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클린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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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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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9년부터 2020년까지 헤르타 BSC 감독을 맡았다.#
선수 시절 8-90년대 독일의 전설적인 스트라이커로서 '''게르만 삼총사'''의 일원이었으며, 서독의 1990년 월드컵[4] , 독일의 유로 1996 우승을 이끌었다. 월드컵 통산 11골[5] , A매치 108경기 47골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하며 맹활약, 게르트 뮐러-칼 하인츠 루메니게를 잇는 서독 축구 레전드 스트라이커 계보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클럽에선 84-85 시즌 분데스리가 신인왕, 87-88 시즌 분데스리가 득점왕(이상 슈투트가르트), 인터 밀란에서 UEFA컵 우승(90-91), 바이에른 뮌헨소속으로도 UEFA컵 우승 및 득점왕(95-96)[6] 을 차지했고, 94-95 시즌에 토트넘 핫스퍼에서의 맹활약으로 그 해 발롱도르 2위, FIFA 올해의 선수 3위, 프리미어리그 FWA 올해의 선수에 오르며 최전성기를 보냈다.[7]
감독으로서도 바이에른 뮌헨과 독일 대표팀, 미국 대표팀을 이끌었다. 별명은 금발의 폭격기(Golden Bomber)와 다이버(Diver). 프리미어리그 시절 페널티 킥 유도를 위해 넘어지는 연기를 잘해서 영국에서는 별명이 "diver"이다.[8] 다만 꾸준하게 업적을 쌓으며 맹활약해온 국가대표 선수 시절과는 달리, 클럽에선 감독 및 선수경력을 불문하고 한 팀에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는 방랑벽으로도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9]
2. 선수 경력
2.1. 클럽
클린스만은 제과점 주인 지크프리트 클린스만과 그의 아내 마르타 사이에서 난 네명의 아들 중 한명이었다. 그는 8세가 된 뒤 깅엔 안 데어 필스를 연고로 하는 깅엔에 입단하였다. 6달 후, 그는 새 클럽 소속으로 단 한경기에서 16득점을 올렸다. 그는 10세가 되자 가이슬링엔으로 이적하였다. 클린스만은 그로부터 4년 뒤, 가족 전체가 슈투트가르트로 제과점을 옮겼다.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중심 슈투트가르트로 가족이 이사를 한 뒤에도, 클린스만은 뷔르템베르크 대표가 눈도장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이슬링엔에서 활약하였다. 16세의 클린스만은 슈투트가르트 키커스와 계약을 맺고 2년 후에는 프로 계약도 체결하였다.
1978년에 슈투트가르트 키커스로 이적한 클린스만은, 1982년에 2. 분데스리가에서 프로 데뷔를 하였다. 1982-83 시즌, 그는 짧은 시일 내에 주전이 되었고, 1983-84 시즌 말, 그는 키커스 소속으로 19골의 득점을 올렸다. 호어스트 부어츠 전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감독은 클린스만이 수차례의 스프린트 트레이닝을 호르스트 알만이라는 독일 최고의 스프린트 감독의 덕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는 새 시즌이 시작되기 전 100m 달리기를 11.7초에서 11초 사이에 끊을 수 있도록 하였다.
1984년, 그는 분데스리가에 위치한 라이벌팀 VfB 슈투트가르트로 이적하였다. 슈투트가르트에서 첫 시즌에 클린스만은 15골을 득점하여, 같은 시즌에 16골을 득점한 칼 알괴버에 이어 팀내 득점 2위를 기록하였다. 그는 특출한 득점력에도 불구하고, 팀이 리그를 10위로 마감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1985-86 시즌과 1986-87 시즌에, 클린스만은 각 시즌당 16골을 득점하였고, 전자의 시즌에는 팀을 DFB-포칼 결승에 올려놓았으나, FC 바이에른 뮌헨과의 결승에서 2-5로 패하였고, 클린스만은 이 경기의 마지막 골을 득점하였다.1987-88 시즌,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전설적인 오버헤드킥을 포함하여 19골을 득점한 그는 분데스리가 득점왕에 등극하였다.
1988년, 클린스만은 24세의 나이로 서독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였다. 1988-89 시즌, 슈투트가르트는 UEFA 컵 결승에 진출하였으나 디에고 마라도나의 SSC 나폴리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참고로 클린스만은 5시즌 동안 156경기 79골을 넣었는데, 거의 경기당 0.5골을 기록한 셈.
이후 클린스만은 이탈리아의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이적하여 국가대표팀 동료 로타어 마테우스와 안드레아스 브레메를 만났고, 게르만 삼총사를 결성하였다.
클린스만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와 3년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는 조반니 트라파토니의 지나치게 수비적인 전술에도 불구하고, 세리에 A에서 1989-90 시즌에 13골을 넣었다.
그다음 시즌, 클린스만은 인테르 소속으로 UEFA컵 우승을 차지했고,[10] 전년도의 리그 성과를 계속 이어나가 14골을 득점하였다. 클린스만의 계약은 이에 따라 1994년까지 연장되었으나, 1991-92 시즌때 엄청 부진했고, 인테르는 코라도 오리코 감독의 지도하에 무관으로 마치는 것은 물론 리그에서 8위를 기록하였고, 클린스만 본인은 7골에 그치며, 팀내에는 불화가 발생하였다. 이로써 클린스만은 1991-92 시즌 이후로는 더이상 인테르 선수로 뛰지 않을 것을 밝혔다. 3시즌동안 세리에 A에서 103경기 36골을 넣은 클린스만은 AS 모나코 FC로 이적하여, 첫 시즌에 팀을 리그 1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마르세유의 뇌물수수 스캔들이 터지자, 마르세유가 가져갔던 타이틀을 획득하여 1992-93 시즌의 실질적인 우승팀이 되었고, 그에 따라 모나코는 1993-94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모나코는 AC 밀란에 패하기 전까지 준결승에 올라갔다. 1993-94 시즌, 모나코는 리그를 9위로 시즌을 마감하였고, 클린스만은 인대 파열로 2달간 결장하였으며, 1년의 계약기간이 남는 상황에서 조기에 팀을 떠났다. 참고로 이때 2시즌 동안 65경기 29골을 넣는 활약을 펼친다.
1994-95 시즌, 토트넘 홋스퍼 FC는 AS 모나코 FC에서 이적료 200만 파운드를 지급하고 클린스만을 영입했다. 사실, 클린스만이 처음 토트넘으로 왔을 때는 클린스만을 향한 토트넘 팬들의 시선이 그렇게 곱지만은 않았었다.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잉글랜드를 탈락시킨 주범(?)이기도 했고, 할리우드 액션이 너무 심하다는 편견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만 30살이던 클린스만은 데뷔전에서 골을 터뜨린 뒤 할리우드 액션 셀러브레이션을 펼쳐서 토트넘 팬들의 시선을 끌더니 연이은 득점 행진으로 최고 수준의 활약을 펼치면서 단숨에 토트넘을 대표하는 골잡이로 떠올랐다. 이 시즌에서 클린스만은 21골을 터뜨린 것을 포함하여 모든 대회에서 30골을 넣었다. 그리고 축구기자연맹이 선정한 올해의 선수에 선정된다.
