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항공전
1. 개요
Formosa Air Battle [1]
1944년 10월 12일~18일에 걸쳐 진행된 미 해군과 일본군간의 대규모 항공전.
2. 배경
필리핀 해 해전의 대승 이후 미군은 필리핀 상륙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필리핀을 노리는 것은 일본군도 뻔히 알고 있는 일이었고, 필리핀 주변으로 일본군 전력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렇게 증강되는 전력들은 대부분 고기밥(...)이 되었지만 해상으로 오는 수송선단이 아닌, 필리핀 인근 지역의 일본 점령지에 전개한 항공세력은 미군이 먼저 두들겨서 박살내지 않는 한 필리핀 탈환전에 커다란 장애가 될 것이 분명했다.
10월 5일,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대장은 3함대 사령관 윌리엄 홀시에게 포모사(타이완)의 군사 및 항만시설을 다시는 사용하지 못할 만큼의 타격을 주라고 지시했다. 홀시 제독은 마크 미처 제독의 TF38에게 북상하여 대만 일대의 일본 항공세력을 일소할 것을 지시했다.
대만 항공전의 전초는 10월 10일 오키나와 공습이었다. 마크 미쳐 제독은 대만 공습 이전에 오키나와를 먼저 두들겼고, 그 다음날인 11일에는 남하하여 필리핀 루손 섬의 주요 활주로를 공습했다. 이같은 사전 공습을 통해 미 함대의 의도를 눈치챈 일본군은 후쿠도메 시게루 중장의 제2항공함대를 동원하여 제3함대를 완전히 섬멸코자 하였다.
3. 경과
10월 12일, 3함대의 함재기들이 대만을 초토화하기 위해 대거 이륙했다. 이날 미군은 무려 1,378 소티로 대만 각지에 산재한 활주로와 군사 시설들을 맹폭했고 이에 맞서 일본 요격기들이 이륙했지만 추풍낙엽처럼 격추당했다. 일본군도 미군 함대를 포착하고 90여 기를 투입하여 공습에 나섰으나 절반 이상이 격추당하는 경이로운 기록 속에 실패로 끝났다. 한편, 같은 날부터 일본군은 제762해군 항공대에 의한 T 공격을 시도하였다.
T 공격이란, 계속되는 패배에 좌절하던 일본군이 미국 함대에 제대로 된 타격을 가하기 위해 궁리 끝에 개발한 전술로 겐다 미노루가 제안한 것이다. 야간이나 동트는 새벽, 혹은 '''태풍같은 악천후'''에 출격하여 최대한 해수면에 근접하여 비행, 미군의 초계망을 돌파하고 미군 함대에 공습을 가한다는 개념이었다. 당연 막대한 비전투손실이 발생할 것이 분명했지만 이런 무모한 시도 외엔 마땅한 방법이 없던 것이 일본군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10월 12일의 T 공격도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다.[2]
10월 13일, 미군은 947소티를 투입하여 다시 한 번 대만을 두들겼다. 특히 하와이에서 온 정보에서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요다 소에무가 대만 신주에서 지휘 중이라는 첩보가 입수되면서 신주에 대한 집중적인 공습이 단행되었다. 만약 도요다까지 공습으로 죽었다면 야마모토 이소로쿠, 고가 미네이치에 이은 세 번째 사령장관 전사가 되었을 터이지만 도요다는 공습을 피했다.
이 날 일본군은 마침내 미군에게 유효한 타격을 주어 중순양함 캔버라가 대파되었고 항모 프랭클린이 작전에 지장을 주지 않는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10월 14일, '''제멋대로 미군의 함대 방어력을 크게 깎아 먹었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총공격에 나섰다. 일본군이 이러한 판단을 내린 계기는 미군이 전날보다 약화된 공습만을 가하고 항로를 남쪽으로 변경한 것, 그리고 '''귀환한 파일럿들이 과장된 전과 보고를 한 것을 고스란히 믿어서'''였다. 사실 이때 미군이 항로를 돌린 이유는 '''충분한 전과를 올렸다고 판단'''했고 '''대파된 캔버라를 귀환'''시켜야 했으며 이후 '''필리핀 탈환전'''을 지원하고자 함이었으니 엄청난 오판이었다.
