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모

 




相撲(すもう[1]
1. 개요
2. 역사
3. 규칙
4. 일문과 도장
5. 계급과 구조
5.1. 요코즈나(横綱)
5.2. 오제키(大関)
5.3. 세키와케(関脇)
5.4. 고무스비(小結)
5.5. 마에가시라(前頭)
5.6. 주료(十両)
5.7. 마쿠시타(幕下) 이하
6. 선수 생활
7. 심판
8. 경기
9. 해외에서의 인기
10. 수입 구조
11. 실상
12. 사건사고
12.2. 2017년 요코즈나 하루마후지 폭행 & 은퇴 사건
12.3. 2018년 도효 여성 출입 금지 논란
12.4. 2018년 어린이 시범 경기 여아 차별 논란
13. 그 외
14. 관련 인물
15. 관련 캐릭터
16. 관련 문서

[image]
2003년 5월 바쇼(場所) 13일째 무스비(結び)2번
카이오우(魁皇, 좌)가 히키오토시(引き落とし)로 치요타이카이(千代大海, 우)를 이기는 장면[2]

1. 개요


두 사람의 힘을 겨루는 일본 전통격투기. 일본의 국기(國技)이다.
일본어로 스모 선수를 리키시(力士, 한국 독음으로는 '역사')라고 한다. 한때는 국민 스포츠였으나 2000년대에 들어선 이후 내부 파벌 등으로 인하여 멸망 직전의 상황까지 몰린 한국의 씨름과는 다르게, 일본에서는 축구, 야구와 함께 3대 스포츠로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보는 스포츠로서 뿐만 아니라 학교나 마을에서 스모 대회를 여는 등의 '''하는 스포츠'''로서의 입지도 나쁘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인기에 비해서 유독 일반인의 수련 인구가 적은 종목이기도 하다. 일시적인 이벤트로 즐기는 경우는 많아도, 취미나 아마추어 종목으로 일상에서 꾸준히 수련하는 사람은 적다. 우선 경기할 때의 복장부터 거의 벌거벗은 수준이라 많이들 벗기를 꺼리며, 리키시의 몸도 다른 스포츠 선수에 비해 일반인과 괴리가 크다.[3] 또, 멋진 도복을 입고 경쾌하고 날렵한 동작으로 상대를 던져대고 타격하는 유도·공수도·검도·아이키도 등의 다른 일본 무도와 비교해서 육중한 무게의 몸으로 무대뽀로 밀어내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동작이 '''멋있지 않다'''는 인식도 있어서 더욱 스모 입문에 거부감을 가지게 된다. 일부에서는 복장이나 룰 등을 수정해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아마추어 스모를 보급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효과는…
일본 만화에선 스모 선수들이 왠지 무지 셀 것처럼 나오지만 격투계의 현실은 아케보노 타로만 봐도…물론 료토 마치다처럼 스모 기술로 격투기 챔피언을 먹은 인물이 있기는 한데, 스모 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베이스는 어디까지나 쇼토칸 가라테고 실제로도 그렇게 표방한다.
다만 스모선수만 격투 판에서 약한 건 아니고, 어떤 종목이라도 딱 한 가지 무술만 익히고 적응훈련도 없이 종합격투기로 나오면 스트라이커가 타격전에서 두들겨 맞고 그래플러가 그라운드에서 대걸레 대용품으로 바닥청소를 할 수밖에 없다. 현대의 종합격투가들은 타격도 그래플링도 여러 무술의 장점들을 익혀 놓았기 때문. 스모는 치우쳐도 너무 치우친 데다 경기장도 매우 좁고 시간도 아주 짧게 진행되기 때문에 공략법이 빤히 보여서 문제일 뿐.
다만 체급제 격투 스포트와 종합격투기가 정립되기 이전 시대, 특히 고대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종합격투기가 없으니 무술가들은 전부 단일 무술만 수련해서 싸움에 나서는 것이고, 스모 선수 특슈의 체중과 힘이 있으면 경량급의 타 무술 수련자들을 압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대라면 역사(力士)로 추앙받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2. 역사


스모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야요이 시대[4], 적어도 그 이전부터 스모라는 것 자체는 존재해 왔다고 추정하고 있다. 다만 그때의 스모가 지금의 스모와 같았던 것은 당연히 아니고, 처음에는 리키시들의 맨손 힘겨루기에 가까웠다고 보여진다. 말이 힘겨루기지, 기록에 의하면 유술이나 발차기 등도 포함한 사실상의 종합 격투였다. 이것은 스모뿐만 아니라 일본의 고무도나 유술, 유도 등으로도 발전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 사신이 수박을 보여준 적이 있으며 망명한 백제 왕세자를 보러온 백제 사신들을 환영하는 연회에서 상박(스모)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상으로 지금의 스모의 토대가 된 것은 나라 시대로, 속일본기에 찌르기, 때리기, 차기의 3가지 기술을 금하고 48가지의 기술과 예법에 대한 기록이 있어, 이것이 현대의 스모의 시작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부터 스모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인기 스포츠로 자리하고 있었으며, 정기적으로 스모 경기를 열기도 했고, 심지어 일본 황실이나 귀족들이 전문 스모 선수를 육성하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즉, 스모는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일본의 프로 스포츠로 성장해 온 것이다.
무로마치, 가마쿠라 시대, 센코쿠 시대에도 장려되었으며 오다 노부나가가 현재의 씨름판의 원형을 고안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이묘들도 직속 리키시를 육성해 손님을 접대하거나 다른 다이묘의 리키시와 대결하는 어람 시합를 열었으며, 우수한 선수는 가신으로 임명되기도 했다고 한다. 에도 시대에는 서민층에게도 보급되고 직업 리키시도 등장하여 대중적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고 급기야 승패를 걸고 도박을 하는 등 사행성이 만연해지기도 했다. 사찰 건립 모금을 위해 스모 경기가 벌어지기도 했으며, 쿠로후네 사건 당시 에도 막부미국인들에게 일본의 상징으로서 자랑스럽게 보여준 것 중 하나도 스모였다.

3. 규칙


먼저 준비로 시코(四股)라는 작은 의식을 치른다. 스모선수 하면 으레 떠올리는 양다리를 쩍 벌리고 한 발씩 들었다가 지면을 강하게 내리밟는 바로 그것이다.[5] 원래는 시코아시(醜足)의 약자이기도 한데, 스모 훈련방법의 일환이기도 하며, 민속적으로는 땅에 깃들어 있는 사악한 영령들을 짓밟아 멸한다는 의미도 있고, 종교적으로는 대지의 날뛰는 기운을 밟아 가라앉히고, 혹은 밟는 것으로 잠자고 있는 초봄 무렵의 대지를 깨워서 한 해의 풍작을 약속받는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는 의식이다.[6]
경기 규칙 또한 매우 간단하다. 직경 4.55m의 원형 또는 사각형을 한 도효(土俵)에서 리키시(力士) 2명이 승부를 겨루는데, 발바닥이 아닌 다른 부위가 바닥에 닿거나[7] 신체가 도효 바깥에 닿으면 진다. 반칙을 한 경우[8]도 마찬가지. 판정은 교지(行司, 스모의 심판)가 내린다.
스모 이외의 많은 레슬링 계열의 격투기는 폴처럼 상대의 등이 땅에 닿아야 승리가 되는 경우가 많으며, 장외가 반칙인 경우는 있어도 즉시 패배가 되는 경우는 적다. 이 때문에 스모의 승부는 다른 격투기와는 다르게 대부분 빠르게 이루어지며 승패의 향방이 정말 미세하게 갈린다. 체중제를 하지 않아도 승부가 성립하는 이유라고 봐도 될 것이다. 체격 차이가 커서 저게 뭐 상대가 되겠냐 싶은 시합도 체격이 작은 쪽이 순전히 기술과 순발력만으로 승리하는 경우가 많다.[9]

4. 일문과 도장


모든 스모 선수들은 '헤야'(部屋)라는 도장에 소속되게 된다. 그리고 헤야는 반드시 일문에 소속되어야 한다.[10] '헤야'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유가증권인 토시요리 카부(年寄株)가 필요하며, 카부를 인수하면서 동시에 헤야가 설치된 건물을 인수하거나 건축해야 한다. 그 정도 재력이 없이 토시요리 카부만 소유하게 되는 경우 도장에 소속된 코치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 카부는 보통 1억 엔 전후로 거래[11] 되지만 이는 자신의 도장을 열 수 있는 일종의 면허개전과도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정 계급 이상에서 일정 기간 이상 머무르는 등[12] 세키도리로서의 실력을 보증받은 자들에게만 소유권이 주어지게 된다. 도장들은 대개 도쿄에 위치하는데 아무리 대로변이 아닌 골목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더라도 도쿄 도내에 위치한 3~4층짜리 단일 건물의 가격은 상상에 맡긴다. 오야카타가 송사에 휘말리거나 급서하는 등 변수가 없는 이상 일반적으로 소속 헤야 출신의 세키토리가 후진 양성에 뜻이 있는 경우 선수 생활 과정에서 카부 계승자격을 취득하고, 해당 도장에서 코치를 맡다가 스승이 정년을 맞으면 그 도장을 인수하면서 원래 소유하고 있던 카부를 넘기는 식으로 대가 이어진다.[13] 이런 사정이 있기 때문에 데릴사위 비슷하게 들어가 도장을 물려받는 경우도 많고, 결혼이 이혼으로 끝나면서 도장의 소유권을 놓고 법적 다툼이 벌어지는 일도 종종 생기게 된다. 도장이 크게 흥하여 세키토리가 여럿 배출되고 이들이 각각의 도장을 열길 원하면 분가하게 되면서 일문을 이루게 된다. 도장의 오야카타는 선수들의 지도뿐만 아니라 하위 계급 선수들의 숙식을 책임져야 하는데 스모협회로부터 급료와 보조금을 받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스폰서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특히 도장에서 세키토리가 배출되게 되면 그 선수의 출신지 향토 기업에서 줄줄이 스폰서를 자처하기 때문에 선수뿐만 아니라 지도자들 역시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

5. 계급과 구조


스모는 철저한 계급사회로, 나이와 입문 선/후배 등은 전혀 무의미하고 오로지 계급에 의해 대접을 받는 실력지상주의다. 하위 계급은 상위 계급에게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절대 복종하고 예의를 지켜야 하며, 시중을 드는 일, 심부름, 훈련의 보조 등을 기꺼이 해야한다. 동문의 선후배가 성적에 따라 지위가 역전되는 일도 잦으며, 나이가 한참 차이 나는 후배라도 상위계급이라면 훈련 중 선배를 체벌하거나 심하게 훈계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한마디로 "꼬우면 출세하라"는 식이라 보면 된다.
물론 원칙은 분명히 그러하지만 스모계는 사문 내의 선후배 관계 또한 엄격하고 중요하며, 상위 리키시라고 하더라도 언제 몰락할지 모르기 때문에 단순히 계급이 높다고 선배에게 무작정 막 대하기 어렵긴 하다. 다만 사적인 부분은 몰라도, 훈련에 임해서는 상위 계급 리키시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5.1. 요코즈나(横綱)


리키시 중 최고위. 쉽게 말해 '''명예의 전당'''. 스모계에서는 전설의 경지로 생각하며 그에 맞게 대단한 예우를 받는데, 한 번 요코즈나가 되면 다른 스모 선수들과 달리 절대 강등이 되지 않는 특혜가 있으며, 강등이 되지 않으므로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았는데 억지로 출장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대회에 출전하면 그 격에 맞게 대회 출전자 중 무조건 가장 강한 15인과 싸운다. 요코즈나를 이기면 단순한 1승이 아닌 승격 강등 심사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스펙으로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킨보시라고 하여 은퇴할 때까지 1년에 260만 원에 해당하는 상여금을 지급받을 요인이 된다. 그만큼 요코즈나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대신 성적이 나쁘면 강등이 아니라 아예 은퇴를 해야 한다. 출전자 중 가장 강한 15명과 싸우면서 11승은 해야 체면을 지킨 것으로 평가받으며, 2대회 연속 10승 미만이면 거의 강제 은퇴라 보면 된다. 다만 요코즈나까지 될 정도면 기본실력이 대단하기도 하고, 강등 걱정이 없어서 몸상태가 안 좋은데 억지로 나와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10승 이하의 망신을 당하는 일은 별로 없다. 요코즈나를 이기는 것을 킨보시라고 부르며 우대해주는 것도 사실 요코즈나는 아프면 쉬면 되고 실력이 떨어지면 집에 가야 하기 때문에 킨보시를 획득하려면 무조건 컨디션이 괜찮은 요코즈나를 이겨야 하기 때문인 것도 있다.
일단 규정상으로는 오제키로 승격한 선수가 2개 대회 연속 우승 혹은 그에 준하는 성적을 거둔 경우, 심의위원회를 통해 진급을 심사한다. 전적 외에도 품행, 인품 등도 고려하지만, 이 부분은 거의 자의적인 스모협회의 해석 때문에 비판이 나오는 경우도 많다.
사실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2개 대회 연속 우승이 의무가 아니었다. 보통 오제키가 1개 대회를 우승한 이후, 심의위원회에서 '다음 바쇼에서 우승 혹은 몇승 이상을 올리면 진급 가능성이 있다'는 식으로 조건을 정해주는데 그 조건이 우승 직후 다음 대회에 13승 정도였다. 물론 그 조건에 미달하면 다시 처음부터 연속 우승이나 그에 준하는 성적을 달성해야 했다. 다만 여기에도 예외는 있어서, 12승 정도로 우승에 실패했어도 요코즈나를 꺾었다거나 경기 내용이 좋으면 특별히 한 대회 더 심사를 받을 수 있게 되기도 하며, 13승을 올리고도 패한 경기에서 정말 형편없이 졌다면 심의가 보류되기도 했다.
그러나 하와이 출신 고니시키, 아케보노 등이 연달아 요코즈나를 사정권에 두자 협회는 그들의 요코즈나 승격을 막기 위해 2대회 연속 우승을 해야 요코즈나로 인정해주겠다고 기준을 강화했는데, 이 때문에 90년대 일본의 국민 스타인 다카노하나의 경우, 2년 가까이 연속 우승 직전에서 아케보노에게 패해 오제키에 머무르다 간신히 요코즈나에 오르게 되었다. 외국인 선수 견제를 위해 억지를 부린 조치에 엉뚱하게 다카노하나가 불이익을 당한 셈. 이후부터 2대회 연속 우승은 엄격하게 지켜져 왔으나, 일본인 요코즈나의 명맥이 끊긴 것을 이유로 협회가 괜찮은 일본인 오제키가 등장하는 대로 툭하면 80년대의 완화된 승격조건을 제시해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 혜택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 기세노사토인데, 기세노사토는 현 세대 최강의 리키시인 하쿠호를 상대로 그나마 가장 상대전적이 좋았던 일본인 리키시로 예전부터 많은 푸쉬를 대놓고 받아왔었다. 오제키 승진 때도 우승도 없는 32승 진급이라는 특혜에 가까운 성적이라 비판이 많았고 몇 년 간 맥이 끊겼던 일본인 리키시의 우승도 고에이도나 고토쇼기쿠가 차지하는 등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왔었다.[14] 여러 번 협회의 파격적인 특혜성 승진 조건에도 번번이 물을 먹어오던 기세노사토가, 결국 준우승 이후 연속된 바쇼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2017년 19년 만에 순수 일본 출신 요코즈나로 승격했다. 승격 후 첫 바쇼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나 싶게 만들었는데, 장기 부상에 신음하며 제대로 치른 바쇼가 별로 없던 기간이 길어졌고 18년 11월 바쇼에선 개막 후 내리 5연패를 당하는 개망신을 당한 끝에 강제 휴장 조치가 내려지는 수모를 겪다 회복이 되지 않아 19년 1월 16일에 은퇴를 선언한다.
드물게 우승을 하지 않고도 요코즈나가 된 사례가 하나 있는데 나중에 프로레슬링과 격투기로 전향해 트러블메이커가 되었던 키타오 코지(요코즈나 시절 이름은 후타하구로)이다. 키타오는 10대부터 두각을 나타내면서 2미터에 가까운 체격과 잘생긴 얼굴로 엄청나게 인기몰이를 했는데, 사상 최연소 오제키 승진 후 연달아 우승권에 근접했고, 당대 최고의 요코즈나이던 치요노후지와 2번 연속 동률을 이루고 우승결정전까지 가는[15] 접전 끝에 준우승에 머물렀다. 엄청난 인기에 이제 20대 초반이고 절대자로 군림하던 치요노후지의 대항마로 키타오가 성장하리라 기대했던 협회는 논란을 감수하며 요코즈나로 승격시켰다.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우승자와 동률이고 3명의 요코즈나를 모두 격파한 실적을 근거로 내세웠다. 문제는 승격한 후타하구로가 번번이 치요노후지의 벽에 막혀 준우승만 2번 한 게 고작이라는 것. 게다가 품행 문제로 말이 많은 데다 도장의 후배와 스승의 사모를 두들겨 패는 대형사고를 치는 바람에 고작 1년 만에 강제 은퇴당한다.
시합에서도 정면승부를 암묵적으로 강제당하는 등 요코즈나로서의 품격을 유지할 것을 요구받는다. 요코즈나가 헨카(変化, 회피기)를 썼다가는 갑분싸를 느낄 수 있을 정도.[16][17]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날렵한 몸매를 가졌던 리키시들도[18] 요코즈나에 오르고 나서는 정면승부를 위해 그 전보다 체중을 늘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모든 기록을 갈아치워나가고 있는 69대 요코즈나 하쿠호에게 따라오는 비판도 여기에 있다. 팔꿈치를 쓰는 등 요코즈나씩이나 되는 리키시가 '요코즈나다운 스모'가 아닌 '이기기 위한 스모'를 한다는 비판이 그것. 아무래도 일본식 정서의 결집체다 보니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603년부터 현재까지 421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 반열에 오른 사람은 단 72명뿐으로, 그만큼 일본인들에게 명예와 존경을 받는 영광스러운 위치이다.

