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쿠스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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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각은 19세기에 프랑스에서 상상하여 만든 것이다. 즉 로마 시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그라쿠스 형제의 조각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1. 개요
Gracchi
그라쿠스 형제는 공화정 시절 로마의 정치가로서, 형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기원전 168/163년 ~ 기원전 133년)와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Gaius Sempronius Gracchus, 기원전 154년 ~ 기원전 121년)를 부르는 말로, 이들은 기원전 2세기 호민관을 역임하였다. 이들은 농지법을 발의한 뒤 시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초기에 몇 차례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결국 모두 원로원에 의해 암살을 당하는 결말을 맞이했다. 역사상 귀족들과 맞서 평민들, 특히 징병으로 피폐해진 평민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는 제도를 시도한 것은 이들이 최초였기에 이들은 지금도 '''징병제의 선진병영화'''로 여겨지고 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그라쿠스 형제는 유서깊은 평민 귀족인 셈프로니아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어머니 코르넬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77년과 163년 집정관을 맡았던 정치인이었고, 어머니 코르넬리아는 한니발 바르카를 이긴 로마의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둘째 딸이었는데,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 그라쿠스와 외할아버지 스키피오는 서로 정적 사이였지만 스키피오가 그라쿠스의 능력을 인정해서 결혼시켰다고 한다.[1] 동시에 그라쿠스 형제의 누나인 셈프로니아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와 결혼했으니 그라쿠스 가문은 스키피오 가문과 겹사돈 관계였다. 아프리카누스와 그의 양손자 아이밀리아누스는 로마의 일인자였고 그 집안과 겹사돈 관계를 맺었으니, 그라쿠스 가문은 아주 강력한 연줄을 갖춘 로마의 최고 가문 중 하나였다.
그라쿠스의 부모님은 나이차가 상당히 많이 나는 결혼이었지만 부부의 금슬은 매우 좋아서 그라쿠스 형제를 포함해 자녀가 무려 12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생 가이우스가 태어나고 얼마 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 이후 어머니 코르넬리아는 일반적인 로마 여성들과 달리 재혼하지 않고 자녀들의 교육에 힘썼다.[2] 코르넬리아는 그들에게 최고의 그리스 출신의 교육자를 붙여주었고 형제는 이 가정교사들로부터 웅변술과 정치학을 배운다. 이때 이들은 그리스의 민주주의의 체계를 배우고 공화정의 모든 권력은 국민들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상을 배우는데 이는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준다. 또한 이들은 당시 젊은이들에겐 필수적이었던 군사 교육도 배우는데 이들은 승마술, 무술 등을 배웠고 이들은 곧 다른 젊은이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재능을 보이게 된다. 두 형제 중 형 티베리우스는 3차 포에니 전쟁에 종군한 젊은 장교 중 가장 뛰어난 통솔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카르타고 성벽을 가장 먼저 돌파한 지휘관이기도 하였다. 또한 스페인에서 발발한 누만티아 전쟁에서는 뛰어난 외교술로 2만에 이르는 병력의 목숨을 구해내는 등의 활약을 한다. 그들의 뛰어난 재능과 배경은 곧 원로원 귀족층의 눈에 띄었고 이후 이들 형제가 성장하면서 원로원 귀족들과의 교우는 점점 두터워진다.
2.2.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형 티베리우스는 성년이 되자 복점관이 된다. 이 무렵 집정관에 감찰관까지 역임한 유력 원로원 의원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딸과 결혼한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매형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따라 3차 포에니 전쟁에 참전해 군사 호민관[3] 에 임명된다.(출처 필요) (플루타르쿠스가 인용한) 당시 참전용사 판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판니우스 자신과 더불어 가장 먼저 카르타고 성벽에 오른 사람이라고 한다.
BC 137년 티베리우스는 콰이스토르[4] 에 임명되어 집정관 가이우스 호스틸루스 만키누스를 따라 누만티아[5] 전쟁에 참전한다. 그러나 가이우스의 실책으로 대패하고 로마군이 포위되는데 이때 티베리우스가 가이우스의 지시에 따라 휴전협상을 하여 포위된 2만 명의 로마군을 살려 돌아온다. 그러나 로마로 귀환하자 원로원은 누만티아와의 휴전에 반대하며 전통에 따라 군대를 이끈 집정관과 티베리우스를 포함한 장교들을 누만티아에 본보기로 추방할 것을 지시했지만 민중들은 협상으로 군단병을 살려온 티베리우스를 높이 평가해 휴전 폐지와 집정관 가이우스만 추방하고 티베리우스 등 장교들은 남기기로 민회에서 표결한다.
