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테 만 해전

 

'''레이테 만 해전'''
[image]
1944년 10월 24일에 공격받는 야마토
'''명칭'''
영어: The Battle of Leyte Gulf[1]
일본어: レイテ沖海戦[2]
'''날짜'''
1944년 10월 23일 ~ 10월 26일
'''장소'''
필리핀
'''결과'''
'''미군의 압승''', '''일본 해군 붕괴'''
'''교전국'''
[image] 미국
[image] 일본 제국
'''지휘관'''
[image] 윌리엄 홀시
[image] 토머스 킨케이드
[image] 제시 올덴도르프
[image] 클리프턴 스프레이그
[image] 구리다 타케오
[image] 오자와 지사부로
[image] 니시무라 쇼지†
[image] 시마 기요히데
'''전력'''
정규항공모함 8척[3]
경항공모함 8척
호위항공모함 18척
전함 12척
순양함 12척
구축함 및 호위구축함 166척
다수의 어뢰정 및 잠수함
항공기 약 1500여 기
정규항공모함 1척[4]
경항공모함 3척[5]
전함 9척[6]
중순양함 14척[7]
경순양함 6척
구축함 약 35척
항공기 약 300여 기 이상
'''피해 규모'''
경항공모함 1척 침몰
호위항공모함 2척 침몰
구축함 2척 침몰
호위구축함 1척 침몰
항공기 약 200여 기 손실
사상자 약 3,000여 명
정규항공모함 1척 침몰
경항공모함 3척 침몰
전함 3척 침몰
순양함 10척 침몰
구축함 11척 침몰
항공기 약 300여 기 손실
사상자 약 12,500여 명
1. 개요
2. 배경
3. 전투 이전
3.1. 일본군
3.1.1. 군령부 및 연합함대의 구상
3.1.2. 전함파 장교들의 반발
3.2. 미군
4. 해전의 경과
4.1. 팔라완 해협
4.2. 시부얀 해전
4.2.1. 개전 이전
4.2.2. 일본 항공대의 선공
4.2.3. 미 해군 3함대의 무사시 레이드
4.3. 홀시의 북상
4.3.1. 34 임무부대의 편성
4.3.2. 오자와 지사부로 함대의 출현과 홀시의 북상
4.3.3. 미 함대 참모진의 우려
4.4. 수리가오 해협 해전
4.4.1. 별동 함대의 출격
4.4.2. 죽음의 돌입
4.4.3. 미군의 습격
4.4.4. 최후의 전함간 포격전
4.4.5. 일본 함대의 퇴각
4.4.6. 기타
4.5. 엔가노 곶 해전
4.5.1. 홀시의 추격
4.5.2. 엔가노 곶의 항공전
4.5.3. THE WORLD WONDERS
4.5.4. 홀시의 복귀
4.6. 사마르 해전
4.6.1. 구리다 함대의 필리핀해 진출
4.6.2. 양측 함대의 세력 비교
4.6.3. 전투 시작
4.6.4. 전투 전개
4.6.4.1. 미 해군 파일럿들의 분전
4.6.4.2. 미 해군 구축함 및 호위구축함들의 분전
4.6.4.3. 야마토의 이탈
4.6.4.4. 미 해군 호위항공모함들의 포격전
4.6.5. 일본군은 왜 고전했는가?
4.6.6. 구리다 턴
4.6.7. 카미카제
4.6.8. 미 해군의 피해
4.7. 1차 다호 작전
5. 결과
6. 해전 이후의 이야기들
6.1. The world wonders
6.2. 홀시의 북상 결정에 대한 논란
6.3.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대한 논란
6.4. 태풍 코브라
6.5. 미 해군의 사마르 해전에 대한 논공행상과 이면의 어둠
6.6. 미 전함부대 VS 구리다 함대
6.7. 오자와 지사부로가 홀시를 낚았는가에 대한 논의
6.8. 노출된 야마토급 전함
6.9. 일본군
7. 양측의 피해
8. 구리다 턴은 올바른가?
8.1. 야마토가 히어만을 물리쳤다면?
8.2. 진입했어야 했다
8.3. 진입했으면 전멸했다
8.4. 결론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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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고다 마스트[8]

가 보이고, 제가 본 가장 큰 전함가장 큰 미트볼 깃발이 보입니다!

- 윌리엄 C. 브룩스 소위, 사마르 해전 당시 일본군 함대를 처음으로 발견하면서

일본 해군을 완전히 박살내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어버린 전투이자 '''일본군 해군 한정 총력전이다.''' 태평양 전선 기간인 1944년의 필리핀 탈환전역 중 10월 22일에서 27일까지 벌어진 시부얀 해전, 수리가오 해전, 엔가노 곶 해전, 사마르 해전을 통틀어 말하는 함대결전급 해전이다. '''양측 함대의 총 배수량은 약 250만 톤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전이었다.'''[9]
이 해전은 레이테 만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나 일본군의 목표가 레이테 만을 통해 상륙을 벌이려던 미군을 방해하는 것이었고 각 해전[10]이 연관돼있기에 레이테 만 해전으로 불리는 것이다.

2. 배경


1943년부터 태평양 곳곳에서 일본군에게 착실히 반격을 가한 미군의 2개 전구(맥아더의 남서태평양해역군, 니미츠의 태평양해역군)는 1944년 9월 15일[11], 필리핀 열도에서 불과 900km내외에 위치한 현 인도네시아의 말루쿠(Maluku) 제도의 모로타이 섬과 중태평양 최서단의 팔라우 제도의 펠렐리우 섬에 각각 동시 상륙했다.[12] 미국은 이제 전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함을 확신하게 되었고, 전쟁 초반에 잃었던 필리핀 탈환을 원하고 있었다.[13]
반면 일본의 경우, 만일 필리핀이 미군의 손아귀에 떨어질 경우, 일본이 아직 점유하고 있는 남방지역과 본토가 완전히 유린되게 되므로 일본은 더 이상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얻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도 그에 대응해서 미군필리핀 탈환전을 저지하려 했으며, 동시에 잔존한 해군전력 전체를 동원해서 미국의 필리핀 상륙부대와 미 해군에 심대한 타격을 줌으로서 추가 침공을 방지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미군의 상륙지점인 레이테 만을 공격할 계획을 짜게 된다.

3. 전투 이전



3.1. 일본군



3.1.1. 군령부 및 연합함대의 구상


일본군의 항공모함 세력은 필리핀 해 해전에서 패배한 결과 재기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으므로, 연합함대는 좋든 싫든 전함 위주의 작전을 짤 수 밖에 없었다. 항공모함은 후일을 기약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일본 해군 수뇌부는 이 해전에 올인하기로 결정했고, 내일이 없게 된 항공모함은 미끼로 쓰는 것 외에는 별다른 써먹을 구석이 없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 내내 그렇듯이 일본 해군은 양동작전을 준비한다. 남쪽을 통해 니시무라 함대와 시마 함대가 레이테 만으로 진입하고, 주력인 구리다 함대는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통과하여 레이테만 동쪽으로 진입하기로 한다. 또한 오자와 지사부로가 이끄는 함대가 북쪽에서 항공모함을 이끌기로 하였다.
니시무라와 시마, 오자와 함대는 전부 구리다 함대를 위한 양동작전이었다. 그 말인즉슨, 일본군의 구상은 북쪽과 남쪽으로 주력함대를 전부 끌어낸 다음, 당시의 연합함대가 내밀 수 있는 최고의 패였던 야마토, 무사시, 나가토, 남은 공고급 순양전함과 중순양함을 모두 과감히 올인해서 적의 심장부를 타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전이 성공해 미 육군 수송선단에 괴멸적 타격을 입힌다 해도 수상함대가 살아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14]
올인하는 최고의 팻감이 전함이라는 점과 그 결과 잃게 되는 항공모함 들의 면면을 보고 있노라면 기존의 일본 해군과 크게 다를바 없어보이긴 하다. 그러나 가진 것을 과감히 밀어넣어서 승리를 얻겠다는 구상은 아랫 문단에서 서술된 일선 장교들의 악평과는 달리, 여태까지의 일본군 답지 않은 것이었으며, 오히려 과달카날 해전의 미 해군을 연상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적어도 연합함대는 필리핀을 사수함으로서 본토-남방간 해로를 유지한다는 명확한 목적은 가지고 있었다.[15]
참고하자면, 구리다 제독이 지휘한 2함대 1유격부대(미군 명칭 중앙함대)의 전력은 다음과 같다.
  • 전함 5척
야마토급 전함 야마토와 무사시, 나가토급 전함 나가토,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와 하루나.
  • 중순양함 10척
타카오급 중순양함 타카오아타고(기함)와 마야와 초카이, 묘코급 중순양함 묘코와 하구로, 모가미급 중순양함 스즈야쿠마노.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와 치쿠마.
  • 경순양함 2척
아가노급 경순양함 노시로와 야하기.
  • 구축함 15척

