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다 소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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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田 惣角[1]
1859년 11월 4일[2] ~ 1943년 4월 25일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


대동류 합기유술의 증흥조다. 1859년에 태어난 일본의 무술가로 무호는 源正義다.
합기관련 무술의 시조이자, 일본 근대무술의 신화와 같은 인물이다.

2. 생애


아이즈번사였던 다케다 소키치(武田惣吉)의 차남으로 아이즈번 에서 태어났다.[3] 스모의 역사이자, 검술에 능했던 다케다 소키치에게 스모[4], 유술, 보장원류창술 등을 배웠고, 그 재능이 상당하여 '''아이즈의 작은 텐구'''로 불렸다.
13세 때 에도로 상경하여 아버지의 친우인 사카키바라 켄키치(榊原鍵吉)로부터 카시마신전직진영류검술[5]을 배웠고, 갑주를 들고 여러 도장을 다니며 타 유파와 대련을 거듭하였고, 덕분에 다양한 병장기 용법을 배웠다.[6] 이후 서남전쟁에서 사이고 다카모리 측으로서 참전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7] 전쟁 후 무사수행을 하였다.
여비는 주로 현지조달로 마련했다. 타류와의 대련이나 문하생을 모집하여 교습료를 받거나 도장에 직접 방문하여 특강하고 전별금을 받는 식이었는데[8], 상상하기 힘든 거금을 모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1879년에는 쿠마모토성의 창술 도장에서 식객이 되어 창술 교수를 하였는데, 목검으로 1대 3진창(真槍)[9] 대련을 하던 도중, 사고로 앞니에 창의 일부분이 박힌다. 이틀 정도 덜렁거리는 이빨을 달고 다니다, 결국 손으로 뽑아 버리고 여생을 앞니 없이 살았다.
하루는 여관에서 투검으로 호객을 하던 중, 반신불수 앉은뱅이가 '''"그런 날붙이가 나무기둥에 안 박힐 리 있냐?"''' 하며 동전으로 기둥에 연달아 박아내자, 놀라 그에게 3일간 매달려 배움을 청했다고 한다. 이때 교만한 자신을 돌아보고 심신의 단련이 별개가 아님을 깨닫고, 종교, 특히 밀교에 심취한다. 이때부터 각지의 밀교 사찰이나 영산에 방문하여 틈틈히 수련하였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장녀,장남을 얻었으며,[10] 사이고 다노모(西郷頼母)로부터 '''검술의 시대가 끝났으니 유술을 널리 전파하라'''는 가르침과, 다케다(武田) 가문의 비전무술 대동류 합기유술(大東流合氣柔術)을 전부 전수받는다.[11][12]이후에 각지를 유랑하며 영명록과 사례록 등을 꼼꼼하게 기록하며 대동류를 널리 전파한다.
실전성을 증명하여 주목을 받으면서도 타류와의 대련 또한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임하면서, 일본 근대무술사의 신화로서 자리매김한다.
말년에 제자와 재혼하고 다케다 토키무네(武田時宗)[13]를 비롯한 4남 3녀를 얻었다. 또한 3남 토키무네를 장남으로 입적하고 종가(宗家)의 대표로 인정한다. 1943년 향년 만 83세 나이로 아오모리현에서 객사했다. 홋카이도 아바시리시 조동종 사찰 호류사(法竜寺)에 있는 다케다 가족묘에 안장되었다.