여담으로 이때 사촌형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누만티아와의 휴전 협정 비준에 소극적이어서 티베리우스 지지층에게 비난을 들었는데 이를 두고 역사가 사이의 해석이 다르다. 이를 티베리우스가 원로원 의원인 스키피오와의 불화의 시작이라고 주장하는 해석도 있지만(출처 부탁) 플루타르코스처럼 스키피오는 단순히 중립적이었고 오히려 뒤에서 티베리우스의 추방을 막았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이 시기 티베리우스는 로마의 심각한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동생 가이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누만티아로 가는 길에 에트루리아(Etruria) 지역[6] 에서 현지 자영농들이 모두 땅을 잃고 사라지고 노예들이 농사짓는 대농장을 목도하며 로마의 심각한 상황을 파악했다고 한다.[7] 그리고 BC 134년 티베리우스는 위에서 보여준 민중의 지지에 힘입어 호민관에 당선된다. 티베리우스는 호민관에 당선되자마자 로마의 농지 강탈문제를 1차적으로 이 토지 문제를 공격한다. 그리고 대사제 크라수스와, 집정관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장인 압피우스 클라우디우스등과 상의해 기존 법에 따라 불법 토지를 반환하는 농지법을 입안하고 불법 토지강탈의 피해자들인 대다수의 민중의 지지와 티베리우스의 능력이 합쳐져 엄청난 지지를 받는다.
2.2.1. 농지법
2.2.1.1. 배경
로마는 포에니 전쟁 이후 무수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 전쟁 상태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잠깐 휴지기를 가진 뒤 다시 백년에 걸쳐 한해도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로마 군단병들은 로마 시민을 징집하는 구조였는데 대부분 자영농인 로마 시민들은 전쟁 때문에 자주 그들의 농토를 떠나 싸우러 가야 했고 결국 농사를 망치고 결국 생존을 위해 농토를 팔아치운 뒤 파산을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파산한 자영농들은 로마로 상경해 수많은 무산자 계급들과 함께 일거리를 찾아 로마 시내를 배회하였다. 때문에 로마 군단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 요건을 가진 재산을 가진 자들의 수는 줄어들게 되었으며 이는 로마 군단의 약화를 초래하였다.들에서 풀을 뜯는 짐승조차 쉴 곳이 있는데, 로마를 위해 싸우고 죽는 병사들은 공기와 햇빛 말고는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고, 집도 안식처로 없이 처자식과 함께 거리를 떠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장군들이 전투에 앞서 적으로부터 무덤과 신전을 지키라고 군사들을 격려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토록 많은 로마인들 가운데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제단이 있고 조상의 분묘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남들의 부와 사치를 지켜주려고 싸우다 죽는 꼴이지요, 그들은 세상의 주인이라고 불리지만 '''그들에게는 자기 것이라고 부를 흙 한 덩이도 없습니다!'''
-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농지법 통과를 요구하는 연설에서. 당시 장원제인 라티푼디움으로 인한 악영향을 잘 요약한 연설이다.
이런 상황에서 팔린 땅은 자금 동원능력이 있는 원로원 의원 등을 중심으로 한 로마의 부유층이 사들인 뒤 대규모의 농지를 경영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획득한 넓은 영토는 매각되거나 임대를 하게 되었는데 이는 주로 소유가 되곤 하였다. 그나마 소작농이라도 줬다면 농민의 완전파산은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겠지만 부유농들은 이러한 넓은 농지를 수많은 노예를 동원해 경영하였고 농민의 파산은 더 악화되었다.
