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누마 오키쓰구
田沼意次
( 1719년 ~ 1788년)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제일 좋아하는 것은 금은보화이다. 그토록 소중한 금은보화를 아낌없이 바쳐 군주에게 봉사하려는 것은 군주에게 충성을 표시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따라서 그 액수의 다과에 따라 그 사람의 봉사정신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1]
1. 개요
다누마 오키쓰구(혹은 타누마 오키츠구)는 18세기 중반인 에도막부 시절 쇼군의 측근이며 당대 일본의 최고 권신이었다. 그가 막부 정치를 시작한 1767년부터 1787년 그가 실각하기까지 20년을 타누마 시대라고 일본 국사에서 따로 명명할 정도다.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죽던 1751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측근으로서 무려 5만 7천 석의 노중(老衆,로츄)[2] 에 올랐다. 오키쓰구의 아들 오키토모(意知) 역시 요직에 등용돼 부자가 함께 10대 쇼군 이에하루 대까지 권력을 휘둘렀다. 중상주의 정책으로 근세일본의 재정적 성장을 이끌고 방향을 제시했으나, 상품 경제가 일으킨 인플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민생이 피폐해졌고(텐메이 대기근도 그의 실책으로 피해가 더 심해졌다고 여겨졌다) 부정부패도 극심해 사회 시장 질서가 문란해지고 전통적인 일본의 정신 문화가 쇠퇴한 측면도 컸었다. 쇼군의 절대적 신임과 경제적 성장을 배경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그는, 그러나 11대 쇼군 자리가 다른 집안으로 넘어가면서 몰락했다. 뇌물정치로 민심을 어지럽힌 간신으로 찍혀 쫓겨났고 역사에도 그렇게 기록됐다. 장남은 에도 성내에서 암살되고 본인 역시 2년 후 쓸쓸하게 눈을 감는다. 21세기의 일본은 극우파들이 정치를 이끌면서 정치의 도덕성에 대해 둔감해져서 그런지 오키쓰구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2. 출세
1719년 기슈 번(현재의 와카야마현) 번사인 타누마 오키유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류스케. 그의 아버지 오키유키는 고산케의 하나인 기슈 번이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를 배출하면서 하타모토(旗本,막부 직신)가 됐다. 1734년 오키쓰구는 제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시동이 됐고, 이듬해 교호 20년(1735년)에 아버지를 여의고 녹봉 600고쿠를 상속받는다.
1745년 9대 쇼군 이에시게의 즉위 때 최측근으로서 에도에 봉행한 공으로, 오소바고요:토리츠키(御側御用取次)로 올라 에도성내에 저택[3] 과 사가라 번(현재 시즈오카 현 마키노하라시, 규슈의 사가라 아님.)에 1만 석 영지를 하사받음으로써 다이묘 반열에 올랐다. 당시 사가라 번은 이런저런 뜨내기들이 거쳐가고 마지막에 혼다 타다나카(本多忠央, 혼다 타다카츠의 5대손)까지 카이에키를 당하고 쫓겨나 무주공산 상태였다.
10대 쇼군 이에하루 때는 에도성내 칸다바시문(神田橋御門)에 집을 또 내려주고, 앞서 언급했듯 사가라 번에 4만 7천 석을 더해준다. 이때부터 주변에서는 그를 칸다바시사마(神田橋様)라고 불렀다고. 축성까지 허락받고 요시쓰구는 에도에서 로츄로서 일하는 동시에 영지에 사가라 성을 짓는다. 너무 바쁘다 보니 영지에 들를 시간도 없었는데 축성 12년 째에 검지(検分)를 실시한다는 핑계로 잠깐 방문한다. 당시 토도우미 곳곳에 가도를 정비하고, 사가라 항을 짓고, 도카이 가도를 새로 닦는 등 인프라 구축에도 열심이었다.
막부 정치에서는 자수성가한 사람답게 옛 사고방식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한 정책을 펼쳤는데, 러시아와의 무역개설, 홋카이도 개척시도[4] , 상공업자 동업조합 결성, 특산물의 전매제 실시, 광산 개발, 해외 무역 확대, 시모우사[5] 인바 늪 간척, 건어물(俵物,타와라모노)의 중국 수출 확대 등 중상주의 정책을 펼쳐 막부의 재정적자를 상당 부분 해소했다. 그러나 뇌물수수와 매관매직 역시 횡행해, 당시 다누마의 저택에는 승진과 이권을 노리는 다이묘, 하타모토, 상인들이 뇌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가장 압권은 누가 '아름다운 인형'이라고 쓰인 큰 상자를 보냈는데 오키쓰구가 열어보니 사람 미인이 들어있었던 것...