5.2. 오제키(大関)


요코즈나 다음 가는 위치로 9단(段)에 해당하는 등급. 삼역(세키와케 혹은 고무스비)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3대회 합계 33승 이상을 거둔 경우 심의위원회에서 승급을 심사한다. 보통은 33승이면 승격이 되지만 별의별 이유로 승급이 반려되기도 하는데, 34~5승을 올리고도 3번째 대회의 성적이 안 좋았다거나 3대회 33승이라도 그 중 10승을 채우지 못한 대회가 있었다거나 자기보다 계급이 높은 상대들에게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거나 반대로 계급이 낮은 상대에게 허무하게 패했다거나 평소 언행이 과격했다거나 등등… 심지어 그냥 지금 오제키가 많아서 안 된다는 이유까지 있었다.
데뷔 2년만에 오제키 자리에 올랐지만 부상으로 1년여 만에 강등당했던 미야비야마의 경우 훗날 심기일전해 10승 5패, 14승 1패, 10승 5패라는 성적을 연이어 거두었지만 당시 오제키가 너무 많고 3번째 바쇼의 성적이 2번째만 못했다는 이유로 승급이 반려되었다. 그 다음에는 9승 6패를 거두었는데 이또한 3바쇼 합 33승이라는 충분한 승수였지만 승급하지 못했다.
반대로 자신보다 격이 2단계나 높은 요코즈나를 연파했다거나 하는 경우는 가점. 사실상 일본인 리키시들에게나 가능한 특혜로 여겨지긴 하지만 기세노사토나 고에이도가 32승을 거두고 승급했다.
고무스비에서 세키와케에 오르자마자 3대회 합계 33승 이상으로 오제키에 승진된 사례는 치요노후지가 유일하며, 2018년 새로운 오제키로 등극한 조지아 출신 토치노신 츠요시(栃ノ心 剛史)[19]의 경우 마에가시라 계급에서 14승 1패로 우승 후 고무스비를 뛰어넘고 바로 세키와케로 승급했고, 이후 2대회에서 10승, 13승을 거두자 바로 오제키로 승급되었다. 오제키 승급도 심의위원회를 거쳐 심사하기 때문에, 스모계 대내·외적인 정세와 리키시 본인에 대한 여론, 위원들의 판단에 의해 유동적이고 자의적 해석이 내려질 때가 있다. 최초의 몽골인 요코즈나 아사쇼류의 경우 평소 과격한 언행으로 오제키 진급이 1회 보류된 바 있다.
요코즈나는 전설 취급이기 때문에 오제키가 실질적인 최고위직이라, 여러 특전이 있다. 오제키 계급에서 은퇴하면 퇴직금 액수도 크게 늘어나고 별도의 공로금도 푸짐하게 나오며, 오제키의 강등 조건은 두 대회 연속으로 승보다 패가 많은 경우(마케코시)이므로 한 대회 걸러 한 번씩만 8승을 올리면 강등되지 않는다. 설령 강등되더라도 강등 직후 바로 10승을 찍으면 바로 오제키로 복귀시켜주는 카도반이라는 특례가 있다. 이 때문에 일정 이상의 기량만 유지한다면 요코즈나는 되지 못해도 오제키로 오랫동안 롱런하는 경우가 많고, 뛸 수 있을 때까지 뛰다가 더 이상 오제키 계급을 유지하지 못하면 알아서 은퇴하게 된다. 일본인 최다승 기록(1,047승)을 경신하고 은퇴한 카이오 히로유키(魁皇博之)의 경우, 무려 11년간 오제키로 재직하다 은퇴한 덕에 어지간한 요코즈나 부럽지 않은 퇴직금과 공로금을 수령했다.[20]
대전격투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2에드몬드 혼다철권 시리즈간류가 바로 이 타이틀을 달고 있다. 철권 스토리 모드에서 간류와 상대하게 되면 간류가 "왜 요코즈나가 69명밖에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지"라며 허세를 부린다. 동시에 뜨는 "'''간류는 요코즈나가 아닙니다'''"라는 깨알 같은 자막은 덤. 스토리에 따르면 간류는 화려한 옷차림으로 도효에 오르거나 불을 뿜고 나타나는 등의 기행과 불법 도박으로 인해 행실불량 판정을 받아 요코즈나로의 승급이 영구 정지되었다고 한다.

5.3. 세키와케(関脇)


사실상 2위 계급으로, 기본적으로 오제키와 요코즈나를 제외한 선수들 중 이전 대회의 상위 2명을 세키와케로 두지만 세키와케가 2명 이상 있으면서 오제키로 승격하지 못하고 자격만 유지하는 경우 3,4명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일은 세키와케 두명이 유지된 채로 오제키가 세키와케로 강등되거나, 코무스비 계급의 선수가 특출난 성적(13승 이상)을 거두어 승격되는 경우 볼 수 있다. 오오제키로의 승격 조건은 보통 3대회 33승 이상, 강등 조건은 8패. 보통은 대진이 세키와케를 대회초반에 요코즈나, 오오제키진과 경기를 많이 붙이기 때문에 확실히 치고 올라갈 기량이 없다면 초반부터 연속 패전을 쌓고 시작하기 쉽다. 그러다 까딱하면 강등. 세키와케는 강등과 관련된 특례도 없기 때문에 올라갈 거면 바로 올라가고 아니면 바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지 세키와케 계급에서 오래 머무는 경우는 드물다.
오제키로 가는 실질적 관문이기 때문에, 여기서 승급을 못하면 다시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오제키의 적격 기준은 현 계급이 세키와케이면서 최근 3바쇼 45전 중 33승 이상인데, 1~2승 미달임에도 통과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35승을 올리고도 승급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3바쇼동안 총 승수 33승 이상이면서 각 바쇼에서의 승수 10승 이상이 최소 조건이다. 그외에 우승 경력, 수상 실적이나 요코즈나를 이긴 실적이 있으면 유리하다고는 하지만 그 기준이 상당히 자의적이며 오락가락 하는지라 말이 나오기도 한다. 이게 어느정도로 자의적인가 하면 8승 7패로 간신히 반타작을 넘긴 승률이 포함된 채로 32승을 채우고도 승격되는 경우도 있었고, 4바쇼 40승을 넘겼으니 32승이지만 승격시킨다며 승격되는 경우도 있었다. 근 10년간 3바쇼동안 삼역을 유지하면서 총 승수 33승 이상, 각 바쇼 승수 10승 이상을 거둬 승격된 경우는 단 두차례뿐이였으며 그 중 한 케이스가 후술할 타카케이쇼. 우승 포함한 9승-13승-11승을 거뒀으나 9승이 껴있다는 이유로 승격이 반려되어 한 차례 더 세키와케에 머물러야 했다.
7승 8패정도를 거두고 마에가시라 상위 계급에서 딱히 승급시킬 사람도 없는 경우 고무스비로 강등은 하되 삼역 지위는 유지시켜주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역사상 10번도 없었던 일인데 18년 11월 7승 8패를 기록한 세키와케 미타케우미가 삼역은 유지하면서 고무스비로 강등되는 일이 벌어져 진귀한 기록이 한번 더 추가되었다.

5.4. 고무스비(小結)


일반적으로 상위 계급을 제외한 마에가시라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리키시 2인이 다음 대회의 고무스비가 된다. 드물게 고무스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세키와케로 승격되는 경우가 있는데, 반드시 2인이 존재하는 세키와케가 공석이 되는 경우, 또는 마에가시라 상위 계급에서 대회 우승을 하거나 13~4승 수준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는 경우 바로 세키와케가 된다. 고무스비 역시 8패만 당하지 않으면 계속 지위를 유지할 수 있으며, 고무스비 계급에서 보통 카치코시를 거두면 세키와케로 승격시켜주는 것이 관례이다.[21] 세키와케가 4인이었을 때 12승을 올리고도 세키와케로 승격되지 못한 사례가 있다. 반면 세키와케가 마케코시를 당하는 등 공석이 발생하면 8승만 채워도 세키와케로 진급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또한 고무스비가 모두 마케코시를 기록한 경우 평막 상위권에서 8승만 해도 바로 세키와케로 진출하는 경우 또한 생길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회 첫날 요코즈나와 고무스비의 시합이 배정된다.[22]
오오제키부터 고무스비를 三役(산야쿠)라고도 한다.

5.5. 마에가시라(前頭)


이 계급에 속한 이들을 히라마쿠(平幕)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메이저리그 주전 선수들로 볼 수 있다. 최상위 리그인 마쿠우치의 정원 42명에 맞춰, 요코즈나와 삼역 이상 숫자에 따라 엔트리는 유동적이며, 그에 맞춰 실제 실력과 계급에 따라 선수의 순위가 표기된다. 예를 들면 前頭1, 前頭9 등이다. 5위 이내 선수들은 오제키나 요코즈나와도 붙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카츠코시 조건이 8승으로 반타작이라고 해도 만만치 않다. 때문에 기량이 좋은 선수들 중에서도 요코즈나, 오오제키 급으로 진출할 능력이 안되는 경우 커리어 전성기를 마에가시라 상하위를 계속 오가다가 마치는 선수들이 많다.
마에가시라 상위와 하위의 격차는 오히려 마에가시라와 삼역 사이의 실력 차이 이상으로 심하다는 시각이 있는데, '엘리베이터 리키시'들의 존재 때문이다. 마에가시라 상위를 지키는 선수들은 요코즈나나 오제키를 만나도 마냥 패배하지는 않지만, 이 엘리베이터 리키시들은 하위 레벨일 때는 신나게 약자들을 잡다가도 상위 레벨에 올라오면 강자들 틈바구니에서 견디질 못하고 나가떨어진다. 12패까지 얻어맞고 강등되는 일도 허다하며, 이런 식으로 1년 내내 30~40계단까지 오르내리기도 한다.
마에가시라는 대진표상 하위 선수를 잡으며 승수를 쌓다가 상위 선수와 만나면서 패배를 쌓는다.
마에가시라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2명이 고무스비가 되는데[23], 고무스비가 여러명 자리를 유지하는 바람에 T/O가 비지 않아 승격되지 못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요코즈나부터 여기까지를 마쿠노우치[24](幕内)라 부른다. 보통 NHK의 티비 중계는 마쿠노우치 이상의 경기가 중계된다. 엔트리 정원은 42명으로, 마에가시라 하위 순번은 주료로 강등되고 주료의 최상위 순번과 교체된다.

5.6. 주료(十両)


타 스포츠에 비유하면 1군 백업 또는 교체 멤버 수준의 레벨이다. 즉 1.5군의 성격을 가진 리그이다. 마쿠우치로 가기 위해, 또 인간 이하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할 수 있는 마쿠시타 강등을 피하기 위해 싸우는 신예와 노장들의 실질적 격전지가 되고 있다. 주료부터는 마쿠우치와 동일하게 한 대회 15경기를 치른다. 승부에 임하는 치열함이 처절하게 드러난다는 이유로 주료급의 경기를 더 즐겨보는 팬들도 많다. 한 대회가 끝날 때마다 평균적으로 4~5명 정도 승격과 강등이 이루어지나, 부상과 결장으로 마쿠우치의 엔트리 정원이 많이 빠지면 42명을 채우기 위해 추가로 다음 순번 선수들을 선발하는 경우도 있다.
주료가 되면 공식적으로 시중 드는 심부름꾼(쓰케비토, 付け人)도 1명 이상 붙게 되고, 복장과 헤어스타일도 특별한 것을 사용하며, 스모협회에서 하는 공식 행사에 참석할 때 비즈니스 석이 제공된다. 이 계급부터는 24시간 내내 도장 공동생활을 할 의무에서 벗어나고 독자적인 개인 생활 공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승급이 확정되면 결혼 일정을 잡는 사람이 많다. 주료와 마쿠시타의 연 수입부터 최소 15배 이상 차이가 나므로 주료의 월급이 마쿠시타의 연봉보다 많고, 단 한 번만 주료 계급을 달더라도 퇴직금이 10배 가까이 불어나며, 개인 후원회도 이 시점에 결성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선수는 마쿠시타와 주료의 차이를 인간과 짐승의 차이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스모 리키시들로서 수입으로나 지원에 있어서나 엄청나게 풍요로워지기 시작하는 위치이므로, 거의 모든 리키시들은 주료에 승진하려는 목표가 최우선이 된다. 주료 승격을 야구로 치면 메이저리그에 콜업되는 것에 비할 수 있으며, 요코즈나들의 은퇴 회견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고 감격스러웠던 순간을 물으면 거의 대부분 주료 승격 때를 이야기 할 정도이다. 특급 신예가 아닌 이상 주료와 마쿠시타를 몇 번 오르내리다가 주료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늘과 땅 차이만큼 대우의 차이를 실감한 리키시들에겐 엄청난 동기를 부여한다.
반면 마쿠우치에서 꾸준히 활동하거나 주료를 오르내리며 30대를 넘긴 베테랑들의 경우, 주료는 선수 생활 최후의 마지노선이 된다. 오제키로 승격할 만큼 특출난 선수들이 아닌 경우, 나이가 들수록 강등 회복 특례도 없는 마쿠우치에서 계속 8승을 채우는 것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자연스레 주료와 마쿠우치를 오가는 생활을 하게 된다. 주료로 강등되어도 어느정도 컨디션과 기량만 유지하고 있으면 충분히 다시 승격할 수 있고, 강등된 만큼 기본급은 조금 줄지만 마쿠우치 시절 모아온 누적 상여금도 지급되기 때문에 실제 수입 또한 8~90% 가량은 유지된다. 그래서 자녀가 성장해 가는 30대 중반에도 주료에서 계속 선수 생활을 유지할 수 있길 바라는 리키시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베테랑들이 주료 계급조차 유지할 힘이 남지 않으면 마쿠시타로 강등되면서 기본급도 터무니없이 깎이고 누적된 상여금도 지급이 중지되므로 수입이 거의 없어지는 처지에 몰린다. 다시 올라오면 되긴 하지만 그 나이 먹고 다시 올라오는 것도 어려우니 주료에서 떨어지면 두 손 들고 은퇴할 수 밖에 없다. 마쿠시타로 강등되면 1년의 6번 대회 참가수당 15만엔과 몇 만엔의 승리 수당이 전부다. 마쿠시타로 떨어지면 주료 때 104만엔씩 나오던 기본급도 없고, 마쿠우치와 주료 시절 쌓아둔 누적상여금도 지급을 중지한다.
2020년 7월 대회에서 역대급 사건이 터졌는데 원 오오제키(요코즈나 바로 다음의 등급)였던 몽골 출신 선수 테루노후지가 부상과 건강 문제로 스모의 9번째 계급이자 쥬료보다 3단계 아래인 죠니단으로 몰락했다가 1부 리그인 마쿠노우치의 마에가시라 동 17로 복귀하여 1부리그 최하위 등급으로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야말로 인간승리. 테루노후지 개인으로서는 통산 2회째 마쿠노우치 우승이자 5년 만의 우승이다. 2020년 1월 대회에서는 마에가시라 서 17이었던 도쿠쇼류가 혼전 끝에 우승했는데 같은 해에 마쿠노우치 최하위가 2번씩이나 우승한 것은 전무후무한 사례이자 앞으로 수백년이 지나도 깨지기 힘든 진귀한 기록이다.
요코즈나부터 주료까지를 세키토리(関取)라 부르며, 여기까지가 스모의 메이저리거들이라 할 수 있다. 선수 명단을 작성할 때 이름을 굵은 글씨로 써 준다. 따라붙는 쓰케비토는 하위 계급의 리키시로서 훈련소부터 경기장, 행사장까지 따라다니며 해당 리키시의 잔심부름이나 신변을 챙겨주는 역할을 한다. 그 리키시가 속한 헤야(도장)에서 붙기도 하고, 헤야끼리 연합한 일문에서 뽑히기도 한다. 또한 개인 게쇼마와시[25]를 입고 의식을 위한 무대에 나갈 수 있다. 주료 이상이 되면 급여[26]는 물론 신분까지 한 번에 수직 상승하는 것이다.

