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항포 해전

 


1. 소개
2. 제1차 당항포 해전
2.1. 개요
2.2. 상세
3. 제2차 당항포 해전
4. 기타
5. 관련 문서


1. 소개


唐項浦海戰
1592년(선조 25) 음력 6월 5일 ~ 6일과 1594년 음력 3월 4일 두 차례에 걸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당항포에 주둔한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
제1차 당항포 해전과 제2차 당항포 해전으로 나뉜다. 1차 해전은 1592년(선조 25)년 6월 5일부터 6일까지 이틀 동안, 2차 해전은 1594년 3월 4일 하루 동안 이루어졌다. 당항포는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 회화면 당항리에 해당하는데, 창원시 진해구로 보는 설도 있다.

2. 제1차 당항포 해전


'''이순신의 전투 목록'''
당포 해전
(1592년 6월 2일)

'''제1차 당항포 해전'''
(1592년 6월 5일)

율포 해전
(1592년 6월 7일)

2.1. 개요


'''제1차 당항포 해전'''
'''시기'''
1592년 7월 13일 (음력 6월 5일)
'''장소'''
조선 경상도 고성 당항포
'''원인'''
충무공, 남해 제해권 도모(圖謀).
'''교전국'''
조선 [image]
일본 [image]
'''지휘관'''
<^|1>충무공 이순신
원균
이억기
모리 무라하루
오모리 로쿠다유†
가시바루 우시노스케†
아와다 한시치†
와타나베 시키부†.[1][2]
'''병력'''
전선 51척
전선 26척
'''피해'''
피해 규모 불명
지휘부 괴멸
전선 26척 침몰
'''결과'''
조선 수군의 승리
[clearfix]
이순신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수군의 연합함대가 제2차 출전에서 사천·당포 해전에 이어 세 번째로 치른 해전이다. 이순신의 전라 좌수영 전선 23척, 이억기의 전라 우수영 전선 25척, 원균의 경상 우수영 전선 3척(...) 등 총 51척이 참가하였다. 총지휘는 이순신이 맡았다.

2.2. 상세


6월 2일에 당포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과 원균의 연합 함대는 당포 앞바다에 정박해 전략 회의를 계속하면서 수색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3일에는 수색을 했으나 적들이 보이지 않았고, 4일째 되던 날에 거제도 주민들로부터 당항포에 왜선이 정박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이억기의 전라 우수영 전선 25척이 뒤늦게 합류했으며[3], 연합함대의 규모는 51척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조선 연합 함대는 6월 5일 아침 안개가 걷히자마자 당항포로 진격하였는데 포구에는 왜군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모여 있었다. 연합 함대는 당항만 어귀에 전선 4척을 숨겨두고, 거북선을 앞세워 일제히 공격을 가하였다. 조선 수군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일본 수군도 조총을 쏘아 대며 대응 태세를 취하였다. 이에 아군은 왜군의 육지 탈출 봉쇄와 주민 보호를 위해 왜군을 바다 한가운데로 유인한 뒤, 왜선을 포위하고 맹공을 가하였다. 왜선 대부분은 여기서 격침되었고, 도주하는 나머지 왜선들도 모두 추적해 불살랐다. 4척의 대선은 육지로 도망쳤으며, 도망친 패잔병들을 소탕하기 위해 남겨둔 대선 1척은[4], 패잔병들이 몰래 배에 올라타 도주하려 배에 올라타자 미리 이순신의 명을 받은 방답 첨사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에 의해 6월 6일 새벽에 섬멸되었다. 이때 원균이 적선에 올라타 수급 50여급을 베어내기도 했으며[5] 방답첨사 이순신도 활을 직접 쏴 적장을 맞춰 죽이는 전과를 세웠다.[6]
1592년 6월 7일 사천, 당포, 당항포에서 해상 전투를 벌인 조선 수군은 연합 함대를 구성하여 웅천 증도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었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23척, 전라 우수사 이억기가 25척, 경상 우수사 원균이 3척 등 모두 51척의 전선으로 구성된 함대였다.
이때 거제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 대선 5척, 소선 2척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진 쪽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정오 쯤에 영등포 앞에 이르자 조선 수군은 세차게 배를 몰아 율포만으로 추격해 들어갔으며 대선 2척을 나포하였고, 중선 5척을 불사르고, 일본 수군을 36명의 목을 베었다.
이 율포해전을 끝으로 2차 출동은 마무리되었다.