여기에 더 불을 붙인 게 국유지의 불법 점유로 로마는 점령지를 무산자들에게 싼값에 소작을 주었는데 이것을 부유층들이 불법으로 점유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소작이라는 마지막 수단까지 막힌 로마 시민들은 대부분 파산해 무산계급이 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로마도 이런 악순환을 모르는 게 아니라 리키니우스법처럼 토지를 소유를 500 유게름(약 125 헥타르)만 허용하는 토지상한제 등을 시행했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티베리우스 이전에 집정관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사피엔스'도 이런 상황을 해결하고자 했지만 반대파에게 막혀 포기한 전적이 있다. 심지어 라일리우스는 개혁을 중도에 포기한 것이 원로원 입장에서는 현명하다고 간주되어 '사피엔스'라는 별명을 받은 것이었으니 얼마나 반대가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2.2.1.2. 티베리우스의 농지법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저소득층에 대한 분배를 늘리기 위해 농지법을 제안한다. 이 농지법은 전쟁으로 획득한 국유 토지에 대한 관리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법은 개인당 125 헥타르 이상의 땅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 이상 소유했을 경우 그 나머지 부분은 정부가 몰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법은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이유는 대토지 소유주가 자신의 노예와 자신들의 보호민(클레엔테스)인 로마 시민들의 명의로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이러한 편법을 농지법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원로원 의원들은 거의 대농장 소유주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달래기 위해 그라쿠스는 농지법에서 그들이 불법으로 소유하는 영토를 정부로부터 임대받는 형태로 소유를 하는 것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이렇게 형식적으로 몰수한 것에 대해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는 원로원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최대한의 배려였다.
티베리우스는 또한 정부 관리하에 있는 국유지의 경우 무산자들에게 대략 7.5 헥타르 정도의 땅을 나누어 주게 한뒤 세금과 병역 복무의 의무를 지게 하는 하는 제안을 내놓았다. 이는 로마 사회의 무산자의 급증과 병역 복무 가능 인원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이 제안에 대해 원로원은 강하게 반대하였다. 이들의 반발의 배경엔 티베리우스의 법안 제출이 독단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서 그의 제안을 반대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는 원로원에 우선 제출하여 의논을 거친 뒤 민회에 회부하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직접 이 법안을 민회에 가져간 것이었다. 비록 이것이 로마법을 어긴 것은 아니었지만[8] 원로원 의원들은 원로원을 무시하는 티베리우스의 방식에 분개하였고 때문에 원로원과 티베리우스와의 관계는 멀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티베리우스의 법안을 저지시키로 결심한 원로원은 동료 호민관인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를 설득하여 티베리우스의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토록 하였다. 옥타비우스의 거부권에 의해 여러번 저지되자 티베리우스는 그가 평민의 권리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음을 들어 그를 해임키로 하였다. 티베리우스는 그의 해임에 대한 투표를 하려 하였는데 옥타비우스는 이러한 투표가 전례에 없으며 또한 이런 것이 로마법에 규정되어있지 않음을 들으며 호민관 직을 계속 유지하였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그가 평민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저지하였고 그의 해임안에 대한 투표를 강행하였는데 이는 호민관에 대한 신성불가침 권한을 위배하는 것이었으므로 티베리우스의 지지자들은 이에 대해 우려하였다. 마침내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호민관으로써 갖고 있는 거부권을 활용해 로마 시내의 모든 축제와 시장이 열리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이로써 로마 시내의 모든 상업과 행사를 중단케 하였다. 티베리우스는 이 농지법이 통과되어야만 자신의 거부권을 철회하였다고 버텼다. 이러는 동안 티베리우스의 신변을 우려한 민중들은 그가 이동할 때마다 그를 에워싸며 보호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우스 해임안을 관철시킨다.[9]
옥타비우스를 해임하자 티베리우스는 거리낌없이 농지법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자 원로원은 농지법에 아주 적은 양의 예산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훼방을 놓는다. 그런데 그해 마침 페르가몬의 왕 아탈루스 3세가 로마에 자신의 왕국을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이로써 로마는 그의 왕국과 그의 국고를 손에 넣게 된다. 티베리우스는 이 새로운 돈을 농지법의 예산으로 쓰고자 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평민집회에서 이 돈을 농지법의 자원으로 쓰는 법안을 제출하고 이를 통과시킨다. 이는 원로원에게 있어 직접적인 공격이라고 비추어졌는데 그 이유는 전통적으로 예산의 집행은 원로원의 고유 권한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퀸투스 폼페이우스[10] 가 원로원에서 티베리우스를 맹비난하며 아탈루스 3세가 죽으면서 그에게 자신의 왕의 인장과 가운을 주었고 이는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왕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라며 비난을 퍼붓는다.