3.1.2. 전함파 장교들의 반발


허나, 일본 함대는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상태였다. 연합함대가 미 육군 수송선단을 직접 공격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2함대에 작전 내용을 전달하면서 벌어진 다음의 대화를 보자.
코야나기 토미지 제 2함대 참모장
"이 계획은, 적 주력의 격멸을 포기하고 적 수송선단을 작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이것은 전술의 상도에서 벗어난 기책입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적 주력 격멸을 제 1목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카미 시게노리 연합함대 참모
"적 주력의 격멸에는, 기동부대의 항공병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이판 공방전에서 대타격을 받은 기동부대와 항공대의 재건에는 적어도 반 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그런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동시에 적이 다음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필리핀이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거기서 필리핀의 기지항공병력과 호응해, 제1유격부대의 전력으로 적 상륙선단을 격멸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이 작전의 주안입니다.
코야나기
"좋습니다. 적의 만내에 돌입하면서까지 수송선단을 격멸하라면 그것도 하지요. 연합함대 사령부는 이 돌입작전으로 수상부대가 괴멸되어도 상관없다는 결심입니까?"
카미
"'''필리핀을 빼앗기면 본토는 남방과 차단되어, 일본은 말라죽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함대를 가지고 있어도 보물을 썩히는 꼴입니다. 필리핀은 도저히 놓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일전으로 연합함대가 괴멸되어도 필리핀을 확보할 수 있다면 후회는 없습니다.''' 나라가 망하면 함대도 없습니다. 돌입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장관의 결심입니다."
코야나기
"그렇습니까. 연합함대 장관이 그만큼의 결심이라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돌입작전은 간단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적 함대는 전력을 기울여 이를 저지하려 할 겁니다. 따라서, 호불호를 묻기 이전에 적 주력과의 결전 없이 돌입작전 실현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구리다 함대는 명령대로 수송선단을 목표로 적 항만에 돌진하지만 만에 하나 도중에 적 주력부대와 대립해, '''양자를 택일해야만 할 경우 수송선단을 버리고 적 주력의 격멸에 전념합니다.''' 지장 없겠습니까?"
카미
"지장 없습니다."
코야나기
"이건 중요한 요점입니다. 장관에게 잘 전해주십시오."
카미
"알겠습니다."[16]
군령부와 연합함대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수송선단을 격멸해야 한다고 했으나, 정작 일선 부대에 전달할때는 그 취지를 납득시키지 못했으며, 거함거포주의함대결전사상에 찌든 전함전대 승조원들이 함대 결전의 기회가 온다면 결전을 벌이겠노라고 고집부리는 것을 꺾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구리다 턴은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또한 아래와 같이, 제독들 사이에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사회
토요다 씨는 19년 9월 케이오 대학 히요시 교사로 연합함대 사령부를 이동시켰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요코야마
지휘관 선두라는 건 항공기가 아무리 발달해도 지켜져야 해. 최고 지휘관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진 싸움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가령 하와이도 그렇지. 야마모토 장관이 기동부대와 같이 가서 항공모함을 찾으라고 명령했으면 좋았을 텐데, 무선 봉쇄로 아무런 지휘도 할 수 없었지.
마츠다
적어도 장관은 제일선에 있어야만 해, 이건 원칙입니다. 레이테에서 진 다음에는 아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으니까 육상이라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구리다(타케오)씨가 타고 있는 '야마토'라도 '무사시'라도 좋으니까 타고 있었으면 좋았잖아.
요코야마
타고 있었다면 레이테 만에 돌입할 수 있었다는 거지.
(중략)
노모토
수뢰전대에서 힘차게 달리는 걸 보고, 믿을만한 놈이라고 중앙부는 생각했겠지. 그 때까지 큰 사고도 일으키지 않고 무사히 보냈으니까. 차라리 해상 경험이 풍부한 것치고는 머리도 좋았던 코무라 케이조(45기 소장)같은 사람을 5, 6년 정도 더 키웠으면 최적임이었을 텐데. 구리다 씨도, 그저 수뢰전대에서 달리기만 했을 뿐 머리는 없었어. 레이테 때는 내가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어떤지는 모르지만, 여기 있는 분들 말을 들어보면 장관으로서 자주성이 없어. 오자와 씨와는 전혀 다른 점이야. 레이테 출격 때 브루나이에서 작전회의 때는 - 이야기를 들은 것 뿐이라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 다른 사령관에게서 레이테 만에 난입이라니 해군의 타락(*)이라고 한참 악담이 나왔는데, 그런 걸 휘어잡을 능력이 구리다 씨에게는 없었어.
* 레이테 만 해전 당시 연합함대의 작전 목표는 미 육군 수송선단의 격파였지만, 수십년간 함대결전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연합함대의 전함전대 승조원에게는 굴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역주)
(중략)
마유즈미
해대를 나오지 않아도 중앙근무를 하면 자연스럽게 그런 것은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레이테의 반전에는 비판이 있습니다만, 그 때는 장관만이 아닌 참모장도, 우리 말단 함장도, 맥아더의 부대는 전부 상륙을 끝내 결국 가봤자 빈 배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곳에 2함대를 희생시키며 돌입해도 의미가 없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사기도 높지 않았죠. 작전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쓰시마 해 해전에서는 네보가토프 제독이 주력함을 이끌고 항복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뭐 이런 얼간이가 다 있나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부하를 살려 해군 재건에 사용하려고 네보가토프는 생각한 것 아닐까 합니다. 구리다 장관은 우리 함장 클래스와는 달리 네보가토프 같은 심경이 조금은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17]
위의 글은 당시의 지휘부를 비판하는 일선 함장급들의 회상인데, 마츠다 치아키는 4항전 전대장으로 이세급 전함 2척을 지휘하며, 마유즈미 하루오는 중순양함 토네의 함장으로 레이테에 참전했다. 좋게 말하면 지휘부를 비판하는 것이지만, '''간단히 말해, 일선의 함장, 제독들이 수뇌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구 일본군의 연공 서열이 어땠는지를 알고 있다면 정말 놀라울 정도.
당시 일본 해군에서는 파벌이 갈려있었는데, 이러니 저러니 하지만 간단히 나누면 전함파 VS 항공파이다.[18] 그리고 이 파벌에 따라서 전술에 대한 관점이 많이 달랐다. 가령 기함이 앞장서야하는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전함파 내부에서도 수뢰전과 포술과의 의견조차 갈렸고, 기함은 어떤 배로 해야하는가에 대해서도 전함파와 항공파는 의견이 달랐다. 전함파는 그 외에도 전파 침묵과 야간전에 광적으로 집착했는데, 이 점 때문에 수리가오 해협 해전의 패전을 자초하게 된다.
그러나, 이노우에 시게요시오자와 지사부로 등 일부 비주류를 제외하면 단지 수단이 전함이냐 항모이냐의 차이일 뿐 '''한방 승부의 함대결전에 모든 걸 건다'''라는 시각은 거의 동일했다.[19] 게다가 파벌과는 무관하게 잘 지내는 이들도 꽤 있었다. 따라서 레이테 만의 전개는 단지 기존의 전함파 vs 항공파의 대립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일선 장교들이 보기에, 문제는 연합함대 사령부에 있었다. 일선에서 함대결전을 지휘하는 조직이었던 러일전쟁 도고 헤이하치로 시기와는 달리 2차대전기에는 연합함대 지휘부는 실전에 나가지 않았다. 전함을 호텔로만 써먹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부를 지상으로 옮긴 코가 미네이치, 게이오기주쿠대학으로 사령부를 이동시키며 '''본토로 도망친''' 도요타 소에무를 비롯한 연합함대 사령장관들의 추태에 이어 함대결전을 포기한 2함대 사령장관 구리다 타케오 같은 높으신 분들의 행태는, 실전에 나가는 것도 아니면서 작전을 담당하는 상급 총사령부 격인 군령부의 입지만 애매하게 만들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미 태평양 함대처럼 컨트롤 타워로서의 역할을 해내지도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 반면, 지휘관의 미덕인 '''기함이 선두에 선다'''는 연합함대의 자랑스러운 전통[20]은 일선의 중견 지휘관에게만 강요되었다.[21]
오히려 지휘관이 어디 있어야 하는가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항공모함을 기함으로 삼았던 나구모나 오자와는 당연히 선두에 설 수는 없었지만 당연히 일본군에서도 이들에게 지휘관 선두를 들먹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진짜 문제는 보신주의에 젖은 높으신 분들이 아예 싸움을 피해버리는 바람에[22] '''최고사령부의 의도가 현장에 전달되지 못한 것'''이다. 진주만 공습은 대표적 항공파인 야마모토 이소로쿠에 의해 주도되었음에도 함대결전급 전력(정규항모 6척, 고속전함 2척)을 동원한 대규모 작전에 정작 본인이 참가하지 않는 바람에 전함보다 전략적 가치가 높은 항공모함과 항만 시설에 타격을 입히지 못했고, 미드웨이 해전 역시 함대결전급 전력이 동원된 전투임에도 작전목표는 명확하지 못했고 수뇌부는 주력(항공파 입장에서)인 정규항모 4척의 상실을 초래했으며, 과달카날 전역에서는 높으신 분들이 몸을 사리며 주력함의 투입을 미루는 사이 고속전함 2척과 정예 항공승무원들을 대거 상실하면서도 전과를 얻지 못했고, 대전 말기 레이테 만 해전에서도 같은 문제가 반복된 것이다.
그리고 자기네들은 본토로 도망치면서 잔존 함대에는 황국의 흥폐가 여기에 달렸다고 훈시하면서 미 육군 수송선단과 동귀어진하라는 명령을 내린 도요타 소에무는 전함파였다. 표리부동 그 자체였던 것. 상층부가 일선 장병들에게 권위와 신뢰를 상실하기까지 이르기에는 이런 경위가 있었다.

3.2. 미군


미군은 레이테 만에 지상군을 상륙시켜서 필리핀을 공략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필리핀 탈환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대만과 류큐 제도의 항공기지를 3함대의 함재기를 동원하여 공습했다. 대만 항공전이라 명명된 이 전투에서 3함대는 일본군 항공기 500대를 쓸어내 하늘을 청소했다. 이로 인해 대만 및 일본 본토에서의 항공 지원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다음 과정으로 레이테 만에 맥아더 장군의 육군 6군을 상륙시켜 레이테 섬을 탈환하도록 한다.[23]
킨게이드 제독의 7함대는 여러 함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3개의 호위항공모함 전단(태피 1&4, 2, 3)은 레이테 만 동쪽과 남쪽 외곽에 전개하여 지상군에게 항공 지원을 제공하고, 6척의 구형 전함과 7척의 순양함, 그리고 10척이 조금 넘는 수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77.2 임무전대는 올덴도르프 제독의 지휘 하에 레이테 만에 직접 들어가서 포격 지원을 하기로 한다.
그리고 홀시 제독의 3함대는 좀 더 외곽에 전개되어 일본 해군의 역습을 맞받아치는 함대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7함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에식스급 항공모함과 고속전함들이 다수 배치된 마크 미처 제독의 38 임무부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또한, 7함대의 77.2 임무전대처럼 3함대 역시 주목할만한 하위 제대가 존재하였는데, 존 매케인 1세 제독이 3척의 에식스급 항공모함인 와스프, 호넷, 행콕을 포함한 38.1 임무전대를 이끌었다. 이 전대는 38임무부대의 8척의 정규항공모함과 8척의 경항공모함 중 3대의 정규항모, 2척의 경항모가 소속되어 있고 함재기만 따지면 38임무부대 전체의 1/3이 넘는 강력한 전대였다. 이 전대는 울리시 해군기지에 재보급을 받으러 가다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일본 해군이 침입해 올 만한 경로는 남쪽의 수리가오 해협과 북쪽의 산 베르난디노 해협, 그리고 북쪽의 대양이었는데, 남쪽의 수리가오 해협에 어뢰정을 잔뜩 보내서 초계하도록 하고, 적이 발견되면 77.2 임무전대가 호위항공모함의 항공 지원을 받으면서 격퇴하기로 하였다. 북쪽의 산 베르난디노 해협은 매우 구불구불해서 침공하기 불리한 장소였긴 하나, 일단 배치상으로는 3함대가 방어할 영역에 해당했다.
그 당시 미군의 전력은 일본군의 전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특히 미군은 항공모함과 지상 기지로부터의 압도적인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일본군은 그렇지 못했다. 원래라면 각각의 함대가 각자의 임무를 완수하기만 해도 일본 해군은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나, 명령·작전계통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필리핀 탈환전은 독립적인 작전권을 가지고 각자의 해역에서 전투를 벌이던 태평양 전구의 2개 해역군. 니미츠 제독의 태평양해역군과 맥아더 장군의 남서태평양해역군이 합동 작전을 펼친 첫 대규모 전투였던 것이다.(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을 남서태평양해역군에 빌려 주는 일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온전한 합동 작전은 아니었다.) 홀시 제독의 3함대는 태평양해역군 소속이었고 킨게이드 제독의 7함대는 남서태평양해역군 소속이었다. 작은 규모의 전투라면 두 해역군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인물을 야전사령관으로 임명하면 되나 필리핀 탈환전은 2개 해역군이 동원되는 규모의 대전투였다. 니미츠나 맥아더 중 한 사람이 전역을 총괄하게 되면 다른 쪽은 굴욕감을 느끼고 격분할 것이었다. 태평양해역군이 해군 중심이고 남서태평양해역군은 육군 중심이라는 이유도 작용했다. 그런 이유로 통합사령관 없이 독자적인 전투를 실행하게 되었다. 필리핀 탈환전의 명목상의 지휘관은 맥아더 장군이었지만 그의 지휘권은 남서태평양해역군에게만 해당되었고 태평양 함대에 대해서는 니미츠 제독을 통해 협조 요청이라는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3함대와 7함대간의 비협조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4. 해전의 경과


[image]
  1. 시부얀 해전 (구리다 VS 홀시)
  2. 수리가오 해협 해전 (니시무라, 시마 VS 킨케이드 휘하 올덴도르프 함대)
  3. 엔가노 곶 해전 (오자와 VS 홀시)
  4. 사마르 해전 (구리다 VS 킨케이드 휘하 스프레이그 함대)[24]

4.1. 팔라완 해협


브루나이를 출발한 구리다 함대는 레이테 만으로 향하지만, 10월 23일 0시 16분에 팔라완 해협에서 미국 잠수함 다터(USS Darter)에게 발각되었다. 다터는 동행하던 잠수함 데이스(USS Dace)와 함께 일본 함대를 추적했고, 새벽 5시 24분에 구리다 함대의 기함 아타고에 4발의 어뢰를 명중시킨다. 이후 다터는 중순양함 타카오에 어뢰 2발을 명중시켰고, 데이스는 중순양함 마야에 4발의 어뢰를 먹인다.
아타고와 마야는 침몰했지만 타카오는 살아남았고, 타카오를 추적하던 다터는 실수로 좌초하는 바람에 추적에 실패하고 만다. 타카오는 2척의 구축함을 호위로 대동하고 브루나이로 돌아갔다. 이후 수리받지 못한채로 싱가포르로 갔고, 같은 신세인 묘코와 함께 대공포대로 전락하게 된다.
다터의 승무원들은 전원 데이스에 구조되어 오스트레일리아로 탈출한다. 정원초과로 다터의 승무원 2명은 데이스에 들어가지 못하고 잠수함 위에 앉아서 가야 했다. 다터는 레이테 만 해전이 끝난 다음주에, 데이스와 노틸러스에 의해 처분된다.
아타고가 너무 빨리 침몰한 탓에, 구리다 사령관은 물에 빠졌다가 구축함 키시나미에 의해 구조되었다. 이후 새로운 기함을 골라야하는 상황에서, 전함 야마토를 선택한다. 반면 숙련된 사령부 통신요원들은 구출되지 못했는데, 이게 엔가노 곶 해전에서 전황을 바꾸는 큰 문제를 일으켰다.