5.7. 마쿠시타(幕下) 이하


여기부터는 2부 리그로 세키토리들과 달리 한 대회에 7경기를 치르게 되며, 기본급과 상여금은 없고 오로지 1년에 6번 대회에 출장하는 횟수에 따라 출장수당과 승리수당만 지급된다. 마쿠시타 1위와 주료13위는 딱 한 순번 차이지만, 수입은 15배 이상, 대우와 지위도 하늘과 땅 차이다. 비인간적인 대접과 연습을 빙자한 가혹행위, 상위 계급의 온갖 잔심부름과 시중도 감수해야 하며, 프라이버시 같은 건 없고 365일 24시간 오로지 도장 공동 숙소에서 함께 먹고 자는 생활이다. 마쿠시타까지 성적에 따라 계급이 상승하는 구조는 동일하지만, 아마추어 시절 대상 경력이 있는 경우 하위 리그를 생략하고 바로 마쿠시타부터 선수 생활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마쿠시타 다음으로 산단메(三段目), 조니단(序二段), 조노쿠치(序ノ口) 순으로 계급이 정해져 있다.

6. 선수 생활


대개의 리키시들의 첫 선수데뷔는 중학교, 고등학교 연령에서 조노구치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학교를 중퇴하고 곧바로 훈련소(헤야)에 뛰어들기도 한다. 일부는 대학에 진학하여 교내 명문 스모부를 거쳐 헤야에 입문하는 경우도 있다. 각종 선수권에서 거둔 수상이력을 참작하여 조노구치보다 상위의 계급에서 리키시 생활을 시작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 제도는 과거 수많은 수정을 거쳐 현재의 방식으로 정립되었으며, 마쿠시타 쓰케다시(幕下付出)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 마쿠시타 15부터 시작하는 경우: 전일본 스모선수권 대회(아마추어 스모), 전국 학생스모 선수권 대회(학생 요코즈나), 전일본 실업단 스모선수권 대회(실업단 요코즈나), 국민체육대회 스모경기(성년남자부 A, 국체 요코즈나): 이 중 한 가지 선수권 우승 보유자
  • 마쿠시타 10부터 시작하는 경우: 전일본 스모선수권 대회 우승을 필수적으로 만족한 상태에서 나머지 세 선수권 중 한 가지 이상의 우승기록이 있는 자
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조노구치, 조니단을 뛰어넘어 바로 산단메 맨 끝자락부터 시작하는 산단메 쓰케다시도 있는데 그 조건은 상기 대회 8강 이상 입상한 경우이다.
마쿠시타 이하의 급료로 생활이 되는가 싶지만 실상 조노구치, 조니단의 경우는 신체적, 기술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10대 후반 입문자들이 대다수이기에 츠케다시 없는 고졸, 대졸 출신 선수들은 금방 벗어나는 편. 스모는 수백 kg의 체중을 지속적으로 이겨내야 하는 강인한 인대를 타고나야 하는 것 뿐만 아니라 , 췌장 같은 장기들 또한 선수생활 동안의 가혹한 식습관을 버텨내야 한다는 점에서[27] 특히나 재능충들의 스포츠이지만, 그 중에서도 어마어마한 재능까진 못되고 노력이 좀 필요한 재능충들의 경우 산단메~마쿠시타에서 치열하게 싸우다 20대 초~중반 정도 연령대에 주료로 승급하는 경우가 많다. 비합리적인 트레이닝 시스템이나 낙오자에게 가혹한 부분은 차치하고서라도 대졸 취업자들의 연령을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늦는 것은 아닌 셈.
참고로 리키시들은 전부 본명이 아닌 링네임인 시코나[28]를 쓴다. 이는 외국인 리키시도 예외가 아니라서 파란 눈의 리키시가 한자 이름을 쓰는 것이 스모계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스모가 일본색이 강하다 보니 외국인 리키시들은 어느 정도의 일본어를 구사할 것을 요구받기도 한다. 물론 외국에서 스모하러 올 정도면 못해도 일본에 대한 지식은 평균 이상일 것이니 큰 압박은 아닐 듯.[29]
스모 선수들은 이겨도 잘 웃지 않는데, 규정으로 상대 선수에게 감정표현을 자제하라고 써 있다는 모양. 마찬가지로 패배해도 감정을 표출하는것이 자제된다.

7. 심판


스모의 심판은 교지(行司)라고 불린다.
스모 심판은 15세가 되면 채용 시험을 볼 수 있는데, 19세가 되기 이전까지 보아야 하며, 19세가 넘어가면 채용 시험을 볼 수 없다.
게다가 료코쿠 국기관 교지의 정원은 45명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공석이 생겨야만 새로 채용이 되며, 아무리 열의가 강하고 성적이 높아도 15 ~ 18세의 기간동안 정원이 생기지 않아 채용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즉, 교지가 되기 위해선 실력뿐만 아니라 운도 있어야 한다는 말.
교지에도 등급이 있어 등급이 올라갈수록 높은 등급의 선수들 경기의 심판에 참여할 수 있다. 최고등급인 타테교지(立行司)는 허리에 단도를 차는데, 최고등급의 심판으로서 책임과 마음가짐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타테교지는 에도 시대 교지로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키무라 가문과 시키모리 가문의 이름을 계승한 키무라 쇼노스케(木村庄之助)와 시키모리 이노스케(式守伊之助)의 두 사람인데, 이는 본명이 아닌 대대로 계승해서 내려오는 이름과도 같은 것이다. 즉, 타테교지의 정원은 겨우 2명으로 올라가기 대단히 힘들다.
2020년 현재 키무라 쇼노스케는 37대, 시키모리 이노스케는 41대째이다.

8. 경기


정규경기는 1년 6번, 대개 홀수 달 2번째 일요일부터 시작하여 4번째 일요일에 끝나는 총 15일의 경기를 실시한다.(단, 2012년 접어들어, 거의 정설로 굳어져 왔던 2번째 일요일이었던 바쇼 첫날이, 첫 번째 일요일로 결정되는 사례가 종종 나타나고 있다. 각 바쇼 개최일은 연간일정표를 참고하기 바란다) 조노구치부터 마쿠시타까지 7일의 날짜를 택하여 경기할 수 있으며 주료 이상의 세키토리는 15일의 경기일정을 다 소화해야 한다.
대개 부상 등의 이유로 휴장하는 경우는 있지만 이 경우 휴장 1회는 1패와 동일하게 적용하므로 다음 승강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본래 '공상제도'라 해서, 경기 중 입은 부상에 한정하여 휴장을 인정하되 승패에 영향을 주지 않는 제도가 있었다. 이 제도는 2000년대 초중반까지 적용되었다가 폐지된다. 훈련 중 부상이나 실수에 의한 부상과의 시비가 만만찮은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공상제도를 믿고 훈련이나 수행을 게을리하여 특히 자국(일본) 내 리키시들의 경기력이 저하되었다는 의견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30]
휴장으로 인해 직, 간접적으로 승강급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경우는 요코즈나 뿐이다. 그 요코즈나가 어떤 여론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그 휴장이 긍정적이게도, 부정적이게도 보이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아래는 정규바쇼의 개최지이다.
이외에도, 위의 지역이 아닌 지방 소도시, 농어촌 지역 등을 협회에서 매년 다른 지역을 선정하여 순회하는 '순업(巡業, 발음은 '즁교')'이 있다. 하지만 순업은 승부의 의미라기보다 '공연', '퍼포먼스'의 의미[31]가 더 강하고, 도시같은 곳에서 스모를 볼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지방인들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또한 순업에서의 승부는 하루 한번의 공연으로 토너먼트제이며, 이로 인한 승패의 여부가 리키시들의 공식 성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덤으로 요코즈나로 은퇴하면 부와 명예가 따른다고는 하지만, 이미 상한 몸으로 오래 사는건 바라기 힘들고 요즘엔 민속씨름처럼 그다지 안쳐준다는 듯. 오죽했으면 '''생전에 돈 많이 벌어놓고 빨리 죽어 유산도 빨리, 많이 남기는 요코즈나가 1등 신랑감'''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을까. 다만 최근엔 의학의 발달과 은퇴 후 다이어트 하는 등 나름 건강을 관리해서 장수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그래도 일본의 국기(國技)인지라 천황이 직접 주재하기 때문에 한국씨름과 같은 안습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듯 싶다.

9. 해외에서의 인기


일본 특유의 문화 수출 덕분에 서양권을 중심으로 은근히 팬이 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미국 대통령[32]자크 시라크프랑스 대통령이 스모팬으로 유명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백악관에 일본 스모선수와 유도선수를 초빙해 대련했으며 자크 시라크는 '''"정치인의 길을 걷지 않았으면 스모 선수를 했을것."'''이라는 발언을 할정도로 스모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실제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재임 기간중 여러차례 일본 총리와 스모경기를 직관했었다. 퇴임 이후에도 스모를 직접 관람했을 정도로 관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1970년대 하와이 출신의 타카미야마(高見山)가 외국인 출신 최초로 마쿠우치 우승을 달성하며 일세를 풍미했고, 은퇴 후 제자 양성을 하는 과정에서 하와이, 사모아 출신의 폴리네시아인들이 유입되었다.[33] 90년대 이후로는 몽골, 동유럽 출신들의 입문이 이어졌으며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호주, 미국 등 서양 국가에서 경기가 열리기도 한다.