프리미어 리그 공식 기록은 불과 1시즌 동안 41경기 21골을 넣으면서 일약 토트넘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심지어 게리 리네커[11] 의 뒤를 잇는다는 찬사까지 들었지만... '''다음 시즌 훌쩍 독일로 떠났다.''' 지못미 토트넘.
FC 바이에른 뮌헨에서 2시즌 동안 65경기 31골을 넣으며 여전히 녹슬지 않는 기량을 선보였고, 또 다시 훌쩍 이탈리아로 떠나서 1997-98 시즌 UC 삼프도리아에서 뛰었다. 다만, 이 때는 1시즌을 채우지 못하고 토트넘으로 다시 임대를 갔었다. 삼프도리아에서는 8경기 2골, 토트넘에선 15경기 9골.
클린스만이 토트넘 팬들에게 진정한 레전드로 인정을 받은 것은 이 짧은 1년을 보낸 뒤,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옮긴 뒤 UC 삼프도리아를 거쳐서 다시 되돌아온 1998년 토트넘에서 보여준 활약 때문이었다. 토트넘 팬들은 위기에 빠진 팀을 구해줄 것이라면서 클린스만을 열혈하게 환영했다. 클린스만의 유럽 리그 은퇴 시즌이 된 이 시기에는, 토트넘 팬들에게 클린스만의 이름을 영원히 각인시킨 시간이었다. 겨울 이적시장에서 삼프도리아에서 임대로 다시 토트넘으로 합류한 클린스만은 반복된 패배로 인해서 강등권으로 쳐진 토트넘의 구세주가 되었다. 클린스만이 합류한 1997-98 시즌 중반, 토트넘은 10월의 시작과 함께 이어진 패배의 그림자가 불러온 강등의 기운에 허덕이고 있었다. 11경기에서 무려 8패를 당하면서 강등권으로 추락해버린 토트넘은 시즌 도중 감독까지 경질하면서 어려운 시기에 놓여 있었고, 많은 전문가들이 1977년 이후, 토트넘이 20년 만에 다시 2부 리그로 강등될 가능성을 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98년 1월 17일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와의 홈경기에서 결승골을 터뜨리면서 한 달 만의 승리(1:0으로 승리)를 안긴 클린스만은 남은 시즌 6경기에서 (최종 3경기 연속골을 포함) 모두 골을 넣었으며, 그 경기에서 팀은 4승 2무의 호성적을 냈다. 뭐니뭐니해도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로 남게 된 경기는 강등권 팀들간의 혈투인 37라운드 AFC 윔블던 원정경기였다. 클린스만은 이 경기에서 혼자서 4골을 몰아치면서 토트넘의 6:2 승리를 이끌었다. 이로써 토트넘은 극적으로 잔류를 확정했고, 클린스만은 현재까지도 토트넘 팬들의 레전드로 인정을 받고 있다. 은퇴 이후에도 "토트넘의 레전드, 감독 제의받다."라는 신문 기사도 나왔었고, 실제로 토트넘에서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끝나고 감독직 제의를 하기도 했다.
한동안 축구계를 떠나 미국에서 조용한 삶을 누리나 했는데, 40세가 된 2003년 미국 오렌지 카운티 블루 스타 팀에 등장, 8경기 5골을 기록한다.
2.2. 국가대표
클린스만은 1988 서울 올림픽에 토마스 헤슬러 등과 함께 서독대표로 출전해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12]
이어 자국에서 열린 자신의 첫 국가대표 메이저 대회인 UEFA 유로 1988에 출전해 조별리그 덴마크를 상대로 골을 넣으며 팀의 4강 진출을 이끌었다.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 루디 푈러와 함께 부동의 투톱으로 맹활약하며 월드클래스 포워드로 거듭나게 된다. 당시 서독은 유고슬라비아, 콜롬비아, 아랍 에미리트와 함께 D조에 편성되어 있었는데, 서독은 이 세팀과의 경기에서 10득점 3실점, 2승 1무로 수월하게 조별리그를 통과하였다. 서독의 16강 상대는 그들이 2년전에 홈에서 열린 UEFA 유로 1988에서 서독을 탈락시킨 네덜란드였다. 이 경기는 클린스만에게 있어서 가장 인상적인 국가대표팀 경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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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에게 선제골을 뽑아낸 직후 환호하는 클린스만
루디 푈러가 22분에 퇴장당한 후, 클린스만은 혼자서 스트라이커 임무를 이행하였다. 그는 네덜란드 수비를 향해 질주하여 휘저었고, 후반전에 1-0 선제골을 득점하였고, 서독은 2:1로 승리했다. 그 다음날 독일 신문사인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클린스만에 대해 '''"최근 10년간 독일 축구 협회 (DFB) 에서는 놀랍고, 완벽한 성과를 보인 공격수는 없었다."'''라고 보도하였다. 이후 서독은 체코슬로바키아를 1:0으로 격파하고, 잉글랜드를 승부차기 끝에 꺾고 결승에 올랐다. 결승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와 리턴매치를 하였다. 이 경기에서 클린스만은 페드로 몬손의 거친 태클을 받았다. 몬손은 클린스만을 태클한 뒤 퇴장당하였고[13] , 아르헨티나는 10명으로 서독을 상대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안드레아스 브레메가 페널티 킥 결승골을 넣으며, 서독은 우승을 차지한다.
90년 월드컵 우승후 세계 최강으로 자리한 독일은 2년뒤 UEFA 유로 1992에서도 자타공인 우승후보였으나 팀의 간판이자 전설 로타어 마테우스가 대회 직전 아킬레스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며 낙마하자 루디 푈러가 주장을 이어받고 출전한다. 그러나 푈러마저도 팔골절 부상을 당하자 클린스만은 독립국가연합과의 1차전에서 주전으로 출전하였다. 독일은 평가만큼 최고의 경기력을 보이지 않았지만 대회가 진행될수록 해슬러와 리들레의 활약으로 차츰 기량을 회복하였으나, 결승전에서 아예 지역예선 탈락으로 출전 기회조차 없던 덴마크[14] 에게 충격적인 0-2 완패를 당해 준우승에 그쳤다.
