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코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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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ochus Megas(영어)
Ἀντίoχoς Μέγας (그리스어)[1]
1. 개요
셀레우코스 왕조의 여섯번째 왕(BC 223~187 재위).
셀레우코스 왕조의 최대의 군주이면서 동시에 제국 쇠망의 단초를 만든 인물로 지목되기도 한다. 알렉산드로스 3세를 제외한다면, 역대 그리스인 중 그보다 넓은 영토를 통치한 그리스인은 없다. 그는 그의 치세에 막 카르타고를 이겨 지중해 세계의 최강자로 떠오른 로마에 대항하는 모든 이들의 우상이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최대 영토를 실현한 것은 바로 그이며, 동시에 제국의 남은 200여년의 방향을 결정한 것 역시 그의 치세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는 죽은 이후에도 지중해 세계에서 최고의 명성을 누렸으며,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자들은 그를 모방해 자신을 '''새로운 안티오코스 메가스'''라고 선포하곤 했다.그 자신, 또 그가 남긴 옥좌가 지닌 이런 불멸의 마력은 셀레우코스 제국이 로마에 최종 멸망하는 그 날까지 로마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동쪽인 이란 지역에서 제국을 재건한 반면 소아시아 지역과 유럽에 대한 로마의 지배권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주(州)의 크기를 줄여 제국을 행정적으로 개혁하고, 군주숭배 의례(자기와 부인 라오디케를 신으로 받드는 것)를 강화했으며, 주변 국가의 군주들과 자신의 딸들을 결혼시킴으로써 관계를 개선했다."안티오코스는 한니발 이후 로마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왕이었는데, 셀레우코스 니카토르(셀레우코스 왕조의 창시자이자 알렉산드로스 3세의 부하 장군인 셀레우코스)가 지배하던 아시아를 거의 모두 손에 넣어 사나운 야만족을 잠재운 다음, 자기에게 아직도 싸움을 걸어올 유일한 나라인 로마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 전집 1권의 569쪽/ 현대지성사/ 이성규 옮김.
2. 불안한 제국의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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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코스 3세가 제위에 오를때의 셀레우코스 왕조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가 죽자 그의 장남인 셀레우코스 3세 케라우노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2] 셀레우코스 2세가 사망하면서 소아시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케라우노스는 번개같이 그들을 진압하러 직접 군대를 이끌고 떠났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군대의 반란으로 암살당하고 동생인 안티오코스 3세가 왕위를 계승한다. 안티오코스는 총리에 헤르미아스, 소아시아 총독에 아카이오스 2세, 메디아와 페르시스 등 동부 속주들의 총독으로 몰론과 알렉산드로스 형제를 선왕(先王)이 임명했던 대로 유임시키고 반란자들의 척결에 나섰다.
안티오코스 3세가 즉위할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은 잇따른 반란과 외적의 침입으로 제국 개국 이래 최대의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서쪽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로도스 공화국, 페르가몬 왕국, 폰투스 왕국 등이 제국의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으며, 동쪽에서는 박트리아가 독립의 움직임을 보이고, 파르티아가 침입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선왕의 살해자들과도 싸워야 했다. 게다가 소아시아는 폰투스 왕인 미트리다테스 2세의 딸과 결혼한 장군 아카이오스 2세 휘하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안티오코스 3세의 승인 없이 자체적으로 주화까지 발행하는 반역 행위까지 저질러가며 독자적으로 페르가몬 왕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들 중 선왕 살해자들은 안티오코스 3세가 즉위하자마자 권력을 쥐고 있는 대신 헤르미아스의 도움으로 말끔히 처단하는 데 성공했다. 헤르미아스는 원래 간신으로 유명한 사나이였지만, 안티오코스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신이 권력을 쥐기 위해 그를 열성적으로 후원했다. 사실, 몰론과 알렉산드로스, 아카이오스 2세의 반란은 헤르미아스가 정권을 마구 휘두르면서 자초한 결과였던 것이다.