4.2. 시부얀 해전


Battle of Sibuyan Sea

4.2.1. 개전 이전


다터와 데이스가 구리다 함대를 습격하기 전, 홀시는 식량과 탄약 보급을 위해 2개(38.1, 38.4)의 항모 전단을 울리히로 돌려보낸 상태였다. 하지만 다터로부터 일본 함대와의 접촉 보고를 받자, 홀시는 항모 전단의 복귀를 지시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정규 항공모함을 3척 보유하고 있어서 3함대의 최고 주력이었던 38.1 임무전대는, 지휘관인 매케인 제독의 재량으로 홀시의 허락을 받아, 레이테 만으로 복귀하지 않고 울리히로 갔다. 이 덕분에 미군은 압도적인 항공 우세에도 불구하고 석연찮은 전과+찜찜한 승리를 거두게 된다.
10월 24일 오전 8시에 구리다 함대는 3함대가 사방에 뿌린 미국 정찰기에 발각되었다. 홀시는 38.1 임무전대의 복귀를 재차 명령하고는, 남은 3함대의 3개 항모 전단을 총동원해서 구리다 함대를 공습한다. 하지만 공습하기에 최적인 위치에 전개되었던 38.2 임무전대의 항공 세력은 에식스급 항공모함 인트레피드[25] 1척과, 2척의 경항모 뿐이었다.

4.2.2. 일본 항공대의 선공


일본의 오니시 다키지로 일본 해군 중장은 루손 섬의 항공대에 명령하여, 구리다 함대를 지키기 위해 홀시의 3함대를 공습하도록 지시한다. 미 3함대의 38.3 임무전대가 이 공습을 저지하였으나 50~60대의 항공기로 각각 구성된 3차례의 공습을 모두 저지하는데에는 실패하였다.
인디펜던스급 경항공모함 프린스턴(USS Princeton, CVL-23)은 9시 38분에 폭탄에 맞고 화재 진화 중 15시 23분에 탄약고 폭발로 침몰한다.
클리블랜드급 경순양함 버밍햄(USS Birmingham, CL-62)이 프린스턴의 화재 진화 중 폭발에 휘말려 손해를 입어 2개월 정도 전선에서 이탈하게 된다. 프린스턴이 유폭할 때 버밍햄을 덮친 화염이 갑판에 나와 있던 버밍햄의 함장에게 화상을 입혀 결국 사망하였으나, 함장은 '배를 버리지 말라'는 명령을 남기고 죽었고 승조원들은 필사적으로 배를 수습해서 살아 돌아간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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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격당한 프린스턴
버밍햄이 불을 끄고 있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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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이 유폭하고, 치명타를 입은 버밍햄이 물러선다.
프린스턴이 레노의 뇌격처분으로 굉침
이후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간, 오자와 함대도 38.3 임무전대를 공습한다. 하지만 항공대의 공습때문에 미군 함재기들의 대공 초계가 매우 삼엄했고, 오자와 함대의 함재기들은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한다. 필리핀 해 해전 이후 파일럿의 숙련도는 더욱 떨어져 있었고, 오자와는 공격대 발진 직전 '''모함 귀환이 여의치 않으면 필리핀 지상기지에 착륙한 뒤 보고할 것''' 이라는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부분의 일본군 함재기들은 아군의 도움을 더 빨리 받을 수 있는 루손섬의 항공대 기지로 도망가야 했다.
루손섬의 항공대와 전투를 벌이느라 담당 영역의 정찰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38.3 임무전대는, 바다로부터 날아든 적 항공기가 온 방향으로 정찰기를 뿌린다.

4.2.3. 미 해군 3함대의 무사시 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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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있는 배가 공습당하는 무사시.
무사시 우측 뒷편에 보이는 배는 구축함이다.
미 해군 역시 항공기로 구리다 함대를 공습했다. 전술한 38.2 임무전대의 첫 공습이 10월 24일 오전 10시 27분에 나가토, 야마토, 무사시에게 쏟아졌으며, 중순양함 묘코가 대파되어 보르네오로 회항한다. 무사시는 1번 포탑 천장에 폭탄 1발, 우현에 어뢰 1발을 피탄당했지만 폭탄은 운 좋게 도탄되었고 어뢰 피해도 무사시의 덩치가 워낙에 컸던지라 별 거 아니었고 금방 복구했다.
1시간 반이 지난 후, 38.2 임무전대의 인트레피드는 한번 더 공습을 시도한다. 무사시는 큰 덩치를 자랑하는 데다, 어그로를 끌기 위해 의도적으로 함체를 기존의 일본 해군 함선보다 밝은 회색으로 조금 다르게 칠했기에 미군 함재기들은 무사시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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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테 만 해전 참가를 위해 브루나이에서 출항하는 무사시.
확실히 다른 일본군 군함보다 색이 밝다.
[27]
인트레피드의 공습은 불발탄 1발과 엔진룸 바로 위에서 폭발한 폭탄 하나가 기록되었으며, 스팀 파이프를 파손시킨 탓에 엔진룸과 보일러룸을 포기하게 되어서 스크류 하나가 멈추게 된다. 당연히 함속이 내려갔다. 구리다 제독은 무사시를 낙오시키지 않기 위해 함대의 속도를 줄였다.
13시 31분이 되자, 38.3 임무전대의 에식스급 항공모함 에식스, 렉싱턴이 공습을 퍼붓는다. 이들의 함재기는 무사시의 양현에 어뢰 3발을 명중시켰다. 그 결과 또 다른 엔진룸이 침수되어 함속이 또 내려갔다. 다른 어뢰는 1번 포탑의 수압식 펌프를 고장내서 보조 유압 펌프로 전환하게 하였다. 무사시는 이에 대응하여 주포에 3식탄을 장전하고 사격을 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거기에 사전 경고 없이 사격을 가하는 바람에 무사시의 대공포 사수들이 주포 발사의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생존자 중 일부의 증언에 의하면 주포사격의 충격으로 인해 무사시의 주포 조준 방위판이 고장났다는 주장도 있었다.[28] 이 3식탄 발사 과정에서 1번 포탑의 중앙 포신에서 포탄이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났으며, 탄약고에서 1번 포탑으로 탄약을 올려주는 양탄기가 전부 고장나버렸다.
무사시는 이 시점에서 버티지 못하고 회항을 결정하였으나, 38.2 임무전대의 인트레피드와 38.4 임무전대의 엔터프라이즈와 에식스급 항공모함 프랭클린이 15시 25분에 네 번째 공습을 한다. 이 공습에서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들에게 3발의 어뢰를 맞고, 인트레피드와 프랭클린으로부터는 13발의 폭탄과 11발의 어뢰를 얻어맞는다.[29] 이 공습으로 무사시는 대화재가 발생하고, 좌현 함수가 물 속에 잠기기 시작할 만큼 기울어졌다. 무사시는 최고로 보수적으로 따지더라도, 4번의 공습을 통해 총 19발의 어뢰와 17발의 폭탄을 두들겨 맞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구리다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보고, 15시 30분 경에 무사시를 방패막이로 버려둔 채 함대를 반전해 도망치기 시작한다. 미군은 이걸 보고 구리다 함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고 간주했지만, 미군의 정찰기가 사라지자마자 구리다는 함대를 다시 돌려,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통과해 목적지로 향한다. 구리다 함대는 16시 21분 경에 만신창이가 된 무사시를 다시 지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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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부가 크게 가라앉은 상태로 돌아가는 무사시.구축함 이소카제에서 촬영.
그 동안 무사시는 1척의 중순양함과 2척의 구축함의 호위를 받으며, 북쪽으로 침로를 잡고 좌현으로 10도나 기울여진채로 6노트의 속도로 항구를 향해 항해했다. 하지만 엔진에 누적된 타격이 너무 컸으며, 무사시는 해변에 좌초하기로 하지만 그 전에 엔진이 멈춰버린다. 19시 15분에 배를 버리기로 결정되었다. 2,399명의 승조원 중에서 1,376명이 구출된다. 절반 정도는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다른 절반은 필리핀 방어전에 해군 육전대로 동원된다. 그 외에 마야로부터 구출한 635명이 동승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구축함 시마카제가 대신 항구로 실어보낸다.
구리다 함대는 잠수함 뇌격으로 중순양함 2척 격침, 1척 대파의 손실을 입었고, 공습으로 전함 1척 격침과 중순양함 1척 대파의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홀시는 당장 이 전과를 확인할 도리가 없었으니, 눈앞에 보이는 프린스턴의 격침, 그것도 공습에 의한 격침이 그저 뼈아플 뿐이었다.

4.3. 홀시의 북상



4.3.1. 34 임무부대의 편성


오자와 지사부로의 함대가 발견되기도 전에, 미 함대는 구리다 함대와 니시무라 함대를 포착한 상태였다. 홀시와 3함대 참모들은 아이오와급 전함 뉴저지에 모여, 구리다 함대를 저지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한다. 여기서 34 임무부대의 편성이 결정되었으며, 윌리스 리 제독[30] 휘하에 4척의 전함, 5척의 순양함, 14척의 구축함을 편성하여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봉쇄하고, 3함대의 항공모함과 38.4 임무전대의 항공모함의 지원을 받도록 하는 방안이 결정된다.
무사시를 향한 마지막 공습이 하늘을 날던 10월 24일 오후 15시 12분. 홀시는 이 결정을 태평양 함대 사령부의 니미츠 제독과 워싱턴 해군 본부의 어니스트 킹 제독에게 전달한다. 7함대의 킨케이드 제독은 수신인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미 해군 지휘부의 통신병들은 누가 수신인인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신들이 수신한 모든 통신을 전부 참모들에게 전달하였기 때문에, 킨케이드 제독에게도 그 결정이 전달된다. 니미츠 제독도 동일한 결론을 내린 상태였고, 거기에 동의한다.
홀시 제독은 오후 17시 10분에 두번째 전문을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다시 의사를 표명한다.
IF THE ENEMY SORTIES (THROUGH SAN BERNADINO STRAIT) TF 34 WILL BE FORMED WHEN DIRECTED BY ME.
적 함대가 산 베르난디노[31] 해협을 통해 진격할때, 내 지시에 따라 34 임무부대를 편성할 것임.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홀시는 첫 전문을 미래형(즉, 아직 안했음.)으로 보냈는데, 킨케이드는 현재형인 것으로 착각했다. 게다가 첫번째 전문처럼 미래형으로 작성된 두번째 전문은 킨케이드가 아예 받지 못했다.
실제 34 임무부대를 편성하는 경우, 거기에 들어갈 4척의 전함은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사우스다코타, 매사추세츠, 앨러배마,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워싱턴이었다. 거기에다가 후방에 에식스급 항공모함 프랭클린과 엔터프라이즈를 포함한 38.4 임무전대가 항공지원을 하게 되므로, 구리다 함대가 제 아무리 야마토와 나가토를 데리고 온다 한들,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통과할 가능성은 0%였다.