10. 수입 구조


스모는 프로스포츠에 가까운 성격임에도 매우 독특한 지급 구조를 가지고 있다. 보통 프로스포츠의 경우, 선수는 구단과 개인적인 계약 관계를 맺은 일종의 자유소득직 프리랜서, 혹은 사업자가 없는 사업자로 분류할 수 있는데, 스모의 경우 선수 전원이 일본스모협회에 소속되어 공적으로 급여를 지급받는 형태이다. 스모협회로부터 받는 공식적인 수입은, 크게 월급인 고정급과 1년에 6차례 열리는 정규바쇼(스모대회) 참가 누적으로 정산하는 상여금, 출전수당 + 우승상금 + 승리수당 + 현상금 등의 포상금, 그리고 퇴직 시점에 협회로부터 정산하는 퇴직금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정기급여: 고정급 + 누적상여금
1) 고정급: 매월 + 9월, 12월(연2회) 보너스 지급(고정급 연 14회 지급)
  • 요코즈나(横綱): 약 282만 엔, 연 3,948만 엔
  • 오제키(大関): 약 235만 엔
  • 삼역(세키와케(関脇) 및 고무스비(小結)): 약 171만 엔
  • 마에가시라(前頭): 약 132만 엔
  • 쥬료(十両): 약 104만엔
2) 누적상여금: 세키토리(주료 이상 계급)가 되면 연간 6회 현금으로 지급.
- 누적상여금은 최저 상여금 보장금액에 미달하면 최저 보장 지급하고, 이후 실적에 따라 꾸준히 누적되어 +@로 지급하는 연공서열 방식이다. 상여금 계산식은 제법 복잡한데, 간략히 요약하면 상위계급 승진할 때 마다 계급 점수 가산, 패수보다 승수가 많을 경우(대회에서 8승이상), (승-패)×0.5점씩 가산, 우승(전승우승은 50점 가산)시 30점 가산, 마쿠우치가 요코즈나를 이기는 경우인 킨보시(金星)획득 시 10점 가산된다. 이렇게 가산되어 계속 누적된 점수에 물가상승에 맞춘 금액(현재는 4,000엔)을 곱해서 지급한다.
  • 요코즈나(横綱): 최저보장 150점, 60만 엔(150 X 4,000엔)
  • 오제키(大関): 최저보장 100점, 40만 엔
  • 오제키 외 마쿠우치: 최저보장 60점, 24만엔
  • 쥬료(十両): 최저보장 40점, 16만엔
즉 쥬료로 승격만 해도 최소 16만엔, 1부리그인 마쿠우치에 진입만 해도 최소 24만엔을 2달에 한번씩 고정급 외 보너스로 받는다. 게다가 우승을 많이 하고 그만큼 많이 이길수록 누적상여금은 어마어마하게 늘어난다. 예를 들면 2000년대 후반부터 절대강자로 군림해온 사상 최다 37회 우승자 요코즈나 하쿠호의 경우, 2018년 3월 시점 누적점수가 사상 최고인 1,929.5점인데, 여기에 4,000을 곱한 금액을 받는다. 즉 1,929.5 X 4,000 = 771만 8천엔이다. 8천만원에 가까운 금액을 2개월에 한번씩 누적상여금으로 받고 있다. 1년 누적상여금 지급액이 5억에 가깝고 정기급여(약 4억원)보다 더 많다. 현재까지 누적 1,000점을 넘긴 선수는 하쿠호 포함 역대 6명이다.[34] 또한 킨보시를 여러 번 획득한 선수들의 누적상여금은 비슷한 승률의 마쿠우치 선수들보다 월등히 높다. 킨보시 한 번에 10점이니, 요코즈나를 한 번만 이겨도 은퇴할 때까지 두 달에 4만 엔, 5번 이기면 20만 엔씩 더 받는 것이다.[35] 한번 누적된 점수는 감액되지 않고 계속 지급되지만, 아래 계급으로 강등되면 승진할 때 계급 점수를 추가로 준 만큼만 감액한다.[36]
2. 포상금: 출장수당, 특별수당, 보조금, 우승상금, 현상금 등
1) 우승상금과 기능상, 수훈상,감투상의 3상 수상: 주료 우승 200만엔, 마쿠우치 우승 1,000만엔, 3상 수상시 200만엔(주료는 3상 미해당)
2) 특별수당(연6회) & 지방대회 출장수당(연 3회): 특별수당은 연간 6회 열리는 매 대회마다 삼역 이상에게만 지급하며, 11일 이상 출전시 전액, 6일 이상 출전시는 3분의 2를, 그 이하는 3분의 1 지급. 전일 휴장(불참)시는 지급하지 않는다.
  • 요코즈나(横綱): 특별수당 20만엔, 출장수당 42만엔
  • 오제키(大関): 특별수당 10만엔, 출장수당 약 34만엔
  • 세키와케(関脇) 및 고무스비(小結): 특별수당 5만엔, 출장수당 약 29만엔
- 삼역 미만 출장수당만 지급
  • 마에가시라(前頭): 출장수당 약 25만 엔
  • 쥬료(十両): 출장수당 약 23만엔
+ 보조금(연3회)의 경우 주료 이상부터 2만 5천엔 동일하게 지급. 연 7만 5천엔
3) 현상금: 마쿠우치(1부리그) 대회만 지급
  • 승리한 선수에게 봉투 갯수로 현장 지급되며, 협회가 아닌 스폰서 기업에서 협찬한다. 2014년까지는 봉투 1개당 6만엔, 이후부터 6만 2천엔이며, 3만엔은 그 자리에서 선수에게 현금으로 지급하고, 5,300엔은 스모협회의 몫. 나머지 2만 6,700엔은 세금충당금이라고 해서 협회가 적립한다. 이것으로 연초 선수가 소득세를 납세할 때 모자라는 급액을 대납해주기도 하며, 적립 누적된 금액은 선수 은퇴 시점에 일시금으로 별도 지급한다.
  • 봉투갯수는 스폰서 기업의 갯수와 같으므로, 보통 대회 초반과 하위 선수들의 대전은 갯수가 작고 강자들끼리 대전하는 시합에는 많아진다. 대회 초반에는 경기 당 평균 10개 내외, 대회 마지막 날이나 빅매치에는 한 시합에 4,50개 까지도 늘어난다. 2015년 이전까진 스폰서 참가 제한을 50개로 정하는 바람에 1경기 최다 현상금은 아사쇼 류의 51개였으며, 특례에 의한 갯수 제한이 해제된 2015년 이후 하쿠호, 카쿠류,키세노사토 3명의 61개가 최다이다. 즉 단 한 게임, 10초 남짓한 시간에 61 X 6만2천엔 = 약 360만엔을 거머쥔 셈이다. 선수에게 즉시 현금으로 돌아오는 금액인 3만엔으로 잡아도 183만엔, 우리 돈으로 약 1,900만원이다.
  • 한 바쇼(대회) 최다 현상금 기록은 2010년 하쿠호의 541개로 무려 15일의 기간 동안 3,354만엔을 획득하였다. 2010년대 이후 기업의 스폰서 참여가 급격하게 늘어난 덕분에, 역대 최고 기록 1~4위까지 모두 하쿠호의 몫이다. 또한 연간 최다 현상금 1~5위 기록도 모조리 하쿠호가 차지하고 있으며, 2010년 현상금 합계 2,111개[37]로 최다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하쿠호를 제외하면 1,600개를 넘는 선수도 전무한데, 2010년대부터 스폰서 참여 기업의 갯수 제한을 없애 현상금 봉투 숫자가 크게 증가한 덕분이다.
다만 현상금 봉투 갯수가 늘어나는 추세는 저변 확대가 아니라 스모 인기 저하의 결과이며, 선수들에게 좋다고는 할 수 없는데, 공식적인 스폰서 참가 형태는 늘었지만 선수 개인의 후원회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2006년 아사쇼 류가 27개로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1시합 현상금 봉투는 50년 가까이 26개가 최다일 정도였다. 심지어 스모의 황금시대이자 일본경제의 최정점이던 80년대를 상징하는 최고의 요코즈나 치요노후지[38], 90년대 일본 전국민의 우상이던 다카노하나 조차도, 한 시합에 평균 20여 개 가량 현상금 봉투를 수령했다.
물론 하쿠호가 실력면에선 위의 둘에게 밀리지 않지만, 치요노후지나 다카노하나가 누렸던 어마어마한 인기와 차지하고 있는 위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격차가 크다. 그런데 이렇게 인기와 위상이 한참 못한데도 현상금 숫자는 최소 두 배 이상 많으니 의아할 수도 있다. 이는 과거 기업이 인기 스모 선수들에게 대대적인 후원회 활동을 축소하고 현상금 봉투로[39] 대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거의 선수 후원 활동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규모가 커서, 인기 선수들의 경우는 대기업들이 앞다투어 선수 후원 회장을 맡기위해 경쟁할 정도였다. 초인기 선수인 치요노후지나 다카노하나 같은 정도가 되면, 많은 기업 오너들과 스폰서들이 각자 선수후원회를 만들어 경쟁하며 거의 일생의 호사를 책임져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40] 과거엔 마쿠우치만 되어도 기업이 중심이 된 후원회의 지원 덕분에, 스모협회의 월급과 현상금 등은 한푼도 쓰지않고 전부 저축할 수 있었으며,[41] 후원기업에서 선수가 소속된 도장을 먹여살리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스모 선수 개개인을 지정해 엄청난 지원을 해주는 기업들은 줄어들고, 이제는 후원금 액수를 정해 깃발을 올리는 것으로 홍보비 지출을 투명하게 줄여가는 추세라 봐도 된다. 즉 스모의 인기 하락과 경기불황, 기업의 투명한 회계가 자리잡은 현재는, 기업들도 선수를 직접 후원하는 비용을 크게 줄이고 부담없는 TV광고 스폰서 깃발만 올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차피 과거처럼 선수후원회 감투로 얻는 명분 보다는, 실질적으로 TV에 나오는 광고 효과를 더 중시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선수들에겐 현상금의 갯수가 과거처럼 명예나 상징적인 의미가 아닌, 실질적인 현금 수입과 생활에 큰 영향을 주는 요소가 되고 있다.
3. 퇴직금: 양로금과 근속가산금으로 구분, 양로금의 경우 계급에 비례해서 가산하며, 근속가산금은 얼마나 오래 위치를 지켰는지에 따라 가산한다.
1) 양로금: 자격자 조건은 마쿠우치 통산 25대회 이상 자격유지 또는 20대회 이상 연속 유지(단, 삼역 이상은 자격자 요건 무관). 그외는 비자격자.
  • 요코즈나(横綱): 1,500만 엔
  • 오제키(大関): 1,000만 엔
  • 삼역(세키와케(關協) 및 고무스비(小結)): 763만 엔
  • 마에가시라(前頭): 자격자 763만 엔, 비자격자 475만 + 계급유지 가산
  • 쥬료(十両): 자격자 475만 엔, 비자격자 115만 + 계급유지 가산
2) 근속가산금: 계급별 금액에 위치를 유지한 대회 횟수만큼 곱한다.
  • 요코즈나(横綱): 50만 엔
  • 오제키(大関): 40만 엔
  • 삼역(세키와케(関脇) 및 고무스비(小結)): 25만 엔
  • 마에가시라(前頭): 자격자 20만 엔, 비자격자 15만
  • 쥬료(十両): 15만 엔
만약 다음과 같이 10년 세키도리로 활동하며 요코즈나로 은퇴한 경우, 퇴직시점 근속가산금으로 2천만엔을 수령하게 된다.
20대회 요코즈나 유지: 20 X 50만 = 1,000만엔
10대회 오제키 유지: 10 X 40만 = 400만엔
10대회 삼역 유지: 10 X 25만 = 250만엔
10대회 마에가시라 유지: 10 X 20만 = 200만엔
10대회 주료 유지: 10 X 15만 = 150만엔
3) 특별공로금: 이는 오제키, 요코즈나가 은퇴하는 경우에만 해당되며, 2005년부터 지급 금액을 공개하지 않아 논란이 많다. 보통 뛰어난 업적을 이룬 요코즈나와 인기 선수에게 더 많은 공로금을 지급한다고 알려져 있다.
  • 그 밖에 현상금에서 절반 가량 협회가 세금충당금으로 떼어 적립해 둔 누적 금액도 은퇴 시점에 일괄 지급된다. 이것도 7,8년 마쿠우치로 꾸준히 활동하고 은퇴하는 중견이상 선수들이면 보통 1,000만엔 이상 모인다.
위와 같은 것들을 종합하면, 요코즈나의 경우 퇴직시 지급금 합계는 기본적으로 5억원 이상, 오제키의 경우 3억원 이상이라 보면 된다. 물론 이건 근속연수와 지위, 계급 상승 시점에 따라 편차가 엄청나게 크고, 요코즈나와 오제키 특별공로금도 선수에 따라 다르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몹시 부진해서 3년도 재위하지 못하거나 부상으로 일찍 은퇴하지 않는 한 거의 그 이상이라 보면 된다.
마쿠우치로 5년 정도, 주료를 합쳐 총 7~8년 가량 세키토리로 선수생활을 하는 중견급이면, 보통 퇴직 시점 일시금으로 2억원 정도는 바라볼 수 있다.
4. 세키토리(마쿠우치,주료) 미만 선수들의 수입
위와는 대조적으로 세키토리에 진입하지 못한 선수들의 수입은 참담할 정도로 작다. 월급은 없으며 출전에 따른 시합수당이 전부이다. 대부분 도장에서 숙식을 제공하고, 세키토리의 시중이나 보조로 용돈을 받으며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 스모의 인기가 높던 시절에는 하부리그 선수들도 후원회를 통해 생활의 보조를 받았으나, 현재는 세키토리로 승격이 확실한 극소수의 전도유망한 선수들을 제외하면 금전적 지원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마쿠시타(幕下): 대회수당(연 6회) 15만엔 + 1승당 2,500엔 + 장려금(승이 패보다 많을때) 6천엔, 대회 우승상금은 50만엔, 기본 퇴직금 20만엔
산단메(三段目): 대회수당(연 6회) 10만엔 + 1승당 2,000엔 + 장려금(승이 패보다 많을때) 4,500엔, 대회 우승상금은 30만엔, 기본 퇴직금 20만엔
죠니단(序二段): 대회수당(연 6회) 8만엔 + 1승당 1,500엔 + 장려금(승이 패보다 많을때) 3,500엔, 대회 우승상금은 15만엔, 기본 퇴직금 10만엔
죠노구치(序ノ口): 대회수당(연 6회) 7만엔 + 1승당 1,500엔 + 장려금(승이 패보다 많을때) 3,500엔, 대회 우승상금은 10만엔, 기본 퇴직금 7만엔
보면 알겠지만 선수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 주료 이상 세키토리에 오르기 위해 목숨을 걸 수 밖에 없는 구조다. 마쿠시타의 1위 등급과 주료의 최하위 13등급은 순서상으로 딱 하나 차이에 불과한데, 수입과 대우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 만큼이다. 마쿠시타의 기본 연 수입은 90만엔, 승리수당과 장려수당을 합쳐봐야 간신히 100만엔을 넘기는 정도로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친다. 만약 마쿠시타에서 한 대회 전승으로 우승한다고 쳐도 2달 총 수입이 50만엔 + 15만엔 + 23,500엔 = 약 67만엔에 불과하다. 그런데 주료로 승격해 한번만 대회에 나가도 기본 224만엔이 2개월 급여로 들어온다. 기타 보수와 출장비, 퇴직금까지 놓고 보면 북유럽과 제3세계 극빈국의 차이만큼 다른 차원의 세상이다.
5. 리키시들의 지위에 따른 연봉 추정
위에서 보듯 스모는 철저한 계급제 사회로 세키토리 미만 계급에서는 수입을 논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따라서 주료 이상이 되면 신분의 상승과 함께 경제적으로도 제법 풍요롭고, 퇴직 이후도 대비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구조 때문에 세키토리에서 하부리그 탈락이 예정되면, 선수들이 거의 은퇴를 결정한다. 다만 우승권에는 미치지 못해도 마쿠우치에서 꾸준히 활동하는 레벨의 선수들은, 주료로 강등되어도 수입은 80% 가까이 유지되기 때문에 바로 은퇴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주료와 마쿠우치 리그를 오르내리다가 마쿠시타 강등이 확정되는 경우 은퇴하게 된다.
주료부터 마쿠우치 중간 레벨까지의 평균 수입은 격차가 크지 않으며, 삼역 이상이 되면 대폭 뛰어오르게 된다. 최정점인 요코즈나는 격이 다른 수입과 대접을 받지만, 대회에서 10승 미만 이거나, 대회초반 하위 등급에게 연패를 당하거나 하면 강제 휴장을 시킨 후 은퇴 압력을 받게 된다.[42] 요코즈나는 명예직이라 강등이 없고 은퇴가 유일한 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 강자로 오랫동안 우승권에 머물 수준이 아닌 이상, 약체 요코즈나보다 오제키로 오래 남아있는 것이 여러면에서 유리하다는 시각이다. 오제키는 승격한 후 최소 강등조건이 2대회 연속 마케코시(승보다 패가 많은 경우), 즉 두 대회 중 8승 이상만 거두면 계속 강등되지 않는다.[43] 그렇게 오랫동안 오제키로 머물러 있으면 자연히 누적상여금도 올라가고, 근속가산금도 계속 쌓이기 때문에 오히려 단명 요코즈나보다 수입이 더 많은 경우도 있다. 그야말로 철밥통 고위공무원인 셈이다.
1) 평균 이상(반타작 승률 이상) 세키토리의 공식 연봉 추정
  • 주료: 최소 급여 약 1,630만 엔
  • 마에가시라: 최소 급여 약 2,060만엔 + 현상금 현금 수령 300만엔 이상[44]
  • 삼역: 최소 급여 약 2,630만엔 + 현상금 수령 600만엔 이상[45]
삼역이 아닌 마쿠우치 등급에서 요코즈나를 이기면 누적상여점수가 10점 가산되며, 기능상 등 3상을 수상하면 추가로 200만엔을 수령한다.
2) 오제키의 공식 연봉 추정
  • 최소 급여 약 3,720만엔 + 현상금 수령 1,000만엔 이상[46]
이 등급의 선수들은 요코즈나와 대전에서도 열세이긴 하지만 승리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고, 빅매치들이 많이 잡혀 현상금 봉투 갯수가 좀 더 많다. 우승권에 가깝기 때문에 누적상여금도 많아지고, 근속가산금도 빠르게 증가하여 장기 재위할수록 유리하다. 기본 4억원~5억원 정도의 연 수입은 기대할 수 있으며, 장기 재위하고 우승 경력이 붙어 누적상여금이 대폭 증가한 오제키들은 요코즈나 못지 않은 수입이다.
3) 요코즈나의 공식 연봉 추정
  • 최소 급여 약 4,550만엔 + 현상금 수령 2,000만엔 이상[47] + 당연히 우승권에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에 연 1회 정도 우승을 가정하면 우승상금 1,000만엔 이상
대략 요코즈나로서 현재 공식적인 수입을 가정한다면, 최소 연 8억원 정도는 기대할 수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초짜(?) 요코즈나의 경우이고, 여러번의 우승, 전승우승, 승수 누적으로 누적상여금이 대폭 증가한 중견 요코즈나라면 이보다 대폭 증가하게 된다.
현역 최고이자 역대 최강자 중 하나인 하쿠호의 연봉을 추산해 보면, 약 17~18억 원 이상이다.
[2014년 기준] 기본급 및 수당 약 4,200만 + 누적상여금 약 4,000만 + 현상금 5,796만[48] + 우승 3회 3,000만 = 1억 6,996만엔
다만 상기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공식적으로 표기되는 수입은 과거의 역대급 요코즈나들보다 더욱 증가한 것으로 보이지만, 공식 수입 외 후원금, 선물, 광고수입 및 판공비 등등으로 받는 유/무형의 소득은 많이 차이가 난다.