몰론은 메디아,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총독이었는데 그들은 안티오코스 3세가 직접 임명한 장군들이었다. 당시 안티오코스는 실권이 없었고 간신 헤르미아스가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 그들은 아직 어린 왕을 간신 헤르미아스의 간섭에서 해방시킨다는 것을 명목으로 중앙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몰론과 알렉산드로스의 반란은 안티오코스 3세에게 자신이 은혜를 베푼 장군에게도 배신당할 수 있다는 경각심과 대신에게 의지하면 안된다는 자립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안티오코스 3세는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헤르미아스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파 당수였던 제욱시스의 진언에 따라 진두지휘하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사기가 올라 몰론과 알렉산드로스의 반란군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반란군은 기세를 올려 제국의 대부분을 장악하기도 했다. 그들은 헤르미아스에 대해 반란의 기치를 들었기 때문에, 군대가 그들에게 대거 호응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헤르미아스만 제거하면 반란은 사그러들 것 같았다. 당시 안티오코스 3세는 안티오키아에서 웅거하고 있었는데, 왕이 없는 셀레우키아는 반란군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다. 자신들의 군대의 힘을 알고 나자 두 형제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셀레우키아에서 왕을 참칭하고 안티오코스 3세에게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반란자들의 군대 역시 헤르미아스라면 이를 갈았으나, 두 형제와 같이 안티오코스 3세에게는 대항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반란군은 속속들이 안티오코스에게로 투항하고 두 형제는 반란군 내에서도 고립된 존재가 되고 말았다. 몰론은 군대를 이끌고 직접 티그리스 강을 도강하여 북상해 안티오코스 3세가 직접 이끄는 니시비스 방면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몰론은 이 간헐적인 전투에서 안티오코스에게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자기 군대의 좌익이 고립되어 투항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후 안티오코스의 승승장구가 이어졌고, 마침내 몰론과 알렉산드로스는 BC 220년에 자결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그리고 BC 220년 메디아의 북서부 지역인 아트로파테네까지 정복했다. 한편,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기회만 엿보던 헤르미아스는 마침내 반역을 꾀하기 시작했는데, 이 음모가 안티오코스 3세의 측근에게 걸려들고 말았다. 이 음모가 발각됨으로써 그는 국왕파의 자객에게 같은 해(BC 220)에 살해당했다. 이로써 제국 내에서 그의 왕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세력은 소아시아에서 자신이 왕임을 주장하는 아카이오스 2세밖에 남지 않았다.
3. 제4차 시리아 전쟁
BC 219년, 안정된 제국을 갖게 된 안티오코스는 이집트의 혼란한 내정을 기회로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세력을 넓히기 위해 시리아 남부로 진격했고 이리하여 제4차 시리아 전쟁이 발발한다. 이 거국적인 전쟁은 제 3차 시리아 전쟁의 복수전이기도 했기에 이제 겨우 21세가 된 젊은 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진격했다. 처음에는 안티오코스 측이 유리했다. 전쟁을 하는 동안 그는 셀레우키아 피레우스, 티레, 프톨레마이스와 같은 동부 지중해의 주요항구들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다. BC 218년 코일레-시리아(레바논), 팔레스타인, 페니키아를 손에 넣었다. 특히 겨우 3년 전에 이집트의 대왕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가 사망했고, 그의 어린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가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왕권이 매우 미약한 때였다. 반면 안티오코스 3세의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얼마 전 몰론의 반란을 진압한 것으로 기세가 올라 있었고, 그는 티레를 비롯한 팔레스타인의 거의 모든 도시를 장악했다. 그는 이 지역을 완전히 제국령으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에 1년 가까이를 이곳에서 소모했다.
이집트의 권력을 쥔, 그 때까지 부패의 전형으로 여겨져 오던 간신 소시비오스는 단기 결전으로는 셀레우코스 제국군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지구전을 계획했고, 그는 말 잘하는 특사를 보내 이집트가 곧 항복할 것처럼 꾸미게 하고, 안티오코스에게 타결될 듯 타결되지 않는 협상을 진행시켜 그의 진군을 지체시켰다. 그 동안 소시비오스가 군대를 다시 불러모으고, 용병도 최대한 긁어모아 BC 217년 팔레스티나 수복을 위해 진군시켰다. 소시비오스의 진언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직접 이집트로 진격했다. 소시비오스의 책략에 놀아나 필요 이상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시간을 보낸 안티오코스는 아직 안정되지 않은 팔레스타인의 방어를 위해 라피아로 진군하는 수밖에 없었다.