4.3.2. 오자와 지사부로 함대의 출현과 홀시의 북상


한편 오자와 지사부로는 항공모함까지 포함한 제1기동함대 본대(미군 명칭 북방함대)를 지휘하고 있었으나, 항공전력이 부실한 상태에서 항공모함은 그저 크고 무장한 수송선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찌됐건 항공모함은 상당히 전략적인 요소였고, 진주만 공습 당시 참가해서 미국의 격침우선순위에 든 즈이카쿠도 있었다. 오자와는 이를 이용해 미군의 주력 함대를 유인하려 하였다. 전략적 가치가 없어진 아군 항모를 미끼로 미군의 항모를 꼬셔낸 뒤, 전함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수상함대가 미 육군 수송선단을 공격할 기회를 노렸던 것.
24일 11시 58분, 4척의 항공모함에서 총계 57기의 공격대가 발진한다. 하지만 루손 섬의 항공대가 38.3 임무전대를 공습하고 난 직후여서, 대공 초계가 삼엄했다. 공격대는 초계중이던 38.3 임무전대의 항공기들에게 대부분 격추되어서, 미 3함대의 수상함에게는 단 1건의 공격도 하지 못했다. 살아남은 일본 함재기들은 루손 섬의 일본군 항공대 기지로 도망갔다.
오자와 함대에게 공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은 정작 오자와 함대를 제외한 구리다, 니시무라, 시마 함대, 심지어는 16전대까지도 모두 포착한 상태였다. 정작 이들보다 먼저 포착되어야할 오자와 함대는 10월 24일 16시 40분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32] 그날 저녁, 오자와는 미군이 실수로 평문으로 송신한 통신 하나를 감청하게 되는데, 구리다 함대가 퇴각한다는 내용이었다. 자살행 특급열차를 타는 미끼 임무를 하고 싶은 의사가 전~혀 없었던 오자와 역시 그를 핑계삼아 해질 무렵에 도망가기로 결정하고, 미끼 역을 위해 남쪽으로 전개시켰던 이세급 전함 2척을 불러들였다.
한편 해가 진 직후의 20시, 연합함대 장관인 도요타 소에무 제독이 구리다 함대에게 돌격을 재촉하는 무전을 발신한다. 이 무전은 오자와 측에게도 수신되었지만, 정작 오자와는 구리다가 함대를 다시 반전시켜 돌입을 시도했다는 것을 작전이 끝날 때까지 알지 못했다. 오자와 함대는 구리다가 퇴각했다고 판단해 북상을 계속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25일 아침 7시 12분, 38 임무부대의 공습선도기를 발견하면서 엉겁결에 미끼 역할을 완수하게 된다. 그때는 이미 미 해군의 항공모함 3개 전단에서 대대적으로 함재기를 발진시킨 상태였다.
반면, 이 시기의 홀시는 항공모함 예찬론자가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16시 40분에 북동쪽 해상에서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다수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전함 위주의 구리다 함대보다 오자와 함대가 더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하고는, 북상하기로 결정한다. 이 결정에는 공습에 경항공모함을 잃었다는 점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ENTRAL FORCE HEAVILY DAMAGED ACCORDING TO STRIKE REPORTS.
AM PROCEEDING NORTH WITH THREE GROUPS TO ATTACK CARRIER FORCES AT DAWN
공습 리포트에 따르면 중앙함대(구리다 함대)는 심한 피해를 입었음.
나는 새벽까지 3개의 항모 전단을 이끌고 북쪽으로 진출할 것임.
문제는, 3함대는 4개의 항모 전단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홀시는 그중 보급하고 복귀중인 '''38.1을 제외한 3개만 가지고 올라갈게.'''라고 언질한 것이지만, 킨케이드, 니미츠, 킹 제독은 전부 34 임무부대를 편성하면서 38.4를 거기에 배속시키고, 남은 38.1, 38.2, 38.3 그룹만 데리고 올라간다고 이해했다. 이 실수로 인해, 처음의 두 메시지를 받은 니미츠와 킹 조차도 홀시 제독의 의사를 잘못 받아들이게 된다.
이제 산 베르난디노 해협은 텅텅 빈 상태가 되었으나, 미 해군의 다른 제독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4.3.3. 미 함대 참모진의 우려


그날 밤, 함대가 북상하는 동안, 미 해군 3함대의 제독들과 참모들이 계속해서 이의를 제기했다.
후술하지만, 보급을 마치고 3함대로 복귀하던 38.1 임무전대의 지휘관 매케인 제독은, 홀시의 결정에 소극적인 항명을 하기로 한다.
38.2 임무전대의 지휘관이었던 제럴드 보건 제독은 경항공모함 인디펜던스에서 발진시킨 야간 정찰기와 산 베르난디노 해협에 두고온 구축함들로부터 해협에 항해등이 켜진 것을 관측했다는 정보를 각각 받았다며 우려를 표했지만, 그 정보를 접수한 홀시 제독의 참모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면서 기각한다. 홀시 제독은 38.2 임무전대에 소속된 아이오급 전함 뉴저지에 승함하고 있었다.
워싱턴을 기함 삼아 38.3 임무전대에서 전함들을 이끌고 있었던 월리스 리 제독은, 오자와 함대가 미끼라는 결론을 홀시의 기함에 점멸 메시지로 전달했지만 역시 기각된다.
마크 미처 제독은 38 임무부대 지휘관이었으며, 38.3 임무전대의 렉싱턴을 기함으로 삼고 있었다. 그의 참모장이던 알레이 버크 대령과 비행단장인 제임스 플래트리도 동일한 결론을 내리고, 위험한 상황이라 생각해 마크 미처 제독을 깨운다. 하지만 홀시에게 보고했냐는 소리에 그렇다고 하니, 홀시의 성격상 '''본인이 필요할때나 내 의견을 들을 것'''이라고 답변하고는 도로 자러 갔다...
흩어서 서술하니 감이 잘 안오겠지만, 4개 임무전대 중에서 3개 함대의 지휘관 혹은 참모들이 우려를 표명한 상황이며, 38.3의 경우는 반쯤 체념한 것에 가깝다.
같은 시간, 사령부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은 홀시 제독이 3개 전단을 이끌고 북상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라면 함대를 북상시키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렀을 거라고 했다.[33]

4.4. 수리가오 해협 해전


Battle of Surigao Strait

4.4.1. 별동 함대의 출격


10월 22일 15시, 후소급 전함 야마시로를 기함으로 하여[34] 같은 후소급 전함인 후소, 모가미급 중순양함 1번함 모가미, 시라츠유급 구축함 2번함 시구레, 아사시오급 구축함 미치시오, 아사구모, 야마구모의 7척으로 구성된 2전대, 일명 니시무라 함대(미군 명칭 남방함대)가 구리다 함대의 뒤를 이어 브루나이를 출항했다.
중순양함 나치(기함)와 아시가라, 경순양함 아부쿠마, 그리고 구축함 시라누이, 아케보노, 우시오, 카스미의 4척으로 구성된 5함대 2유격부대, 일명 시마 함대가 2차 타격 함대로 그 뒤를 이어 출항했다.
니시무라, 시마 함대의 역할은 구리다 함대와 정반대 방향에서 레이테만에 접근한뒤, 저지하는 적 해상 세력을 양쪽에서 협공하여 분쇄하고, 레이테만의 상륙함대를 일소하는데 화력을 보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구성에서 보듯이 양동함대의 성격이 더 컸다.
하지만 이들은 무선 침묵을 지나치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구리다 함대나 오자와 함대, 시마 함대와 니시무라 함대끼리의 협조체제조차도 결여되어 있었다.

4.4.2. 죽음의 돌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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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선 : 미 해군 77.2 임무전대
붉은선 : 니시무라 함대
붉은 점선 : 시마 함대
10월 24일, 미 해군이 니시무라 함대를 발견하자 38.4 임무전대의 엔터프라이즈와 프랭클린에서 함재기를 발진해, 니시무라 함대를 공습한다. 야마시로는 우현에 떨어진 지근탄이 벌지를 파손시키면서 침수가 진행되어 우측으로 15도나 기울어 결국 좌현 벌지를 침수시켜서 함의 평형을 되찾는다. 후소에는 2발이 명중했다. 한발은 캐터필트와 2개의 수상기를 부수고 다른 한발은 2번 포탑 주변을 관통해서 1번 부포의 포반원 전부를 전멸시켰다. 피격 결과 배는 우현으로 2도 기울었다. 작은 손상은 아니었으나, 일방적인 공습을 당한 것 치고는 양호했다.
하지만 미 해군 함대에게 니시무라 함대가 노출된 것은 분명했고, 항공 작전이 시작되는 새벽이 오기 전에 모든 것을 마쳐야 했다. 함대는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20시 13분, 니시무라 제독은 도요타 연합함대 장관에게 25일 새벽 4시에 레이테 만으로 돌격하겠다는 전보를 발송한다. 그러나 같은 시간, 구리다 함대는 미 3함대의 공습을 따돌리느라 지체하고 있었고, 아직도 아까전의 전장이던 시부얀 해를 지나고 있었다. 시마 함대는 그보다는 나았지만, 니시무라 함대보단 약간 늦어서 46킬로미터 정도 뒤쳐진 상태였다.
22시 36분, 니시무라 함대는 미군 어뢰정 PT-131과 조우한다. 어뢰정은 뇌격을 시도했으나, 명중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니시무라 함대를 계속 추적하며 침로와 순항속도를 보고했다. 어뢰정의 공격이 실패한 것은 니시무라 함대의 사기와 긴장감도 동시에 높였다.
이후 미군 어뢰정들은 뇌격 시도와 도주를 반복하면서 니시무라 함대를 계속 괴롭힌다. 반면, 니시무라 함대는 어뢰정들을 견제하며 최대한 빨리 레이테 만을 향해 달렸다. 그 과정에서 어뢰정 PT-130과 PT-132가 야마시로의 공격에 피해를 입는다.
10월 25일 밤 1시 5분, 후소는 좌현 전방에 함영을 발견하고 함포로 공격한다. 그러나 후소가 공격한 상대는 모가미였고, 모가미의 의무실에 있던 승조원 3명이 사망한다. 니시무라 함대를 뒤덮은 긴장감 때문에 생긴 불상사였다.

4.4.3. 미군의 습격


어뢰정으로부터 정보를 전달받은 올덴도르프 제독은, 니시무라 함대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우선, 제일 후열에 6척의 전함들을 단종진으로 배치했다. 전함 부대의 기함 웨스트 버지니아를 앞장세우고, 메릴랜드, 미시시피, 테네시, 캘리포니아, 펜실베이니아가 그 뒤를 따랐다. 미시시피를 제외한 모든 전함이 진주만 공습에서 피해를 입었고, 웨스트 버지니아와 테네시, 캘리포니아는 공습으로 인한 손상 때문에 대개장을 받은 전함이었다. 특히 기함 웨스트 버지니아는 전쟁 전의 지위도 그렇거니와 대개장 이후의 성능도 기함을 달만한 배였는데다가, 이것이 복귀후 첫 실전이기도 했다.
전함 앞열에는 구축함과 중순양함들을 배치했다. 적의 침로로 예상되는 우측 열에는 올덴도르프 제독 본인의 기함인 노스햄프턴급 중순양함 루이스빌을 선두로 해서 포틀랜드급 중순양함 포틀랜드, 뉴올리언스급 중순양함 미니애폴리스가 그 뒤를 따랐으며, 그 뒤를 최신예 클리블랜드급 경순양함 덴버와 콜롬비아가 따랐다. 좌측열은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보이쉬(Boise)와 피닉스, 그리고 호주 해군의 중순양함 슈롭셔[35]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구축함들은 해협 양쪽의 지형을 은엄폐삼아서[36] 뇌격을 시도하기 위해 앞으로 내달렸다.
새벽 3시가 되자, 미 구축함 3척이 니시무라 함대에 뇌격을 시작했다.
3시 9분, 플레처급 구축함 멜빈이 발사한 어뢰중 1~3발이 후소의 우현에 명중했다. 후소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으며 대열에서 이탈했다. 이후 연료에 인화되어 침몰했다. 후소의 경우, 불타며 두동강이 났으나, 양쪽 조각 모두 기울지 않고 가라앉았다 해서 논란이 있었다.[37] 2017년 말에 발견되어 탐사한 결과로는 어뢰에 맞은 함수 부분이 부러져서 휘어진 것으로 판명되었고, 파고다 마스트는 부러져서 사라져있었다고 해서, 증언이 맞는게 아닌가 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여지는듯 하다. 이후 후소는 순양함 루이스빌에게 추가로 포격을 받았으나, 일반적으로는 멜빈의 단독 전과로 본다. 후소의 승조원들은 아사구모에 의해 구출되었으나, 아사구모마저 격침되면서 결국 10명만이 살아남았다.
어뢰들은 후소에게만 달려든 것이 아니었다. 미 구축함들의 어뢰는 구축함 야마구모를 격침하고 미치시오와 아사구모[38]를 항해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새벽 3시 11분이 되자, 플레처급 구축함 몬슨(Monssen)과 킬렌(Killen)이 추가적으로 뇌격을 했고, 1~2발이 기함 야마시로에 명중했다. 그 결과 야마시로는 느려졌고, 좌현으로 기울었다. 후미의 탄약고 2개에 침수도 발생했다. 야마시로는 3시 40분에 함수 부분에 어뢰 한대를 더 맞았다.
니시무라는 함대가 입은 괴멸적인 피해에도 불구하고, 연합함대로부터 받은 명령, 즉 구리다 함대의 돌입을 지원하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계속 전진한다.

