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그라쿠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Tiberius Sempronius Gracchus'''
'''Gracchus the Elder'''
BC 217 ~ BC 154
1. 개요
2. 생애


1. 개요


대 그라쿠스(Gracchus the Elder)는 기원전 2세기 로마 공화정의 정치인이다. 그라쿠스 형제의 친아버지이지만, 두 아들의 후광에 밀려 인지도는 낮은 편. 하지만 절대로 아들들보다 부족한 인물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라쿠스 형제가 평생에 걸쳐 그 길을 따르고자 했던, 당대 최고의 로마인 중 한 명이었다. [1]

2. 생애


그의 어린 시절은 알려진 것이 없다. 그가 로마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190년 스키피오 형제[2]를 따라 셀레우코스 전쟁에 참전했던 일로, 군단이 통과할 안전한 길을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스키피오 형제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안티오코스 3세를 쫓던 상황에서 로마군은 그라쿠스가 착실히 임무를 완수한 덕분에 그들은 별 탈 없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스키피오 형제는 잠시 시리아에 남아서 안티오코스 3세 문서에 나와있는 것처럼 가는 도시마다 엄청난 거액의 배상금을 뜯어냈다. 또 로마에 충성하는 속국의 군주들에게서 뇌물들도 짭짤하게 챙겼고, 아직 아시아에 주둔 중이던 군대의 유지비를 위해 중앙에서의 지출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건 물론 스키피오 형제의 주머니로 들어간 것도 있기야 했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전쟁의 대외관계 정리 및 전후처리와 고생한 군인들을 위한 포상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사정을 잘 모르는 로마인들은 형제가 도둑질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형제는 결국 로마로 돌아오자마자 부패 혐의로 기소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그라쿠스가 등장한다. 스키피오 형제가 재판을 받고 있던 중, 다른 쪽에서는 그라쿠스가 호민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라쿠스는 로마의 영웅이었던 스키피오 형제가 처벌받는 걸 원치 않았고, 그는 호민관의 필살기인 '''거부권'''[3]을 행사해 재판을 강제로 중지시킨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에 대해 감사를 표하며 그의 딸 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4]와의 결혼을 제의했고, 그라쿠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코르넬리아는 최근 로마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흥 가문의 여자였고, 생전에도 이미 출중한 본인의 능력과 모범적인 여성상으로서 유명한 인물이었으니 특히 그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직접 주선해준 이 결혼은 그라쿠스의 정계 활동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기원전 182년 그라쿠스는 안찰관으로 선출되었고, 이 즈음에는 재정을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키는 등 이것저것 유명해지기 위해 자기 이름으로 일들을 벌였다. 결국 그는 일대의 유명인사가 되었고, 인기도 어느 정도 쌓아서 기원전 180년에는 법무관으로 선출되었으며 1년 뒤에는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5]의 총독이 된다. 여기서 그는 켈티베리아인들의 반란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를 가볍게 진압하고 해당 지역의 평화를 위해 정책을 수립한다. 당시 켈티베리아인들은 카르타고로부터 이제 막 로마에 병탄된 히스파니아에서의 혼란상과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로마 본국에서 이렇다 할 대처가 없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는데, 그라쿠스는 빈민들을 모아 직접 토지를 분배해주는 것으로 불만을 잠재운다. 이때 그가 펼친 토지 분배는 그라쿠스 형제의 급진적인 개혁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기원전 177년 그는 로마로 귀환했고, 스페인에서의 공적으로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의 동료 집정관이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Gaius Claudius Pulcher)로, 그라쿠스의 처가인 스키피오 가문과 견원지간이었던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동료와 싸우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위험한 줄타기를 시도하는데, 그라쿠스의 정치적 역량을 잘 드러내는 시기가 바로 이 집정관 시기다.
가늘고 긴 줄 위에 서서 그라쿠스는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스키피오 가문 사이를 오가며 조정자 역할을 자처했고, 마침내 두 가문 모두를 자신의 우방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더는 스키피오 가문에만 매달릴 이유가 없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동맹은 아들 대에도 이어져서,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후에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에서 든든한 우군이 되어주었다.
이후 사르데냐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곧바로 달려가 빠르게 진압했고, 이것으로 외딴 시골이었던 사르데냐에도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6].
