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코 판체프
1. 개요
구 유고슬라비아, 지금의 북마케도니아 출신의 前 축구선수.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역사상 득점 순위 7위를 랭크하고 있는 공격수이다. 물론 판체프 위로 줄줄이 10년이상 뛴 선수들이 대부분인 반면, 판체프는 고작 3년을 뛰면서 리그에서 92경기 84골, 챔스에서 18경기 11골을 기록하는 괴물같은 득점력을 지녔기 때문에 단기 임팩트로만 따지자면 판체프가 우위다. 로베르트 프로시네츠키, 데얀 사비세비치같은 선수들의 지원아래 사정없이 퍼붓는 판체프의 화력은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아이덴티티 라고 볼 수 있었다.
2. 클럽
1982-83 시즌 북마케도니아 최강 클럽인 FK 바르다르에서 데뷔했다. 첫 시즌에는 4경기에서 나서 3골을 넣었고 두번째 시즌부터는 천부적인 골결정력을 과시하며 '''득점왕'''을 차지해버렸다. 그 다음 시즌에는 리그에서만 20골을 득점하며 유고슬라비아 최고의 공격수로 떠올랐고 1988년 팀을 떠날 때 까지 151경기에 나서 84골을 득점했다.
1988-89 시즌을 앞두고 판체프는 유고 최강팀인 FK 츠르베나 즈베즈다로 이적한다. 같은 날 이적한 데얀 사비체비치와 함께 판체프는 군대에 입대했는데, 문제는 군인들을 관리하는 팀은 본인이 거절한 FK 파르티잔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판체프는 리그 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다. 와중에 유고슬라비아 축구협회가 로비활동에 성공해 축구선수들이 군복무를 하면서도 리그 경기에 출장하는 것이 가능케 되었고 1989-90 시즌이 사실상 츠르베나에서 판체프의 첫 시즌이 되었다.
수준급의 동료들의 지원을 받아서 그런지, 판체프는 유고슬라비아 리그를 개발살냈고 첫 시즌 32경기 25골을 기록하며 두번째로 득점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1990-91 시즌은 팀과 판체프 모두 정점을 찍은 시즌인데, 판체프는 리그에서 32경기 34골이라는 가공할만한 활약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유러피언 컵에서도 5골을 집어넣으며 팀이 결승전에 올라가는데 일조했다. 판체프는 결승전에도 선발로 출전했고 팀은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올랭피크 마르세유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판체프는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키커로 나서 성공시키며 팀의 우승을 확정지었다.
판체프는 콜로 콜로와의 인터콘티넨탈 컵에서도 선발 출전해 팀의 3번째 골을 득점하며 우승에 일조했고 팀 동료 데얀 사비체비치, 초대 FIFA 올해의 선수 수상자였던 로타어 마테우스와 함께 공동으로 발롱도르 2위에 랭크되는 등 세계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1991-92 시즌에도 판체프는 리그 28경기 25골을 기록하며 다시 한 번 득점왕에 올랐다.
판체프는 다른 팀 동료들 처럼 이탈리아 무대에 도전했고 인터 밀란에 입단했다. 이전 시즌 8위라는 충격적인 성적 때문에 인터 밀란은 개혁을 단행했고 그 과정에서 게르만 삼총사는 해체되었으며, 판체프를 비롯한 공격수들[2] 은 모두 신입생들이었다. 발롱도르 2위에 빛나는 골잡이 판체프는 쉽게 주전 자리를 확보하나 싶었으나... 정작 주전 자리를 차지한 것은 우루과이 출신의 루벤 소사였다. 판체프는 기대 이하의 모습만을 연발했고 데뷔골을 넣은 것은 해가 바뀌고 나서였다. 설상가상으로 감독인 바뇰리와 불화까지 겹쳐, 판체프의 이탈리아 생활은 사실상 끝이 나버렸다.
다음 시즌 아약스에서 데니스 베르캄프가 영입되면서 판체프는 전력 외의 선수로 분류되었고 1경기도 나오지 못한 체 겨울에 독일의 VfB 라이프치히로 임대되기에 이르렀다. 독일 무대에서 판체프는 10경기에 나와 2골을 기록하는 등 부진을 면치 못했고, 팀은 강등되었다.
다시 돌아온 인테르는 오타비오 비안키로 감독이 바뀌어 있었고 판체프는 새로운 감독 밑에서 출전 기회를 모색했으나 말도 안되게 하락한 폼과 부상 등으로 여의치 않았다. 판체프는 서포터들로부터 쓰레기통에 비유되었고 1995-96 시즌을 앞두고 포르투나 뒤셀도르프로 이적한다. 아직 만 30세도 되기 전이기 때문에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으나 한 번 떨어진 폼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에서도 그는 14경기 2골이라는 참혹한 기록을 달성했고 스위스 리그의 FC 시옹으로 이적한다. 별볼일 없는 퇴물 공격수가 된 판체프는 시옹에서 5경기 출장에 그쳤고 1997년 만 31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3. 국가대표
유고 내전으로 인해 국제대회에서 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선수 중 하나이다. 메이저 대회 참가 경력으로는 90년 월드컵이 있는데, 여기서는 조란 부요비치의 서브 멤버로 주로 활약했고 UAE를 상대로 2골을 득점한 것이 전부이다. 유로 1992에 불참한 것이 상당히 아쉬운데, 이 대회는 87년 우승 세대가 본 궤도에 오르는 시점이자 지난 해 츠르베나가 그 유고 황금 세대의 위력을 시범했기 때문이다.
1993년 마케도니아 축구 국가대표팀이 분리되자 소집되었고 1995년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할 때까지 대표팀의 초대 주장을 맡았다.
4. 평가
북마케도니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탁월한 골 결정력 덕분에 90년대 초반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이름을 날렸다. 2004년 UEFA 50주년을 기념해 각국 역사상 최고의 선수를 뽑았는데, 여기서 판체프는 북마케도니아 역대 최고의 선수로 뽑혔다.
5. 기타
은퇴한 뒤에 자신이 인터 밀란으로 이적한 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며 인테르에서의 생활을 비판했다. 인터 밀란에서는 자신의 스타일을 싫어했다고 말했다. 판체프는 골을 넣는 것 이외에는 경기 중 영향력이 강한 선수가 아니었고 인터 밀란은 이를 납득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팀의 주축 이탈리아 선수들(젱가, 베르고미, 페리)이 외국인 선수들에게 불친절했다고 한다. 때문에 적응에 애를 먹었고 다른 외국인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