라피아 전투는 헬레니즘 세계의 전투 중, 입소스 전투 이후 가장 큰 전투라고 일컬어진다. 셀레우코스군은 약 7만명, 프톨레마이오스군은 약 8만명에 달하는 인원이 투입되었다. 코끼리도 투입되었는데, 안티오코스 3세와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코끼리를 양익에 나누어 배치했다. 코끼리 간의 서전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인도 코끼리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아프리카 코끼리에 승리를 거두었다.[3] 산병 부대와 팔랑크스들도 이집트군을 향해 기세좋게 공격했다. 이집트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안티오코스 3세는 이집트의 파라오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적진으로 너무 깊이 진군했고 그 사이, 좌익을 희생양으로 삼고 제정신을 차린 이집트군은 우세한 숫자로 셀레우코스군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앙에서 점차 셀레우코스군의 패색이 짙어졌고, 좌익 역시 프톨레마이오스 측에 가담한 그리스 용병들의 분전으로 괴멸되었다. 그 때까지 전장을 지키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무사히 후방으로 빠져나갔다.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자 안티오코스는 자신이 패배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셀레우코스군은 라피아의 참패를 뒤로 하고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한다.
그러나 라피아 전투의 여파는 아이러니컬하다. 그 여파란 양 제국의 약화를 초래한 것이지만, 그 약화의 정도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훨씬 컸다.(...) 이집트는 긴 내분 속으로 빠져들었다. 중앙에서 마케도니아인과 함께 활약한 토착 이집트인[4] 이 전우들을 배반하고 상이집트에 독립 세력을 구축했다. 이집트는 이 내전이 장기화 됨으로 인해 크게 약화되었다.
4. 제국을 개혁하다
시리아 전쟁에서 패한 안티오코스는 제국으로 돌아가 개혁을 시작하는데, 문관과 무관으로 나뉘어 있던 관제를 개혁하여 문무대립을 없앴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때 추진되었던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제도를 혼합하여 제국의 실정에 맞는 제도를 완성하였다. 이 개혁으로 스트라테고이(장군; 페르시아의 샤트라프와 유사한 것)라고 불리우는 지방 총독들이 문무관을 통합하게 되었다. 또한 수도 안티오키아 만으로는 광활한 제국의 영토를 다스릴수 없기에 서쪽엔 사르데스에, 동쪽엔 셀레우키아에 각각 행정 중심지를 설치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그리스 문화를 동방문화보다 중시하였기에 결과적으로 토착세력의 반발을 낳기도 하였다.
5. 아나바시스, 동방원정
제4차 시리아 전쟁 이후 아카이오스 2세의 반란에 대처했다.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와 동맹을 맺은 안티오코스는 BC 213년 아카이오스 2세를 그의 수도 사르디스에서 사로잡아 야만적인 방법으로 처형했다. 소아시아 지방을 안정시킨 뒤 그는 유명한 동방 원정[5] 에 착수하여 멀리 인도까지 진출했다. BC 212년 안티오코스는 여동생 안티오키스를 아르메니아의 크세르크세스 왕과 결혼시켰고 크세르크세스는 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쳤다. 파르티아 왕 아르사케스 3세의 수도 헤카톰필로스를 점령하고 BC 209년 그에게 동맹을 강요했다. 이듬해에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에우티데모스를 격파했지만 그의 칭호와 통치권은 인정해주었다. BC 206년 안티오코스는 힌두쿠시 산맥을 가로질러 카불 계곡으로 진출했고 인도의 왕 소파가세노스와 우호관계를 새로이 했다.[6]
5.1. 제2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안티오코스는 사르디스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이 지역의 통치권을 재정비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함부로 군대를 움직이고 싶지 않았기에, 별 수 없이 페르가몬, 비티니아, 카파도키아, 폰투스가 자신의 통치권 밖에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년 후인 BC 212년, 그는 군대를 동쪽으로 출발시켰다. 그 성과로 아르메니아의 오론테스 왕조 제10대 국왕인 크세르크세스에게 자신의 종주권을 강요했다. 그리고 그에게 '''바실레이오스 메가스 다시 말해 대왕'''이라는 명칭을 선사할 동방 원정[7] 에 착수하였다. 우선, 준비 운동 격으로 BC 209년에는 군대를 이끌고 원래는 셀레우코스 제국령이었으나, 지금은 파르티아의 수도가 되어 있는 헤카톰필로스를 함락시키고 히르카니아(이란의 카스피 해 연안)까지 그들을 쫓아냈다. 파르티아의 왕인 아르사케스 2세는 사자를 보내 안티오코스에게 종주권을 인정하겠다고 하며 평화를 구걸했다.