이때 티베리우스의 임기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티베리우스가 옥타비우스를 해임시킨 것은 신체불가침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었으므로 원로원은 그의 임기가 끝나면 재판에 회부하고자 하였다. 이를 안 티베리우스는 호민관에 다시 출마하려고 하였고 이는 공직에 있는한 기소당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선거의 공약으로 군복무 기한을 줄이고, 배심원을 기사계급으로 구성시킬 것이며[11] 또한 로마 시민권을 로마의 동맹 시민들에게도 수여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티베리우스의 행동은 참주가 되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졌다.[12]
이때 최고 제사장이었던 스키피오 나시카는 티베리우스의 사촌임에도 불구하고[13] 티베리우스를 맹비난하며 티베리우스가 왕이 되려하는 것을 가만 둘 수 있느냐고 말하며 원로원 의원들을 선동한다. 그는 당시 집정관이었던 무키우스 스카이볼라[14] 에게 그라쿠스를 처형하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결국 스키피오 나시카는 자신의 철제 의자를 뜯어다 곤봉을 들고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티베리우스를 항해 돌진한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티베리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혼란에 빠졌고 패싸움 도중 티베리우스는 목숨을 잃는다.
현직 호민관이 원로원 의원들에게 로마 포럼 한복판에서 살해당하는 참극은 로마 시민들을 경악시켰다.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이지만, 본래 호민관은 고대로부터 이러한 상황을 염려하여 법률로서 신체불가침권을 인정받고 있었는데 사회 지도층이라는 원로원 의원들이 이를 대놓고 무시한 것이다.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원로원은 나시카를 추방형에 처한 뒤[15] 농지법의 시행을 약속한다. 하지만 뒤이어 발족된 농지 분배 책임을 맡은 농지법 위원회는 원로원으로 구성되었으므로 시행에 대한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고 수많은 방해 공작과 로비로 인해 농지 배분은 있으나 마나 하는 상태가 돼버린다. 그런 상태로 10년이 흐른뒤 티베리우스의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2.3. 가이우스 그라쿠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티베리우스의 친 동생으로 그보다 9살이 어렸다.[16] 티베리우스가 죽었을때 그는 21살이었는데 형의 죽음은 그라쿠스에게 아주 큰 슬픔을 안겨주었으며 이런 강한 충격은 그의 형에 비해 더 급진적이고 열정적인 성격을 갖게 하였을 거라고 역사가 플루타크는 서술하였다.
가이우스는 티베리우스의 농지법의 작성에 참여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티베리우스가 농지 분배 위원회를 구성했을 때 그의 장인과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여기에 참여시킨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가 농지법에 대한 방해공작으로 고생했을때나 이것에 의해 살해당했을때 가이우스는 이것을 아주 직접적으로 체험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때 그는 이미 성인이었던 21세였으므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였는지[17]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죽음 이후 그는 조용히 명예로운 경력을 밟아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28세에 재무관에 선출되었고 임기가 종료된 32세에 호민관 선거에 나서 당선된다.
가이우스는 호민관이 되자마자 그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처럼 원로원의 친구가 아님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그가 티베리우스가 죽은 뒤 그의 동료들을 재판한 당시 집정관인 파필리우스를 공격하는 법안을 제출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로마법엔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재판은 반드시 평민 집회를 통해서만 가능했는데 파필리우스는 티베리우스 일파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기 위해 이를 어기고 재판을 열어 그들을 사형시킨 바 있다. 이에 대한 위법성을 가이우스는 지적을 하였고 이 때문에 파필리우스는 로마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그리고 뒤이어 티베리우스가 공약했었던 배심원을 기사계급으로 채우는 것을 실현시킨다.
가이우스는 농지법도 적극적으로 실현시키려고 하였다. 원로원이 티베리우스에게 대단히 적대적이었던 것은 티베리우스가 추진했었던 125 헥타르의 제한이 원로원의 토지 소유와 충돌했었기 때문인데 가이우스는 이를 피하려고 해외 식민지를 적극적으로 개발해 이것을 로마 시민들에게 배분하려 하였다. 이점은 원로원의 재산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고 또한 원로원이 이미 평민들에게 농지법을 약속한 것도 있어 가이우스는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는다.