3. 제2차 당항포 해전


'''이순신의 전투 목록'''
제2차 웅포해전
(1593년 5월 2일)

'''제2차 당항포 해전'''
(1594년 3월 4일)

제1차 장문포 해전
(1594년 9월 29일)
수륙 병진책이 무산된 일본 수군이 거제도 내륙을 오가며 살인·납치·약탈을 일삼던 1594년 3월 4일(양력 4월 23일)에 행해졌다. 아군 연합 전선 124척이 참가한 대규모 해전으로,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의 치밀하고 신속하며 정확한 전략으로 압승을 거둔 해전이다. 연합 함대의 제6차 출전이자, 전투로는 12번째 해전이다.
3월 4일 새벽 이순신은 함선 20척을 거제도 견내량으로 보내 수비하도록 하고, 동시에 전라 좌수영과 경상 우수영에서 각각 10척, 전라 우수영에서 11척을 선발해 공격 함대를 편성하였다. 공격 함대의 사령관은 어영담을 임명하였다. 이순신은 나머지 3군 함대를 이끌고 학익진을 펼치며 함대 시위를 하는 한편, 다른 왜군의 지원과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한 준비까지 철저하게 마친 뒤 공격 명령을 내렸다.
왜군은 조선 수군의 완벽한 전략 앞에서 손 쓸 틈도 없이 일거에 무너졌다. 먼저 어영담 함대에 의해 10척이 격파되고 불태워졌다. 이어 나머지 21척도 당항만으로 진격해 들어간 아군에 의해 모두 불태워지고, 패잔병들은 전의를 상실한 채 육지로 도주하였다.
불의의 사태에 대비한 예비대 편성, 신속한 기동력, 적 주력 부대의 퇴로 차단 등 이순신의 용의주도한 전략이 돋보인 해전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제2차 당항포 해전은 원래는 수륙 협공 전략이었으나 육군의 무미건조적인 태도로 인해 육지로 달아나는 왜군을 섬멸하지못한 전투로 묘사했다.

4. 기타


지도를 보면 당항포 쪽 바다는 앞이 막힌 만으로 왜군이 서진하려고 했다면 서쪽이 아닌 남쪽의 견내량을 통과해야지 왜 당항포로 갔을까라는 의구심이 드는데, 이와 관련된 야사가 있다.
전란 발발 직전 일본은 대규모의 간첩을 파견하여 조선 전역을 탐색했고 이는 경상도 고성 땅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느 날 행인으로 위장한 첩자가 고성의 한 주막[7]에 들렀는데 주인장이 일본 간자의 짐에 들어있는 지도를 보게 되었고 그 퀄리티에 놀란 나머지 자신이 살고 있는 고성 땅을 통째로 칠해버린 것. 주인장이 칠한 건 바다를 뜻하는 색이였고 다음날 일본 간자는 주인이 수정한 지도를 들고 떠났다는 얘기로 그래서 일본군이 문제의 지도를 보고 당항포를 뚫린 바다로 착각해 진입했다고 한다. 확실히 지금의 고성 읍내만 적절히 칠해주면 뻥 뚫린 바닷길로 보였을 것이다.
물론 당항포 해전 직전에 사천과 당포(통영 부근)에 진출했던 왜군이 털린 것으로 봐서 위의 썰이 진짜일 가능성은 낮다.

5. 관련 문서



[1] 일본군 장수 명단은 아와수군과 조선의 역(阿波水軍と朝鮮の役.)에서 발췌.[2] 敵の猛反撃を受けて大海戦となり阿波水軍の総指揮森志摩守村春が戦死を遂げ,更に樫原牛之介,小森六大夫,粟田半七,渡部式部など阿波水軍練達の勇将を失ったのである。(적의 맹반격을 받아 큰 해전으로 아와 수군의 총 지휘관 모리 시마노카미 무라하루가 전사하였고, 더욱이 가시바루 우시노스케, 오모리 로쿠다유, 아와다 한시치, 와타나베 시키부 등 아와수군 숙달의 용장들을 잃었다.)[3] 이억기의 함대가 합류하자 진중의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남겨져있다.[4] 여기서 이순신 장군의 백성 사랑하는 마음을 볼 수 있는데 적의 배를 모두 불태운다면 적들은 육지로 도망을 가게 되고, 그렇게되면 육지에 있는 조선 백성들이 피해를 받기 때문에 왜적이 타고 도망갈 전선을 남겨두었다고 당포파왜병장에 기록해두었다.[5] 당시 수급은 전공의 척도로 매우 중요했다. 원균과 이순신의 차이점은 원균은 억지로라도 수급을 가져가려 했고 이순신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6] 이 적장은 매우 젊었는데 맹렬히 싸우다 10여발의 화살을 맞고서야 사망했다고 한다.[7] 판본에 따라 기생집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