11. 실상


원래 스모는 힘이 좋은 역사, 그러니까 특별한 트레이닝 없이도 강한 사람들이 하는 경기였다. 당연히 과거의 역사는 비교적 근육질이면서 체지방량은 많으나 체지방률은 낮은, 흔히 7~80년대 에로 영화에 나오는 힘 좋은 변강쇠 같은 타입이 많았다. 이게 현대로 넘어오면서 중량을 이길 수 있는 게 없다는 공식이 퍼지고, 그로 인해 덩치가 큰 외국인들이 스모에 많이 진출하면서[49] 살을 찌우는 게 암묵적으로 강제된 스모 선수가 증가[50]하고 결과적으로 기술이나 순간적으로 방향을 바꾸는 힘의 사용 같은 것은 보기 힘들게 되었다. 한국 씨름이 이만기, 강호동에서 백승일, 최홍만, 김영현 등으로 변한 것과 동일하다.
참고로 이런 고체중자에게 유리한 시합 방식 때문에 스모선수들의 강함은 자신들의 체중을 최대한 이용한 밀어붙이기에 가까워졌다. 그런고로 동체중이나 자신보다 저체중자에겐 강하지만, 자신보다 힘이 세거나 체중이 더 나가는 상대에겐 약해지는 특징이 있다. 물론 정식 시합에서 상대에 비교해서 저체중의 선수들이 이기는 일도 심심치 않고, 호리호리해 보이는 테크닉 성향의 선수가 없는 것도 아니다. 대체로 그런 분위기라는 의미로 보면 된다.
[image]
하와이 출신이며, 스모 역사상 2번째로 무거웠던 287㎏을 기록한 (제6대) 고니시키 야소키치(小錦 八十吉)[51]. 문자 그대로 산만한 체격에서 나오는 큼지막한 돌진은 대단한 인기를 자랑했으며, 특히 노년 여성층의 호응이 엄청났다.
물론 이런 크고 아름다운 선수들이 판을 치던 80년대에 스모 역사상 최고의 요코즈나로 존경받고 있는 고 치요노후지는 183㎝, 127㎏ 정도로 스모 선수치고는 상당히 작은 체격이었으며, 이마저도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체중이 더 늘지 않아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엄청난 근육을 붙여 겨우 몸을 만든 것이다. 치요노후지의 전성기 시절 사진을 보면 일반적인 스모 선수의 몸매가 아니라, 잘 다져진 프로레슬러같이 탄탄한 몸이다.[52] 2천년대 들어서도 불미스러운 일로 은퇴한 몽골 출신 하루마후지의 경우, 요코즈나 시절에도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마쿠우치 시절에는 겨우 110㎏을 오르내리는 날렵한 몸이었다. 그 덕분에 아크로바틱한 몸놀림과 순발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기술을 선보이며 거구들에게 역전승을 거두는 일이 많아 인기가 매우 높았다. 또한 사상 최고의 요코즈나로 최다승을 비롯한 모든 기록을 갈아치운 하쿠호 역시 스모 선수로는 평균적이라 할 수 있는 체중인 '''151㎏''' 전후이며, 일본 출신 선수들보다 월등한 192㎝의 신장과 두터운 골격을 지니고 있다. 하쿠호 이전 최강으로 군림하면서 가장 화려했지만 사건사고와 논란거리를 동시에 몰고 다닌 이슈 메이커 아사쇼류 역시 최전성기의 체중은 140㎏ 내외였다. 이처럼 당연한 말이지만, 만일 체중이 스모의 승부를 결정짓는 유일한 요소라면 애초에 경기를 할 필요도 없이 체중을 재서 더 무거운 선수가 이기면 되는 종목이 되어버린다. 실제로 저체중 리키시의 시합을 보면 상당히 테크니컬한 움직임으로 자신보다 무거운 상태를 꺾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체중보다 높은 확률로 승부가 결정 나는 요소가 있는데 그건 뒤를 잡히고 밀어붙이면 진다는 것. 스모 경기 방식상 뒤를 잡히는 경우 거의 90% 이상의 확률로 패배한다고. 일반적으로 스모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밀어붙이는 힘인데, 이것은 동일한 근력이면 당연히 체중이 많이 나가는 쪽이 유리할 수 밖에 없으니 자연스럽게 체중을 키우면서 밀어내거나 버티는 힘을 강화하는 쪽으로 발전되어 온 것이다. 여기서 씨름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발생하는데, 씨름의 경우 당기는 힘이 가장 중요하고, 샅바를 당겨 중심을 흔드는 것부터 기본 전략이 된다. 반면 스모는 반대로 밀어내는 힘이 가장 근본이 된다. 때문에 한국 씨름 출신 선수들이 일본 스모에 진출하는 경우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라고 한다. 2천년대 중반 마쿠우치로 꾸준히 활약했던 인하대 씨름선수 출신 김성택(金成澤)[53]도, 서로 맞잡은 대치 상태가 되면 뛰어난 손기술과 잡아 당기는 힘으로 상대를 무너뜨렸지만, 기본적인 밀어붙이기에 한계를 보여 3역(三役)으로 올라서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엇비슷한 근력이라면 무조건 체중을 불려야 유리하다는 것이 일반화 된 후, 스모 선수들은 그 특유의 덩치 키우기에 매진하게 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100㎏은 가뿐히 넘기는 스모 선수들이 그 체중을 유지하고 더 불리기 위한 식사 요령이 있는데, 바로 '''하루에 두 끼만 먹는 것'''이다. 그 두 끼를 그야말로 폭식하면, 쉴 새 없이 먹는 것보다 체중이 더 크고 빠르게 올라간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지방은 몸에서 쓸 에너지를 비상용으로 축적해두는 용도로 늘어난다. 하지만 영양분이 자주 공급될 경우 몸에서 도리어 지방축적을 줄인다고 한다. 그래서 스모 선수들과는 달리 보디빌더들은 고단백 저지방의 적은 양의 음식을 자주 먹는 방법으로 근육을 만든다. 그렇지만 최근 스모선수들은 보디빌더들이 비시즌에 섭취하는 웨이트 게이너같은 고칼로리 셰이크도 섭취하는 비중이 늘었다. 고강도의 운동을 한 뒤에 엄청나게 대량의 고형식의 식사를 폭식하다시피 먹다보니 위장장애로 사고를 겪는 선수들이 있어서이다.
보통 스모 선수하면 처음부터 뒤룩뒤룩한 살덩어리들이 입문해서 그대로 선수로 활동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54], 의외로 10대에 입문하는 선수들의 체형은 일반인에 비해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심지어 7~80㎏대의 입문자들도 꽤 많은 편이라고. 스모 지도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오히려 골격이 자라기 전부터 지방으로 뒤덮인 뚱뚱한 체형은 순발력이 떨어지는데다, 일류 선수에게 필요한 근력과 근 지구력을 꾸준히 기르면서 체형을 만들기가 더 어렵다고 한다. 2천년대 초반 스모계의 트러블메이커이자 절대강자였던 아사쇼류의 경우, 일본으로 처음 건너와 도장에 입문했을 때 체중이 놀랍게도 70㎏을 조금 넘는 정도였다고 한다. 타고난 근력과 놀라운 순발력을 유지하면서 꾸준히 근육을 만들고 그 위에 갑옷처럼 지방층을 쌓는 방식으로 증량해 나가기 시작, 전성기에는 136~142㎏을 유지하면서도 타고난 순발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류 스모 선수가 되려면 물렁살 비계살로는 어림도 없고, 소위 근육돼지가 제일 이상적이라는 말이다. 이들이 주로 먹는 음식으로 고칼로리의 냄비 요리인 창코나베가 유명하다[55]. 무슬림라마단 기간 야간에 먹는 이프타르에 맞먹는 고열량이라는 것만 빼면 맛도 영양도 괜찮은 요리이니 혹시 기회가 된다면 한번 먹어봐도 좋을 듯하다.
지나친 칼로리 섭취와 극단적인 체형의 불균형 때문에 스모 선수들의 평균 수명이 꽤 짧은 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평균 60대 중후반 정도로 초고도 비만치고는 오래 사는 편이라고 한다.[56] # 그래도 운동했던 사람들이니깐…은퇴하고 살을 쫙 빼는 선택지도 있다. 일례로 65대 요코즈나이자 스모협회 역대 최연소 임원에 철저한 자기관리로 유명한 다카노하나의 경우 현역 은퇴를 앞둔 말년의 체중이 161㎏였으나, 스모를 은퇴한 후 85㎏까지 감량에 성공하여 그야말로 '반쪽'이 되었다. 덤으로 현역 시절부터 귀공자같던 외모가 더욱 빛이나 미중년의 포스를 보이고 있다.[57] 물론 고니시키처럼 은퇴 후에도 감량을 전혀 못 해서 생명이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고 위장축소수술까지 한 경우도 있다.
마쿠우치 선수들은 긴자 술집에서 최고로 환영받는 손님들이다. 수입이 넘치는데 쓸 데는 없으니 씀씀이가 크지, 덩치만큼이나 술도 푸짐하게 마셔대지, 거기다가 츠케비토의 존재 때문에 혼자 다니는 법이 없다. 한 번 들를 때마다 수백만에서 수천만 원씩 소비하는 큰손이다. 당연히 무한리필 집에서는 가장 보이콧하는 손님 중 하나이다.[58]
하루에 아주 짧은 경기 한 판을 이기는 걸로도 꽤 많은 수입을 올린다고 한다. 스모 경기가 길어봐야 1분을 넘지 않고 아주 짧은 경우는 0.2초 만에 승부가 나는 경우도 있으며, 3분이 지나도 승부가 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메인심판인 교지는 약간의 휴식을 줄 수 있으며 경기속행 때는 본래의 승부 장면 그대로 복원한 다음 다시 경기를 진행해 승부를 유도할 수 있다. 그렇지만 대개 1분을 넘길 경우 긴 경기며, 휴식을 일시적으로 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스모판에는 돈이 굴러다닌다.'는 속담도 있으며[59], 돈을 벌기 위해서 온 외국인들도 제법 있다고 한다. 북유럽이나 미국 등에서 온 선수들도 있지만, 평균적으로 가장 강한 외국인 선수는 몽골 출신 선수들이다. 예전에는 하와이 출신[60]들이 스모판을 휩쓸었던 시절도 있다. 20세기 말 쯤? 이 시기에 대표적인 선수가 체중 200㎏이 넘어가는 고니시키, 아케보노, 무사시마루 등이며, 보통 2명을 넘기기 힘든 요코즈나가 5명이나 나온 시기이기도 하다. 오제키도 두 자리 수가 된 것은 현대 스모 이후 최초라고…
2008년에는 불가리아 출신의 고토오슈 가쓰노리가 유럽인 최초로 우승하기도 했다. 2000년대부터 말만 일본 국기이지 챔피언 자리는 정작 외국인들이 휩쓰는 상황(…)이 되다보니, 일본의 자존심인 스모를 되찾자는 마음으로 일본인 요코즈나가 탄생하기를 바랬으나, 현실은 요코즈나는 커녕 일본인의 우승도 요원한 상태…였다가 2016년에 고토쇼기쿠(琴奨菊)가 10년 만에 일본인 우승을 달성하고, '''2017년에 기세노사토(稀勢の里·본명 하기와라 유타카) 선수가 몽골인 요코즈나 하쿠호(白鵬)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하면서 19년 만에 일본인 요코즈나가 탄생했다.''' 하지만, 기세노사토는 요코즈나가 된 이후 부상과 그로 인한 성적 부진에 빠지면서 급기야 일본 요코즈나 심의위원회로부터 좀 더 분발하라는 '격려' 결의를 받기도 하는 등 순탄치 못한 선수 생활을 이어간 끝에 결국 2019년 1월 16일에 은퇴를 선언했다.
사실 이종격투기만 봐도 답이 나오지만 피지컬에 있어서 몽골계를 제외한 아시아인들이 체격 등 비슷한 조건에선 서양인들한테 밀리는게 현실이다보니 서양인들이나 몽골인들, 폴리네시안들이 스모판을 휩쓰는건 당연하다고 볼수도 있다. 일본인 선수들 입장에선 외국인들이 진출하면서 불리해진 셈이다.

12. 사건사고



12.1. 승부조작


2010년 6월경에는 적지 않은 수의 선수와 스승들이 야쿠자들과 관계된[61] 야구도박에 연루되는 문제로 인기가 떨어져 NHK에서 여름의 나고야 대회 생중계를 중단해버렸다. 이 도박사건으로 인하여 천황 사배라고 부르는 우승컵도 나고야 바쇼에서는 주어지지 않았고 대거 유력한 후원인 및 회사들이 나고야 바쇼에 대한 후원을 중단하여 야구도박 사건은 스모역사상 최대의 불명예 사건 중 하나로 남게 되었으며, 일본 스모 협회에서는 이사장을 교체하고 폭력단과의 연계를 단호히 근절하고자 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2010년 9월 경기부터 NHK방송을 재개했으며, 우승컵 및 각종부상들이 다시 주어지기로 발표되었다.[62]
그러다가 야구도박사건을 수사하면서 경찰이 승부조작을 시사하는 내용의 문자메시지[63]를 찾아냈고, 2011년 들어와서 현역 스모선수 2명과 지도자 1명이 스모경기의 승부조작을 인정함으로서 충격에 빠졌다. 정기 리그전에 해당하는 2011년 3월 하루바쇼(春場所)는 취소되었고[64], NHK와 후지TV는 자체적으로 열던 스모대회를 취소했다. 문부과학상은 스모협회의 공익법인 허가를 취소할수 있음을 시사하고 나섰다. 스모 대회를 독점 중계해온 NHK는 스모 중계에서 완전 철수할지를 신중히 검토 중이다.
승부조작사건으로 인한 신인도 추락으로 NHK는 5월 스모중계권을 포기하고 대회를 방송하지 않았다. 단 정식명칭 나츠바쇼가 아닌, '기량심사바쇼'라는 이름으로 5월 경기는 매년 거행되던 형태로 국기관에서 치루어졌다. 또한 승부조작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다수의 마쿠노우치급과 쥬료급 리키시가 은퇴를 하는 크나큰 수업료를 치르게 되었다. 사실 이 승부조작사건에 연루된 리키시들도 일부는 진위를 두고 논란거리가 되었다.
7월의 나고야 경기는 NHK에서 중계되었다. 앞으로 다른 예외상황이나 물의가 없는 이상 계속 NHK와 스모협회간 중계권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스모가 예전에 비하여 형편없는 상황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본의 국기'임을 자임하고 있다.
이 와중에 외국인 선수들한테만 승부조작을 뒤집어씌워서 몽골·유럽 선수 다수와 한국인 유일의 세키토리였던 김성택이 강제 은퇴를 해야 했다. 물론 김성택 본인은 혐의를 부인하고 있으며, 일본 내에서도 김성택 등의 외국인 기사들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우는 데에 대한 의문이 많았다.[65] 특히 김성택의 경우는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승부조작에 가담한 가능성이 희박한 편이다. 링크 이들 중에서도 물론 조작에 참여한 사람은 많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봐도 노골적으로 조작질해댔던 일본 자국인 선수들은 다 봐주는 스모협회를 보며 조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인 리키시들도 이 건으로 퇴진한 경우는 있었으나, 직접적 정황이 나타난 소수를 제외하고 별로 인기가 없는 리키시들이었으며, 수사진행 상황에서도 다수의 경우가 물증 아닌 일부인들의 진술 위주로 진행되었다. 사실 가장 의혹이 심한 선수가 장기간 오제키를 지키고 있었던 '''순혈 일본인'''인 카이오인데 이 선수에 대해선 조사조차 안 했다는 거다. 카이오는 2천년대 후반 들어 스모 팬들 사이에서도 철밥통 오제키나 공무원 등으로 불리면서 조소를 받을 정도였는데, 10년이 넘게 오제키 자리에 눌러 있으면서 1년 내내 8승 7패라는 성적으로 자리만 지키는 등 승수 맞추는데 급급해 요코즈나에 올라설 가망성은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우승자 윤곽이 드러난 후 강등을 막기 위해 거의 눈에 보일 정도로 카이오에게 무기력하게 패하는 경기들도 노골적으로 눈에 보일 정도였다. 스모의 계급 구조 상 오제키가 되면 2번 연속으로 반타작(15회 중 8승 이하) 승률이 되지 않는 한 계속 그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 관례이다. 일본인 리키시들이 점점 줄고 몽골 출신 요코즈나들이 득세하는 와중에 사상 최다승을 목표로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카이오의 강등을 노골적으로 막는 시합내용이 몇번이나 비난을 받을 정도였다. 이처럼 죄질로 따지면 카이오야말로 영구제명을 시켜도 시원찮을 수준의 노골적인 오제키 사수질이 계속됐는데도 정작 카이오는 제명자 명단에서 빠져있었다. 그 카이오는 2011년 7월 나고야 바쇼에서 연령과 성적부진으로 은퇴선언[66]을 하였다. 시기가 늦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카이오의 존재는 점점 외국인 리키시에게 위축당하는 일본인 리키시를 볼 때 상징적으로 희망의 존재가 되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사실 훨씬 이전부터 승부조작 의혹이 제기되긴 했다. 《괴짜경제학(Freakonomics)》이란 책에서도 선수들이 '지면 강등'인 경기에서 기괴할 정도로 승률이 높다는 점[67], 선수층이 좁고 양성 도장들도 서로 관련이 있다는 것, 경기자체가 순식간에 승부가 지어지는 관계로 슬쩍 힘을 빼주는 정도로 간단하게 져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승부조작의 난이도에 비해 얻는 인센티브가 너무 크다는 것[68]등을 들어 아마도 승부조작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문제를 증명하겠다고 했던 이들 중 두 명이 의문사를 맞았다. 한 명은 은퇴 후 도장을 운영하다가 도장을 매각한 후 스모 업계를 떠났던 코테츠야마(高鐵山)였고, 다른 한명은 전 요코즈나 키타노후지의 후원회장이었다. 이들은 1996년 4월 스모판에 만연했던 승부조작과 적폐들에 관련된 내부고발 저서 발간을 앞둔 상태였으나 공교롭게도 이 두 명은 죽은 날짜와 병원, 병명 및 상황이 모두 일치하여 의혹을 부채질하였다. 이 책은 '''1996년'''에 나왔으니, 고질적 문제였던 것이다.
2011년의 사건은 표면적으로 밝혀진 바로는 조작은 가축과 사람의 경계선이라고 불리는 마쿠시타~주료 계급의 경기에서 이루어졌다고 발표되고 덮였다. 그러나 예전부터 승부조작에 대해서 암암리에 아는 사람은 다 알고있었지만 모른 척 하고 있었던 치부가 구체적인 물증과 함께 터져나왔기 때문에 도저히 덮을 수 었었던 것 뿐 실상 마쿠우치 레벨에서의 승부조작에 대해선 감히 제대로 파악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NHK 공중파에 방송되고 각종 대기업 중소기업들의 공식적 비공식적 스폰서가 붙는, 그리고 천황과 총리의 이름으로 우승배가 수여되는 마쿠우치 레벨에서의 수 십년간 쌓여온 승부 조작이 낱낱히 파헤쳐지면 업계 자체의 근간이 흔들려버리기 때문에 건드릴 수가 없는 것. 당장 위에 언급된 서적도 마쿠시타~주료 계급이 아닌 요코즈나들도 승부조작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정면으로 고발하는 저서였고, 대표적으로 언급된 키타노후지는 70년대, 치요노후지는 80년대 활동하던 선수이니 만큼 승부조작 문제는 수십년 전 부터 암암리에 계속되어 왔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상징적 존재로 스폰서와 도장을 비롯한 많은 것을 짊어진 요코즈나들은 10승 정도는 거두어야 체면치레를 했다고 인식되는 부분이 있었기에 정말 실력 대 실력으로 맞붙는 경기는 5경기 남짓일 뿐, 부상 관리와 전적 관리를 위해 나머지 승부에 있어 돈을 받고 져준다거나, 적당한 액수를 지불하고 상대를 매수해 승리를 거두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특히 당시 스모의 상징이였던 쇼와의 대 요코즈나 치요노후지가 당시의 연승 기록을 갱신했던 53연승 과정에도 승부조작 문제가 얽혀있었음을 암시하는 등 [69] 이런 초 거물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 작가들 죽음의 원인이라고 의심되기 하는 상황. 스모협회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전 현직 요코즈나, 오제키 경력자들 또한 이러한 승부조작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2011년 당시 전 오제키 출신 협회 이사장의 꼬리자르고 사태를 봉합하는 결정은 업계를 살리기 위한 구국의 결단으로 내부에서 칭송받았다. 또한 스모협회 개혁을 외치던 타카노하나가 내부의 견제와 파도 파도 나오는 본인의 숨겨왔던 치부들을 견디지 못하고 내로남불의 전형과도 같은 모습으로 비참하게 스모협회를 그만두고 나갔으나, 그에 대한 현지의 반응이 덮어놓고 비난 일색만은 아닌것이 다른 의미로 본인도 대단히 깨끗하진 않았으나 결국 이 조작범들로 가득한 스모협회라는 적폐를 일신하려던것이 타카노하나였기 때문이다.[70]

