이크랑 유사한 구석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