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나리

 


'''[image] 에도 막부 11대 정이대장군
とくがわ いえなり
徳川家斉

도쿠가와 이에나리
'''
[image]
'''생몰년도'''
1773년 11월 18일 ~ 1841년 3월 22일 (68세)
'''신장'''
156.6cm
'''재임'''
'''쇼군'''
1786년 4월 23일 ~ 1837년 5월 6일 ('''51년''')
'''태정대신'''
1827년 ~ 1841년(14년)
'''오고쇼'''
1837년 ~ 1841년(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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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에도 막부의 11대 쇼군. 1773년(안에이 2년) 음력 10월 5일 생.
재임 기간이 '''51년'''이나 되는, '''일본 사상 최장기간 집권한 쇼군'''으로, 그 엄청난 집권기간 동안의 치적보다는 일본사에서 알아주는 다자녀 쇼군으로 더 유명하다. 40명의 후궁을 두고 이중 16명으로부터 아들 28명, 딸 27명 등 총 55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1813년에는 이 한 해에만 4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하지만 그 많은 자녀들 중, 남자 직계로 이어지는 집안은 오로지 15남 나리타미의 자손들 뿐이다.[1] 여계까지 계산해도 아래 언급된 마에다 집안에 시집간 11녀 야스히메만 자손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이에나리는 자식들을 다이묘 가문에 양자로 입적시키거나 혼인시켰는데, 이런 관계가 무려 36건에 달해 에도 시대 최다 타이틀을 획득했다. 현재 도쿄대학에 남아 있는 상징인 아카몬(赤門)도 이에나리의 딸이 마에다 가문에 출가(出嫁)하면서 기념으로 신축한 것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쇼군의 혈통들이 여러 다이묘들에게 장가-시집-입양되었는데, 둘째 셋째 수준도 아니고 30째 40째를 받게 된 다이묘 가문은 슬슬 얼마나 더 짬처리를 당해야 하는지 불만을 품기도 했다. 입양했다면 자식을 모셔야 하고며느리를 받았다면 며느리를 모셔야 하니 말이다. 미토 번의 경우 쇼군의 혈통만 4명을 받아서 여기가 미토냐 에도냐 하는 자학개가가 있었다.
이에나리는 고산쿄(御三卿) 중 하나인 히토쓰바시 집안 출신이다. 히토쓰바시 집안은 원래 쇼군을 배출하는 반열의 고산케(御三家) 출신이 아니다. 전대 쇼군인 이에하루는 고산케 중 하나인 기슈 도쿠가와 출신이었다. 그런데 이에하루가 후사 없이 죽으면서 전대의 섭정 다누마 오키쓰구가 이에나리의 부친 하루나리(治済)와 짜고 이에나리를 쇼군의 자리에 올린 거였다. 불과 13세의 나이에 쇼군에 오른 그는 아버지와 중신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의 섭정을 받았다. 그들은 바로 오키쓰구를 토사구팽하였다. 사실 전임 쇼군 이에하루의 처첩들과 자녀들이 죄다 일찍 세상을 뜬 것은 하루나리가 자신의 아들을 쇼군에 올리려고 독살한 거라는 음모론도 없지 않다.(이에하루의 딸은 오와리 도쿠가와에 출가시키려고 했던 건데 일찍 병사해 무산되었다.)
섭정은 시작은 좋았으나 결국 칸세이 년간(1789~1800)의 개혁(寛政の改革)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는 이에나리의 친정이 시작됐지만 별로 변하지 않았다. 방만한 통치는 계속돼 세기 전환기(18세기19세기)의 에도 막부에 악영향을 끼쳤다.
1804년부터 1829년까지의 사반세기를 분카분세이기(文化文政期, 문화문정기)[2]라고 하는데, 18세기와 달리 자연재해도 잠시 줄어들고 정치도 안정되어 일본의 서민문화의 마지막 황금기로 꼽힌다. 50년이 넘는 재위기간에 풍성한 문화를 이룩했으나 중흥보다는 정체의 시기였다.
'''1799년'''부터 막부 관리와 다테 가문을 비롯한 몇몇 다이묘에게 지시하여 사할린 남부지역과 쿠릴 4도를 탐험케 하여 땅을 얻어낸다.[3] 이 당시 홋카이도는 이미 에도 막부의 영토였다.