4.4.4. 최후의 전함간 포격전


[image]
웨스트 버지니아가 제출한 보고서에 나오는 레이더 추적 기록
점선으로 표시된 Able이 야마시로로 보이고,
지그재그 기동을 하면서 돌격하다 반전한 Baker가 모가미로 보인다.
새벽 3시 16분경, 콜로라도급 전함 웨스트 버지니아가 미 전함중에서는 홀로 야마시로와 모가미를 포착한다. SG 레이더로 포착한 거리는 38킬로미터 거리였다. 올덴도르프 제독은 니시무라 함대가 구축함들에게 유린당할 때까지 기다리며, 웨스트 버지니아로부터 들려오는 보고를 받는다.
[image]
니시무라 함대에 포격 중인 웨스트 버지니아
새벽 3시 50분, 모가미와 야마시로가 이를 악물고 20.8킬로미터 거리까지 다가오자, 웨스트 버지니아는 레이더 사격통제 시스템으로 적을 조준해서 16인치 주포 8문으로 일제 사격을 시작하고, 도합 93발의 주포를 퍼붓는다. 웨스트 버지니아의 주포 사격은 첫 사격부터 야마시로에게 명중했다. 이후 6척의 전함 중에서 제대로 사격한 것은 최신 사격통제장치를 갖춘 웨스트버지니아, 캘리포니아, 테네시 3척 뿐이며, 나머지 세 척은 구식 사격통제장치의 저성능 때문에 제대로 포격하지 못했다. 메릴랜드는 남들의 포격으로 일어나는 물보라를 보고 대충 포격이라도 했고, 미시시피는 마지막 순간에 적을 발견하고 일제사격이라도 한 번 해봤지만, 펜실베이니아는 대상을 찾지 못했고 사격 선상에 아군 함정이 있어서 결국 제대로 쏘지도 못했다. 덧붙여서 미시시피의 포격은 전사(戰史)상 전함이 전함에게 가한 마지막 포격이다.[39]
그 결과 이 해전은 세계 해전사에서 수상함들로만 이루어진 마지막 해전이자 전함들끼리 포탄을 교환한 마지막 해전이며 여기서 가라앉은 일본 전함 야마시로는 전함 주포에 가라앉은 최후의 전함으로 기록된다.
1,2번 포탑으로 사격을 가하며 응전하던 야마시로는 플레처급 구축함 베넌(Bennion)의 뇌격을 추가로 맞은 후 주포탑 탄약고가 폭발하였고, 파고다 마스트가 무너져 내리며 대파되었다. 4시 17분,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함장 시노다 대좌는 총원 퇴함을 명령했고, 약 2분 뒤, 야마시로는 함미 방향부터 심해의 무덤속으로 가라앉았다. 니시무라 제독 이하 지휘부 및 시노다 대좌 이하 함 승조원 중 대다수가 전사했고, 생존자는 포로가 되어 전후 귀국한 10명 정도 뿐이었다.

4.4.5. 일본 함대의 퇴각


포문을 연 것은 전함만이 아니었으며, 그 앞열의 순양함들도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후일에 말하기를 '''360도 전 방향에서 강철이 폭포처럼 쏟아졌다.''''고 할 정도.
모가미급 중순양함 모가미는 포틀랜드의 8인치 주포 사격에 맞아 함교와 대공사격 관제소가 대파되었고, 함장과 부장이 전사, 포술장이 직무를 대리했다.
궁지에 몰린 모가미와 구축함 시구레는 남쪽으로 도망치기로 한다. 그러나 도망치려는 와중에, 시마 함대의 기함 나치가 모가미의 우현을 들이받는다. 모가미는 수면 아래쪽의 우현에 큰 구멍이 났고, 나치의 함수에도 침수가 시작된다. 모가미는 이 충격으로 조타실에 침수가 발생했으며, 어뢰가 폭발해 모가미의 우현 엔진을 날려버린다. 그 와중에도 모가미는 안간힘을 쓰며 남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올덴도르프 제독 휘하의 순양함대와 구축함대, 어뢰정들은 잔존한 시마, 니시무라 함대를 추격하러 남하하고 있었다. 새벽 5시 30분에 포틀랜드, 덴버와 기함 루이스빌의 포격도 모가미에게 쏟아진다. 모가미는 그것을 얻어맞으며 남쪽으로 계속 도망갔다. 결국 사마르 해전이 시작되자 77.2 임무전대의 순양함들은 추격을 포기하고 태피 3을 구하기 위해 돌아간다. 모가미는 살아남은 것이다.
그러나 아침 8시 반이 되자, 운명의 여신이 모가미를 버린다. 모가미의 좌현 엔진이 파괴되었고, 배는 표류하기 시작했다. 표류한지 30분이 지난 9시 2분이 되자, 태피 1의 함재기들이 나타난다. 태피 1과 4는 태피 3을 구원하기 위해 북상하고 있었는데, 같은 이유로 수리가오 해협을 비운 77.2 임무전대를 대신하여 수색하기 위해, 짬을 내서 함재기를 띄운 것이었다. 모가미는 태피 1의 어벤저 뇌격기에게 발견되었고, 공습을 당해 폭탄 2발을 맞는다. 결국 모가미로부터 퇴함 명령이 내려진다. 시마 함대의 구축함 아케보노가 퇴함하는 이들을 수용한 다음, 모가미를 뇌격 처분했다.
새벽 3시 25분, 시마 함대의 경순양함 아부쿠마는 미해군 어뢰정 PT-137에게 뇌격을 받아서 1번 보일러 룸이 대파되었으나, 새벽 4시 45분에 가까스로 복구해서 20노트로 도망간다. 5시 35분에 아부쿠마 역시 올덴도르프 제독의 추격함대에게 따라잡히나, 가까스로 탈출한다. 그러나 아부쿠마는 그 다음날인 10월 26일, 구축함 우시오의 호위를 받으며 수리를 위해 다피탄으로 향하던 도중, 미 육군의 폭격을 맞고 격침된다.
결과적으로, 시마 함대는 아부쿠마 한척을 잃은데 그쳤으나, 니시무라 함대는 시구레 한척을 제외하고 전멸했다.

4.4.6. 기타


일본 해군의 함대는 올덴도르프 함대의 견고한 방어진을 뚫지는 못했다. 시마와 니시무라의 협력이 전혀 없어서, 니시무라 함대가 먼저 돌입해서 개박살 난 후 시마 함대가 돌입한 것도 패인이었다. 다만 일본 해군의 전력 대부분, 특히 전함 두 척이 니시무라 함대에 집중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미 해군 전함열의 화력이 워낙 압도적인 상황이었다. 올덴도르프 함대는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소속의 2척을 포함해서 79척(이 중 주력함은 전함 6척,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4척으로 나머지는 구축함과 어뢰정이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압도적인 전력차이다.) , 이에 대해 니시무라, 시마 두 함대를 합쳐도 14척, 별도 행동중이던 시마 함대 휘하의 21구축대까지 포함시켜도 17척이었다. 시마 함대가 협력해서 같이 진입했다고 한들 돌파의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러나 시마 함대 소속이지만 별개 행동을 했던 16전대는 레이테 섬 돌입에 성공했다. 이들은 원래 구리다 함대에 소속될 예정이었다가 시마 함대로 소속이 변경된 뒤, 별도 행동을 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별도로 서술된 '1차 다호 작전'에 서술되어 있다.
수리가오 해협에선 미군에게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니시무라 함대의 돌입을 알고 나서 77.2 임무전대가 단종진으로 전개하자, 더글러스 맥아더는 올덴도르프 제독에게 전함의 포격전을 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가 거절당한다. 이후 상륙지가 위험할 수 있다는 이유로 미 육군 지휘부는 상륙함에서 전부 내려, 필리핀 내륙으로 '''이동된다.'''

4.5. 엔가노 곶 해전


일본어 :エンカノ岬沖海戦
영어 : Battle of Cape Engaño

4.5.1. 홀시의 추격


10월 24일 오후 4시 40분, 3함대 예하 38.3 임무전대는 오자와 제독의 함대 위치를 파악하고 홀시에게 보고했다. 홀시는 오자와를 때려잡으러 북상을 시작한다.
10월 25일 새벽 2시 50분, 홀시는 3 함대에 배속된 6척의 고속전함 전부를 34 임무부대로 재편성한 뒤, 윌리스 리 제독에게 34 임무부대를 맡아 오자와 함대를 쫒아 북상하라고 지시한다.[40] 홀시 제독은 일본 항공모함을 완벽하게 끝장내기 위해, 미처 제독의 공습과 함께 전함의 주포 사격을 퍼부을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 홀시는 항공모함의 전술적인 운용에 대해서는 전부 마크 미처 제독에게 위임하게 된다.
34 임무부대가 편성될 즈음 수리가오 해협 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고, 구리다 함대는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막 통과한 상태였다. 덧붙여서, 킨케이드 제독으로부터 첫 지원 요청 무전이 온 것은 이보다 50분 전인 새벽 2시, 수리가오 해협에서 교전이 벌어질 것이 분명할 때였다.

4.5.2. 엔가노 곶의 항공전


[image]
공습당하는 즈이카쿠(왼쪽)과 즈이호(추정. 오른쪽).
좌측 하단에 즈이카쿠를 향해 급강하 중인 SB2C 헬다이버도 있다.
25일 새벽 미해군 3함대는 180대의 항공기를 발진시켰다. 먼저 발진한 공습 선도기는 7시 12분에 이미 접적보고를 올린 상태였다. 미 해군 함재기 편대는 아침 8시에 오자와 함대의 상공에 도달한다. 전투기들은 항공 초계중이던 30여대의 일본기를 전부 격추했고, 급강하 폭격기와 뇌격기들은 공습을 진행한다. 그날 저녁까지, 3함대는 오자와 함대를 상대로 527 소티를 기록한다.
[image]
[image]
퇴함 도중 마지막 경례를 하고 있는 즈이카쿠의 승조원들
퇴함 도중 마지막 반자이를 외치는 즈이카쿠의 승조원들
홀시의 3함대는 엔가노 곶에서 오자와 함대와 교전에 들어가 큰 피해없이 항공모함 즈이카쿠, 경항공모함 즈이호, 치토세를 격침시키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즈이카쿠는 연합함대와 오자와가 예상했듯이, 홀시가 북상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중 하나였으며, 항공모함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많은 7발의 어뢰와 9발의 폭탄을 흠씬 두들겨 맞고 좌현으로 전복된 뒤, '''출격 열흘 전에 제독으로 진급한 함장''', 카이즈카 타케오와 842명의 승조원들의 시신과 함께 가라앉았다. 진주만 공습에 참가한 6척의 일본군 주력 항모들 중 미드웨이 해전 때 가라앉은 아카기, 카가, 히류, 소류, 이후 필리핀 해 해전 때 가라앉은 쇼카쿠를 빼고 마지막인 즈이카쿠가 가라앉음으로써 일본 항공전대는 사실상 붕괴됐다.
그 외에도 3함대는 구축함 아키즈키를 격침시키고, 경항모 치요다쿠마급 경순양함 타마를 대파시켰다.
타마는 이스즈의 호위를 받으면서 퇴각하였으나, 이스즈는 치요다를 구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탈한다. 이후 구축함 시모츠키가 함께하나, 시모츠키 역시 즈이호를 도우라는 명령을 받고 이탈한다. 타마는 홀로 오키나와로 향하다가 미군의 발라오급 잠수함 잘라오에게 발견되었고, 뇌격을 받아 격침되었다. 잘라오는 이것이 첫 출동이었고, 타마의 생존자는 한 명도 없었다.
치요다는 2번째 공습이 끝난후 휴가가 견인하려고 하였으나, 세번째 공습으로 포기한다. 이후 이스즈가 3번이나 승조원들을 구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계속되는 미군의 공습을 피하다가 이스즈 역시 공습에 손상을 입고 말았다. 이스즈는 남을 돕기에 앞서 스스로를 구해야할 상황이 되었고, 치요다로부터 승조원들을 구출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이후 치요다는 북쪽으로 느리게 도망가다, 듀보세 제독이 이끄는 미 해군 추격함대의 공격으로 생존자 없이 격침되었다.
이제 오자와 함대에는 항공전함 휴가, 이세, 그리고 경순양함 오요도와 이스즈, 그리고 구축함 8척이 남았다. 오자와는 기함을 침몰한 즈이카쿠에서 오요도로 옮긴뒤 도망친다.