이에 가이우스는 몇 가지 개혁을 더 추진하는데 로마 시민들에게 곡식을 싼값에 제공하는 것, 그리고 전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수여하는 것 등이었다. 곡식에 대한 법은 통과되었으나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것은 기각되었는데 그 이유는 로마인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다른 이탈리아인들과 공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이우스는 형과 달리 연임에도 성공한다. 하지만 이때부터 원로원이 움직이기 시작해 이들은 같은 원로원인 드루수스에게 힘을 실어준다. 원로원에게 조종당한 드루수스는 가이우스보다 더 급진적인 법안을 내놓았고[18] 이로써 시민들의 인기는 드루수스에게 집중되고 가이우스는 잊혀지게 된다. 가이우스는 세 번째 호민관 선거에 출마하나 여기서 낙선한다.
그해 가이우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던 루키우스 오피미우스가 집정관에 당선된다. 오피미우스는 가이우스의 법안을 철회하려고 하였고 이에 항의하는 군중들이 카피톨리네 언덕에 모이게 된다. 이때 오피미우스의 부하가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고 이를 빌미삼아 원로원은 최초로 '''원로원 최종 권고'''를 발의한다. 이로써 이들은 로마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초월적인 권한을 오피미우스에게 주었으며 오피미우스는 그의 병사를 이끌고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의 지지자를 모두 체포한다. 가이우스는 달아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그의 지지자 3천 명은 모두 처형당한다. 그렇게 한 뒤 원로원은 가이우스가 발의했던 모든 법안을 폐기한다.
가이우스를 제거한 오피미우스도 나시카처럼 뒤끝이 좋지는 않았는데, 누미디아와 한판 붙은 유구르타 전쟁 직전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것이 들통나 디라키움으로 추방되는 형벌을 받고 거기서 죽었다.
여담으로 오피미우스는 가이우스의 머리를 들고 오는 자에게 그 머리의 무게에 상응하는 금을 줄 것을 약속했는데, 머리를 잘라 온 셉티물레이우스(Septimuleius)라는 자가 가이우스의 뇌를 빼내고 녹인 납을 부어넣어서 머리의 무게를 늘리려는 얕은 꾀를 쓰는 바람에 약속을 취소하고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3. 평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로마에서 가장 유명하고 부유한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을 수호하다 죽은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뛰어난 통찰력으로 로마가 가진 문제점을 파악하였고 뛰어난 교양과 법률적인 지식을 무기로 이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법안은 원로원의 이익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원로원은 이 법안을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방해한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는 이에 한치도 물러나지 않았고 이들은 평민 집회가 가진 입법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원로원의 의사에 반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이는 당시 권력자들이었던 원로원의 심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고 이러한 종류의 도전은 원로원은 공화정 설립 이후 처음 겪는 것이었다.
공화정이 생긴 이래 원로원은 실질적인 로마의 최고 권력 집단이었다. 집정관이 공식적으론 최고 권력자이나 이들은 집정관 경험이 없는 뜨내기들이 주로 맡았고 원로원은 전직 집정관이 우글거리는 집단이었다.[19] 또한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는 인사들은 이미 원로원 의원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집정관들은 거의 모든 문제를 원로원과 상의하려고 하였으며 따라서 원로원의 의사는 곧 로마의 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라쿠스 형제는 이러한 구조에 처음으로 도전한 것이다. 호민관들 중 그라쿠스 형제처럼 그들이 가진 권한을 쓴 적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호민관의 권력은 막강하였다. 행정권과 군단 지휘권을 제외하고 호민관과 집정관의 권한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단지 호민관 특권과 군단 지휘권 두 개만으로 황제의 직위를 획득하였다. 이 호민관 특권은 군사권만 빼면 황제의 권한과 전혀 다를바 없었으며 단지 아우구스투스는 일년 임기를 없애고 종신으로 호민관 권한을 가졌을 뿐이다. 이것 만으로 황제 노릇이 가능했을 정도이니 호민관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했던가를 짐작케 한다. 그 이전에 강력한 군단 지휘권을 쥔 폼페이우스가 호민관 가비니우스의 배후에서 원로원에 불리하고 민중파에 유리한 법들을 잇따라 제정하게 했는데도 원로원이 아무 조치도 못 취했다는 점에서[20] 그 강력한 권한이 충분히 설명된다.
호민관이 가진 막강한 권한은 이들이 입법권, 사법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원로원의 허락없이 자신의 재량만으로 재판을 열수 있었고 또한 법률을 민회에 회부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이런 권력을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원로원인데, 이는 원로원이 귀족과 평민의 차별을 없애라는 개혁을 요구하는 평민들의[21] 요구를 수용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편법 때문에 호민관이 이런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된 것이었다.
