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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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순신 함대가 두 번째로 출전해 치른 첫 해전이다.5월 29일 맑음
(중략) 적의 무리는 두려워 물러났는데,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인지 그 수를 알 수 없고 그 가운데 많은 수를 목잘랐다. 군관 나대용이 총환에 맞았고, 나 역시 어깨를 관통하였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사부와 격군 중에서도 총환에 맞은 자가 많았지만, 적선 13척을 불사지르고 물러나 주둔했다.
《난중일기》
전투로는 1592년(선조 25년) 5월 7일부터 8일까지 치른 세 번의 해전에 이어 네 번째이다.같은 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치러졌다. 함대 규모는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 좌수영의 정예 함선 23척과 원균(元均)이 이끄는 경상 우수영의 함대 3척(...) 등 총 26척이다.
이순신 함대에는 새로 창안된 전함 거북선도 포함되었는데, 거북선이 실전에 투입된 것은 사천포 해전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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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벌기>에서 묘사된 이순신. [2]
2. 사천 해전
1차 출동 당시 옥포 해전, 적진포 해전 등을 치른 후 일본 수군은 이전에 치러진 조선 수군과의 해전에서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서해안으로 진출하기 위해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던 이순신은 6월 3일 이억기의 함대와 함께 출동해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힐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5월 27일, 경상 우수사 원균이 "적선 10척이 사천을 출발해 노량으로 향했다."는 공문을 받고 이억기에게는 먼저 출전할테니 따라오라는 공문을 띄우고 출전, 이순신은 이틀 후인 5월 29일 노량(露梁)에 도착, 원균이 이끌고온 판옥선 3척(...)과 함께 연합해 사천으로 향했다. 해안선을 따라 이동 중이었던 이순신과 원균 연합 함대는 사천 선창으로 도망치는 일본군 척후선 1척을 발견, 격침시킨 뒤 계속 나아가 사천 포구에 이르렀다. 선창에는 일본군 대선 12척이 매어 있고, 선창 뒷산에는 일본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순신 함대가 접근하자 일본군은 완강히 저항하며 맞섰다.
마침 썰물 때라 전선을 포구에 댈 수 없어 아군 함대는 작전상 후퇴하며 적군 일부를 먼 바다로 유인하였다. 왜선이 아군의 대형 전함인 판옥선이 활동하기에 유리한 해역까지 따라오자, 이순신 함대는 갑자기 뱃머리를 돌려 다시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최전방 돌격선의 임무는 거북선이 맡았다. 이순신은 아군 주력선인 판옥선보다 먼저 거북선을 적진에 들여보내 천·지·현·황(天地玄黃) 등 총통과 각종 함재 화포를 집중적으로 발사하였다. 이에 놀란 왜군 함대는 지리멸렬해 사천 포구 쪽으로 도주하였고, 그러는 사이에 만조가 되었다.
거북선에 이어 밀물을 따라 포구에 도착한 판옥선에서도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하자,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산 위로 도주하기에 바빴다. 이 와중에 수많은 일본군이 죽고, 포구에 있던 왜선 가운데 10척이 아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나머지 2척은 패잔병들이 타고 도망갈 때 소탕하기 위해 일부러 태우지 않고 남겨 둔 채 함대를 사천만 입구의 모자랑포로 옮겨 그 곳에서 밤을 지냈다.
물론 단순히 함정을 판것 뿐만 아니라 모든 배를 불태우면 도망친 일본군 수군이 인근 마을을 약탈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배 몇척을 일부러 남겨 적들이 내륙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심리적으로 잡아놓은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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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2척을 타고 도주하려던 일본군 패잔병은 6월 1일 새벽 배와 함께 불에 타 죽거나 목이 베어졌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 2,600명이 도살되었고, 13척의 왜선도 모두 격침되었다. 조선군 측은 이순신의 군관인 나대용과 봉사 벼슬을 했던 종군 장수 이설이 적의 총탄에 맞았고, 이순신도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다. 부상 인원 세 사람 모두 기함에 승선해 있던 지휘관들이다. 이는 이순신의 기함이 조총의 유효 사거리 안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기함이 조총의 유효 사거리에 들어갔던 것은 임진왜란의 해전 중 옥포해전을 제외하면 항상 조총의 사거리에 노출 되어 있었다.[3] 지휘관이라고 해서 항상 후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하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당포파왜병장(사천 해전에 관한 일도 보고되어 있다.)에서는 '그 가운데는 간혹 우리 나라 사람들도 저들과 섞여서 쏘았으므로 신은 더욱 분하여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나아가...'라는 대목이 있다. 그 외에도 거북선이 첫 출전이라 좀더 가까이서 지휘를 하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다음은 이순신이 1년 후 유성룡에게 보낸 편지이다. 전투가 끝난 후에 수술로 총탄을 제거하고[4] 치료했으나 총상을 입은 지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상처가 아물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살피지 못한 동안 기운은 어떠하십니까. 전에 두 번이나 주신 글을 받고 나아가 뵙고 겸하여 적을 토멸할 계책도 말씀드리려 하였으나, 접전할 때에 '''스스로 조심하지 못하여''' 적의 총알에 맞아 비록 죽을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어깨뼈를 깊이 상한데다 또 언제나 갑옷을 입고 있으므로 상한 구멍이 헐어서 진물이 늘 흐르기 때문에 밤낮 없이 뽕나무 잿물과 또는 바닷물로 씻고 있지만 아직 쾌차하지 못하여 미안합니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나실 날이 언제인지요. 나랏일이 매우 다급하게 되었는데 병이 이와 같아서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통탄할 따름입니다. (후략)'
3. 성과
사천 해전은 이순신이 치른 다른 해전과 마찬가지로 지형과 조수를 이용한 전략 외에 거북선을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해 그 성능을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거북선은 각종 함포로 무장한 최전방 돌격선으로서 적선 격침은 물론, 적진을 혼란에 빠뜨리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이후 거북선은 한산도 대첩을 비롯한 각종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상징하는 전선으로 위용을 떨치게 된다.