4.5.3. THE WORLD WONDERS


일반적으로는 니미츠 제독이 보낸 제목의 메시지가 유명하나, 사실 하나만 보낸 것이 아니다.
킨케이드 제독은 수리가오 해협 해전이 시작되는 25일 새벽 2시에 3함대를 처음으로 호출해서, 3개 항모 전단을 꼭 싹 끌고가야 했는지 애걸복걸한다. 이 당시만 해도 킨케이드는 34 임무부대와 38.4 임무전대가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방어하고 있는줄 알았다.
새벽 3시~4시 즈음에 수리가오 해협 해전이 끝나자, 킨케이드 제독은 홀시 제독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낸다. 7함대의 77.2 임무전대에 소속된 전함들이 교전을 했으며, 그 결과 탄약이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애걸복걸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홀시는 7함대 세력이 막강한데 뭐가 문제냐 라는 반응을 보였다. 덧붙이자면 77.2 임무전대는 니시무라 함대를 괴멸시킨 이후에도 탄약이 부족한 상황이 전혀 아니었지만,[41] 홀시가 이 사실을 알 도리는 없었다. 정리하자면, 두번째 메시지는 킨케이드 제독이 엄살을 부린 것.
25일 아침 6시 45분을 기점으로 사마르 해전이 벌어지자, 태피 3의 아수라장으로부터 온갖 무선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킨케이드 제독은 원래의 평서문에 더해, 문장을 점점 더 간략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보내기 시작한다.

"My situation is critical. Fast battleships and support by air strikes may be able to keep enemy from destroying CVES and entering Leyte.

내 상황이 위급하다. 고속전함과 항공지원이 있다면, 적이 호위항공모함을 파괴하고, 레이테에 진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8시 0분에 킨케이드 제독이 보냄.

홀시는 이 호출문을 듣고 깊게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홀시는 오전 10시 이전까지 킨케이드 제독의 메시지를 하나도 전달받지 못했다고 변명했다.[42] 그러나 이후 38.1 임무전대의 지휘관인 매케인 제독이 자신은 이 메시지를 받았다고 폭로했고, 후에 홀시는 킨케이드가 곤경에 처한건 알았지만, 야마토같은게 튀어나와서 근거리에서 호위항공모함에게 주포를 쏴대는 어마무시한 상황 씩이나 될 줄은 몰랐다고 변명했다.

Fast Battleships are Urgently Needed Immediately at Leyte Gulf

레이테 만에 고속 전함이 긴급하게, 즉시[43]

필요하다.

8시 22분에 킨케이드 제독이 보냄.

Need Fast Battleships and Air Support

고속전함과 항공지원이 필요함.

9시 5분에 킨케이드 제독이 보냄.

4 Battleships, 8 Cruisers Attack Our Escort Carriers

전함 4척, 순양함 8척이 아군의 호위항공모함을 공격중

9시 7분에 킨케이드 제독이 보냄.

여기까지 다다르자, 니미츠 제독은 더 이상 상황을 좌시할 수 없었고, 홀시에게 34 임무부대의 위치를 묻는 식으로 완곡하게 의사를 표명하고자, 아래와 같이 메시지를 보낸다.

TURKEY TROTS TO WATER

GG[44]

FROM CINCPAC

ACTION COM THIRD FLEET INFO COMINCH CTF SEVENTY-SEVEN

X[45]

WHERE IS RPT WHERE IS TASK FORCE THIRTY FOUR

RR[46]

THE WORLD WONDERS

''해석을 막기 위한 더미 문자''

태평양 함대 사령부로부터

수신인 : 3함대 지휘부, 해군장관,[47]

77임무부대[48]

어디 있는가, 반복한다.[49]

34임무부대는 어디 있는가.

''해석을 막기 위한 더미 문자''

위의 메시지가 홀시에게 전달될 때는 아래와 같은 문장이 되어 있었다.

WHERE IS RPT WHERE IS TASK FORCE THIRTY FOUR THE WORLD WONDERS

어디 있는가, 반복한다. 34임무부대는 어디 있는가. '''온 세상이 알고 싶어한다'''

홀시는 입으로 이 문구를 다 읊으며 읽었다고 하는데, 마지막 문장을 읽자마자 항공모함 갑판에 자신의 모자를 내동댕이치고는, 분노의 괴성을 지르며 니미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나서는 그 자리에서 흐느꼈다. '''멘붕'''한 것이다.[50] 그의 참모장이었던 로버트 카니 제독[51]은 홀시 제독 앞에 마주 서서 홀시 제독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고는, 진정하라고 이야기한다. 홀시는 그제서야 이성을 찾았지만, 오자와 함대를 격멸하겠다는 목적을 바꾸진 않았다. 3함대는 이후로도 1시간 동안 더 북상하며, 오자와 함대의 잔존 함정을 추격한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인고 하니, 통신을 보낼 때는 도청 방지를 위해 아무 문구나 집어넣어서 보내게 된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듯이 문장에서 어떤 문구는 고정될 수 밖에 없다. 대표적으로 수신인이 그렇고, Yours sincerely같이 예의상 붙이는 관용어구가 그렇다. 그리고 미국은 일본의 외교 암호를 해독할 때 같은 방식으로 공략에 성공했다. 그 문제의 문구는 '''덴노헤이카 반자이'''. 추축동맹인 독일 또한 '''하일 히틀러'''를 써넣다가 영국한테 털렸다.
그런데 하와이의 통신장교가 체스터 니미츠의 전문을 보내면서, 하필 '''온 세상이 알고 싶어한다'''라는 문구를 넣었다. 이 문구는 발라클라바 전투의 경기병대의 돌격을 다룬 테니슨 경의 시구이며, 마침 그 날이 경기병대의 돌격 기념일이라 해당 문구를 골랐던 것이다. 이를 기함인 전함 뉴저지의 통신요원들이 번역하면서, 뒤의 더미 문구를 그대로 붙여버린 것이다.
본래 니미츠는 부하 지휘관들의 행동은 크게 존중해 주었고 전투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위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니미츠가, 작전술 단위에서 재량권을 가지는[52] 3함대 지휘관에게 이런 과격한 조롱을 한 셈이 되었다.
게다가 니미츠 부임 이후에 태평양 함대의 주축이 된 상급 지휘관들은 가식적인 인물들이 없었고, 말수가 적거나[53] 솔직담백한 이들[54]이 전부였다. 홀시는 그런 이들의 조롱으로부터 태평양 함대에 부임했을 당시의 니미츠를 지켜준 적도 있다. 그런데 홀시가 자신이 물리친 이들이 할 법한 빈정거림을 니미츠로부터 받았으니, 그 당혹감과 배신감이 오죽했겠는가.
어쨌든 홀시는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38.1 임무전대에게 구원을 명령한다. 하지만 38.1 임무전대의 지휘관 매케인 제독은 이미 새벽에 3함대와 합류하는 침로가 아닌 7함대 사이의 어중간한 침로를 타면서 물타기를 하고 있었고, 8시 0분의 킨케이드 제독의 메시지를 받자마자 이미 독단적으로 남쪽으로 전속 항해를 시작한 상태였다. '''이것이 이전 문단에서 언급한 매케인 제독의 항명 행위이다.'''[55]
9시 20분이 되자, 구리다 턴이 시전된다. 적이 퇴각한다는 사실에 안도한 킨케이드 제독은, 곧 어리둥절해서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낸다.

Who is guarding the San Bernardino Strait?

산 베르난디노 해협은 누가 지키고 있는가?

10시 5분에 킨케이드 제독이 보냄.


4.5.4. 홀시의 복귀


11시 15분이 되자, 쪼이는데 질린 홀시는, 윌리스 리 제독이 이끌던 고속전함 위주의 34 임무부대에게 반전하여 남하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이미 구리다 함대는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통해 탈출한 뒤였고, 리의 고속전함 함대는 치요다와 오자와 함대의 잔존 함정에게 포격을 개시하기 일보 직전이었으며[56], 항공모함 전단의 구축함들은 남하하기 전에 2시간 반동안 급유를 해야 했다. 이렇게 뒤늦은 타이밍에 결정을 뒤집는다면, 홀시는 아무런 성과도 얻을 수 없었다.
홀시는 클리블랜드급 경순양함 산타페, 모바일, 위치타급 중순양함 위치타, 뉴올리언스급 중순양함 뉴올리언스의 4척과 9척의 구축함을 떼어 38 임무부대를 만들고, 로렌스 듀보세 제독에게 추격을 계속하도록 지시하고는, 아래의 지침을 준다.

No survivors are permitted to be rescued.

단 한 명의 생존자도 구출되게 놔두지 말라.[57]

[image]
38임무부대가 촬영한 치요다의 최후
리의 고속 전함 함대가 반전한 것은, 대파된 치요다와 구출되지 못한 승조원들의 최후를 아주 조금만 미룬 것에 불과했다. 38 임무부대는 홀시의 명령에 따라 경항모 치요다에서 단 한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는다.
홀시는 또한 구색을 맞추기 위해, 함대에서 가장 빠른 전함인 아이오와급 전함 '뉴저지'와 '아이오와'의 2척, 그리고 3척의 순양함과 8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34.5 임무전대를 34 임무부대에서 독립 편성하여 오스카 뱃저 2세 제독에게 맡긴 뒤, 리 제독은 나머지 4척의 전함으로 뒤따르도록 하고, 34.5 임무전대를 최대 전속으로 태피 3를 향해 남하시킨다.
어쨌거나 구리다 함대는 도망갔으므로 34.5 임무전대는 얻을 것이 없어보였지만, 치쿠마의 승조원들을 구출해서 도망가던 구리다 함대의 구축함 노와키를 산 베르난디노 해협에서 포착해서 격침시킨다. 노와키는 헤일스톤 작전에서 아이오와급 전함에게 추격당하고도 살아남았지만, 이번에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노와키는 추격함대의 순양함에게 포격을 맞았고, 플레처급 구축함 오웬의 뇌격을 맞아 격침당했다. 치쿠마와 노와키의 모든 승조원이 익사했다.

4.6. 사마르 해전


Battle off Samar[58]
이름하여 다윗과 골리앗의 태평양판 전투
간편리뷰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crHb1pDO7AM
[image]
붉은 선 : '''2함대 1유격부대, 구리다 타케오 제독[59]'''
검은 실선 : '''77.4.3 임무분대 (태피3), 클립튼 앨버트 프레드릭 스프레이그 제독'''
우측의 검은 점선 : 77.4.2 임무분대 (태피2), 펠릭스 스텀프 제독
하단의 검은 점선 : 77.4 임무전대 본대 (태피 1, 4), 토마스 스프레이그 제독[60]

4.6.1. 구리다 함대의 필리핀해 진출


홀시가 이끄는 미 해군 3함대가 북상하면서 산 베르난디노 해협이 텅 비었다. 그 덕분에 구리다 함대는 10월 25일 새벽 3시에 무사히 해협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이들은 해협을 통과한 뒤 레이테 만을 향해 남하한다.
동이 트자, 7함대의 호위 함공모함 함대인 77.4 임무전대는 항공작전을 개시한다. 임무전대 예하의 호위 항공모함 부대는 태피 1,2,3,4로 세분화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항공기를 발진시키기 위해 일제히 맞바람이 부는 북쪽으로 항진하기 시작한다. 그중에서, 태피 3의 호위 항공모함 5척은 상륙한 육군을 위한 항공 지원을 준비했고, 세인트 로에서는 태피 3가 담당한 북쪽 해역의 대잠 초계를 위해 정찰기 4대를 발진시킨다. 그리고 6시 37분, 정찰기를 조종하던 장교는 '''홀시의 3 함대[61]가 전개했을 것이라 믿은 장소에서, 일본 함대가 기동하고 있다'''는 보고를 올린다. 태피 3의 지휘관이던 클립튼 스프레이그 제독은 당연히 믿지 않았고, 좀 더 다가가서 확인하라고 내리 갈굼을 시전한다. 그래서 정찰기는 좀 더 다가갔고, 보고를 올린다.

I can see pagoda masts. I see the biggest meatball flag on the biggest battleship I ever saw!

파고다 마스트[62]

가 보이고, 제가 본 가장 큰 전함가장 큰 미트볼 깃발이 보입니다!

- 윌리엄 C. 브룩스 소위

정찰기는 일본 해군의 전함 야마토와 수많은 수상함들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구리다 함대 역시, 6시 45분에 항공모함 위주의 미해군 함대를 발견하고는, 머리 위의 정찰기에게도 대공포 사격을 한다. 정찰기가 야마토를 발견할 무렵, 구리다 함대는 태피 3의 북서쪽 방향으로 불과 3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태피 3의 견시도 이 대공 사격을 목격했다.
구리다 제독은 이 함대를 홀시가 이끄는 3함대라고 판단하고, 함재기의 공격을 받아 불덩어리가 되기 전에 항공모함을 벌집으로 만들어 수장시키기 위해서 즉각 교전에 들어갔다.