클린스만은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도 출전했는데, 댈러스의 코튼 볼 경기장에서 열렸던 1994 FIFA 월드컵 미국 C조 최종전에서 대한민국과 맞닥뜨려 전반전에 2골을 기록했는데, 엄청난 터닝 슛으로 대한민국을 침묵에 빠뜨리기도 했다. 당시 전반을 클린스만의 2골과 리들레의 득점으로 3-0으로 마쳤지만, 후반전을 시작하고 나서 황선홍과 홍명보의 합작으로 20분 만에 대한민국이 2골을 터뜨려 3-2로 따라붙었다. 후반전에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거의 걸어다니는 수준이었던 독일 선수들에 비해, 대한민국 선수들은 2골을 넣은 후 맹렬한 기세로 독일 진영을 휘젓고 다녔다. 당시에는 위르겐 클린스만도 당시 40도가 넘어가던 끝장나는 미국의 폭염에는 속수무책으로 체력저하를 겪어서 수비에만 집중해야 했을 정도였다고...[15]
결국 3:2로 독일의 승리로 끝났지만, 클린스만 본인은 훗날 당시 경기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만약 그때 5분만 더 있었다면 우리가 졌을 것이다."''' 그리고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된 클린스만은 10년 후 본프레레호 당시 원정 경기로 2004년에 다시 만난 대한민국에 '''1:3'''으로 패하는 굴욕을 당했다.[16]
이후 불가리아에게 패해 8강에서 탈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클린스만은 대회에서 5골을 득점하여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상을 받았다.
주장으로 참가한 UEFA 유로 1996에서 클린스만은 3골을 넣으며 활약했고 체코와의 결승전에서 올리버 비어호프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는 현재까지도 독일의 마지막 유럽축구선수권 우승이다. 아울러 노장들이 대거 합류해 비판을 받았으나 노련함과 중고신인 비어호프의 활약으로 우승, 독일의 세대교체 타이밍을 놓치게 한 양날의 검과도 같은 우승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가된 클린스만이지만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도 출전했고, 3골을 득점했지만, 8강에서 크로아티아에게 0:3으로 대패했다. 이후 클린스만은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2.3. 플레이 스타일
현역 시절의 스타일은 득점기계. '''타고난 순발력과 점프력, 유연성으로 각종 발리슛, 오버헤드킥, 다이빙 헤더등의 아크로바틱한 골'''이 많다. '''머리, 발 등 축구에서 사용가능한 부위는 일단 갖다대고 득점을 노리는 악착같은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골대 앞에서 득점을 주워먹는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일단 공을 잡았다 하면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는 위협적인 공격수였다. 드리블이나 스피드, 제공권, 킥력 모든 면에서 준수했던 전천후 스트라이커. 전형적인 클래식 스트라이커의 스타일은 아니었으며, 발재간도 준수한 공격수로서 보다 현대적인 스트라이커의 유형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피지컬로 상대를 누르는 스타일은 아니었기에 최전방 원톱보다 세컨톱으로 많이 기용되었다.
특히 무엇보다도 클린스만을 가장 돋보이게 했던 위협적인 무기는 '''순발력과 순간적인 판단에 의한 다이렉트 슛'''이다. 투톱 파트너에게 수비수들이 몰리면 그 틈을 타서 크로스나 패스가 건네지는 순간 최소한의 터치로 날리는 슈팅은 일품이었다. 그래서인지 커리어 내내 발리나 다이빙 헤딩과 같은 멋진 장면을 많이 연출했다.[17] 극단적인 수비로 일관하며 좀처럼 기회가 나지 않던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의 유럽무대에서 이러한 클린스만의 능력은 더더욱 빛을 발했다.[18]
2.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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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에 활약한 마르코 반 바스텐, 게리 리네커,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로베르토 바지오 등과 함께 그 시대를 대표한 8-90년대의 레전드 스트라이커이자,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루디 푈러 이후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등장 전까지 '''90년대 서독과 독일의 공격을 상징하는 국가대표팀의 전설'''이기도 하다. '''월드컵 통산 11골로 역대 5위이자 108경기 47골로 센추리클럽 회원'''이기도 하며,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주전으로 우승을 이끌어 대회 공식 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1994 FIFA 월드컵 미국과 토트넘 핫스퍼에서의 맹활약으로 '''1995 발롱도르 2위, 1995 피파 올해의 선수 3위, 1994-95 프리미어리그 FWA 올해의 선수에 꼽히는 등 당대 유럽을 상징하는 월드클래스 공격수 중 한 명'''이었다.
선수 생활의 황혼기인 95년 이후엔 '''바이에른 뮌헨에서 유로파리그 개편전 UEFA컵 단일시즌 최다 기록인 15골을 몰아치며 득점왕으로 UEFA컵 우승을 이끌었고(95-96), 주장으로 유로 96 우승및 분데스리가 우승(96-97)'''으로 커리어 유종의 미를 거둔다.
'''다만, 1990년대를 장식한 무수한 스타 공격수들 가운데는 인지도가 2% 떨어진다. 이는 역마살에 기인한 방랑형 커리어로 인해 본인의 활약을 대표할 만한 상징적 소속 클럽팀이 없기 때문이 크다.''' 이 때문인지 각종 매체의 올타임 평가순위 자료를 보면 명실상부 90년대 대표 스트라이커임에도 차이는 있으나 대체적으로 50~90위권으로, 다소 박하게 평가되는 편. 물론 소속 클럽팀 중 가장 돋보였던 토트넘에선 지금도 레전드로 회자되며 발롱도르 2위까지 기록했지만, 토트넘에서 딱 1년만 뛰고 바로 이적해 단기 임팩트가 강하다는 표현이 맞다. 물론 분데스리가, 세리에 A에서 부진했던 시기를 빼면 매년 15골 정도를 꾸준히 기록했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에서는 경기 수가 늘어났기 때문에 20골을 찍기도 했다. 클린스만은 항상 리그에서 상위권에 드는 스트라이커였지만, 득점왕 경력은 87/88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차지한 것이 유일하다. 다만 클린스만은 세리에 A, 분데스리가, EPL 어디를 가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활약을 했고, 강팀에 있던 약팀에 있던 꾸준히 활약했다. 또 커리어 초창기를 제외하면 기복 없이 10년간 매년 15골 정도를 넣었고 슬럼프, 부상이 있었던 예외적인 해조차도 10골은 넣었다. 한두 시즌 반짝하여 빨리 사라진 스타 선수들도 많지만, 클린스만처럼 10년 가까이 이런 폼을 일정하게 유지한 선수는 많지 않다. 이런 꾸준함이 클린스만의 장점이었고, 때문에 누적 기록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기록을 쌓았다. 이것을 이유로 로타어 마테우스는 부상이 많아 활약은 상대적으로 짧았던 판 바스턴보다 오랬동안 꾸준히 활약하며 많은 골을 넣은 클린스만을 더 위대한 선수로 꼽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대 레전드 스트라이커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클럽팀이 있게 마련이다. AC 밀란의 전설인 반 바스텐은 말할 것도 없고, 바티스투타는 ACF 피오렌티나, 티에리 앙리는 아스날 FC, 앨런 시어러는 블랙번 로버스 FC와 뉴캐슬 유나이티드 FC라는 자체적인 개별 상징들이 있지만, 클린스만은 이적하는 팀마다 두자릿수 득점을 하며 수준급 활약을 했음에도 앞서 말한 토트넘에서도 1시즌, 분데스리가 우승과 더불어 UEFA 컵에서 시즌 15골을 몰아치며 우승시킨 바이에른 뮌헨에서도 활약 기간이 2시즌 남짓에 그치며 클럽 레벨 월드클래스라기보단 국가대표의 레전드라는 이미지가 더 강하기에 어쨌든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별로라는 것은 팩트이다.