4. 미디어에서의 모습
사천 해전(1592년 5월 29일)
돌격하라, 귀선이여
피와 눈물의 전장에서
조국을 수호하라
고통을 전복시키고
강한 승리를 일구기 위해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68회에 나왔다. 이순신의 총상을 전투 중이 아니라 사천까지 진군하던 도중 일본 측이 대기시켜두었던 저격수에게 당한 것으로 묘사했으며, 실제 역사와는 달리 왼쪽 어깨가 아닌 오른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또한 전라 좌수군과 경상 우수군이 합류하여 사천으로 진군한 것과 달리 전투 도중에 합류한 것으로 그려졌고, 유인한 일본군 함대도 도쿠이 미치유키가 직접 통솔하는 함대가 아니라 별동대인 것으로 나왔다.목숨이 지나간 자리
피와 살이 허물어져도
흐르지 않는 중심
나를 일으키는 힘
다른 길은 없다, 오직
이겨야 한다, 지켜야 한다
다만 앞선 옥포 해전과 마찬가지로 일본 해군이 박살이 나는 장면이 실감나게 묘사되었으며, 특히 전투 직전까지도 도도 다카도라에게 큰소리를 질러대며 기세등등했던 도쿠이 미치유키가 거북선의 위력에 질린 나머지 ''''이건 말도 안 돼...! 저 괴물은 대체 뭐냔 말이야...! (중략) 저 괴물을 박살 내란 말이야...!'''' 라며 공황에 빠진 것이나 원균의 함대를 신나게 밀어붙이다가 이순신 함대가 날린 포격에 그대로 무너지는 것도 감상 포인트. 또 전투가 끝나고 어깨에서 총알을 빼내는 고통을 참는 김명민의 연기가 매우 일품이다.
그 밖에 일본군이 실제 기록처럼 풀잎 등으로 못을 가리지도 않은 거북선 위로 도선하는 장면이 의아하다는 평도 있는데, 이렇게 치면 도선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부터를 문제삼아야 한다. 적의 요새나 성을 공격할 때에도 맨 앞에서 돌격했다가는 황천길 직행이라는 게 뻔한데도 돌격 명령을 받고 달려가는 병사들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 송곳이 꽂힌 철판이 덮인 거북선의 특징을 극중에서 묘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나, 애초에 도선을 하려해도 입구가 보이지 않는 뚜껑판에다 대고 도선을 하라는 것은 조금 어색한 느낌이 있다.
임진왜란 1592에서는 첫 회에 나오는데, 불멸의 이순신과 달리 거북선에 도선하는 장면은 없고 거북선의 활약과 장사진이 펼쳐진 이후의 전투 양상을 잘 표현했다. 특히 최근 학설인 곡사 사격이 아닌 직사 사격으로 왜선을 요격했을 것이란 설을 적극 수용해 거북선이 돌격 후 장사진 -사실상의 단종진- 으로 적진을 횡단하면서 일제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는 양상으로 표현했다.
왜란종결자에서는 해전 중 처음으로 비중있게 다루는 전투. 왜란종결자로 유력시되는 이순신을 마수들이 왜병을 조종해 마기 실은 조총으로 죽이려 하나, 태을사자 일행의 활약으로 저지되어 부상에 그친다. 이순신은 물론 나대용의 부상도 여기에 휘말려 일어난 일이다.
5. 참고 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임진장초(壬辰狀草)』
- 『징비록(懲毖錄)』
- 『일본전사조선역(日本戰史朝鮮役)』(참모 본부 9, 1924년)
6. 관련 문서
[1] 부산과 거제도로 도주하여 나오지 않았다.[2] 일본에서 출간된 서적으로 어깨에 총탄을 맞았으나 태연자약한 태도였다는 징비록을 좇아 묘사한 그림이다.[3] 2차 출동 이후의 승첩 장계를 보면 대장선에서도 항상 조총에 의한 사상자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4] 이때 총알이 5~6cm나 박혀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