12.2. 2017년 요코즈나 하루마후지 폭행 & 은퇴 사건


한국에선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현지에선 아래 사건들 이상으로 꽤 시끄러웠던 사건으로, 2017년 10월 26일 당시 요코즈나였던 몽골 출신 스모 선수 하루마후지가 후배 몽골 출신 선수인 타카노이와를 술자리에서 선배가 훈계하는 데 스마트폰을 만지는 등 버릇이 없다는 이유로 주먹, '''가라오케 리모콘'''[71] 등으로 수십 차례 구타를 가한 사실이 밝혀졌다.[72] 피해자인 타카노이와는 머리가 찢어지는 등 부상을 입어서 입원을 할 정도였다.
후에 타카노이와가 자신의 감독(오야카타)인 타카노하나와 상담 후 하루마후지를 경찰에 신고해서 언론을 타고 사건이 공공연하게 알려지게 된다. 2010년에 요코즈나 아사소류의 만취 폭행 사건 이후로 현직 요코즈나가 폭행 사건에 얽매인 건 7년만이며, 여태까지 문제시돼왔지만 공공연하게 말이 나오지 않던 일본스모협회의 선수 관리능력, 요코즈나의 자질 등에 대한 의문이 한번에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스모를 다른 스포츠와는 다른 국기(國技), 즉 스포츠맨쉽 뿐만이 아닌 역사와 전통, 품위를 갖춘 스포츠로 인식하고 있는 만큼 그 정점에 서 있는 요코즈나가 이런 사건을 일으켰다는 데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결국 피의자인 하루마후지가 대부분의 행위를 시인하고 은퇴하는 선으로 어느정도 마무리되었지만 스모협회의 대응, 일본 스모계 자체에 대한 불신과 의문 등은 남아있는 상황이다. 특히 이 사건의 핵심 인물들이 순혈 일본인이 아닌 몽골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역시 외국인은 일본 문화의 정수인 스모를 받아들일 줄 모른다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까지 머리를 내밀 정도. 참으로 일본스러운 상하관계를 대강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보기엔 실소만 나오는 이야기지만. [73]
이 사건에 대해 일견에서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타카노이와의 스승이였던 타카노하나는 현재 스모협회의 주도하에 흘러가는 스모판에 대해 여러가지로 불만이 많은 상황이였다. 몽골리안이 득세하는 스모판[74]에도 불만이 있었던 타카노하나가 이걸 기회삼아 스모 협회의 후진성에 경종을 울리려 했다고도 하는데…그러나 정치력이 이상을 따라주지 못했던 타카노하나는 아쉽게도 자신의 이름값과 국민적 지지를 가지고도 스모 협회의 철옹성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게 된다. 스모 협회에서 설 자리를 잃은 타카노하나는 자진폐업 형태로 도장의 문을 닫으며 2018년 스모판에서 발을 빼고 만다.
하루마후지의 스승인 이세가하마(伊勢ヶ濱) 오야카타는 제63대 요코즈나인 아사히후지 세이야(旭富士 正也)[75]였는데, 타카노하나의 등장에 뭔가 기대를 걸고 캐스팅 보터로서 지원을 해줬더니 이 사건으로 제대로 통수를 맞은 꼴이 되고 말았다. 방귀 뀐 놈이 성을 내는 것 같지만, 오히려 타카노하나가 이 사건 이후로 파도 파도 괴담만 나오며 이미지에 많은 타격을 입게 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폭행 피해자였던 타카노이와가 자신의 시중을 드는 츠케비토를 폭행했다는 것이 밝혀져 2019년 강제 은퇴를 한 것. 결국 타카노하나는 등잔 밑이 어두운 줄 모르고 큰소리를 친 바보가 되어버렸는데, 덤으로 타카노이와의 단발식에 참석하지도 않는 몰인정한 모습까지 보여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76] 정작 타카노이와와 얽혀 모든 영광을 잃게 된 하루마후지[77]는 '더 이상 감정은 없다'며 '''단발식에 참석'''해 가위를 넣고 같은 몽골인으로 은퇴 이후의 삶을 응원하는 모습을 보여 오히려 대인배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게다가 다른 제자였던 타카노후지 또한 시중인에게 가한 가혹행위가 두 번이나 밝혀져 강제 은퇴당하게 된다. 첫 폭행때 반성의 의미로 강제 휴장조치가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반성 없이 재차 이런 일이 발생했으며, 변명으로 '중졸로 도장생활을 하며 좁은 시야를 갖게 되었다' 같은 소리를 했기 때문에 도대체 타카노하나의 도장 분위기나 지도 방식이 어느 정도로 개판이었길래 제자들에게서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지 의구심만 키웠다고.
후폭풍으로 타카노하나의 다른 제자였던 타카케이쇼 미츠노부(貴景勝 光信)는 1번의 우승과 1번의 준우승을 포함한 3바쇼 33승을 채우고도 오제키 승급을 반려당하는 일까지 발생한다(그 다음 바쇼가 끝난 뒤에야 승급). 오제키에 오른 타카케이쇼는 2020년 9월 바쇼 준우승, 11월 바쇼 우승이라는 요코즈나 승급을 기대해볼 법한 성적을 올렸지만, 심판부장 이세가하마 오야카타가 (요코즈나 승급에는) 아직 부족하다[78]고 언론에 공표하는 걸 보면 아직 감정이 남아있는 듯.[79]

12.3. 2018년 도효 여성 출입 금지 논란


2018년 4월 4일, 교토 부 마이즈루 시 문화공원체육관에서 봄맞이 스모 경기 도중 인삿말을 하던 마이즈루 시장 다타미 료조(多多見良三)가 지주막하 출혈로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관객들이 우왕좌왕하고 남성 관계자들도 어쩔 줄 몰라하는 와중에 관람석에 있던 한 여성[80]이 응급처치를 위해 도효 위로 올라가서 응급조치를 시도하였으며, 나중에 (의료계 종사자로 추정되는) 여성 두 명이 또 달려왔다.[81]
그런데 이때 장내 아나운서가 '''"여성은 도효에서 내려가 주십시오."'''라는 안내 방송을 내보낸 것이 알려져 엄청난 욕을 먹었다.# 당시 도효에 있던 경기 심판도 여성들에게 똑같이 이를 요구했다고 한다.[82] 결국 해당 여성들이 내려간 이후 구급대가 도착, 시장을 병원으로 후송했다.
그 후 관계자들은 도효에 부정탔다면서 소금까지 뿌렸다. 스모 협회는 여성 때문에 소금을 뿌린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도효 위에서 리키시가 부상을 입거나 갑작스럽게 쓰러지는 등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 소금을 뿌리는 건 실제로 존재하는 작법이지만, 아사히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도 그렇고 다들 '여성이 도효에 올라온 탓에 소금을 뿌린 거 아니냐'는 분위기.
사건이 알려진 뒤 일본 국내에서는 거센 비판이 휘몰아쳤다. 안 그래도 21세기까지 이런 악습을 유지하냐고 논란이 많았던 참이었고, 2000년에는 오사카 부지사 오오타 후사에(太田 房江)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도효로 올라가지 못하고 경기 장소 아래에서 우승자에게 상을 수여하여 논란이 되었을 정도였다. 여기에 더해 '''사람의 생명이 달린 급박한 상황'''[83]에서까지 구태의연한 금녀 관습을 고집하는 스모계에 대한 불만이 곳곳에서 폭발했다. 이 사건으로 각종 미디어에서는 일제히 스모 협회를 극딜했고 SNS상에서도 스모계의 구태의연한 악습에 비난이 폭주했다. 한국, 중국, 영국, 미국, 독일, 싱가포르 등 수많은 외국 언론에 해당 사건이 대서특필 된 것은 덤. 다만 이 와중에도 '전통(...)은 지켜야 한다', '남자 의사가 있었으면 될 문제였다[84] '는 반론을 내세우며 어그로끄는 일본인들도 있었다.
결국 스모 협회는 "사람의 생명이 달린 상황에 부적절한 대응이었다"는 내용의 공식 사과문을 올렸으나, 금녀의 전통은 계속 지키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빈축을 샀다. 사과할 때 심장 마사지를 실시한 여성에게 감사는 표했지만, 여성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한 마이즈루 시장의 입장은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이 논란이 된 이후로 스모 경기 티켓이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 효과를 낳았던 모양이다.
정작 스모계에서 혼성 시합 금지 및 여성 참여 금지의 전통을 내세운 시기는 메이지 시대다. 근대화 과정에서 정부가 여성이 옷을 풀어헤치고 스모를 하는 것을 후진적인 문화라고 간주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니 이 '전통'이라는 것도 고작해야 한 세기 정도 된 것에 불과하다. 근대 이전의 기록을 보면 여성이 스모를 즐겼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보인다.[85]

12.4. 2018년 어린이 시범 경기 여아 차별 논란


게다가 어린 여자아이까지 막아선다는 점에서 다시 논란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이에 스모 협회는 여자가 남자에 비해 부상을 당하기 쉬워, 안전을 고려해 그렇게 결정했다”고 언급했다는 보도까지도 나와서 애초부터 협회의 결정으로 당초 참석이 예정되어있던 5명의 여자아이들은 참석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한 스모 관련 단체에서는 ”불참 통보를 받아 실망하고 울었던 아이도 있었으며 다음에는 참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언급했다고 한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당연히 논란이 됐는데 스모 경기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이러한 과거 악습인 금녀 규칙을 굳이 고수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는 것이 지적되었다.

13. 그 외


폐도령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요시와라 같은 유흥지역에서 도검을 소지한 사무라이와 자주 물리적 충돌을 빚었던 계층이기도 하다. 리키시들이 유흥가로 놀러가서 취했다가 마찬가지로 만취한 사무라이들과 시비가 붙어서 벌어지는 싸움이었다. 사무라이 측이 도검을 소지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리키시한테 털리거나 심지어 맞아 죽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문치주의가 정착하면서 에도 막부가 칼을 뽑는 행위를 엄격하게 다루었던 것도 있지만). 이런 사건 중에서는 오사카 유곽에서 신선조 창설 전의 세리자와 가모 일행과 스모 선수단이 싸움을 벌인 오사카 난투 사건이 제일 유명한 사건이지만 실상은 좀 과장되었다. 일단 양측의 난투가 있었던 것은 맞으나 봉행소에서 작성된 정확한 조서가 존재하지 않아서 실제 양측 가담자의 수, 사상자는 불분명하다. 분명한 건 가모 일행은 진검, 선수단은 몽둥이로 싸웠고 후세의 신선조 옹호 측은 가모 일행이 숫적 불리함을 극복하고 리키시 수십 명을 베어 죽였다고 주장하나 신선조 창설 이전 무직 낭인에 불과했던 세리자와 가모가 그런 학살을 벌이고도 무사했다는 건 앞뒤가 안 맞는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우메보시, 낫토, 가부키와 함께 일본 문화의 관문 중 하나. 우메보시와 낫토, 가부키, 그리고 스모를 '''순수한''' 의미에서 즐길 수 있다면 일본 문화에 상당히 친숙해졌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지도. 고종과 순종은 망국 이후 석조전에서 요코즈나 히다치야마가 선보이는 스모 경기를 관람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스모 선수가 살이 쪄서 대변 후 뒷처리를 못하므로 그부분을 닦아주는 직업이 실존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86],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스모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사람들이 많은 일본에서조차도 아직까지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떠돌고 있는 도시전설 중 하나인데[87], 실제로 스모 선수는 위에서 언급된 바 있듯, 살이 찌긴 했어도 운동 선수라, 일반인들과 근육량, 운동량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난다. 유연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실제 스모 선수가 하는 훈련 중 '마타와리(股割り)'라고 해서 양 다리를 벌리고 앉은 상태에서 땅에 배와 가슴을 붙이는 훈련이 있을 정도로, 살이 찐 상태에서도 운동을 잘 하지 않는 일반인보다 대체로 유연성이 훨씬 좋다. 즉, 혼자 뒷처리를 하는 것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스모 선수에게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뜻. 실제로 어떤 일본 방송에서 유명 스모 선수에게 장시간 비행기를 탔을 때 일반인들에게도 조금 비좁은 비행기 화장실을 어떻게 이용하고 대변 후 뒷처리는 가능하냐는 질문을 했는데, 전혀 문제 없이 이용하고 뒷처리까지 잘 하고 나왔다는 답변을 한 적이 있다.
이러한 속설이 생기게 된 계기는 위에서 언급한 '쓰케다시(付出) '제도의 쓰케비토(付け人)'가 그런 일을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 때문인데, 마쿠시타(幕下) 이하 리그에서는 주어지지도 않고(오히려 그 이하 선수들은 쓰케비토가 되는 입장), 잔심부름이나 짐을 들어주거나, 등을 닦는 역할 정도를 도와주는 것이지, 역시 그부분을 닦는 것을 도와주지는 않는다고 한다.
스모 경기중에 입는 저 바지는 '마와시'라고 부르는데, 일반적으로는 '''세탁하지 않는다'''. 세탁을 하면 일종의 '기'가 씻겨간다고 믿는 풍조가 있기 때문이다. 경기 끝나고는 빨랫줄에 걸든가 해서 그냥 바람과 햇빛에 말리는 걸로 끝. 국내에 개봉했던 으랏차차 스모부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스모 선수들은 머리에 촌마게를 트는데 리키시들에게는 이 촌마게가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지위에 따라서 형태가 전부 다르다고 한다. 또한 경기 중에 상대의 촌마게를 쥐는 것은 반칙행위이다. 은퇴하면 촌마게를 자르는 단발식이 열린다. 덕분에 머리카락이 심심한 리키시들은 이 촌마게 트는 것이 고역이라고 한다. 정반대로 머리숱이 너무 많은 경우 나카조리(中剃り)라고 하여 '''속알머리를 배코친 뒤''' 상투를 튼다.
스모 경기 중 임팩트 있는 시합(대개는 요코즈나가 패배했을 때다)이 나오면 관중들이 방석을 집어던지는 퍼포먼스를 해준다. 스모 경기장의 방석은 빌릴 때 일정한 보증금을 지불하고 반납하면서 보증금을 돌려받는 것이니, 이걸 던져주는 것은 즉, '잘했다. 이거(보증금)나 가져가라'는 뜻을 표현하는 풍습. 다만 방석이 날아들면 '위험하니 방석을 던지지 말라'는 장내방송이 나오게 되는데, 방석이 문제라서 그러는 것은 아니고 열기에 취해서 엉뚱한 물건을 던지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정규바쇼에서 우승하면 우승자가 기자회견에 참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2014년 5월 나츠바쇼에서 우승한 하쿠호가 기자회견을 거부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관계자가 몇 번이고 설득했음에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아무런 입장 표명도 없었는데, 며칠 후 하쿠호가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리며 '5월 바쇼 중에 임신 5개월이던 부인이 유산을 했는데, 기자회견에 참석하면 유산에 대한 질문이 나올 것으로 생각해 부인을 배려하고자 기자회견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원문기사 그의 블로그엔 그를 격려하는 메세지가 1000여건 이상 들어오고, 한편으론 매스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원문기사