FIFA 월드컵 우승과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을 모두 주전으로 달성해낸데다 월드컵 본선에서만 통산 11골로 레전드 반열에 오른 국대와 달리 클럽의 커리어는 준수하지만, 그래서 비교적 임팩트가 약하다. 클린스만의 커리어를 보면 슈투트가르트, AS 모나코, 토튼햄 핫스퍼, 삼프도리아 등 비인기 중하위권 팀에서 활동한 경력만 많다. 초창기 슈투트가르트 때의 경우도 보통 선수들은 시작은 중위권 혹은 하위권 팀에서 해도 경력이 쌓이면 리그 강팀에서 쭉 활동을 이어가지만, 클린스만은 전성기 때 인테르를 떠나 AS 모나코로, 바이에른 뮌헨을 떠나 토트넘 핫스퍼로 이적하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 때문에 우승 기록도 별로 없다. 또한 84-85 시즌 슈투트가르트에서 분데스리가 신인왕으로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득점왕은 88년 분데스리가에서 1번이 전부이다.
루디 푈러 이후엔 당대 독일 국가대표 내에서는 대체 불가능한 자원으로 여겨졌다. 당시 독일 축구계에서 올리버 비어호프와 더불어 유이한 공격수 자원이었다. 때문에 클린스만은 자신이 대표팀에서 대체 불가하다는 점을 잘 이용해 베르티 포크츠 감독에게 앙숙인 마테우스를 은퇴시키지 않으면 자신이 대표팀에 출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마티아스 자머로 대체 가능한 마테우스와 달리 클린스만은 대체 자원이 없었기에 포크츠 감독은 실제로 마테우스를 부상을 핑계로 대표팀에서 일시 하차시켰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마테우스는 격분했다. 마테우스를 하차시키자 여기서 그치지 않고 클린스만은 그 마테우스가 차던 주장 완장을 요구했고 그렇지 않으면 역시 출장하지 않겠다고 말했고, 이 역시 관철되었다.
94년 이후에 클린스만의 득점력이 높아졌다 해도 경기당 0.5골 정도로 스트라이커로서 나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뛰어나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활약이었다. 때문에 위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클린스만이 많이 득점하지 못해서 독일 대표팀이 암흑기에 빠졌다는 주장도 완전히 반박하기 어렵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공격수가 없던 독일에서 클린스만이 그 정도라도 준수하게 활약했기 때문에 독일이 폭망하지 않고 UEFA 유로 1996 우승을 하는 등 다름대로 체면은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암흑기에 클린스만이 메이저 대회 본선 토너먼트에서 큰 걸 잘 해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지역 예선에는 꾸역꾸역 넣어줬고, 클린스만이라도 없었으면 예선을 통과하여 본선 진출조차 장담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평가는 현지에서도 다소 엇갈리지만, 그래도 클린스만의 이미지도 좋은 편이고, 어쨌든 대표팀에서 오래 뛰었고, 누구나 그렇듯 시간이 지날수록 좋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편. 그래서 대표팀에서 은퇴한지 18년이 지난 2016년에서야 뒤늦게 독일 국가대표 명예 주장으로 꼽히기도 했다.
3. 감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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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은퇴 후 미국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내던 동안 독일 국가대표팀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클린스만의 은퇴 이후 벌어진 첫 국제대회인 유로 2000에서 1무 2패, 유로 2004에서는 2무 1패의 참담한 성적을 거두며 '녹슨 전차군단'이라는 오명의 정점을 찍고 있었던 것. 물론 그 중간에 치러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는 준우승이란 성과를 내었지만 이는 사실 독일의 조별리그와 토너먼트 상대로 걸린 팀이 죄다 독일보다 한수 아래였다는 운빨이 크게 작용한 점이 컸다.[20] 차기 월드컵 개최국이었던 독일이었기에 이런 부진에 위기감을 느낀 독일 축구협회는 루디 푈러가 사퇴하자 발빠르게 클린스만을 대표팀 감독에 선임한다. 6월 23일에 독일이 탈락했고, 클린스만이 감독직을 맡은 날은 7월 26일.
젊은 클린스만 감독은 일단 지휘봉을 잡자 과감한 개혁을 시작했는데, 당시 독일 축구계와 언론의 뭇매를 맞았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사건으로, 터줏대감이나 다름없던 올리버 칸을 내치고 옌스 레만을 주전 골키퍼로 내세운 것을 비롯해 잇달아 반감을 살만한 조치를 내린 것. 그 외에도 생뚱맞게 쏼라쏼라 미국인 체력코치를 데려오더니 선수들의 기초 체력을 따져가며 노땅들을 갈구지 않나, 게르만 정신을 부정하듯 당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소속이자 독일과 가나의 '''혼혈''' 공격수 다비드 오동코어를 전격적으로 대표팀에 발탁해 독일 축구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21] 순혈주의를 고집하던 당시의 독일 국가대표팀에 흑인 선수가 뛴다는 것 자체가 상상을 초월하는 화제거리이자 이슈였다.[22][23]
많은 논란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클린스만은 취임 직후 브라질과의 친선경기에서 무승부를 이끌어내며 분위기를 반전시키더니 이후 독일 대표팀의 뼈대를 구성할 필립 람, 루카스 포돌스키 등 신예들을 발굴해낸다. 독일의 암흑기를 가져온 원흉이었던 수비라인 또한 아르네 프리드리히 - 페어 메르테사커 - 크리스토프 메첼더 - 필립 람 포백으로 재건해내며 토너먼트를 치러낼 경쟁력을 확보했다. 기존의 미하엘 발락, 미로슬라프 클로제, 마누엘 노이빌레, 토르스텐 프링스 등과 클린스만 체제에서 새로 발굴된 멤버들이 결합한 신형 전차군단은 2006 FIFA 월드컵 독일 대회에서 내내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며 4강에 올랐고, 프링스의 공백으로 아쉬웠던 이탈리아전에서 연장 막판 골을 허용하며 아쉽게 탈락했으나 포르투갈을 3위 결정전에서 대파하며 3위를 차지한다. 비로서 클린스만은 감독으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제2의 축구 인생을 시작하나 싶었는데... "아 집에서 좀 쉴래"하더니 사임하고 또 훌쩍 떠나버렸다(...).
클린스만이 사임하자 독일축구협회는 곧바로 클린스만을 보좌했던 수석코치 요아힘 뢰프를 감독으로 선임하였는데, 클린스만의 공백은 당시에도 없을 거라는 의견이 많았다. 사실 클린스만은 대표팀 감독 취임 후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며 독일 대표팀의 개혁을 주도했으나 선수들의 사기와 팀 케미스트리, 트레이닝 방법 등에만 열중하였지 전술적인 부분은 뢰프 수석코치가 다 알아서 했기 때문이었다. 주제 무리뉴나 라파엘 베니테스, 펩 과르디올라처럼 자신이 모든 걸 맡아서 하는 감독도 있는가 하면 알렉스 퍼거슨이나 프랑크 레이카르트처럼 전술적인 부분은 수석코치에게 상당 부분 일임하는 감독도 있는데 클린스만의 경우 그런 부분은 전부 뢰프 수석코치에게 맡기는 편이었다. 필립 람의 경우, 국가대표와 FC 바이에른 뮌헨 감독으로 클린스만을 겪어봤지만 클린스만이 하는 말이라곤 "넌 골을 넣어야 한다. 이길 수 있다." 따위의 사기 진작밖에 없었다고 한다.
