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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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592년(선조 25년) 5월 29일부터 6월 1일 아침까지 전라 좌수영의 이순신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연합 수군은 사천포 해전을 통해 왜군 함선 13척을 격침시키고, 왜군 2,600여 명을 사살하였다. 같은 날 정오 무렵 이순신 함대 전선 23척과 원균이 이끄는 경상 우수영 전선 3척은 삼천포 앞바다를 거쳐 사량도에 이르러 이곳에서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오전 8시 척후선으로부터 당포 선창에 왜선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 함대는 곧 당포(지금의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앞바다로 나아갔다. 당포 선창에는 왜군 대선 9척, 중선·소선 12척이 매어 있었다. 9척 그 가운데 가장 큰 배에는 판옥선과 크기가 같을 정도로 컸다고 하며 붉은 일산이 세워져 있고, 장막 안에는 왜장 도쿠이 미치유키가 앉아 있었다.
아군 함대가 접근하자 왜군은 조총을 쏘며 맞섰다. 아군은 개의치 않고 거북선을 앞세워 현자 총통을 비롯한 천자·지자 총통을 쏘아 대는 한편, 뱃머리로는 왜장선을 들이받으며 격파하였다. 이어 화포와 화살을 왜장선에 집중적으로 발사하였다. 이 와중에 왜장은 중위장 권준(權俊)이 쏜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1] 사도 첨사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적선에 올라(!!) 적장의 목을 베었다. 왜장 도쿠이 미치유키가 죽자, 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육지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2. 성과
왜선 21척은 모두 격침되었고, 많은 수의 왜군이 사망하였는데 정확한 수는 파악하기 어렵다. 이순신 함대가 제2차 출전에서 사천포 해전에 이어 치른 두 번째 해전이다. 옥포·합포·적진포 해전 등 제1차 출전까지 합하면 다섯 번째 해전이 된다. 적정과 지형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거북선을 앞세워 적의 대장선에 화력을 집중하는 이순신의 치밀한 전략이 돋보인 해전이다.
보통 이 전투에서 사망한 왜장이 가메이 고레노리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가메이가 히데요시에게 하사받아서 가메이의 이름이 쓰여 있는 황금 부채가 노획되었고 마침 적장을 하나 죽였기 때문에 '죽은 적장 이름이 가메이인가보다' 하고 판단했기 때문. 덤으로, 히데요시가 가메이에게 내린 것이기 때문에 받은 사람인 '가메이 류큐노카미'와 내린 사람인 '하시바 치쿠젠노카미' 양쪽이 부채에 쓰여 있었는데, 이걸 본 조선에서는 (한자는 판독이 가능하지만 일본식 고문이나 가나는 해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오해해서) '우리가 하시바라는 장수를 잡았나보다'하고 기록하기도 했다. '''하시바 치쿠젠노카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옛 성과 관직이다.''' 실은 도쿠이 미치유키[2] 가 전사했다. 하지만 가메이가 당포 전투에 참전한 것과 탈탈 털린 것은 사실로, 이후 가메이는 1597년에 다시 수군을 이끌고 조선에 당도한 기록도 있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 때 동군에 참여하여, 영지를 보존했고 1612년에 노환으로 사망한다.[3]
대선 9척의 크기는 판옥선에 준한다고 장계에 되어 있는데, 특별히 층각선으로 언급된 1척은 안택선이고, 나머지 8척은 대형 세키부네로 보인다.
3. 대중 매체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사천 해전 편에서 내레이션과 함께 짧게 묘사하고, 권준이 직접 활을 쏘아서 도쿠이 미치유키[4] 를 사살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임진왜란 1592에서 역시 사천 해전을 주제로 한 1화에서 등장한다. 여기에서는 지휘관을 가메이 고레노리로 설정하고, 귀선을 돌진시켜서 가메이가 탄 대장선을 공격해 혼란에 빠뜨린 다음, 권준이 애기살로 저격하고 이후 김완과 그 부하들이 도선해서 참수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4. 관련 문서
[1] 이 전투에서 구출한 포로에 따르면 도쿠이 미치토시는 처음 화살 1발을 이마에 맞고도 태연하게 있었지만 두번재로 쏜 화살이 가슴을 관통하자 그때서야 쓰러졌다라고 이야기 했다.[2] 이 사람 동생이 역시 명량 해전에서 전사한 구루시마 미치후사다(...) [3] 배한성의 고전열전에선 가메이가 사망한 것으로 연출했고. 가메이가 도요토미에게 받았다던 황금 부채는 조정에 진상됐다가 1909년까지 조정에 보관됐는데 일본인이 훔쳤다는 카더라를 추가했다.[4] 극중 이름은 구루시마 미치유키. 그러나 도쿠이 미치유키는 구루시마 성주(来島城主)였던 무라카미 미치야스(村上通康)의 장남으로 태어났을 뿐이고, 도쿠이 씨에 입적하여 이를 계승하였으므로, 실제로는 구루시마씨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