원로원은 평민들로 하여금 평민 집회를 따로 갖게 하였고 이들이 호민관을 선출하게 함으로써 기존의 정부 체제를 완전히 고수하는 한편 평민들의 정부를 따로 구성케 한다. 그리고 이 평민들의 정부를 자신들의 통제하에 둠으로써 "평민들의 요구 수용"과 "귀족들의 기득권 수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다. 평민들의 정부가 완전히 원로원의 통제를 받았다. 호민관에 출마할 자격을 가진 자들은 평민 귀족들 뿐이었고, 이들은 원로원과 정치적 이익을 공유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로원이 자신들과 같은 계급이라고 생각한 그라쿠스 형제가 최초로 이 평민 정부를 움직여 로마의 개혁을 추진하고 원로원을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최초로 평민 정부가 원로원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원로원은 위에 나오듯 이를 심각한 위협이라고 판단하였고 원로원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법을 만들고 추진하는 것을 왕이 되려는 행보라고 판단하였다. 그럼으로써 원로원이 일찍이 없는 무력으로 호민관을 마구 죽이는 초법적인 행동에 의지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라쿠스 형제 이후 로마 정부는 피와 폭력으로 얼룩지게 된다.[22]
즉, 그라쿠스 형제의 출현은 로마 정부의 모순점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이런 모순을 만든 건 다름 아닌 원로원 계급이나 다름없었다. 군단 지휘권만 없었지 실제론 왕이나 다름없는 권한을 호민관들에게 줌으로써 사실상 로마내에 두개의 정부가 구성되게 한 것은 바로 원로원들이었다. 이로써 이들은 사실상 다른 마음을 품은 정치세력이 마음만 먹으면 평민들로 이루어진 정부를 굴려 원로원 체제를 전복시키려 하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훗날 민중파의 대두는 바로 이런 터전하에 생긴 것이며 이들은 사병화된 군단들과 영합하여 군사력까지 갖춤으로써 기어이 원로원 체제를 전복시키는 데 성공한다. 호민관의 권한이 막강해진 것은 시대의 요구라고 할 수 있고(안 그랬으면 로마가 귀족과 평민으로 반반씩 갈라졌을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 사병화된 군단이 나타난 것도 원로원의 병크에 의한 것이니 남말할 처지도 못 된다.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은 훗날 제정이 되고 나서도 황제들이 시도하지 않는데 이는 너무도 기득권과 반대되기 때문이었다.[23] 사유 재산에 한계를 긋는 것은 현대에 와서도 사회주의 국가 외에 어디서도 시행되지 않는다. 이렇게 고대~중세 국가의 귀족 집단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성공 사례가 극히 드문데, 이런 귀족 집단의 영향력은 왕조차도 무시할 수 없으며, 이들이 왕보다 권력이 큰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대개 이들의 기득권이 전복된 것은 외부의 침략으로 아예 나라 전체가 쑥밭이 되거나 또 다른 지배계급이 등장하여 기존 지배세력의 대체를 시도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24]
원로원 계급이 그라쿠스의 농지개혁에 반발한 것은 원로원 계급은 반드시 대농장을 경영하는 지주여야만 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는 원로원의 상업활동을 금지하는 법이 플라미니우스에 의해 규정되었기 때문으로, 원로원이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대농장을 소유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은 바로 이런 대농장의 소유를 금지케 하는 것이었으며, 농지법의 시행은 사실상 원로원 계급의 씨를 말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원로원 의원들에게 있어선 절대로 농지법의 통과를 동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라쿠스 형제가 이것을 몰랐던 것인지 혹은 의도했던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원로원에게 있어 그들의 계급 자체를 파멸시키는 법안이나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라쿠스의 형제의 법안에서 원로원의 사유농지 자체를 불법화한 적이 없다. 이전부터 농지의 임차와 소유의 상한선은 정해져 있었지만 원로원이 일가족과 노예들 명의까지 동원해서 사실상 무제한으로 토지 점유가 이루어졌고, 그라쿠스는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 임차와 소유의 상한선을 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상한선을 넘긴 토지도 국가가 돈을 주고 사는 식이었다. 농지법에서 정해진 상한선은 1000유겔룸(250헥타르) 인데 이게 원로원을 파멸시킬 수준인지는 의문.