3.2. FC 바이에른 뮌헨
독일 대표팀 감독직 사임 후 2년 뒤인 2008년 FC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바이에른 뮌헨은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강호의 모습이라기보다는 한때 잘나갔던 구단 중 하나로 추락하고 있었는데, 독일 대표팀의 개혁을 이끈 클린스만에게 이번에는 바이에른 뮌헨 개혁의 키를 맡긴 셈. 트레이닝에는 큰 관심을 보여 FC 바이에른 뮌헨 감독 부임시 데려온 미국인 체력 코치만 무려 4명으로 전술적인 모습보다는 트레이닝 방법에 열중했다. 이것은 클린스만의 평소 전술 철학과 맞닿아 있는데 클린스만은 "전술의 발전은 더 이상 없고 앞으로 트레이닝 방법이 성과를 가를 것이다."라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바이에른 뮌헨의 전술은 라인을 적당히 내린 뒤 강력한 압박을 시도해서 볼을 탈취한 뒤 그야말로 한 방의 패스로 승부를 결정짓는 전술이었다. 하지만 이런 전술은 오트마어 히츠펠트의 후반부, 그리고 펠릭스 마가트 재임 시절에 한계를 드러냈다. 바이에른 뮌헨 수뇌부는 이런 팀을 개혁해주길 바랬으나... 클린스만이 보여준 건 그저 공격 라인만 높였을 뿐 세부 전술은 오트마어 히츠펠트와 펠릭스 마가트의 전술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2008-09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8강전에서 FC 바르셀로나와의 원정경기에서 0:4 완패를 당하며 탈락했고 동시에 리그 에서도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장담하지 못하는 상태까지 오자 부임 1년도 안 되어 해고 당했다. 특히 리그에서 패배할 때마다 몇 년만에 패배, 몇십년만에 패배 등 역사적인 기록들을 새로 쓰며 국내 바이언 팬들에게 "역사스만"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다만, 성적 뿐만 아니라 FC 바이에른 뮌헨 전통의 훈련과 팀 세션을 개혁하면서 상층부와의 의견 충돌도 한 몫 했다.
사실 나중에 일부 언론에 흘러나온 얘기에서 클린스만은 선수단을 장악하는데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미 현역 시절에도 선수들이 클린스만보다 마테우스를 따르는 모습을 보여서 리더쉽은 별로라는 평을 받았었는데, 바이에른 뮌헨 감독 시절에도 자기 스타일의 방식을 선수들에게 너무 강권하다가 반발이 상당했다는 후문이다. 또 집에 가지 말고 다같이 식사를 하자는 둥 퇴근할 때 회식 가자고 하는 대한민국 꼰대 상사의 전형을 보인 것도 선수들의 불만을 상당히 샀다고 한다.
3.3.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FC 바이에른 뮌헨을 떠나고 휴식을 취하던 클린스만은 2010년 10월 메이저 리그 사커 팀 토론토 FC 자문역으로 취임했고 9개월 뒤인 2011년 7월 30일,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취임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캘리포니아로 이민을 간 관계로 미국 생활이 길었기 때문에 미국 축구계 사정에도 밝은 데다가, 감독으로서 월드컵 3위를 차지한 경력까지 있는 만큼 미국은 꺼낼 수 있는 최상의 카드를 꺼낸 셈이다. 미국은 이미 6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에 16강까지 달성했는데, 그 이상을 노린다는 강력한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2011년 클린스만 감독 취임 후 23승 6무 8패를 기록하며 승승장구 하고 있다. 더군다나 미국을 꺾은 그 한 팀은 바로 브라질(!). 또한 이탈리아를 상대로 1:0으로 이기기까지 했고 2013 북중미 골드컵에서 파나마를 상대로 우승을 차지했다.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조별리그 추첨에서는 영 지못미스러우면서도 묘한 대진이 걸렸다. 자기 입장에서 조 편성 힘들게 나오는거야 북중미 팀들이 늘 겪는 숙명이니 그렇다 쳐도, 첫 상대 가나를 제외한 다른 유럽 두 팀이 '''독일'''과 '''포르투갈.''' Aㅏ... 게다가 독일은 자신이 선수로서 족적을 남긴 조국임은 물론 2006 FIFA 월드컵 독일 대회 4강을 이끌었을 때 수석코치로 자신과 함께 일하고 후임 감독까지 된 요아힘 뢰프가 여전히 감독으로 있어서 묘한 대진이 연출되었다. 독일과 포르투갈이야 누구나 인정하는 강팀이고 가나도 무시 못하는 게 아프리카에서 축구 강국인데다가 2006년과 2010년에 미국을 탈락시킨 팀이다. 만약에 미국이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성공한다면 미국 축구팬들 사이에서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 경기 가나전에서 조지 알티도어의 초반 햄스트링 부상이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버저비터 골로 2:1 승리를 거두며 지난 2번의 월드컵에서 당한 빚을 갚았다. 두 번째 경기 포르투갈전에서는 이른 시간 선취골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반전에 2골을 몰아넣으며 역전승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종료 직전 동점골을 먹히면서 아깝게 2:2 무승부. 조국인 독일과의 3차전에서는 0:1으로 패배했으나 '''포르투갈과의 골득실 싸움에서 이기며 2위로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16강전 벨기에를 상대로 1:2 패배를 당해 8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조별 본선과 16강에서 보여준 끈끈한 조직력과 물러서지 않는 화끈한 공격력에 사람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클린스만은 지도자로서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미국 내에서도 월드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축구의 인기가 높아지는 등 클린스만의 대표팀 감독 임명은 성공적으로 돌아간 셈. '''축구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우고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라 할 수 있다'''. 기사.
2015년 2월 아스톤 빌라 FC가 강등권에 쳐지게 되자 2월 11일 경질된 폴 램버트의 후임 감독 물망으로 오르기도 했지만, 미국축구협회에서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대회까지 클린스만 감독과 계약을 연장했기 때문에 그가 아스톤 빌라의 지휘봉을 잡을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결국 아스톤 빌라의 지휘봉은 팀 셔우드 감독이 가져갔다.
2015년 골드컵에 앞서 독일과 네덜란드를 상대로 한 친선경기에서 완승을 거두어 2013 골드컵에 이어 2회 연속 우승 확률이 상당히 높아졌으나 되려 4강에서 자메이카에게 3, 4위전에서 파나마에게 패배하여 4위에 머물렀다.
