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스 헨리크 아벨
1. 개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수학자.
2. 생애
천재적인 수학자였으나 인정받지 못한 채 20대 한창 나이로 죽은 비극적인 인물로, 비슷하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천재 수학자 갈루아와 비교되기도 한다.[1] 아벨의 시대에 가장 오래된 난제 중 하나는 1차부터 4차 방정식 처럼 5차 방정식에도 계수를 이용해 근의 공식을 만들 수 있느냐였다. 아벨 역시 처음엔 대수적으로 풀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증명을 시도하였으나 후에 생각을 바꾸고 풀 수 없음을 증명하였다.[2]
하지만 당시로선 너무 난해하고 추상적이던 아벨의 증명을 누구도 인정하지 않아 자비로 논문을 출판해야 했으며 그나마도 묻혔다. 이 증명은 뒷날 프랑스의 수학자 갈루아에게 영향을 미쳐서, 군을 이용한 고차 방정식의 비가해성으로 확장된다.
당대 수학의 신이라고 불리우던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에게 책을 보냈으나 하도 많이 오는 여러 아마추어 수학자들의 책과 편지에 질려버린 가우스가 무시했다.[3] 코시에게도 논문을 보냈었는데 코시가 논문을 '''잃어버려서''' 역시 읽히지 못하였다.[4]
19세에 아버지를 잃고 가난에 허덕이던 그를 그나마 인정하고 알리려던 사람이 독일 수학자 아우구스트 레오폴트 크렐레(August Leopold Crelle ,1780~1855)[5] 였는데 그의 노력으로 아벨에게 베를린 대학 수학 교수직을 얻게 해주었다. 그러나 아벨은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로 인해 결핵을 얻은 상태라 결국 소꿉친구이자 약혼자였던 크리스티네 켐프(Christine Kemp)의 품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그리고 아벨이 죽고 난 바로 이틀 뒤에 교수 임명서가 도착했다. 반응이 없다는 대학 측 답변에 이상하게 여긴 크렐레는 편지를 보냈는데 '닐스는 이미 죽었답니다' 라고 아벨의 지인이 쓴 답장을 받고서야 뒤늦게 죽은 걸 알게 되었다.[6] 나중에 크렐레는 그의 무덤에 와서 이 천재를 너무나도 빨리 데려갔다면서 슬퍼했다.
이 사람의 이름을 붙인 이론이 상당히 많다. 대표적으로 군론에서 어떤 연산 *에 대해 군에 속하는 임의의 두 원소 a, b에 대해 a*b=b*a처럼 교환 법칙이 성립하는 군(group)을 아벨 군(abelian group)이라 한다. 그 외에도 위상수학, 실해석학 등에도 이름이 붙어 있는 이론이 있고 적분에도 아벨 적분이라는 게 있다.
3. 5차 방정식의 일반해가 없음을 증명
아벨이 증명했다. 아벨은 이 내용이 담긴 자신의 논문을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에게 보냈는데, 그 제목을 ''''5차 방정식의 근이 존재하지 않는다.''''로 해 버리는 바람에 가우스는 그 논문을 무시했다. 당시 가우스는 대수학의 기본정리를 통해 ''''복소수 중에서는, 복소수를 계수로 하는 모든 n차 방정식(n>0)에는 복소수 범위에서 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난 뒤였기 때문에 제목만 보고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벨이 증명한 내용은, 5차 방정식의 '''근의 공식이 없다'''는 것이지 결코 5차 방정식에는 '''근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 미묘한 차이로 인한 아벨의 실수(?) 때문에 아벨과 가우스는 만나지 못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가우스로부터 답장이 오지 않자 아벨은 나중에 독일을 방문했을 때에도 가우스를 찾아가지 않았다. 만약 가우스가 아벨의 논문을 읽었다면, 아벨과 가우스 사이에서 교류가 생겨 흥미로운 수학이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4. 아벨상
공식 홈페이지
닐스 헨리크 아벨의 이름을 딴 '''아벨상'''이 노르웨이 총리의 주도 하에 2001년에 제정되어 2003년부터 수상자가 나왔다. 이 상은 노르웨이 왕실에서 주관하여, 매년 1명 (또는 많아야 2명)을 수상한다. 필즈상과 달리 수상자의 나이 제한은 없으며, 수상 범위는 순수 수학뿐만 아니라 응용 수학 분야까지 인정된다. 이런 상의 가치를 상금으로 따질 순 없지만, 상금 액수는 필즈상 보다 높게 책정되어 있다. [7] 필즈상은 40세 미만의 수학자에게만 수여되는 것과는 달리, 아벨상은 평생 업적을 기반으로 상을 주기 때문에 수상자들이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많다.
아직은 제정된 지 얼마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필즈상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고 있는 만큼 그 귀추를 좀 주목해할 필요는 있다. 필즈상은 주로 순수 수학 분야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는 상인데 아벨상은 응용 수학에까지 시상 범위가 미친다는 점도 필즈상과는 다른 점이다.
5. 관련 문서
[1] 게다가 갈루아와 아벨은 동시대 사람이기도 하다. 아벨이 죽고 겨우 3년 뒤 갈루아도 결투로 사망한다.[2] 여기서 '대수적으로 방정식을 푼다'의 의미는, 방정식을 근호와 사칙연산을 이용한 유리함수로 나타낸다는 뜻이다.[3] 또한 가우스는 자신이 대수학의 기본정리를 증명했기 때문에, 5차 이상의 방정식에도 근의 공식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4] 후에 아벨과 갈루아의 논문의 진가가 알려지자 가우스를 비롯한 수학자들은 이 일을 평생 후회하게 되며, 이후 가우스는 자신에게 온 논문을 한번이라도 읽어보려고 노력했다고 전해진다.[5] 수학자보단 공학박사로 더 유명해서 건설 및 여러 일에서 진가를 발휘하여 건설부 차관 및 문교부 장관을 역임했다.[6] 죽은 다음에 장례문제 때문에 제대로 그의 교수임명서를 확인하지 못했다.[7] € 600,000. 원화로 8억 원 정도. 필즈상은 15,000$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