다음 차례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었다. 박트리아 왕국은 원래 셀레우코스 제국령이었으나, 총독이었던 디오도토스 1세가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고 독자적인 왕국을 세웠다. 그리고 디오도토스 1세의 아들 디오도토스 2세는 에우티데모스에게 왕위를 빼앗긴다. 에우티데모스가 디오도토스 왕가를 멸한 지 약 20년째 되었을 때 셀레우코스 제국군의 침공을 받았다. BC 209년, 파르티아를 복속시킨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격전 끝에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아리우스 강 전투에서 박트리아 기병 1만명을 몰살시키고 번개같이 진격하여 그 수도인 박트라(후일 발흐)를 포위했다. 이리하여 발생한 안티오코스 3세의 박트라 공성전은 유명하다. 2년간의 공성전에도 박트라가 함락되지 않자, 빨리 이 곳에서 떠나 지중해로 돌아가고 싶었던 안티오코스 3세의 속은 타들어가기만 했다. 에우티데모스도 이 공성전을 더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양자는 곧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데 합의를 보았다.
셀레우코스 제국과 박트리아 왕국이 맺은 조약의 내용은, ‘반역자 디오도토스를 처단한 공로로 박트리아 왕위에 에우티데모스를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에우티데모스가 어디까지나 셀레우코스 제국을 상위 군주로 섬겨야 한다는 내용이 전제된 것이지만, 어차피 셀레우코스 제국을 섬긴다고 해도 그것은 안티오코스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한 형식적인 것이다. 에우티데모스는 평화 협상이 진행되는 도중, 갑자기 놀랄만한 제안을 했다. 바로 지난날의 원한을 씻게 되었으니,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와 안티오코스의 딸을 혼인시키자는 것이었다. 안티오코스는 고민 끝에 이를 응낙하기로 하고, 날을 잡아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이리하여 박트리아와 셀레우코스 제국은 완전히 화해했다. 안티오코스는 동방으로 좀 더 나아가기로 했다. BC 205년에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원정로를 그대로 따라 카불 계곡과 힌두쿠시 산맥을 지나 인도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마우리아 제국의 왕족이었던 소파가세노스로부터 코끼리를 선물받는다.[8] 그리고 셀레우코스 1세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동맹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해, 케르만 고원을 거쳐 셀레우키아로 입성했다. 이 성과는 그리스인들에게 매우 고무적이었고, 그는 “대왕”이라는 호칭을 얻게 된다. 이는 안티오코스 4세 시대에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그리스인의 식민이 이루어지는 배경이 된다.
셀레우키아에서 그는 또 새로운 동방 원정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원정 방향이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페르시아 만의 남쪽 연안을 따라 남하하는 것이다. 이 원정의 주 목적은 제국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아라비아 유목민의 중심 도시인 게라(Gerrhae)를 복속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원정은 게라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향력이 재건되는 것으로 짧게 끝났다.[9]
5.2. 대왕의 칭호를 얻다.