문제는 그의 말년이 바로 에도 시대 몰락의 상징인 텐포(天保, 천보-하늘의 보살핌, 1829~1843)년간이었다는 것. 일찌기 12세기부터 "일대인지십 一大人只十"으로 파자해 "따르는 사람이 고작 열명뿐"이라는 흉한 연호라고 피했던거였다.. 안습.[4] 1833~1837년의 텐포 대기근은 소의 목 설화의 근간이 되는 등 최악의 기근이었다.
방만하기 짝이 없는 통치를 50년이 넘게 한 뒤 이젠 지겨웠는지 1837년 물러나 오고쇼大御所(상왕 격)가 되었다. 차남 이에요시(家慶)가 계승하여 12대 쇼군에 취임(재임 1837~1853)했지만, 부친인 이에나리가 사망한 1841년까지 4년 동안은 사실상 실권이 없는 명목상의 존재였던 듯하다. 이후에도 별다른 능력은 보여주지 못했고 여기에 무능력자가 다음 쇼군이 되기까지 했으니, 이는 에도 막부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에나리 역시 긴 재임기간에 점차 잊혀졌는지 '''그가 숨을 거두었을때는 누구 하나 알아챈 사람이 없어 주치의인 요시다 세이보우치가 그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았다'''. 물론 이 시기에 이르면 일본 역대 막부의 전통에 따라 쇼군은 사실상 허수아비로 전락했고 실제로는 막부 내 실력자들이 통치를 하는 상황이라서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이에나리의 재임기는 조선정조, 순조, 헌종 재위기와 일치한다.
그의 재임 때인 1811년(순조 11년) 마지막 조선 통신사쓰시마까지만 온 뒤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조-일 간의 공식 국교는 사실상 끊어졌다. 사실 마츠다이라 섭정기인 정조 시기에 이미 통신사를 요청했으나, 에도가 아닌 쓰시마까지로만 통신사를 요청했다(1794). 경비 절감 때문이었다. 조선은 17년간 거부하다가 순조 11년(1811)에 와서야 승인했다. 그만큼 일본에게 조선의 필요성이 줄어든 탓도 있었다. 이에나리의 재위가 워낙 길었기에 20여년이 경과, 1837년 차기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취임할 때는 통신사에 대한 논의 자체가 사라진 뒤였다. 결국 1811년의 사절이 마지막 통신사가 되었다.
만화 오오쿠에서조차, 자식이 하도 많아 한 여자가 그렇게 많은 자녀를 낳았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쇼군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히데타다[5], 남자 도쿠가와 이에미츠[6]를 제외하고는 TS화되었으나 이 사람은 남자로 그냥 나온다.

[1] 상당수가 유년기에 사망했고 살아 남은 자손들도 대가 거의 끊겼다.[2] 연호를 딴 것이다. 분카(1804~1818)는 39년을 제위한 고가쿠 덴노(1780~1817)의 후반기 연호이고, 분세이(1818~1829)는 닌코 덴노(1817~1846)의 전반기 연호이다.[3] 물론 그에 따른 포상도 지급했다고 한다. 그리고 훗날 에도 막부가 망한 뒤 쿠릴 열도를 둘러싼 러일대립이 2차 세계대전부터 시작되었다.[4] 중국 북제 문선제양(육조)의 후신 후량(남북조시대) 명제의 연호이기도 하다. 두 나라 모두 오래가지 못했는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5]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오오쿠 세계관에서 언급은 없지만 존재 가능성이 있고 적명포창이 창궐하기 전에 쇼군이 됬기 때문에 남자일 가능성이 높다.[6] 오오쿠에 나오는 여자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남자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사생아고 남자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오오쿠 세계관에서는 쇼군이 되기도 전에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