4.6.2. 양측 함대의 세력 비교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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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 태피3 전력'''
함종
'''일본 해군 구리다 함대 전력'''

전함
야마토급 전함 야마토, 나가토급 전함 나가토,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 하루나 '''총 4척'''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칼리닌 베이, 세인트 로, 겜비어 베이, 화이트 플레인스, 팬샤우 베이, 킷쿤 베이 '''총 6척'''
항공모함


중순양함
타카오급 중순양함 초카이, 모가미급 중순양함 쿠마노, 스즈야, 묘코급 중순양함 하구로,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 치쿠마 '''총 6척'''

경순양함
아가노급 경순양함 노시로, 야하기 '''총 2척'''
플레처급 구축함 존스턴, 히어만, 호엘 '''총 3척'''
구축함
카게로급, 유구모급, 시마카제급 구축함 '''총 11척'''
존 C. 버틀러급 호위구축함 존 C 버틀러, 데니스, 레이문드, 사뮤엘 B 로버츠 '''총 4척'''
호위함

하지만 구리다 제독의 판단과는 달리 이 함대는 홀시와 미처 제독이 이끄는 3함대 예하 38 임무부대가 아니었다. C.A. 스프레이그 소장이 지휘하는, USS 갬비어 베이호 등 호위항공모함 6척, 구축함 3척, 호위 구축함 4척 등으로 이뤄진 77.4.3 임무분대 또는 '태피3'라고 불리는 소규모 호위 항공모함 전대였다. 당시 구리다 함대와 태피3의 전력차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태피3의 모든 함정의 배수량을 합치면 야마토 한 척과 비슷했다.'''

4.6.3. 전투 시작


구리다 제독은 오자와 함대가 홀시를 꾀어내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몰랐으며,[63] 상대가 3함대의 주력 항공모함이라 생각했기에, 진형을 대공진형으로 바꾸라고 함대에 지시한다. 함대는 태피 3를 향해 전속으로 달려들면서 진형을 바꿨고, 특별한 목표를 지정하지 않은채 스스로 판단해서 적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한편 클립튼 스프레이그 제독의 호위항공모함 함대, 태피 3는 이런 예측하지 못한 사태를 맞게되자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생각하지도 못한 기습을 받은 데다가, 일본 전함은 코 앞에 있는데 77.2 임무전대에 배속된 미군 전함은 레이테만 남쪽 해협에 있었다. 게다가 이들 전함을 호위하는 구축함과 순양함들은 니시무라 함대와 시마 함대를 추격하기 위해 수리가오 해협 남쪽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따라서 77.4 임무전대의 다른 호위항공모함 부대가 공습을 해 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구리다 함대에 맞서볼만한 카드가 없었다. 그나마도 77.4 임무전대의 호위 항공모함들은 맥아더의 지상 부대를 지원하기 위한 대지상 공격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대잠 공격을 위한 항공기 무장만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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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막을 치며 도망가는 갬비어베이(제일 오른쪽)와 호위 구축함들
갬비어베이의 비행갑판에 출격대기중인 함재기가 있다.
태피3는 적을 발견하자마자 우현으로 일제히 선회해서 남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는 7함대의 토마스 킨케이드 제독에게, 일본 함대에 맞설 수 있는 7함대의 주력 전함 부대인, 77.2 임무전대가 전개하고 있는 레이테 만으로 철수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강력한 적을 상륙지로 끌고 들어오는 셈이었고, 니미츠 제독이 내린 기본 방침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킨케이드 제독은 상륙부대의 안전을 이유로 거절한다. 그 대신 77.2 임무전대는 니시무라, 시마 함대의 추격을 단념한 뒤 즉시 레이테 만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킨케이드 제독은 홀시의 3함대에게 구원 요청을 보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태피3에게는 남하하는 것 말고는 별 다른 수가 없었고,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내달리는 호위항모부대와, 그를 뒤쫒는 일본함대 간의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클립튼 스프레이그 제독은 침착하게 대처했다. 우선 함대를 원형진으로 재편성하며 구축함과 호위구축함은 연막을 쳐서 항모를 가리고, 호위 항모는 맞바람 여부를 따지지 말고 전 함재기를 긴급발진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호위항공모함에도 일본 함대에 유효한 대함용 철갑탄이나 어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무장을 탑재하거나 교체할 시간이 없으니[64] 무장이 있든 없든 일단 전부 띄우고 보자는 것. 스프레이그의 빠른 상황판단 덕분에 단시간 내에 함재기들은 한 기의 피해도 없이 전부 무사히 발함에 성공했다. 그리고 호위항모가 보유하고 있는 함재기용 무장은 유폭의 위험이 있으니 전부 바다에 버리라는 과감한 명령을 내렸다.[65] 그렇다곤 해도 실제적인 전력 차는 너무나 확연했다. 구리다 함대는 스프레이그의 호위항공부대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고, 클립튼 스프레이그는 훗날 '''그 때는 30분 버티면 잘 버틴 거라고 생각했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
그 와중에 태피3 소속 구축함 7척 중 플레처급 구축함 USS 존스턴을 필두로 하여 존 C. 버틀러급 호위구축함 USS 사무엘 B. 로버츠와 플레처급 구축함 USS 히어만, USS 호엘로 구성된 구축함 전대가 구리다 함대를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야마토의 주포탑 하나 무게가 2774톤인데 USS 존스턴의 만재배수량이 2700톤이었다. 전함이 구축함한테 대낮에 패퇴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만큼, 이 돌격은 자살이나 다름없는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나!'''

4.6.4. 전투 전개




4.6.4.1. 미 해군 파일럿들의 분전

태피3의 파일럿들은, 적 함대를 공격한 뒤 레이테 만 북서쪽 타클로반에 건설한 간이 활주로로 가서 재무장과 급유를 받으라는 지침을 받고 긴급 발진한다.
급하게 발진한 나선 함재기들 중 무장을 탑재한 기체는 소수에 불과했고, 그나마 탑재한 무장도 함정에 유효타를 먹일 수 없는 육상 공격용 폭탄이나 대잠 공격용 폭뢰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기총 탄약조차 없는 기체가 상당수였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호위항모의 함재기들은 결사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무장이 탑재된 기체는 폭뢰든 고폭탄이든 일단 최대한 타격을 가하기 위해 폭격을 개시했고, 그 와중에 중순양함 스즈야가 육상공격용 폭탄을 지근탄으로 얻어맞고 엔진에 손상을 입었다. 무장이 없는 기체는 기총사격을[66] 가하거나 텅 빈 무장창을 연 채로 마치 뇌격을 하려는 것처럼 접근해 일본 함대가 회피기동을 펼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항공 세력을 갖추지 못했던 일본 함대는 이런 속임수 공격에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함재기들은 연료가 떨어질 때까지 이런 공격과 거짓 공격을 반복한 다음 육상기지로 향했다. 착륙 과정에서 손상된 기체는 몇 있었지만 태피 3의 파일럿들은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무사히 대피하는 데에 성공했다.
또한 태피 1, 2에서도 태피 3을 구원하기 위해 함재기를 발진시켰다. 태피 2는 함재기를 발진시키기 위해 구리다 함대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북쪽으로 항진하다가 오전 8시가 되기 전에 반전하여 동쪽으로 도망간다.

4.6.4.2. 미 해군 구축함 및 호위구축함들의 분전

한편 태피 3의 플레처급 구축함 존스턴(DD-557)의 함장인 어니스트 에반스는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돌격했다.''' 죽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태피 3의 호위항모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것이다. 이를 보고 플레처급 구축함 호엘(DD-533), 히어만(DD-532)이 뒤를 따랐고, 만재배수량이 2000톤도 안 되는 '깡통 구축함'인 존 C.버틀러급 호위구축함 사무엘 B. 로버츠(DE-413)도 돌격했다. 이들은 일본 순양함들의 주포 부앙각이 못미치는 거리까지 접근해 5인치(12.7cm) 함포로 그나마 피해를 줄 수 있는 구조물들을 공격하고 어뢰를 쏴대는 무용을 펼쳤다.
선두에 선 어니스트 에반스 함장이 이끄는 구축함 존스턴은 우선 지그재그로 접근,[67] 포격을 가하여 모가미급 중순양함 4번함 쿠마노의 함교를 박살내고, 뒤이어 발사한 어뢰로 쿠마노의 함수를 날려버렸다. 이때까지 존스턴은 포탄 한 발도 맞지 않았는데 자기 체급보다 6배나 무거운 중순양함을 박살내버린 것이다. 뒤를 따르던 모가미급 3번함 스즈야는 쿠마노를 피하려고 속도를 줄이며 선회하다가 태피3 함재기들의 공습을 당해 폭탄 2발을 맞고 전열에서 이탈한다.[68] 그러나 존스턴도 7시 30분쯤에 전함 공고의 14인치 주포 3발, 야마토의 6인치 부포 3발을 맞아 큰 피해를 보았고 스콜 안으로 숨어 수리에 들어갔다.
이때 존스턴의 뒤를 이어서 싸움판에 끼어든 배가 바로 사무엘 B. 로버츠(DE-413). 사무엘 B.로버츠는 처음에는 타카오급 중순양함 4번함 초카이를 향해 돌진했는데, 초카이가 반격을 가했으나 역시 부앙각의 사각으로 들어간 덕분에 포격은 모두 빗나갔다. 그렇게 접근하여 초카이에게 뇌격을 가한 후,[69] 곧바로 토네급 중순양함 치쿠마에 접근, 포격전에 들어간다. 치열한 근접전 끝에 치쿠마의 8인치 포탄 6발에 5인치 포탑 중 1기를 잃었지만 나머지 5인치 포 1문으로 반격을 가하여 치쿠마의 3번 포탑과 함교를 날려버렸고, 철갑탄과 고폭탄을 모두 소진한 뒤 최후의 수단으로 조명탄을 발사해서 치쿠마의 함체 전역에 화재를 발생시켰다. 이후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의 14인치 포에 치명타를 입었고 9시 35분에 퇴함 명령이 떨어졌고 30분 후 침몰했다. 하지만 이 활약상으로 '''전함처럼 싸운 호위구축함'''이라는 칭호를 얻었다.[70]
아모스 T. 해서웨이(Amos T. Hathaway) 함장이 지휘한 구축함 USS 히어만(DD-532)은 토네급 중순양함 치쿠마에게 포격을 가하며 묘코급 중순양함 하구로와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를 향해 어뢰를 날렸고, 곧바로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에 접근해서 어뢰를 발사한다. 이 어뢰들은 전부 빗나갔지만 그 중 2발이 바로 뒤에 있던 일본 함대 기함 야마토를 향해 돌진했다. 야마토는 이 어뢰를 피하려다가 방향을 잘못 잡는 바람에 진행하는 어뢰들 사이에 끼어버렸고 그대로 전장에서 벗어나게 된다. 영문위키 나가토에 따르면, 이 어뢰는 야마토와 함께 있던 전함 나가토도 전장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히어만은 혼자서 일본 최강의 전함 2척을 물리친 것이다!''' 덤으로 하루나는 히어만의 어뢰를 피하기는 했지만 이후 전공을 올리지 못했다.
이후 히어만은 사무엘 B. 로버츠와 함께 토네급 중순양함 치쿠마를 양쪽에서 포위하고 공격했지만, 일본군의 순양함들과 전함 공고, 그리고 어뢰에 쫓겨 도망가던 야마토와 나가토의 집중포화를 뒤집어쓴 끝에 포탑 하나가 날아가고 이물이 침수되고 3명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히어만은 태피2의 함재기 4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계속 포격했고, 함재기의 어뢰 1발이 치쿠마의 고물을 파괴한다. 대파되어 조종불능이 된 치쿠마는 뒤이은 공습으로 침몰했고, 토네가 히어만을 잡으려고 달려들었지만 역시 공습을 당해 쫓겨난다. 구리다 제독이 후퇴명령을 내리면서 해전은 막을 내렸고, 히어만은 자살적인 돌격을 감행한 4척의 미군 군함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야마토와 나가토를 물리치고 최후까지 구리다 함대를 저지하여 사마르 해전을 승리로 이끈 공적 덕분에 해서웨이 함장은 해군십자훈장을 받았으며, 히어만은 미국과 필리핀 정부로부터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이 해전에서 히어만이 낸 전사자는 6명 뿐이었다.
히어만과 함께 돌격한 호엘(DD-533)은 공고를 정면에서 틀어막고 하구로에게 어뢰를 날리며 분전했지만, 일본군에 포위당해 40발이 넘는 포탄을 얻어맞고 8시 55분, 돌격을 감행한 4척의 미군 군함 중 첫번째로 침몰했다.
존스턴은 때마침 드리운 스콜에 숨어서 기관부와 포탑 2개를 복구하는데 성공했고 다시 아군을 지원하던 와중에 아가노급 경순양함 야하기가 구축함 4척을 이끌고 호위항모에 공격을 가하려고 접근하자 '''다시한번 이들을 단신으로 가로막고 나섰다.''' 여기에 당황한 일본 함대는 급히 93식 어뢰를 발사했지만 제대로 조준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부 빗나간다. 이어진 포격전 끝에 존스턴은 2번 포탑과 엔진이 파괴되었고, 오전 9시 40분에 전원 퇴함, 10시 10분에 침몰하고 말았다.