BC 205년(혹은 BC 204년), 라피아의 영웅인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가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아직 유아에 불과한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가 즉위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이것을 좋은 기회로 여기고, 마우리아 제국과 함께 셀레우코스 제국의 중요한 맹우(盟友)였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손을 잡았다. 두 군주는 이집트, 페르가몬, 트라키아를 서로의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분할하고, 서로가 필요하면 즉시 군대를 지원해 주기로 하였다. 이번에는 페르가몬이나 로도스 등이 셀레우코스 제국이 팔레스티나를 손에 넣는 것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BC 200년, 안티오코스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오론테스 왕가를 멸망시켰다. 앞으로 10년간, 아르메니아 고원은 안티오코스 3세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다.거대한 봉신국체계를 수립한 안티오코스는 '대왕'이라는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칭호를 사용했다. 그리스인들은 그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비유하여 그에게도 '대왕'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안티오코스 3세와 필리포스 5세의 계획을 로마가 알게되었다. 로마는 사절을 보내, 이집트 그 자체만은 침공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두 군주는 그런 요구에 흔쾌히 응했고, 로마의 사절은 그런대로 만족하면서 돌아갔다. 같은 해인 BC 200년, 안티오코스 3세는 드디어 팔레스티나를 침공했다. 그러나 아이톨리아 출신의 유능한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장군, 스코파스의 눈부신 활약은 안티오코스를 또다시 좌절시키는 듯 했다. BC 199년에는 스코파스의 지휘 하에 이집트군은 팔레스티나에서 셀레우코스 제국군을 거의 몰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스코파스의 운명은 여기서 끝이었다. BC 198년, 오늘날 요르단인 파니온에서 셀레우코스 제국군과 프톨레마이오스 제국군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파니온 전투에서 스코파스는 셀레우코스가 동방으로 원정하면서 안티오코스가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카타프락트의 매운 맛을 보아야만 했다. 개전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셀레우코스 제국의 카타프락트는 이집트의 기병대를 쓸어버렸고, 그들은 그대로 도주해버렸다. 버림받은 보병대는 측면에서 들어오는 카타프락트와 정면에서 들어오는 팔랑크스의 공격을 막아낼 재간이 없어 결국 이집트군은 여기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오랫동안 염원해오던 팔레스티나 정복을 마침내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안티오코스의 기세는 바야흐로 절정에 달해 있었다.이로써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을 획득했고 유대인의 신전국가에는 특별한 권한을 허용했다. BC 195년의 평화조약에 의해 안티오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가 100년 동안 각축을 벌였던 남부 시리아 지방과 소아시아의 이집트 영토를 영원히 소유하게 되었다.[10]
또한 그는 딸 클레오파트라를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시켰다. 이집트는 사실상 셀레우코스 왕조의 보호국이 되었다.
6. 헬레니즘 세계의 대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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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시에 그런 영광과 함께 암울한 소식역시 존재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가 로마와 대결하여 키노스케팔라이에서 대패한 것이었다. 필리포스 5세는 펠라에 틀어박혀 나오려 하지 않았다. 로마군은 그 동안 필리포스가 애써 키워놓은 마케도니아의 촌락을 약탈하고 다녔다. 필리포스는 이런 손실을 감내하면서까지 항전한 이유는 안티오코스의 개입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티오코스는 마침 팔레스티나에서 중대한 국면에 접어들어 있던 상황이었고, 페르가몬 왕국에 군대를 보내고 있던 상황이었다. 필리포스를 도울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필리포스는 안티오코스에게 실망감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로마에 항복하여 그 보호국이 됨으로써 동맹을 바꾸어버렸다. 그러나, 필리포스는 곧 로마에 더 큰 실망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로마는 그리스 내의 분쟁에서 언제나 필리포스의 반대편을 들었고, 이런 불만은 계속 쌓여가 종국에는 셀레우코스 제국과 안티고노스 왕조는 반(反)로마의 기치 아래 다시 비밀리에 우호관계를 회복하게 되기 때문이다.