그라쿠스 형제는 농지 개혁을 원로원과 관료들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시도하려 하였고, 이에 맞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한치도 양보할 생각이 없던 원로원은 위법적인 무력 수단을 동원한다. 그 결과 그라쿠스 형제는 목숨을 잃고 로마는 엄청난 혼란에 빠진다. 이는 결국 기득권을 한치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 원로원과, 부족한 힘으로 무모한 개혁을 시도한 그라쿠스 형제의 대결이 결국 원로원의 승리로 끝난 셈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패배한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은 시도조차 되지 않고 묻혔으며 원로원이 야기한 사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원로원은 점점 지지를 잃어갔으며 마침내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거쳐 원로원은 힘을 잃고 로마는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으로 가게 된다.
따라서 그라쿠스 형제의 출현은 로마 공화정의 모순된 정치구조를 보여주는 최초의 조짐이라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말로는 평등하게 정치를 하지만, 실제로 정치를 하는 쪽은 귀족계급인 원로원에서 하고 평민들이 대항하면 자신들이 가진 군사력으로 밀어버렸다. 즉 원로원과 민회는 겉보기에는 완전히 동등한 권력기관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인 무력이 없는 민회는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다만 반대로 말하면 실질적인 무력을 가지고 민회를 장악하면 원로원도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가진 자가 바로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다.[25]
기득권 출신이었음에도 기득권에 반하는 개혁을 추진하다가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했다는 점 때문에 후세의 많은 동정을 받았으며, 이들이 후사를 두지 못했기 때문에 혈통은 단절되지만 그라쿠스라는 이름은 ''''양심적인 로마인''''을 묘사할 때 애용되는 이름으로 남아 고대 로마를 다룬 작품에서 등장한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스파르타쿠스와 노예들의 처지를 동정한 민중파 영수의 이름도,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콤모두스 황제 이후의 로마를 맡아 공화정으로 회귀시킬 역할을 맡은 원로원 의원의 이름도 모두 그라쿠스이다.
[1] 출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전, 1장[2] "코르넬리아의 보석" 일화에 나오는 두 아들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이다.[3]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 '호민관'과는 전혀 상관없는 군사 지휘관이다. 오역의 폐해. 시오노 나나미는 '대대장'으로 번역했다. 관련 문단 참고.[4] Quaestor 고대 로마의 재무담당 관리[5] numantia 지금의 스페인 동북부 지역의 도시[6] 지금의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이다.[7] 출처-플루타르쿠스 영웅전 8장[8] 호르텐시우스 법으로 평민들로만 구성된 민회에서 의결된 법안 또안 법으로 기능하는 것이 보장되어 있다.[9]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티베리우스는 옛 친구이기도 한 옥타비우스를 최대한 설득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논쟁할 때 옥타비우스에 대한 인신 공격은 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법안에 저촉되는 옥타비우스의 땅값을 개인 재산으로 내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결국 해임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도 민중들 앞에서 간절히 설득한 뒤 자신의 호민관 직부터 거는 안부터 내밀고 이걸 거절하자 해임안을 제출했으며, 투표가 진행된 뒤에도 옥타비우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흐르자 투표를 중지시키면서까지 설득했다.[10]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싸운 폼페이우스와 같은 성을 쓸 뿐 직접적인 혈연은 아니었다. 그래도 카이사르와 어느 정도는 관련이 있어서 그의 증손녀가 카이사르의 부인인 폼페이아이다. 폼페이아는 클로디우스가 여장을 하고 카이사르의 집에 잠입한 사건으로 인해 이혼당한다. 이때 카이사르는 '내 아내는 추문에조차 휩싸여선 안된다'라고 말하였다. 이 에피소드에서 유래한 관용어가 Caesar's wife.(의혹을 살 행동을 하면 안 되는 사람)[11] 이는 그 자신에 대한 보신책이기도 하였다. 배심원이 기사계급으로 구성되면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무죄받을 확률이 원로원으로 구성된 배심원보다 훨씬 높았다.[12] 호민관의 연임은 위법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일부 책에는 호민관의 연임이 위법이라는 법률이 있었다고 확실히 증명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연임시도 이후, 제한적인 상황(후보가 나서지 않는다든지)에 한해 호민관의 연임을 허용한다는 법률이 제정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이를 통해 그 이전에 호민관의 연임이 위법으로 정해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자세한 내용은 허승일이 저술한 로마공화정연구 참조. 