또한 새롭고 진기한 이국적 취미가 유행한 것도 이때였다. 난학(蘭學[6] )이 발달했으며, 다이묘들 사이에도 네덜란드에 대한 관심이 지나쳐 난벽(蘭癖)이란 지적까지 받을 정도였다고. 다누마 역시 여기에 해당된다. 특히 이때부터 서양 문물 수입과 교역으로써 일본 서부 지방 다이묘들이 성장해 70년 뒤 메이지 유신의 토대가 됐다고 평가된다.
3. 몰락
그러나 1782년부터 텐메이 대기근이 시작되고 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마저 죽자, 1786년 오키쓰구는 노중에서 직위해제됐고 2만 석의 영지와 오사카 저택 등 몰수, 에도 저택의 양도 등을 명받고 폐문처분이 내려지게 되었다.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는 경쟁 가문인 고산쿄(御三卿) 출신 히토츠바시(一橋) 가문이었던 것. 오키쓰구는 이에하루의 세자 이에모토가 요절하자 발등에 불떨어지듯 이에나리를 이에하루의 양자로 입적시켰지만, 이에나리 파는 즉위하자마자 오키쓰구를 쳐냈다.
끈떨어진 오키쓰구는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가 2년 후인 1788년 향년 70세로 사망. 장남 오키토모는 1784년 같은 하타모토인 사노(左野)에게 에도 성내에서 암살됐지만, 남은 세 아들만은 훨씬 전에 다른 가문의 양자로 보내졌던 터라 목숨을 부지했다. 이중 오키츠구의 손자 다누마 오키아키에게만 사가라 번(1만 석) 상속이 허락돼 다누마씨가 1백 년간 더 다스린다.
3.1. 그가 남겼다는 가훈
一・主君に対しては忠誠を誓い、このことは決して忘れ損じてはならない。当家においては特に、九代家重様、十代家治様に多大な御恩を受けているのだから、夢々忘れてはならない。
(주군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고, 이를 절대 잊어선 안 된다. 우리 집안을 두고 특히, 9대 이에시게님, 10대 이에하루님이 하해 같은 은혜를 내려주심을 꿈에도 잊지말라)
二・親に対する孝行、親族に対する配慮をおろそかにしてはならない。
(부모에 대한 효도, 친척들에 대한 배려에 소홀해선 안된다)
三・同族間ではもちろんのこと、同席の衆、親しい人に対し態度を変えることなく接するように。どんなに身分が低くても、情をかけるところは差別のないようにすること。
(혈육은 물론 우연히 동석한 사람, 지인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말고 대하라. 아무리 신분이 낮은 자도 정을 다해 차별함이 없도록 하라)
四・家中の者に対しては、依怙贔屓(えこひいき)がないように気をつけて接すること。使いやすい人、使いにくい人にも、大いに気配りをして、しっかり召し使うこと。
(부하들을 차별(贔屓)없이 대하도록 신경 써라. 부리기 좋고 나쁜 걸 따지지 말고 대범하게 신경써주고 제대로 대우하라)
五・武芸は怠ることなく心がけ、家中の者にも重々申し付けること。若者には特に精を出させ、大いに励ませるべきこと。ただし、武芸に精を出した上は、その余力で遊芸に励むことは勝手次第で、それを止めだてする必要は毛頭ない。
(무예에도 태만하지 않도록 유의하고, 부하들에게도 신신당부하라. 젊은이는 특히 온 힘을 다해 무예에 힘써야 한다. 다만 무예에 힘을 쏟고 남은 여력으로 취미 활동(遊芸)[7]
을 즐기는 것은 각자의 자유다. 막을 필요는 전혀 없다.)
六・権門の衆中には隔意失礼のないように心がけること。公儀に関わることはどんなに些細なことでも慎重に行い、諸事入念が肝要である。
(권세가의 사람들에게는 격의를 다해 실례가 없도록 마음을 써라. 막부 일에 대해선 어떤 것도 자세하고 신중하게 처리하고 모든 일에 신경을 다함이 중요하다)
등등이다. 10대 쇼군의 이름은 물론 쓰잘데기 없어 보이는 잔소리가 심각한 걸 보니, 노인이 된 후 가족들에게 여봐라하고 써준 글로 짐작이 될 뿐이다.七・諸家の勝手向が不調なのはどこも同じようで、好調なるは稀である。不勝手が募ると幕府御用にも支障が置き、軍役も充分に勤まることが出来ず、領地を拝領している意味がない。家の経済を守ることはとても大切なことであるので、常に心がけることが肝要である。
(다이묘들의 재정이 엉망인 것은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이므로, 흑자가 나도록 노력은 해야 한다. 궁핍해지면 막부의 도움을 받게 돼 막부에 폐를 끼치게 되고 군역도 다할 수 없게 돼 영지를 내려주신 의미가 없어진다. 집안 경제를 지키는 것은 중요한 것이므로, 항상 마음을 다함이 긴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