7. 로마와의 일전
BC 196년, 시리아 전쟁이 매듭지어졌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안티오코스 3세의 딸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고, 시리아 경영에서 영원히 손을 뗀다는 내용의 조약을 맺게 되었기 때문이다. 파니온 전투로 인해 역전된 역학관계는 셀레우코스 제국이 메소포타미아를 상실할 때까지 계속된다. BC 198년, 시리아 전쟁과는 별도로 안티오코스 3세는 페르가몬 왕국을 공격했다. 이는 오히려 그들이 로마에 도움을 청하여 로마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BC 197년에는 이오니아 도시국가가 거의 모두 안티오코스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이들 중 몇몇이 로마에 지원을 청했고, 양국의 적대감이 본격화 되었다. BC 196년, 안티오코스 3세는 트라키아에 상륙했고, 여기서 자신의 종주권을 선언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최대 영토는 바로 이 시점이었다. 그리스는 권력의 공백상태로 안티오코스의 트라키아 합병 선언에 아무것도 대응할 수 없었다. 트라키아를 합병한다고 선언함[11] 으로써 로마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관계의 악화가 상당히 심해졌다. 그러나 이런 행보 속에서, 양국 관계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한니발이 셀레우코스 제국의 궁정에 망명 신청을 낸 사건'''이었다. 안티오코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 중 한니발의 활약에 관해 들어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해 최고의 예우를 갖추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것이 그 자신에 걸맞은 대우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한니발은 군대를 이끌고 싶어 했으나, 그가 나중에 이끈 것은 육군이 아닌 해군이었다.(...)[12]
BC 191년, 때마침 로마에 불만이 많던 아이톨리아 동맹이 사령관으로 안티오코스 3세를 선출하자 안티오코스는 군대 1만명을 이끌고 그리스 본토에 상륙했다. 안티오코스는 지난날 스파르타군이 페르시아군을 이겼던 바로 그 테르모필라이에서 로마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로마군은 숫자도 많았고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포위당했으므로, 1만명이 거의 다 죽는 참사 끝에 안티오코스만 병사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져 아시아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한니발에게 페니키아 해군이 맡겨졌다. 로마의 충실한 동맹자였던 로도스는 당시 최강의 해군을 가진 국가로, 만만치 않은 상대인 페니키아 해군을 에우리메돈 해전에서 격파했다. 한니발의 패배를 접하자 안티오코스는 해군 제독 폴리크세니다스의 지휘 하에 함선 90척을 맡겨 미오네수스 해전을 이끌게 했다. 그러나 비슷한 수의 로마-로도스 연합 선단과의 싸움은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이제 셀레우코스 제국이 로마군의 아시아 상륙을 제지할 방도가 없어졌다. 양 군은 마그네시아에서 충돌했다. 이를 마그네시아 전투라 한다.
안티오코스 3세가 직접 이끄는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총 7만 명 규모로, 카타프락트를 포함한 기병이 1만 2천 명이었으며, 낫 달린 전차, 코끼리 54마리 등 제국 내에서 징집할 수 있는 병종은 모두 모았다. 총 5만명 규모인 로마군은 로마-그리스의 혼합 병종으로 무장했으나, 대부분이 로마군이었고 그리스인은 주로 펠타스토이와 호플리타이로 전투에 참가한 듯 하다. 기병은 5천 명 가량이었다. 결전 장소인 마그네시아는 개활지가 아니라서 기병을 활용하기 적합지 못한 장소였다.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좌익에서 스스로 혼란에 빠졌다. 전차가 기병의 진군을 방해한 것이다. 그러자 우익에서 왕 자신이 이끄는 카타프락트 부대가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는 흥분한 나머지 로마군 측면을 공격하는 대신 로마군의 캠프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전장을 뜻하지 않게 이탈했고, 그와 동시에 페르가몬 왕으로 로마의 동맹 기병을 담당한 에우메네스 2세가 혼란에 빠져있던 셀레우코스 제국군의 좌익으로 돌격하여 그들을 괴멸시켰다. 중앙에서는 로마군이 코끼리를 겁먹게 하는 데 성공하여 그와 함께 팔랑크스의 측면을 찔러 그들이 마지막으로 무너졌다. 전투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진지가 함락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미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무너진 이후였다.(...)[13]
안티오코스는 결국 로마군에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못미. BC 188년, 그는 로마인들과 아파메아에서 조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이 매우 가혹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1만 5천 탈렌트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소아시아의 모든 영토를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새로운 국경선으로 타우루스 산맥이 설정되었다. 