후타바 채널 같은 곳에서 스모를 소재로 한 합성사진에서는 스모선수가 막 날아다니고 에네르기파 같은 것도 쓰거나 하는 식으로 패러디된다. 바로 이 짤방. '相撲(스모)'가 아니라 'SUMO'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 [88]
이것들의 원조는 바로 위의 영상으로, 일본에서는 오니무소(鬼無双)[89], 해외에서는 The Real Sumo Fighting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유튜브 업로더 checkit014[90]가 만든 이 영상은 8탄까지 나왔으나, 그 이후 더 이상 올라오지 않고 있다. 그런데 2015년 4월 25일, 니코니코 초회의를 통해 이벤트 매치가 벌어졌다.
스모를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만들자는 이들도 일본에 있긴 한데, 일본 스모 협회조차도 매우 부정적이다. 다만 비 올림픽 스포츠 종목들의 종합 경기 대회인 월드 게임에서는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월드 게임과는 별도로 스모 세계 선수권 대회도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보통 NHK BS위성방송에서 스모 경기를 중계 방송해주는 바람에 애니메이션 덕후들에게 본의 아닌 피해를 끼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사건은 2000년 3월 21일 카드캡터 사쿠라 최종회 방영 사건이었다. 당시 무사시마루(武蔵丸)와 타카노나미(貴ノ浪)의 경기가 연장되는 바람에 카드캡터 사쿠라 방송이 늦어지면서, 결국 최종편 녹화 당시 사쿠라 대신 '''스모를 녹화'''할 수 있었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장면 4분 녹화를 날리게 만든 사건이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사건을 '''무사시마루의 비극(武蔵丸の悲劇)'''이라는 이름으로 회자될 정도다. 자세한 내용과 당시 방영 영상은 해당 문서을 참고.
스모의 승패를 가를 때 부채(軍配ぐんばい)를 올려서 판정을 하는데, 여기서 일본어의 관용구인 ~に軍配が上がる가 파생되었다. 직역하면 '~에게 부채가 올라갔다', 즉 이겼다는 의미이다.
스모의 등급 결정과 관련이 없는 임시 대회나 순업 에서는 숏키리(初っ切り)라는 코너가 있는데, 본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리키시들이 나와서 스모의 금칙들을 재미있게 콩트 형식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전통이다. 처음에는 단지 금칙들만 가지고서 개그를 보여주었다가, 요즘에는 '''프로레슬링 패러디가 나온다던지''' 다양한 소재들이 나온다. 이거 때문에 스모를 즐겨보는 사람들도 많은 듯. 예시 1, 예시 2.
덴뿌라와 더불어 일본을 방문한 찰리 채플린살린 스포츠이기도 하다.
이런 스모의 입지 덕에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 시리즈에도 스모가 나온 적이 있다. 여기서 한지우잠만보를 끌고 와서 우승했다.

14. 관련 인물



15. 관련 캐릭터


아래의 캐릭터들과는 달리 키도 작고 여리여리한 체격의 부잣집 아가씨임에도…
치토세가 담임 선생님한테 와피코를 뛰지 못하게 숙제를 주었는데 담임 선생님은 아예 애들을 밖에 내 보내는 다음에 문을 잡귀는게 아이디어라고 하지만 결국엔 와피코가 시소로 이용해서 스모 소가 난입해서 소가 시소를 누른 다음에 담임 선생님은 성공하는 순간 결국엔 담임 선생님은 패배 하고 말아 버렸다.
스모부 소속 유령부원.