3. 여담


나이, 성별, 출신 등에 상관없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대동류를 전파하였다. 그러나 팔광류 유술의 개조 오쿠야마 류호에 따르면 사례금에 따라서 가르침에 차별을 두었다고 한다. [14] 특히 합기가 들어간 유술과 그렇지 않은 유술을 양분하여 가르쳐서,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였다. [15]
학문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서당에 가는 것을 꺼렸다. '''"나를 위해 대필해 줄 사람들을 거느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하자, 소키치로부터 '''"누가 너를 위해 대필해 주겠냐?!"'''며 역정을 들었다고. 하지만 후일 다케다 소가쿠를 위해 군 고위 관료, 판사, 경찰서장, 신문사 기자[16]들이 그에 대필을 하고자 줄을 섰다. 또한 직제자들에 따르면 문맹은 아니었으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그에 반해 쉽게 질리는 편이었다.
성격은 괄괄하고 의심이 많았다. 노년에도 자주 젊은이들의 사지를 부러뜨리고 집어던지는가 하면, 상대가 대접하는 음식도 먼저 먹지 않고 독이 들었는지 확인코자 기다렸다고 한다.

[1] 국립국어원의 일본어 표기를 고려하여 다케다 소가쿠로 기술한다.[2] 당시 일본의 연호로는 안세이(安政) 6년. 음력 10월 10일이 생일이었다. 11월 4일은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3] 지금의 후쿠시마현이다.[4] 역사로서는 요코즈나(横綱) 다음의 오제키(大関)를 달성했다. 다케다 소가쿠는 스모를 굉장히 좋아해서, 대동류에 스모의 기술을 차용했다.[5] 다만, 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도 있다.[6] 수리검의 경우에는 후술할 사건 이후, 특별하게 가르치지는 않았다.[7] 형이 요절하여 가문을 이어야 하는 사정도 있었다.[8] 보통,2엔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9] 베가본드에서 호조인 인슌이 사용하는 그 창이다.[10] 생활비를 주지않아, 가족들이 꽤 힘들게 살았다는 후문이 있다.[11] 현대 사가들에 따르면, 사이고 다노모로부터는 아이즈번의 오토메유술(御留柔術)을 전수받았다고 추정한다. 그리하여 만든 무술이 대동류 합기유술 이라는 것. 특히 직제자였던 사가와 유키요시의 증언으로, 다케다 소가쿠 증흥조의 기술을 받은 이가 ‘기존의 유술과는 다르다.’고 하자, 순간 '''호시나(保科)씨에게서 배운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호시나는 사이고 다노모가 메이지 유신 이후에 개명한 성이다. 다만 사가와 유키요시는 사이고 다노모의 무력이 굉장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대동류 합기유술은 어디까지나 다케다 소가쿠 증흥조가 이룩한 쾌거라고 선을 그었다. 그 증거로, 다케다 소가쿠 이전에는 대동류에 관한 기록이 없다. 게다가 한동안은 무명(武名)에 신경쓰지 않다가 '''야마토류'''(大和流)라고 일컬었다는 설도 있다. 大和와 大東는 발음이 같을 수 없으니, 요시다 코타로가 대동류 유술(大東流柔術)로 통일하자고 제안하였다.[12] 또한 다케다 소가쿠는 직접 자신 이외에 "호시나 씨의 제자가 한 명 더 있다." 하였다. 이 나머지 한 명은 사이고 다노모의 양자 사이고 시로(西郷四郎)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사이고 시로는 대동류를 배운 적이 없다고 하며, 오히려 유도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이들과 관련된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더 있다. 강도관 유술이 널리 알려지는데 큰 활약을 했던 인물이 사이고 시로이기 때문이다. 유도가 유술계 공공의 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위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사이고 시로의 공도 지대하였다. 전국의 이름난 유술가들을 야마아라시(山嵐)와 같은 술기로 제압한 덕분에 유도는 단 시일 내에 정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13] 대동류 합기유술의 종가.[14] 무사에게 문외불출의 기술은 전장터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이를 전수한다는 것은 (만에 하나) 후일 적이 될 수도 있는 '''타인'''에게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원천을 알려주는 셈이 된다.[15] 현 콘도 사범이 보인 대동류유술과 대동류합기유술만 보더라도, 저것이 대체 무슨 차이인가 싶을 만큼 알기가 힘들다.[16] 특히, 히사 타쿠마(久琢磨)의 아사히신문사에는 무술 조교로서 자주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