클린스만의 미국 감독직 전망은 마냥 밝은 것만은 아닌데, 클린스만을 비판하는 쪽에서는 2014 브라질 월드컵 16강 성과는 과대평가 받았다고 주장한다. 사실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1994 미국 월드컵과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16강을,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8강까지 진출한 적이 있으므로 2014 브라질 월드컵 16강은 큰 성적도 아니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2015 골드컵에서는 한수 아래라고 평가받은 자메이카와 파나마에게 무기력하게 패배했다는 점, 그리고 2017 컨페더레이션스컵 출전권이 달린 2015 CONCACAF CUP[24] 에서 2:3으로 패배했을 뿐더러 압도적인 점유율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지적한다.
게다가 가끔 미국 축구 자체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며 유럽에 진출했다가 미국으로 돌아온 마이클 브래들리, 클린트 뎀프시 등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선수 선발에 있어서도 미국 출신 선수보다 유럽에서 활동은 하지만 유럽에서 외면받는 미국계 선수들을 적극 등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미국축구협회와 마찰까지 빚고 있다.[25] 그리고 미국 축구 올림픽 대표팀의 경우도 기술위원장의 권한을 내세워 잘 하고 있는 전임 감독을 갑자기 해임하고 자신의 수석코치를 감독으로 발탁시켰으나, 오히려 2016 리우 올림픽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1, 2부 리그는 뿐만 아니라 대학 리그 같은 아마추어 리그까지 하나하나 직접 관람하고 2부 리그 격인 NASL(북미 축구 리그)에서 활동 중인 선수나 대학 축구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를 적극 발탁하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나 이런 선수들에게까지 미국 메이저 리그 사커가 아닌 유럽 리그 진출을 적극 권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미국 축구협회와 MLS 사무국과 마찰을 빚고 있다. 또한, 코파 아메리카 센테나리오에서도 미국을 4강까지 진출시키는 업적을 이뤄내긴 했지만, 아르헨티나와의 4강전에서 유효 슈팅을 한개도 기록하지 못하고 0:4로 완패해서 클린스만의 한계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 이후로 미국 U-23 대표팀의 리우 올림픽 진출 실패의 원인이 된 자신의 수석코치의 올림픽 감독 낙하산,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독단적인 성격, 그리고 좋게 봐도 평균 수준인 경기내 전술 운영 능력 등 단점들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선수들의 통솔력을 상실했으며, 이는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최악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CONCACAF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그야말로 오합지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숙적 멕시코를 상대로 전승을 거두고 있었던 콜럼버스에서 1:2로 패배하고, 코스타리카에게 0:4로 패배한 것을 계기로 2016년 11월 21일 자로 미국 축구협회에 의해 경질되었다. 후임으로는 예전에 미국 대표팀을 맏은 적 있는 브루스 아레나 감독이 거론되었고, 22일 자로 브루스 아레나 감독이 선임 되었다. 기사.
그러나 결국 미국은 러시아에 가지 못하였다. 클린스만을 포함해 브루스 아레나도 엄청나게 욕을 먹었지만, 결국은 유럽에서 뛰는 것이 국가대표팀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클린스만의 의견과 방식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크리스천 풀리식를 포함해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이 고군분투할 때 정작 미국에서 뛰던 조지 알티도어 - 마이클 브래들리 - 클린트 뎀프시는 영향을 많이 끼치지 못했다.[26] 아무리 유능한 선수들도 큰 무대가 아닌 작은 무대에서 뛴다면 기량이 떨어진다는 것을 미국인들도 깨달았고, 월드컵 진출 실패 이후로 미국 선수들을 유럽으로 진출시키는 방법을 모색 중이며, 감독대행 상태에서 젊은 유럽파 중심의 1.5군으로 펼친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직전 친선 경기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비기는 등 예상했던 것 보다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클린스만 이후 미국 국가대표팀의 행보에 긍정적인 신호가 켜졌다.
2018 러시아 월드컵 이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후임 감독 후보로 낙점되었으며 조만간 협상에 돌입할 것이라는 기사가 떴다. 기사. 연봉은 2억 6000만 엔 선(26억 원)으로 결정이 되었고, 일본축구협회의 제안에 대해 클린스만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기사. 하지만 클린스만은 곧 일본 대표팀 감독 취임을 전면 부정했다. 기사.
러시아 월드컵 기간 중 클린스만과 김판곤 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감독선임위원장이 모스크바에서 만남을 가졌고 이때 클린스만으로부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에 대한 거절 의사를 들었다는 내용이 2018년 7월 19일, 한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기사. 같은 날 오후 익명의 관계자는 "대한축구협회가 클린스만과 만난 것이 사실"이라면서 지난해에 울리 슈틸리케가 경질되었을 시점에는 클린스만 측에서 "연봉 300만 달러(34억 원)에 대표팀 감독을 맡을 의향이 있다"고 선제안을 했지만 대한축구협회에서 클린스만과의 협상이 실패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공식적인 접촉을 안 했다고 주장했다. 기사. 그 외 내용에 대해서는 신태용호#s-9 문서 참조.
최근 마우리시오 포체티노의 뒤를 이어 토트넘의 차기 감독으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클린스만은 헤르타 BSC의 이사회 회원에 선임되었고, 2019년 11월 27일, 안테 초비치가 감독직에서 계약해지되면서 헤르타 BSC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 이보다 앞서서 2019년 10월에는 에콰도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아마도 흐지부지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3.4. 헤르타 BSC
분데스판 런동님. 헤르타의 지휘봉을 잡은 첫 경기는 13라운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전. 시작 15분과 17분에 제이든 산초와 토르강 아자르에게 얻어맞으며 2대0이 되었지만 블라디미르 다리다의 절묘한 방향전환으로 2대1로 따라붙었다. 경기는 그대로 2대1 패.
이후 4경기를 2승 2무로 마무리하며 전반기를 5승 4무 8패 12위로 마감했다.
그러던 1월, 감독 라이선스가 만료되어 감독으로서 벤치에 앉을 수 없다는 기사가 나왔다.링크 정확하게는 클린스만의 감독 라이선스 서류가 미국시절 살던 캘리포니아 자택에 있다는 것인데 현재 캘리포니아 자택은 텅빈 아무도 살지않는 집이라 그것을 찾아줄 사람도 또 찾아도 보내줄 사람이 없다. 클린스만은 캘리포니아에서 반드시 찾겠다고 밝혔다.링크 경기 몇 시간전 독일 축구 협회에서는 클린스만의 지도자 라이선스를 인정했다고 발표했다. 클린스만이 제출한 일부 서류를 인정하였으며 부족한 부분은 미국 축구 협회에 문의를 요청했다고 한다.#
2020년 2월 11일 헤르타 BSC 감독직에서 전격 사임했다. # '''클린스만의 사임은 자신의 개인 페이스북 라이브를 통해 예정에 없이 발표되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임은 커다란 충격을 남겼다. 헤르타 베를린 구단은 완전히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난리가 났다고 한다. 클린스만은 구단 수뇌진에게 아무런 언질도 없이 SNS를 통해 사임을 발표했고, 구단 관계자들은 이후 뉴스를 보고 그의 사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현지 언론은 무책임한 사임이라며 맹비난했다. 클린스만은 원래 감독직을 수행한 후 구단 이사회에서 계속 일할 예정이었지만, 며칠 후 구단은 클린스만에게 신뢰감을 잃었다며 이사회 자리에서도 퇴출시키게 되었음을 언론에 발표했다. 이후 구단 수뇌부에게 후회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복귀를 거부당했다.