아니면 단순한 관례였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미국은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2번만 대통령을 하고 내려온 이래 법적으로 금지하는 조치가 없었는데도 대다수의 대통령들이 2번까지만 대통령을 지냈다. 2선 제한이 법으로 생긴 것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4선을 하며 뇌출혈로 사망할 때까지 12년을 대통령으로 보낸 이후부터다. [13] 티베리우스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로, 스피키오 나시카의 어머니의 여동생이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였다. 당시 최고의 장군이자 두번의 집정관, 감찰관 등으로 엄청난 권력을 가졌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그의 사촌이고, 최고 제사장인 스키피오 나시카 역시 사촌인 것은 얼마만큼 티베리우스가 지배계급인 원로원과 가까웠는지 보여준다. 이런 티베리우스가 평민들을 위해 싸우다 죽은 것은 아이러니하다.[14] 스카이볼라는 그라쿠스의 동지로, 농지개혁법의 법률적인 자문을 해주었던 인물이다. 이때 스카이볼라는 "폭력을 사용치 않을 것이며, 재판 없이 시민을 처형하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만약 민중이 티베리우스의 선동이나 강제에 이끌려 불법적인 표결을 강행한다면,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는데, 스카이볼라마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모습은 당시 그라쿠스의 호민관 연임 시도가 로마사회에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는지 알 수 있다.[15] 보통 로마의 최고 제사장은 로마에서 나가는 법이 없었지만 민중들을 달래고자 외교 임무를 구실삼아 나시카를 추방시켰다. 그 뒤 나시카는 정줄놓고 소아시아를 떠돌아다니다가 결국 로마로 돌아오지 못하고(일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의 지지자들에게)죽었다고 한다. [16] 그가 죽은 뒤 14년이 지나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가이우스 마리우스보다 3살 어리다.[17] 즉 원로원 의원들의 부패와 횡포와 이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단이라는 것.[18] 이는 완전히 인기 영합주의적인 법안으로 원로원과 드루수스는 이 법안을 계속 유지하고자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단지 가이우스의 인기를 갉아먹기 위한 것이었다.[19] 집정관은 해마다 두 명씩 나왔으며 이들은 연임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원로원은 대략 2~30여 명의 전직 집정관을 꾸준히 포함하고 있었다.[20] 호민관의 신성불가침도 무시할 수 있는 원로원 최종 권고가 있었지만, 강력한 군사력의 지원을 받는 호민관을 상대로 발동했다간 정치적 정당성은 물론 오히려 원로원이 박살날 수도 있기 때문에 발동 자체가 불가능했다. 삼두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 다만 어디까지나 뒷배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유력자가 붙었을 경우에나 그렇다는 말이지 위의 그라쿠스 형제처럼 그런 거 없을 때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의해 잘만 때려잡았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유력자에게 호민관들이 붙은 것도 있고. 바로 이런 유력자가 흔히 말하는 민중파의 실체다.[21] 이런 요구는 도시 국가에선 필연적으로 이루어 진다. 이 때문에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대부분 민주정으로 바뀌었고 귀족들은 몰락하게 되었다.[22] 키케로는 그의 저서에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왕위를 차지하려 시도했는데, 아니 오히려 그는 실제로 수개월간 통치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누만티아를 파괴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훌륭한 인물로 뛰어난 군인이지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죽인 평범한 개인 푸블리우스 나시카보다 공화국에 더 유익하지는 않았다."라고 말하며 티베리우스의 개혁이 공화국을 무너뜨릴 뻔했다고 비판했다. 키케로는 기사계급이면서도 출세를 한 덕에 대체로 원로원에 호의적이고 민중들에게는 무관심했다.[23] 급진적이었던 셈프로니우스 농지법과 달리, 폼페이우스 퇴역병들의 문제로 인해 보수파 군벌 폼페이우스의 힘을 얻은 카이사르는 집정관으로서 원로원 귀족들의 기득권을 어느정도 보장하는 형태의 율리우스 농지법을 통과시켜 왜곡을 어느 정도 완화했다.[24] 한반도의 고대 국가들 역시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25] 사실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내전의 최종 승리자긴 하지만 그 외에도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등 삼두와 마리우스 등 민중파 정치인들은 전부 같은 과정을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