제국 해군의 규모 역시 로마의 규제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또, 후일 안티오코스 4세가 되는 자신의 삼남을 로마에 인질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안티오코스는 제2의 알렉산드로스가 되려 했던 자신의 야망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제국의 주요 수입원은 시리아 북부와 바빌로니아였기 때문에 무거운 배상금이나 소아시아 포기는 그리 큰 손실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제국의 위신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는 점이다. “바실레이오스 메가스”의 권위를 선언한 지 불과 10년만에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는 것, 이 때문에 속주들은 곧바로 동요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아르메니아 출신의 장군인 아르탁시아스가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아르메니아가 제국에서 분리되어 나갔다. 또, 파르티아가 공격해 오기도 하였다. 제국의 동부 속주는 또다시 난장판이 되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다시 동방 원정을 떠날 결심을 했다. 시리아와 바빌로니아는 제국에 충성하고 있으므로, 셀레우키아에서 출발하여 이란 고원의 독립적인 세력들을 토벌하고 이 지역에 다시 제국의 권위를 세우고 싶었다. 그는 다시 원정군을 꾸려 셀레우키아를 출발했다. 처음에는 원정이 순조로웠다. 그러나, 안티오코스가 여기에서 최후를 맞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그는 셀레우키아에서 가까운 자그로스 산록의 바알 신전을 약탈하라는 명을 내렸을 때, 갑자기 암살자가 뛰쳐나와 그를 찔렀다. 치명상을 입은 안티오코스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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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게 패배하고 맺은 아파메아 평화조약후의 셀레우코스 왕조
8. 사후
그가 사망하자 셀레우코스 제국은 장남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BC 187~175)가 통치했다. 그는 긴축 정책을 취하여 로마나 주변국과의 우호관계를 증진시키는 데 힘썼다. 셀레우코스 4세는 후일 데메트리오스 1세가 되는 아들을 로마에 인질로 보내고, 그 대신 동생인 안티오코스를 데리고 왔다. 셀레우코스 4세는 로마에 배상금을 모두 갚고, 제국의 재정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기 때문에, 셀레우코스 제국은 다시 지중해와 중동의 강자로 떠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4세는 대신 헬리오도루스에게 암살당하고, 그에 편승하여 왕위를 얻은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통치가 이어지게 된다. 안티오코스 4세는 다시 셀레우코스 제국을 초강대국으로 키우는 데 성공했으나, 그리 길지 않은 통치 끝에 그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셀레우코스 제국은 그 자신을 파멸로 이끌 긴 내분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1] Μέγας 메가스는 대왕이라는 의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대왕 역시 메가스이다.[2] 케라우노스란 '''번개'''라는 뜻으로, 이는 그의 행동이나 결단이 신속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3] 셀레우코스 왕조의 인도 코끼리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아프리카 코끼리보다 컸다.코끼리 항목 참조 [4] 그리스어로 '마치모이' [5] 당대엔 '아나바시스'라고 불렸다.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와는 다르다!(BC 212~205)[6] 셀레우코스 1세 때처럼 코끼리를 받아온다.[7] 아나바시스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와는 다르다.[8] 셀레우코스 1세 시절에도 인도까지 가서 코끼리 받아온 적이 있다. 다만 대부분이 늙고 병들어서 금방 죽었다.[9] 게라 시민들에게 500탈렌트를 조공받았다.[10] 다르다넬스 해협을 따라 진군하던 필리포스는 로도스, 페르가몬과 전쟁을 벌였다. 두 나라는 마케도니아에 대항하여 로마에 원정을 호소하면서 두 헬레니즘 왕 사이의 동맹 사실을 알렸다. 이에 로마는 헬레니즘 국가간의 관계에 결정적으로 개입해왔다. 필리포스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BC 200~196)에서 로마에게 패했다. 안티오코스는 그를 돕지 않았고 도리어 로마가 필리포스와 싸우고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집트에 침입했다. 로마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 게 사절을 보냈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11] 셀레우코스 1세가 트라키아를 점령한적이 있음을 들어 정당성을 주장했다.[12]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따르면 당시 안티오코스는 한니발에게 독립된 군대를 주어 북아프리카로 보내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에톨리아 사람 토아스가 로마를 상대로 승리하면 한니발은 돌아오지 않고 왕이 될것이라며 반대했다. 결국 계획은 철회된다. 실제로 위만처럼 망명한 타국 장군이 반기를 드는것이 드문 일은 아니므로 이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북아프리카로 군대를 이끌고 떠나면 적어도 카르타고는 그에게 복속될게 뻔한데, 그때도 한니발이 신하로 남아 있으려 했을까? 여러모로 한니발에게 독립된 지휘권을 주지 않은게 멍청한 결정이라 보긴 어렵다. 안티오코스가 너무 쉽게 말아먹어서 문제지.[13] 반면 독일의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이 쓴 로마사 4권에 의하면, 로마군이 궁병과 투석병 등 원거리 병과들을 내세워 셀레우코스 군대의 중무장 보병들을 계속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방식으로 괴롭히다 지치게 하여 무너뜨렸다고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