겨울 이적시장에서 80m을 사용해놓고 단 2개월만에 사임한 클린스만에 대해 팬들은 엄청나게 분노하고 있다.
4. 기록
4.1. 득점 기록
4.1.1. 클럽
4.1.2. 국가대표
4.2. 대회 기록
4.2.1. 선수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89~1992)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989
- UEFA컵: 1990-91
- FC 바이에른 뮌헨 (1995~1997)
4.2.2. 감독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2004~2006)
- FIFA 월드컵 3위: 2006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3위: 2005
-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2011~2016)
- CONCACAF 골드컵: 2013
4.3. 개인 수상
4.3.1. 선수
- 발롱도르 2위: 1995
- FIFA 올해의 선수 3위: 1995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90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96
- UEFA컵 득점왕: 1995-96
- 분데스리가 올해의 영플레이어: 1984-85
- 분데스리가 득점왕: 1987-88
-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1987-88
-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1988, 1994
- FWA 올해의 선수: 1994-95
- PFA 올해의 팀: 1994-95
- US컵 득점왕: 1993
- IFFHS 세계 최고 득점자: 1995
- FIFA 100: 2004
- FIFA XI: 1996, 1999
- 토트넘 올해의 선수: 1994
- ESM 올해의 팀: 1994-95
- 독일 올해의 골: 1987
4.3.2. 감독
- 독일 올해의 축구 감독: 2006
- CONCACAF 올해의 감독: 2013
5. 여담
- 현행 독일어 표기법을 따르면 위르겐 클린스만이라 적는데, 1990년대 현역 선수로 뛸 당시엔 국내 팬들에게 유르겐 클린스만으로 통했다. 지금도 유르겐 클린스만으로 기억하는 팬이 많으며, 사실 어지간한 축구 매니아가 아닌 이상 그냥 클린스만이라고 안다.[28] 그도 그럴 것이 1994 FIFA 월드컵 미국 예선 3차전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환상적인 터닝 발리 슛을 날려 전국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장본인이니... 그 날 2골을 기록했다. 유르겐이든 위르겐이든 하여간 클린스만.[29]
- 같은 시대 독일을 대표하는 또 다른 선수이자, 함께 힘을 합쳐 이탈리아 월드컵 대회 우승을 일궈내고 인터 밀란에서도 같이 한솥밥을 먹은 철인 로타어 마테우스와 심각한 불화로 유명하다. UEFA 유로 1996 즈음해서 둘의 불화는 대단히 심각해졌고[30] 결국 마테우스가 대표팀에서 하차, 클린스만은 주장으로 팀을 이끌어 결국 대회에서 우승한다. 이는 당시 스위퍼였던 마테우스의 포지션엔 마티아스 자머라는 당대 최고의 선수[31] 가 버티고 있던데 반해 공격진에는 후보였던 올리버 비어호프는 차치하고 노장 슈테판 쿤츠나 햇병아리 마르코 보데를 제외하면 선택지가 전무한 상황에 기인한다. 늘 주장이었던 마테우스에게 완장을 물려받은 클린스만은 98년 월드컵도 주장으로 참가하며 이때 부상으로 잠머가 엔트리 아웃되며 대체선수로 다름아닌 마테우스가 들어와 어색한 상황이 연출된다.
- 홍명보는 런던 올림픽 동메달 이후 인터뷰에서, 현역에서 상대해 본 공격수 중 가장 어려웠던 선수로 위르겐 클린스만을 꼽았다. 브라질의 호나우두도 잘하긴 했지만, 클린스만만큼은 아니었다고...
- 부친인 지크프리트 클린스만(Siegfried Klinnsmann)이 제빵사라서, 지금까지도 언론에서 종종 "빵집 아들"로 수식된다. 지금도 클린스만의 가족들이 슈투트가르트의 보트낭(botnang)에 빵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본인도 선수 시절 초창기에 제빵사 자격증을 취득한 상태.
- 20대 이후 미국에 정착했고 이후 유럽에서 자리를 얻었을 때도 집은 계속 미국에 있었다. 때문에 독일인 치고는 영어 발음이 매우 부드럽다. 독일인들이 영어를 구사할 경우 대개 독일어 특유의 딱딱한 억양이 섞여 있는 탓에 영어권에서는 이를 유머 소재로 쓸 정도인데[32] , 클린스만의 영어 인터뷰를 들어보면 미국식 억양에 제법 가까운 편.
- 90년대부터 미국에 정착했기 때문에 독일 대표팀 감독을 맡을 때도 자기 본위의 사고방식을 가진 클린스만이 미국에서 출퇴근 내지는 원격 재택 근무하는게 아니냐는 우려를 마테우스를 비롯한 일부 언론이 제기했고, 실제로 감독이 되고 났을 때 아주 틀린 예상은 아니게 되었다.
- 2004년 12월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열린 친선경기에서 올리버 칸까지 출전한 독일을 대한민국이 이동국의 발리슛[33] 으로 3:1로 완파하며 클린스만 감독까지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 아들인 조너선 클린스만이 2017 FIFA U-20 월드컵 코리아에 미국 대표로 출전했다. 아버지는 레전드급 스트라이커였는데, 아들의 포지션은 골키퍼라고... 아들은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본인은 국적 취득까지는 가지 않고 영주권만 딴 것으로 보인다. 모처럼 대한민국에 와서 아들의 경기를 보았고, 조너선은 대회 후 헤르타 BSC와 계약했다.