16. 관련 문서


  • 격투기 무술 관련 정보
  • 속이다 - 원래 명칭이 스모 정식 기술명인 네코다마시(ねこだまし)이다. 기술 효능 또한 유래에 걸맞게 선공기+풀죽음 효과.
  • 타타 스모 - 차량의 의미가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1] 용호상박 할 때 그 '상박'이다. 씨름도 상박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2] 뒤에 앉아있는 선수는 토치아즈마(栃東)[3] 초고도비만이나 다름없는 체중과 몸매, 그리고 선수생명이 다하면 정상적인 체중으로 돌려놔야 하는데 문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4] 일본서기에 スマ라는 표현으로 등장.[5] 사실 말이 의식이지 근대부터는 거의 준비동작, 몸풀기 식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6] 영화 '으랏차차 스모부'의 원래 제목인 '시코, 밟아버렸다(シコふんじゃった)'도 여기에서 딴 것이다.[7] '''머리카락'''이 닿아서 진 선수가 실제로 있다.[8] 주먹으로 때릴 때, 급소를 찌를 때, 가슴이나 배를 찰 때 등.[9] 신장 제한이 지금보다 엄격했던 시절 두피에 실리콘 보형물을 집어넣고 제한 신장을 넘겨 리키시가 됐을 정도로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던 마이노우미가 이런 선수로 유명했다. 기술 백화점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10] 예전에는 일문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 헤야 또한 허용된 적이 있었다.[11] 도장 개설과 계승의 필요조건이기도 하지만, 카부를 받아서 노인 가명을 얻으면 일본스모협회의 이사 선출 등 경영에 참여할 수 있고 매월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1천만 원이 넘는 급여를 받을 수 있다. 카부만 보유하고 개별적으로 도장을 개설하지 않은 노인들 또한 여럿 존재한다. 도장을 개설하기 위해서는 그런 카부를 계승해서 분가하거나 인수해야 한다. 카부는 일본국적(취득)자에 한해서 보유할 수 있다. 현재 일본스모협회의 카부 정수는 105주다. 이전에는 요코즈나로서 일본국적(취득)자 경우에 한해 1대에 국한되어 인정되는 카부를 부여하는 제도가 있었으나 폐지되었고 직전 이사장인 기타노우미 이사장의 사망과 다카노하나 이사의 스모계 은퇴로 해당 주식은 모두 소멸되었다.[12] 요코즈나, 오오제키 경험자의 경우 해당 계급에 오르는 즉시 카부 계승 가능 자격이 생긴다.[13] 소속 헤야에 계승 조건을 갖춘 후임자가 없는 경우 같은 일문 소속의 후배가 스승 자리를 계승하기도 하고, 후임자 조건이 되는 선수가 있더라도 그러한 경우가 생긴다. 종종 돈으로 다른 일문 소속 계승자와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일문 제도를 존중하지 않는 행위로 간주되어 지양되는 편이다. 스모협회에서 해당 일문의 투표권이 감소하는 결과를 야기하기 때문이다.[14] 그 와중에 협회가 제시한 조건을 몽골인 리키시 가쿠류가 먼저 만족해, 협회가 울며 겨자먹기로 가쿠류를 요코즈나로 진급시키는 촌극이 발생하기도.[15] 2번 다 치요노후지에 벽에 막혀 우승결정전 끝에 패했다. 한 번은 13승 1패 상황에서 대회 마지막날 14승이던 치요노후지를 이겨 우승결정전까지 가게 되었다. 이때 키타오에 대한 어마어마한 환성과 관중들의 성원은 볼만했다.[16] 위에 언급된 요코즈나 가쿠류는 부상입은 어깨로 인해 그 기세노사토를 상대로 헨카를 썼는데 어쩌다가 그 바쇼에서 우승까지 차지하자 왕창 까였다.[17] 다르게 말하면 요코즈나를 상대하는 다른 리키시들도 요코즈나에게는 암묵적으로 하타키코미(叩き込み) 같은 기술은 쓰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18] 다카노하나라든가, 하루마후지라든가…….[19] 본명은 레반 고르가제(Levan Gorgadze, ლევან გორგაძე)[20] 다만 카이오의 경우 아래 언급된 승부조작이나 승수만 맞춰서 오제키 자리를 유지하는 철밥통 공무원 소리를 듣는 등 긍정적인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21] 원래 정원이 2인인 세키와케 자리에 공석이 없더라도 11승 이상을 거두면 승진시켜준다.[22] 이로인해 대회 초반부터 연패를 쌓고 시작하게 되기가 쉽기 때문에 지키기가 어려운 자리이기도 하다.[23] 상황에 따라 드물게 바로 세키와케로 승격되는 경우도 있다.[24] 마쿠우치라고도 한다.[25] 앞치마처럼 생긴 마와시인데 마쿠시타 이하에서 하얀색 마와시를 쓰는것과 달리 흑·청·적·홍 등 다양한 색상을 쓸 수 있다. 물론 단색으로만 가능하고 지나치게 화려하다든지 알록달록 색상은 금지다. 주로 후원회나 출신학교에서 지원한다.[26] 한국으로 치면 전문의 이상의 급여를 받는다.[27] 수많은 스모선수들이 섭식장애당뇨병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이는 요코즈나도 예외가 아니다. 요코즈나 아사히후지는 지속적인 췌장염을 견디지 못해 "요코즈나의 자리에서 우승까지 경험했으니 이룰것은 다 이뤘다"라는 말을 남기고 은퇴하였다.[28] 경우에 따라서는 카부키처럼 이 리키시 이름을 다른 선수가 이어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문서에 나오는 다카노하나는 다카노하나 2세이며(다카노하나의 아버지도 '다카노하나'로 활동), 와카노하나는 와카노하나 3세였다.(큰삼촌과 그 사위가 각각 와카노하나 1세, 2세로 활등.). 도장별로 돌림자도 있다. 고토오슈 가쓰노리는 고토(琴)가 있으니까 사도가타케 도장(佐渡ヶ嶽部屋) 출신이구나, 토치(栃)가 붙었으니까 카스가노 도장(春日野部屋)이겠구나, 이름이 엔호(炎鵬)인 걸 보니 하쿠호(白鵬)와 관련이 있겠구나 하는 식이다.[29] 토치노신은 조지아는 물론 캅카스에서 최초의 리키시였던 콕카이 후토시(黒海 太)의 말만 듣고 스모를 시작했기 때문에 일본어를 전혀 몰랐고, 카스가노 도장의 사범 토치노와카 키요타카(栃乃和歌 清隆)는 일본에서 조지아어를 배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무척 애를 먹었다. 이에 도장의 사모(토치노와카의 부인)가 주일조지아대사관을 들락날락하고 구글 자동번역(…)을 동원해가며 토치노신에게 일본어 문장을 가르쳤고, 마침 비슷한 시기에 스모를 시작해 가가마루 마사루(臥牙丸 勝)로 활동하던 동갑내기 티무라즈 쥬겔리(თეიმურაზ ჯუღელი)의 도움으로 겨우 일본에 정착할 수 있었다.[30] 몇몇 일본인 오제키들이 공상과 카도반 제도의 허점을 노려 써먹었던것이 결정타였다. 3바쇼 기준으로 공상으로 휴식-카도반-카치코시를 하면 9개월동안 내내 빡세게 준비한 한 바쇼에서 8승만 찍어도 오제키 자리가 유지되는것이다. 이에 "해도해도 심하다"라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멀쩡하게 경기중 다친 선수들만 계급이 나락으로 떨어지는등 피해를 보게 되었다.[31] 실제로 승부에 이기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 자칫 다치기라도 하면 정규 바쇼에 영향이 미치기 때문이다.[32] 다만 유도를 더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33] 타카미야마의 직전 제자중 하나가 외국인 최초의 요코즈나로 유명한 아케보노다.[34] 타이호, 치요노후지, 기타노우미, 다카노하나, 아사쇼류가 이에 해당되며, 하쿠호 이전 1,400을 넘은 선수는 타이호와 치요노후지 두 명 뿐 이었다. 사족으로, 치요노후치는 1989년에 8호 국민영예상 수상자로 선정됐고 타이호는 2013년 1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사망 직후인 동년 2월 25일에 21호 수상자로 선정됐다.[35] 당연한 소리지만 요코즈나 한 번을 못 이기고 은퇴하는 마에가시라들이 대부분이다. 킨보시를 5개 이상 딴 선수는 지금까지 20명도 되지 않으며, '텐 스타'를 달성한 선수는 5명밖에 없다. 그러니까 마에가시라 수준의 선수가 요코즈나를 이기면 상여금을 연금마냥 붙여주는 것이다. 괜히 누군가가 요코즈나를 이기면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치며 방석 투척을 하는 게 아니다. 아사쇼류나 고토오슈 같이 요코즈나를 이길만한 포텐셜이 있는 선수들은 그만큼 빠르게 마에가시라를 '통과'한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36] 예를 들어 100점을 누적한 선수가 마쿠우치에서 주료로 떨어져도, 마쿠우치 승격 시 추가로 받은 계급 점수(최대 20점, 보통 12~16점 정도)만 감액하고 마쿠우치 시절 누적한 점수는 그대로 인정해 지급한다.[37] 1년 현상금 획득 금액이 무려 1억 3천만엔을 넘는다.[38] 언론의 호칭도 '쇼와의 大요코즈나'로 다른 선수들과 격이 다른 대우를 해주는 등, 스모를 상징하는 최고의 선수로 추앙하고 있다. 이 사람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치요노후지 이야기'가 방영되기도 했다.[39] 스모 경기를 보면 시합 전 수많은 깃발을 들고 모래판 주위를 도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현상금 봉투 하나를 후원하면 기업 혹은 스폰서에게 광고 깃발 하나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40] 치요노후지의 경우 80년대 절정이던 일본의 경제호황 덕분에, 시합을 치르고 오면 대기실에 쌓이는 귀금속, 용돈, 후원금이 어마어마 했고, 수천만엔을 들인 초호화판 우승연회, 도장의 해외 전지훈련, 본인의 초호화 결혼식과 고급 저택까지 후원회에서 모두 지원해줬다. 심지어 도쿄의 토지와 수억엔을 호가하는 미술품까지 선물로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41] 후원회가 스모 선수의 은퇴 이후를 걱정해 우리가 선수 생활은 책임질테니, 받은 돈은 전부 저축해서 은퇴 이후를 대비하라는 식이었다.[42] 형제 요코즈나로 유명했던 다카노하나의 형 와카노하나 역시 전승우승 포함 2대회 연속 우승으로 요코즈나가 되어 기세를 올렸지만, 부상에도 불구하고 출전을 강행하다 기량이 급락하여 2년도 채우지 못하고 반 강제로 은퇴당했다.[43] 물론 몇 대회고 연속해서 반타작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오제키도 은퇴 압력을 받는다.[44] 삼역을 오르내리는 상위 마에가시라는 경우 연간 150~200개 정도, 마쿠우치를 꾸준히 유지하는 평균 이상 마에가시라는 보통 연간 합계 100개 이상 가져가며, 협회에 적립되는 금액을 제외하고 본인이 직접 현금수령하는 봉투 1개당 3만엔. 물론 인기 선수의 경우 1경기 현상금 봉투가 좀 더 많고, 오제키나 요코즈나와 대전 시에는 3,40개 이상이 걸릴때도 많다.[45] 세키와케나 고무스비가 되려면 2자리 승수를 거두는 횟수도 늘어나고, 강자에게 승리해 현상금이 더 늘어나게 되어 년 평균 2~300개 정도는 기대할 수 있다. 오제키로 승급하는 교두보이기 때문이다.[46] 오제키는 평 선수들과의 대전에서 대부분 승리하고 기본적으로 10승 이상이 기대되는 위치이기 때문에, 꾸준히 오제키를 지키는 수준이라면 연간 최소 300~400개 이상 가져간다고 보면 된다. 만약 계속 우승권에 근접하면서 요코즈나 승격에 도전하거나, 대회에서 요코즈나를 연파하거나 하면 한 대회에서 현상금만 200개 이상 받곤 한다.[47] 요코즈나가 평균 최소 12승 정도는 해야하는 위치임을 감안하면, 현상금이 대폭늘어난 2015년 이후부터는 연평균 7,800개 이상은 기대할 수 있다.[48] 2014년 1,932개 수령, 최고기록은 2010년의 2,111개[49] 아사쇼류, 아사세키류, 도키텐쿠처럼 고교/대학으로 유학오는 경우도 있다.[50] 실례로 몽골인 요코즈나 하루마후지는 쉽게 증량이 되는 체질이 아니라서 먹고 토하고 선배들한테 맞으면서 혼나고 다시 먹기를 반복했다고 한다.[51] 본명은 살레바아 푸아울리 아티사노에(Saleva'a Fuauli Atisano'e). 현재 미-일을 왕래하며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인물을 모델로 한 캐릭터를 애니화한게 멋지다 코니(도트 koni-chan).[52] 오제키였던 다카노하나 1세는 치요노후지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당장 담배를 끊어라. 너는 체중을 불리고 힘만 키우면 요코즈나가 될 자질이 있는 녀석인데 뭐하는 것이냐'고 호통을 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치요노후지는 이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어 금연하면서 체격을 키우고 체중을 늘리는 데 매진하여 마침내 최고의 선수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다카노하나 1세를 은퇴시킨 사람이 치요노후지였고, 난공불락이던 치요노후지가 은퇴를 결심한 계기도 19세의 다카노하나 2세에게 충격적으로 패한 것이었다.[53] 링네임 카스가오 가쓰마사(春日王 克昌). 씨름선수 출신으로 김남일부평고등학교 동기이다.[54] 호주와 미국 작가들이 세계 여러 나라를 취재하며 일반인, 여러 직업 종사자 등을 취재하며 하루에 먹는 음식량을 사진찍어 상세히 올린 적이 있는데 이란 레슬링 선수들과 터키 씨름인 귀레쉬 선수와 일본 스모 선수들도 취재했다. 당연히 운동선수이니 레슬링과 귀레쉬 선수들도 많이 먹는 편이지만 스모 선수들이 먹는 양은 이들의 3배는 될 정도였다. 칼로리 측정에서도 겉으로도…그리고, 이란 레슬링 선수들은 일본 스모 선수가 먹는 음식 사진을 보고 모두들 웃으면서 이렇게도 많이 먹고 운동할 수 있다니! 라고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 더불어, 와아, 기술도 필요없이 살찐 몸으로 밀어붙이는 대회일까요? 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고.[55] 그래서 창코나베집 상당수가 은퇴한 스모 선수들이 창업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도 첫 스모에 입문한 수련생의 임무 중 하나가 주방일이기도 하다.[56] 물론 일본의 일반인들의 평균 수명에 비해 평균 수명이 짧은 것은 맞다. 다만 평균 선수로서의 수명은 33세라고 한다.[57] 다만 다카노하나의 경우, 10대 돌풍을 일으키며 일본 최고의 아이돌급 인기를 누리던 시절에는 130㎏이 채 나가지 않았으며, 날렵한 몸에 순발력이 뛰어나고 유연성까지 좋아 200㎏에 육박하는 아케보노 등 거구의 선수들을 묘기처럼 쓰러뜨리는 모습으로 인기가 어마어마했다. 요코즈나 등극 이후 체중을 늘리기 시작해 최전성기에는 150㎏ 전후의 몸이 되었으며, 이후 무릎 부상으로 인해 말년에는 160㎏의 몸이 되었다.[58] 이 동영상을 보면 스모 선수들의 먹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59] 예전에는 자신이 응원하거나 성적이 좋은 리키시의 몸에 응원의 뜻으로 지폐를 붙여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걸 털어먹는 쓰리꾼들도 들러붙고…[60] 하와이에 사는 원주민인 폴리네시아인들은 전 세계적으로 봐도 매우 체격이 좋고 힘이 센 민족 중에 하나이다. 덕분에 인구수 대비 엄청난 비율로 격투기, 럭비, 프로레슬링, 미식축구 등 큰 체격과 힘이 중요한 스포츠에 많이 진출한 편.[61] 스모판과 야쿠자들이 알게 모르게 연관되 있는 문제는 하루 이틀 된 문제가 아니다. 지금이야 스모협회가 수입도 많고 양지지에서 제공되는 떳떳한 후원만으로도 회계상 문제없이 깨끗하게 자생할 수 있다지만 이렇게 된 것도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하물며 지금처럼 1년에 6번씩 대회를 치르기 이전인 50년대 그 이전엔 일본의 경제 수준도 현재같지 않았을 뿐더러 정규 대회의 흥행 수입 분배만으로는 도장 및 협회 운영이 불가능할 지경이였다. 따라서 현재는 지방 공연 정도의 의미를 가진 순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입 및 후원에 현재보다 더 의존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걸 중간에서 브로커처럼 연결해 주던것이 시장친화적 풀뿌리조직인 야쿠자였던 것이다.[62] 엮인 선수들은 출장 정지 및 계급 강등이라는 처벌을 받았으나, 애초에 야구도박 씩이나 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계급의 선수들이었고 가볍게 원 계급으로 복귀해 2019년 현재까지 선수 생활을 계속하는 선수들도 있다. [63] 구체적인 조작방법과 돈거래를 시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64] 이는 1946년 경기장 보수공사로 인한 대회미개최를 제외하고 1833년 시작 이래 처음.[65] 혐의를 뒤집어쓴 선수들은 퇴직금이라도 받고 은퇴할래 아니면 불명예스럽게 쫒겨날래 양자택일을 해야 되는 상황에 처했고 대다수가 퇴직금 받고 나가는 쪽을 택했다. 일부 선수들만이 죄가 없다며 소송을 거는 등 저항했으나 소코쿠라이 에이키치(蒼国来 栄吉) 한 명만 무죄를 입증해냈다. 푸른 나라(蒼国)에서 왔다(来)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내몽골 출신으로(2019년 일본으로 귀화), 승소하면서 그동안의 급료를 회수하고 마에가시라로 복귀했으며 2020년까지 주료에서 선수 생활을 계속하다 마쿠시타로 강등되자 은퇴, 스승의 헤야를 이어받는다.[66] 은퇴시기가 늦어진 이유에 대하여 카이오의 고향인 후쿠오카 지역의 규슈 바쇼 수입유지가 원인이라 지적하는 시각이 있다. 11월 개최인 규슈 바쇼의 경우 최근 몇년 사이 관객수가 격감했으며, 그나마 남은 관객도 카이오가 은퇴할 경우, 더더욱 경기를 직접 관전할 이유가 없으므로 입장자=수입, 즉 돈과 직결해서 생각해 볼 때, 협회에서는 될 수 있으면 카이오를 오래 붙들어두려 했고, 승부조작도 그 배경에서 거론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치요노후지를 뛰어넘는 1047승을 기록하였다.[67] 물론 강등 직전이니 없던 힘도 생길 수 있겠지만 그걸로 설명이 안 될만큼 높았다(통계적으로 48%쯤 나왔을 승률이 실제론 80%에 육박했다). 게다가 8승이 유지 기준인데 7승째인 사람이 8승을 이미 찍은(즉, 다음 판은 져도 아쉬울 거 없는) 사람이랑 붙었을 때를 통계로 낸 것이었다.[68] 축구나 야구의 2부 리그를 봐도 알겠지만 스모도 대우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69] 물론 모든 요코즈나, 오제키, 마쿠우치 선수들이 이랬다는것은 아니다. 당장 이 연승 기록을 깬 동시대의 다른 요코즈나인 오노쿠니는 현역 당시엔 요코즈나 답지 않은 걸레짝같은 전적을 남기고 부상으로 신음끝에 단명 요코즈나로 은퇴하고 말았으나 이런 전적이 남들 다 하던 승부조작을 통한 전적관리와 부상관리가 아니였음이 나중에서야 밝혀지고 재평가를 받는다.[70] 타카노하나를 디스하는 관계자들도 그의 승부욕만큼은 인정할 정도.[71] 일본의 가라오케 리모콘은 흔히 생각하는 리모콘이 아니라 액정이 달린 상당히 크고 묵직한 물건이다. 이걸 스모선수 정도의 건장한 남성이 휘두르면 흉기 수준의 물건이 된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술병'''을 들어서 패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만류했다.[72] 심지어 쓰러진 타카노이와를 마운트 자세로 올라가 안면을 쉬지 않고 주먹으로 찍어대기까지 했다.[73] 다만 이쪽은 21세기 들어 보는 눈이 하도 많아진 덕분에 구타'''나마''' 근절되고 있는 추세라…….[74] 저 사건도 하쿠호가 이끌던 몽골 선수 친목도모회에서 벌어졌던 것으로, 웃기는 건 하쿠호가 이야기하는 와중에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며 엉뚱한 하루마후지가 달아올라 폭행을 했다고.[75] 본명은 스기노모리 세이야(杉野森 正也)[76] 스승은 자신이 거둔 제자의 마지막까지 함께하여 책무를 다한다는 의미로 단발식에서 마지막 가위를 넣어 상투를 완전히 자르는 것이 관례이다. 설령 제자가 승부조작이나 폭행·마약 등 사고를 쳐서 은퇴하더라도, 스승으로서 (지도를 잘못한) 책임이 있다며 어쨌건 끝까지 자리를 지켜준다.[77] 하루마후지는 일본 국적을 취득하고 카부를 획득해 오야카타로 후진양성을 하려 했으나, 일본 국적을 취득하기 이전에 강제 은퇴당했기에 이 모든 것은 날아가 버린 셈이 되었다.[78] 표면적으로는 11월 바쇼에선 하쿠호·카쿠류 두 요코즈나가 부상으로 휴장이였고 다른 오제키인 아사노야마·쇼다이가 부상으로 중도 휴장하였으므로 그 자격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카쿠류와 기세노사토도 준우승 뒤 우승으로 요코즈나가 되었지만, 카쿠류는 그 준우승이 우승 결정전까지 간 끝에 나온 것이라 할 말이 있고, 기세노사토는 바로 다음 바쇼를 우승하며 뒤늦게나마 연속 우승의 굴레를 벗었다. 카쿠류도 나중에 연속 우승을 했다), 스모 협회의 높으신 분들이 평소에 '부상은 연습 부족 때문'·'나 때는 걸을 수만 있다면 휴장 따윈 안 했다' 같은 소리를 일삼은 걸 생각하면 글쎄요…하쿠호는 3월까지만 해도 우승을 할 정도니 모를 일이지만 이제 30대 중반이겠다 일본 국적도 땄겠다 아쉬울 것도 없고(애초에 올림픽까지만 현역 생활을 하겠다는 소리를 공공연하게 하다가 코로나 사태로 도쿄 올림픽이 미뤄지며 1년 더 억지로 현역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 카쿠류는 스승의 급서와 그 유언인 '도장을 계승해달라'는 유지를 잇기 위해 생각지도 않던 일본 국적을 취득하려 하나 코로나 때문에 일본과 몽골 양국을 오가는 것이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라 필요 서류가 늦어져 국적 취득도 하염없이 미뤄지는 상황이라 은퇴를 질질 끌고 있다.[79] 정작 타카케이쇼는 그 다음 바쇼가 시작하자마자 4연패를 찍으며 시원하게 미끄럼을 타다가, 2승 7패를 찍은 뒤 휴장하고 만다.[80] 현직 간호사라고 한다. 2018년 4월 5일 日本テレビ NEWS ZERO 보도 내용.[81] 도효에서 소생술을 시도 중인 여성과 교대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흉골 압박은 힘이 많이 들어가는 행위라, 소생술을 할 줄 아는 사람 두 명 이상이 돌아가면서 환자를 압박하는 편이 효율적이다.[82] 여성이 도효에 올라갔을 때 일부 관객이 여자가 도효에 올라가도 되느냐고 지적을 했고 이를 들은 스모협회 측에서 안내방송을 내보냈다는 목격담도 있다.[83] 심폐소생술의 골든 타임은 약 5분이다. 소생술이 골든 타임 내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환자의 사망 가능성은 폭증한다. 반대로 1분 이내에 이루어질 경우 생존 가능성이 올라간다.[84] 애초에 스포츠 행사에 의료인력을 대기시키지 않았다는 것부터가 심각한 안전불감증이다.[85] 이와 비슷하게 여성은 천황이 될 수 없다는 법적인 제한도 메이지 시대에 생겨났다. 물론 꼰대 일본인들은 이것도 전통이라고 우긴다(…).[86] 네이버 지식인 등의 답변에서 이러한 소문을 마치 그러한 직업이 실존하는양 연봉을 써놓고 또 이러한 잘못된 소문을 퍼나르는 사람들이 문제다. 똘추, 뽕아,시다바리 등이 그런 직업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시다바리는 일본에서 전혀 다른 직업을 가리키는 말이며, 똘추와 뽕아는 애초에 일본어가 아니다. 그냥 한국어의 비속어에 불과한 말이다.[87] 한국의 네이버 지식인과 보통 비슷한 느낌인 일본의 야후 재팬 지혜대에서 가장 많이 올라오는 질문 중 하나일 정도로 일본에서도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한국과는 달리, 스모에 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소문일뿐이라며 제대로 된 설명을 해준다. 뭐 일본만화에서도 엄청 덩치 크고 뚱뚱한 스모 선수 더러 주인공이나 동료나 때론 상황이 바뀐 적까지도 비웃으며 "넌 큰 거 보고 스스로 뒷처리도 못하겠는데?"라고 비아냥거리는게 꽤 자주 나온다. 물론 만화에서도 듣는 스모 선수들은 피꺼솟한다.[88] 실제 경기에서 가끔 심판이 말려들어 어딘가를 얻어맞거나 자빠지는 일이 있긴 있다. 심판이 다이빙을 심판에게 직격[89] 에드몬드 혼다의 슈퍼콤보. 한국식 독음은 '귀무쌍'으로 읽는다.[90] '체키쨩 14세'라는 웹 사이트를 운영하는 일본인이다. 라그나로크 온라인이 인기였던 시절에 가끔 자신의 캐릭터인 '체키쨩'(직업:몽크)등을 활용한 단편 RO웹툰을 여럿 그리기도 했다.[91] 정확히는 은퇴한 스모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