14일부터 16일까지 일본군은 무려 1,000 소티가 넘는 항공기를 연속해 출격시키며 파상 공세를 퍼부었으며 결과는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 재현될 뿐이었다. 14일 하루동안 일본군은 무려 244기의 항공기를 잃었고, 미군의 피해는 항모 핸콕, 경순양함 휴스턴, 레노가 경미한 손상을 입는데 그쳤다. 최종적으로 일본군은 약 500여 기의 항공기를 3일여 만에 상실하여 추가 작전 여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한편, 일본군의 밤낮없는 맹공을 모조리 분쇄해내던 미군도 휴식 없는 계속된 전투에 지쳤고 이때문에 항모 벙커힐이 휴식을 위해 일선에서 이탈한다. 참모들은 다른 항모들도 일단 이탈시키자고 제안했으나 곧 있을 필리핀 상륙의 지원, 그리고 항모가 일제히 전열에서 이탈할 경우 패배한 것으로 보여서 사기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며 홀시는 이를 반려한다.
4. 결과
대만 항공전의 피해로 일본군은 1944~45년 필리핀 전역에서 항공지원을 전혀 하지 못했다. 필리핀 전역만이 아니라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일본군의 대만 항공세력은 미군을 위협할 세력이 되지 못했다. 아울러 조종사에게 초인적인 능력을 요구한 T 공격마저 대실패로 돌아가면서 일본군은 카미카제라는 미친 짓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한편 도쿄 로즈는 대본영발표 자료를 인용해서 '''항모 19척, 전함 4척, 순양함 7척, 함종불명 15척 격침 및 격파'''라는 방송을 한다. 참고로 전쟁기간 내내 격침당한 미군 항모가 11척이다. 그리고 격침당했다는 11척의 항공모함 중 거의 절반은 정규항공모함도 아닌 호위항공모함이었다.[3] 터무니없이 과장된 이 전과 홍보는 그때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대본영에 되먹임되어 상황을 오판하게 만들었다.[4] 그리고 이 방송내용을 전해들은 홀시는 '''"침몰당했다는 제3함대는 현재 해저에서 무사히 인양되어 적을 향해 급속 퇴각중"'''이라는 드립을, 그것도 태평양함대에 날렸다.
그리고 이런 거짓말은 일본군 스스로 자멸하게 만들었는데[5] .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미군에게 소모전을 강요하기 위해 루손 섬 북부에 병력을 집중배치하려고 했으나, 해군의 거짓 전과로 인해 대본영에서 방침을 바꿔 레이테 섬으로 집중배치시켰다. 하지만 이 병력들 대부분은 이동중 수장 또는 고립당해 태반은 아사로 사망하게 된다.
[1] 포르모사는 포르투갈인들이 타이완 섬에 붙인 이래 유럽권에서 부르던 명칭이다. 타이완인들도 이러한 호칭을 즐겨불렀다. 대표적으로 메이리다오 사건같은 예시가 있다.[2] 당연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야간 공격을 한다는 전술만 있었지 야간 공격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레이더와 초계 시스템은 처음부터 없었고( 미국은 전투기에 이전 야간 전투기 앞머리에 달던 VHF 레이더가 아닌 본격적인 전투기 레이더를 날개에 달아 필리핀 항공전에서 야간 공습을 성공시켰다.), 야간 공습을 수행해봤던 베테랑들은 이미 소모전으로 많이 소모되었다. 그리고 T 공격의 무모함과 도박성은 카미카제의 모티브가 되었다.[3] 격침당한(혹은 사실상 자침이지만, 정황상 격침 판정이 난) 정규항공모함은 이렇다. CV-1 랭글리, CV-2 렉싱턴, CV-5 요크타운, CV-7 와스프, CV-8 호넷. 사실 이러한 전과 부풀리기는 일본만 그런게 아니라 모든 국가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기는 하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 홀시가 낚시를 문 이유중 하나도 전과를 과대평가했기 때문이었으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지나치게 뻥튀기된 수치기는 하다.[4] 해군은 승전보를 물어 오는데 어째 화물선은 씨가 마르고 보낸 병력은 소식이 없고 미군은 꾸역꾸역 몰려오고 본토에는 폭탄이 떨어지고...[5] 이 거짓 선전은 과달카날과 그보다 더 전인 미드웨이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