-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자국팀이 카잔의 치욕을 당하고 조별리그 꼴찌로 광탈하자 쓴소리를 날렸다. #
[1] 2006년 수훈, 독일 공로십자장 Verdienstkreuz am Bande[2] 스트라이커[3] 독일 대표팀 역대 출장 6위, 역대 득점 4위.[4] '서독' 대표팀으로의 마지막 대회. 1990년 동서독이 통일하여 이후 대회는 독일로 참가한다.[5] 독일 국적으론 미로슬라프 클로제(16골), 게르트 뮐러(14골)에 이은 3위. 전체 선수로는 6위에 해당.[6] 특히 그가 득점왕으로 등극한 95-96 시즌 UEFA컵 15골은 유로파리그로 개편된 뒤 라다멜 팔카오가 17골로 기록을 깰때까지 UEFA컵 단일 시즌 최다골 기록이었다.[7] 이때의 활약으로 클린스만은 토트넘에서 뛴 시즌이 채 2년이 안되는 짧은기간임에도 팀 공식 레전드로 추앙받게 된다. 98년에 강등 위기에 처한 토트넘에 임대신분으로 복귀해 강등권 탈출을 결정짓는 윔블던전에서 4골을 폭발시키며 6-2로 대승, 팀을 끝내 잔류시키며 강한 인상을 남긴것도 유명한 일화이다.[8] 이미 90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헐리웃 액션성격이 짙은 다이빙으로 아르헨티나 수비수를 퇴장시킨 전력으로도 유명. 정작 저 별명을 전해들은 클린스만은 크게 개의치 않아 했고, 토트넘 시절 '데뷔전 데뷔골' 세러모니부터 시작해 골을 넣을 때마다 팀원들과 함께 다이빙을 했다. 기자 회견에서는 "런던에 다이빙을 배우기 좋은 곳이 있나?'''라는 발언까지 했다. #[9] 데뷔한 VfB 슈투트가르트를 제외하면 한팀에 3년이상 머무른적이 없으며 1년만 뛰고 이적한것도 수차례. 감독으로써도 76일만에 헤르타 감독직에서 운영진과의 불화를 이유로 사임하여 팬들에게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다. 오랫동안 팀을 맡기기로 유명한 독일 국가대표팀 감독직도 3년만에 스스로 사임했다. 선수로써의 뛰어난 업적과 위상에도 커리어에 묘한 허전함이 느껴지는것도 이 때문이라 할수 있다.[10] 로마에게 합계 2-1로 우승[11] 영국의 스트라이커. 토트넘에서 일본으로 가기 전 3년간 있었다. 1986년 월드컵 득점왕. 그보단 "축구란 단순하다. 22명이 공을 쫓아 90분간 뛰다가 언제나 독일이 이기는 게임이다."이란 말로 유명하다.[12] 88 서울 올림픽 축구종목은 브라질의 호마리우, 베베투 등 스타급 선수들이 대거 출전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승은 동구권 최강이던 소련.[13] 사실 할리우드 액션이었다. 그런데 연기를 너무나도 잘해서 속아넘어간 심판이 몬손에게 다이렉트 퇴장을 선언했다.[14] 원래는 유고가 출전해야 했으나 크로아티아와의 내전으로 출전하지 못해, 덴마크가 '대타' 출전. 덴마크는 대타 출전한 대회에서 우승하는 기적을 썼다.[15] 독일은 리그 시즌이 가을 ~ 겨울인데다 유럽의 여름은 사막과 같이 건조하기 때문에 동아시아와 미국의 밀림스러운 폭염과는 다르다.[16] 다만, 이때 전술은 요아힘 뢰프가 다 맡았다고 한다.[17] 일례로 1998년 월드컵 이란전에서 같은 팀의 슛이 골포스트를 맞고 나오자 반사적으로 다이빙 헤딩한 적이 있는데,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정말이지 찰나의 순간에 이뤄진 일이라 당시 축구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천히 돌려보면, 골 포스트 맞고 튕겨나오는 공을, 쇄도하던 중에 만나, 왼 발로 왼쪽으로 점프한, 다이빙헤딩..[18] 실제로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소위 '''압박축구'''가 대세였는데, 말이 압박이지, 공격수의 무릎을 작살낸 수비수들에게 영웅급의 칭찬을 하던 시기였다. 거기에 더불어 득점력도 빈곤하여, 20골 언저리만 득점해도 득점왕에 오를 수 있는 시기였다.[19] '''Diver'라는 비판을 받은 뒤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데뷔전에서 데뷔골 작렬후 '다이빙' 세러모니 중인 클린스만. 그의 선수시절 최전성기의 서막이었다.'''[20] 16강 파라과이 1:0 승리, 8강 미국 1:0 승리, 4강 한국 1:0 승리.[21] 당시 오동코어는 대표팀 경력이 '''전무'''한 상태여서 그 여파가 더 컸다.[22] 사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당시 루디 푈러 감독이 가나에서 '''귀화'''한 흑인 공격수 게랄드 아사모아를 발탁하긴 했지만, 클린스만이 벌인 잇단 개혁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주목을 받았다.[23] 앞서 언급된 다비드 오동코어나 게랄드 아사모아 말고도 21세기 들어서 폴란드계 출신의 미로슬라프 클로제, 루카스 포돌스키, 표트르 트로쵸프스키나 터키계인 메수트 외질 등 이민자 2세 출신 선수들이 독일 대표팀에 즐비한 만큼 이제는 대표팀 순혈주의를 완전히 버렸다고 할 수 있다.[24] 2013 골드컵 우승팀 미국과 2015 골드컵 우승팀 멕시코의 단판 승부로, 승자가 2017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러시아에 진출.[25] 아들 조너선 클린스만도 미국 대표팀을 선택했다.[26] 다만, 크리스천 풀리식이 피지컬로 캐리한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실제로, 클린스만이 해임되기 전 경기들과 브루스 아레나 감독 체제에서 무기력하게 비기거나 패배한 경기를 보면 풀리식을 제외한 미국의 유럽파 선수들도 알티도어 - 브래들리 - 뎀프시만큼이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27]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의 하위리그[28] 굳이 옛 한글로 쓰면 ㅇㆌ르겐 클린스만이 될 것이다.[29]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2004년 12월 19일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독일의 A매치에서 독일이 대한민국에게 최초로 졌을 때의 감독이 클린스만이었다. 스코어는 3:1로 대한민국의 완벽했던 승리. 대한민국의 득점은 김동진, 이동국, 조재진이 했다. 독일은 전반에 발락이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만들었다. 보러가기.[30] 여러가지 설이 나무하나 가장 유명한 것은 클린스만의 득점 여부를 놓고 마테우스가 베팅까지 하며 조롱했다는 걸 클린스만이 뒤늦게 알아차렸다는 점이다.[31] 해당 유로 96 최고활약으로 결국 베켄바워에 이어 2번째로 수비수 발롱도르 수상.[32] 대표적인 예로 멀리가지 않고 팀 동료였던 마테우스의 영어 인터뷰를 살펴보면 확실히 독일인 특유의 억양이 섞여있음을 알 수 있다.[33] 이 슛 동영상으로 보면 알지만, 위에 클린스만의 터닝슛 만큼이나 걸작이다.
분류
- 1964년 출생
- 독일의 축구선수
- 독일의 축구감독
- 공격수
- 1982년 데뷔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슈투트가르트 키커스/은퇴, 이적
- VfB 슈투트가르트/은퇴, 이적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은퇴, 이적
- AS 모나코/은퇴, 이적
- 토트넘 홋스퍼 FC/은퇴, 이적
- FC 바이에른 뮌헨/은퇴, 이적
- UC 삼프도리아/은퇴, 이적
- 독일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
- 1994 FIFA 월드컵 미국 참가 선수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88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92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96 참가 선수
-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 독일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독일의 올림픽 메달리스트
- 올림픽 축구 메달리스트
- FC 바이에른 뮌헨/역대 감독
- 2006 FIFA 월드컵 독일 참가 감독
-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참가 감독
- 2005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독일 참가 감독
- 코파 아메리카 센테나리오 참가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