사르데냐에서의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그라쿠스는 히스파니아에서의 일에 이어서 두 번째로 개선하게 됐고, 이것으로 그는 공화국 최고의 유명인이 된다. 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169년 그가 감찰관으로 선출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앞에서 말한 전직 집정관 동료 풀케르와 같이 감찰관이 되었는데, 둘이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7] 사방에 정적들을 만들게 되었고, 결국 덜미가 잡혀 기소까지 가게 되었다. 자칫하면 암살까지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라쿠스는 풀케르에게 망명을 제안했는데, 탈출을 계획하던 중 갑자기 기소가 취소되었다. 이유는 그라쿠스의 인기가 너무 높았던 탓에 로마인들이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감찰관 임기 중 그는 로마에 포럼 바실리카 셈프로니아도 지었고, 페르가몬 왕국과의 평화 조약을 비준하기도 했으며, 무사히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8].
그라쿠스는 감찰관 임기를 마치고 원로원의 대사 일행과 함께 지중해 동부의 속주들을 검토하러 가는 여행을 떠났다. 이때 페르가몬 왕국의 왕 아탈로스 3세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고, 둘은 친구가 되었다. 아탈로스 3세가 유언으로 사후에 페르가몬을 로마에 넘기게 한 것도 어찌보면 그라쿠스의 영향이 있었던 셈이다. 심지어 페르가몬에서 온 사절이 원로원이 아니라 그라쿠스의 집을 먼저 찾아갈 정도여서, 그 유언은 원로원보다도 그라쿠스의 아들인 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형 그라쿠스)의 귀에 먼저 들어가 형 그라쿠스가 즉각적인 행동을 개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기원전 162년 그는 다시 집정관에 선출되어 가문의 위업을 쌓았고, 임기를 마친 그는 말년에 정계에서 은퇴하고 기원전 154년 63세를 일기로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내 코르넬리아는 재혼하지 않았고, 아직 어렸던 두 형제를 홀로 키웠다.
대 그라쿠스는 단순히 저명한 원로원 의원이었던 것이 아니라, 당대 로마에서 제일가는 유명인사에 인기인이었다. 그 어느 가문의 누구든지 집정관이든 개선식은 한 번이라도 하면 엄청난 부와 명예가 보장되었는데, 그는 둘 다 두 번씩이나 해냈으며 배경도 뼈대있는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새롭게 떠오르는 신흥 스키피오 가문 사이에 걸친 인물에, 해외에 외교 사절로도 몇 차례 파견되었을 때도 그냥 가지 않고 돈독한 인맥을 쌓아오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라쿠스 형제가 과감한 개혁을 시도하고 후대에까지 널리 업적을 칭송받고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아버지 대 그라쿠스가 없었다면 이룰 수 없었거나, 혹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 되었을 것들이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이미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거의 대부분의 민중들의 영웅이자 누구나 따르고 싶었던 제1의 로마인이었다. 두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며 그가 갔던 길을 따르고자 맹세했다. 평범한 빈민과 농민들의 구원자이자 자수성가의 대표주자였던 대 그라쿠스의 무용담은 형제를 고취시켰고, 그들을 급진적이고 포퓰리즘적인 사회개혁가로 성장하게 했다.
하지만 일생에 있어 거의 흠잡을 때 없이 살았던 그에게도 말년에 의도치 않았던 실책을 하나 저지르게 되는데, 하필이면 그것이 또 절묘하게 장남 티베리우스와 연관되는 일이었다.
기원전 162년 그라쿠스가 두 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되었을 때의 일인데, 말년이라 딱히 하는 일도 없었던 그는 임기가 끝날 때쯤 다음 집정관 선거를 시행하게 되었다.
원래 집정관 선거를 하기 전에는 전통적으로 복점관이라고 하는 점술가가 새가 날아가는 걸 보고 점을 쳐서 그날 투표를 할지 말지 결정했다. 그런데 당시 복점관이 불길한 징조가 보였다고 말했는데도 그라쿠스는 그냥 헛소리로 치부해버리고 투표를 강행했는데[9], 투표 결과가 자신의 예상과 빗나가자 선거에서 벌였던 의식이 엉망이었다고 우기고 새 집정관더러 사임하지 않으면 신이 노할 거라고 주장했다.
새로 선출된 두 집정관 중 한 명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으로, 코르넬리아의 형부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라쿠스의 말을 어길 수 없어서 마지못해 사임했고, 자신이 모욕을 당했다고 속으로만 삭힐 뿐이었다.
그런데 푸블리우스도, 대 그라쿠스도 죽고 한참 시간이 지나 그 아들들이 세대를 물려받았을 즈음 일이 터지고 말았다. 대 그라쿠스의 장남 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 재선을 위해 선거 유세를 하던 중 원로원을 선동하고 직접 철제 의자를 뜯어 티베리우스를 때려죽인 의원이 바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로, 그는 바로 티베리우스의 아버지 대 그라쿠스에게 모욕을 당했던 나시카 코르쿨룸의 아들이었다.

[1] 리비우스의 기록에서도 당대에 가장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고 하니 그는 꽤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2]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그 유명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다.[3] 호민관의 거부권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다. 집정관의 법안 집행은 물론 원로원의 입법, 호민관의 입법, 재판 등등 그들이 거부권으로 퇴짜놓을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4] 당시 그녀는 18살이었고 그라쿠스는 곧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다.[5] 지금의 스페인 동부 지역.[6] 그라쿠스 형제 중 동생인 가이우스가 사르데냐에서 근무할 때 혹한이 닥치자 마을 주민들에게 추위를 막을 옷을 기부해달라고 호소한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바로 이곳에서 공적이 있는 인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7] 감찰관이 하는 일은 인구조사 외에도 재산 추정이 있다. 즉 맘만 먹으면 누구의 비리든지 까발릴 수 있는 직위였기에 정적을 만들기에도 딱 좋은 관직이었다.[8] 사퇴했다는 설도 있다.[9] 전통을 깨는 건 그라쿠스 형제가 잘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유전이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