4.6.4.3. 야마토의 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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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 해전 중 촬영된 야마토. 야마토 옆으로 함재기 한 대가 보인다.
야마토는 사마르 해전이 시작된 직후, 약 32,000m 거리에서 주포탄 104발을 쏘았지만, 효과는 미비했다. 칼리닌 베이에서는 야마토의 포격이 거리는 정확했지만 방향과 각도가 어긋났음을 파악했다.[71] 야마토에서는 적 항모 1척의 격파를 확인하고 해당 항모의 흑연으로 조준이 곤란해지자 목표를 변경했다.[72]
그러나 미 구축함들이 돌격하면서 뇌격을 했고, 그중 히어만의 뇌격을 피하기 위해 회피기동을 하다가, 전술했듯이 전장을 이탈하게 된다. 이는 구리다가 정확한 전황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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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0 전투 상황도
영문위키와 일본어 위키 레이테 만 해전 모두 야마토가 구축함의 어뢰에 쫓겨서 도망쳤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설도 있다. 야마토와 나가토가 구축함대의 어뢰 회피를 위해 변침하다 조타 실수로 어뢰 항주가 끝날 동안 같은 방향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라, 계속 되는 미함재기의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뢰를 회피한 방향과 같은 방향에 형성된 스콜속으로 대피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변침에 소요한 시간은 8분으로, 긴 시간이라 할 수 없다. 이 외에도 전함 공고 또한 미함재기의 공격 받아 측거의가 파손되어 스콜속으로 대피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주장대로라면 야마토는 공습을 당하면서도 진격하는 구리다 함대의 다른 배들을 버리고, 기함의 임무까지 방기한 채 도주했다는 의미가 되고 만다. 일본군에서 가장 대공화력이 막강한 전함이 말이다.
또 다른 이설은 야마토가 어뢰에 끼어 전장을 벗어났다는 과거의 주장은 간단한 함정기동의 원리조차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전함이 어뢰 사이에 끼여 꼼짝도 못하고 항주하려면 어뢰와 전함의 속도가 계속 똑같아야 한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당시의 어뢰는 무유도 직진형이다. 어뢰는 정해진 속도대로 항주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전함 쪽은 얼마든지 속도조절이 가능하다. 양쪽의 어뢰 사이에 끼었다 하더라도 전함의 속도를 아주 조금만 줄이면 어뢰는 순식간에 앞서나가게 되고 전함은 다시 항로를 틀 수 있는데 무슨 몇분~몇십분간 어뢰에 끼어서 움직이지 못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그만 요트도 아니고 전함급 함선은 관성 때문에 속도 조절이나 방향 조절이 기민하게 이루어질 수 없고, 또한 속도를 늦출 경우 미군 전투기와 폭격기의 손쉬운 공격 목표가 된다. 즉 위의 사진에서 나오는 것처럼 선미쪽에서 옆을 스치듯이 어뢰가 접근하면 전함급 함선은 선회해서 어뢰 경로 바깥쪽으로 피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다고 속도를 빠르게 줄일 수도 없고 속도를 낮춰서도 안되므로 울며겨자먹기로 어뢰가 함선을 추월해가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당연히 야마토의 견시가 어뢰가 선미까지 올 때까지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발견했을리도 없으니, 선미에서 선수까지 추월하는 시간이 아니라 선미 후방 최소 몇 km 뒤 위치에서 선수를 추월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럼 어뢰 때문에 몇 분 정도 야마토가 전장에서 이탈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더구나 어뢰가 지나갔다고 해서 바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다른 어뢰는 또 없는지 충분히 확인한 후 진행방향을 돌려야 하는데, 말했지만 전함급 함선은 180도 턴이 말처럼 휙 이루어지는게 아니다.)
영문 위키와 일본어 위키는 모두 야마토가 구축함에게 쫓겨서 도망쳤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전술하였다시피 정확한 연구를 통해 서술된 것이 아니라 2차 대전 종료 직후에 알려진 일화들이 별다른 검증 없이 현재까지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는다. 생각 외로 레이테 해전 당시의 일본 함대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미드웨이 해전과 같은 상세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야마토가 어뢰에 끼어 도망갔다"라는 주장은 좀더 명확한 출처와 교차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야마토가 구축함의 어뢰에 쫓겨 도망가지 않았다면 히어만을 상대로 계속 싸웠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USS 히어만은 2시간이나 혈투를 벌이면서도 살아남았고 구리다 함대는 레이테 만 진입에 실패했다. 해전 이후 일본군이 구리다 턴을 시전하며 달아났으므로, 야마토는 2시간 동안 구축함과 싸우고도 승리하지 못하고 도망친 셈이다. 야마토가 구축함에게 쫓겨서 달아났다는 결과는 똑같다는 의미.

4.6.4.4. 미 해군 호위항공모함들의 포격전

한편 공고와 중순양함 부대는 호위항모 갬비어 베이에 포격을 집중시켰다. 8시 15분경 갬비어 베이의 최초 명중탄은 하구로와 토네의 20.3cm 포탄이었고[73] 토네의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는 저서에서 '전함부대의 포탄은 적 항모에 화재를 일으킨 일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미국의 전사연구가 Robert Lundgren은 야마토의 포격은 존스턴에 46cm포 3발, 15cm포 3발 피탄, 호위항모 화이트 플레인즈에 지근탄으로 기관실을 파손시킨 것이 전부라고 주장했다.[74] 당시 야마토에 승선하고 있던 우가키 마토메는 전초록에서 31km 거리에서 포격으로 항모 1척을 격파 후 다른 함으로 목표를 옮겼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이 항모는 지근탄으로 기관실이 파손된 후 연막을 살포한 화이트 플레인즈였고 야마토가 다른 항모를 격파 혹은 격침했다는 언급은 없다. 나가사키 사세보 해군 묘지의 공고 위령비는 항모 1척과 구축함 2척 격침을 공고의 전과로 쓰고 있으며, 중순양함과 함께 갬비어 베이를 포격하다 8시 50분경 '적 항모 1척 대화재 대폭발'을 보고하고 갬비어 베이에 사격을 중단했다. 야마토가 갬비어 베이를 명중시켰다는 주장[75][76] 은 일본에서는 소수설.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들도 중과부적,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중포로 두들겨맞으며 도망치는 와중에도 함선당 한 개 달린 구경 5인치 짜리 다목적포를 가지고 열심히 응사를 했다. 세인트 로가 구축함에 1발, 칼리닌 베이가 묘코급 중순양함에 2발을 명중시켰으며[77], 화이트 플레인스(CVE-66)는 5인치 포의 최대 사거리에 가까운 거리에서 초카이에 무려 6발을 명중시켰다. 이후 초카이는 전함 공고에서의 오인사격으로 인해 함수부에 큰 피해를 입었고, 거기에 공습까지 당해 폭탄 2발까지 명중하며 침몰했다.
그러나 이런 분전에도 불구하고 숫자와 화력의 차이로 인해 호위구축함 데니스(DE-405), 호위항공모함 칼리닌 베이(CVE-68), 팬쇼 베이(CVE-70) 등 피격 당하는 함선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USS 갬비어 베이(CVE-73)는 격침당하고 말았다. 갬비어 베이는 1940년 노르웨이에서 독일 해군의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에게 격침당한 영국 항모 HMS 글로리어스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포격으로 격침당한 항공모함이라는 기록의 주인공이 되었다. 치쿠마,공고,초카이,노시로 등 워낙 많은 일본군 군함들이 갬비어 베이에 집중포화를 퍼부었기에 상술한 대로 공고의 전과 내지는 공동격침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호위항공모함 세인트 로(CVE-63)는 이 전투 직후 카미카제 공격에 침몰하였다.

4.6.5. 일본군은 왜 고전했는가?


상식적으로 봤을 때, 스프레이그 제독의 함대는 구리다 함대의 적수가 될 리가 없었다. 다른 전력 다 빼고 그냥 야마토가 주포로 즈려밟기만 해도 모조리 산산조각날 수준이다. 스프레이그 제독이 30분만 버티면 다행이라고 본 게 그래서다. 이렇게 유리한데도 일본군이 패배한 이유는 무엇일까?
  • 클립튼 스프레이그 제독의 훌륭한 지휘
절망적인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스프레이그 제독은 자신이 할 일을 다했다. 그는 일본 함대와 조우하자마자 재빨리 함재기들을 발진시켰다. 일본 함대가 코앞에 있었으므로 함재기를 무장시킬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그의 조치 덕분에 태피 3은 최소한의 대응이 가능했다. 이외에도 그는 호위항모에 실려 있던 폭탄들을 몽땅 바다에 버리라고 명령했는데, 일본 함대가 집중포화를 쏟아부을 게 분명한 만큼 이는 매우 현명한 조치였다. 적의 포격으로 폭탄이 유폭할 경우 호위항모의 빈약한 함체는 단숨에 박살날 것이기 때문이다.
  • 호위항모와 함재기들의 분전
호위항모들은 살기 위해 미친 듯이 연막을 뿌려대고, 어뢰를 난사하고, 긴급출격한 전투기들이 폭탄을 장착하지 않았지만(중후반부에는 구축함들이 필사적으로 옆에 붙어서 폭뢰를 투하하긴 했다.) 폭격을 가하는 척 움직임을 보이고 기총이라도 난사하고, 총알이 다 떨어져도 계속 주변을 맴돌면서 시선을 끄는 등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바람에 효과적으로 제압하지 못했다. 성능 면에서 상대가 안 되는데도 최선을 다한 덕인지, 호위항모 화이트 플레인즈는 일본군의 정예 중순양함인 초카이를 대파하는 공적을 세우기도 했다.
  • 일본군의 오판
구리다 제독은 홀시 제독과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오판을 하고 있었는데, 항공모함을 보고서는 스프레이그 함대를 홀시의 3함대로 착각하고 말았다. 쉽게 말해 호위항공모함을 정규항공모함으로 착각한 것이다.[78] 이런 오판 때문에 '빨리 못 잡으면 함재기가 날아와서 우릴 고깃밥으로 만들거다!'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전투 대형을 짜지도 않고(못하고) 항해하던 대형 그대로 전투를 시작했기에 압도적인 화력을 충분히 살릴 수도 없었다. 이 착각은 구리다 함대가 포에 철갑탄을 장착하고 포격을 가하게 만들었지만, 태피3의 함선들은 모두 과관통이 날 정도로 장갑이 얇아서 그냥 구멍만 좀 나고 말았다. 당장 어니스트 에반스의 USS 존스턴만 봐도 야마토의 46cm 포에 3방 맞았어도 살아 남았고, 호위항모에 명중한 포탄은 아예 관통해 버렸다. 심지어는 포탄이 신관작동으로 폭발하기도 전에 갑판과 선체를 다 뚫고 지나가서 그냥 바람구멍만 뚫리는 일이 발생했으므로 결정적인 손상을 입지도 않았다. 상대적으로 포탄이 작은 일본 해군의 중순양함들이 미군 호위항모에 더 큰 타격을 입힌 것도 이 때문이다.
이때 일본 해군은 모든 상황을 눈으로 직접 관측하는 상황이다 보니 스프레이그 함대의 이동속도를 실제 이동속도보다 훨씬 더 빠른 30노트 이상의 속도로 추정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스프레이그 제독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내가 그때 겁먹긴 했지만 그정도로 급하진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 USS 존스턴과 용감한 구축함들의 돌격
USS 존스턴의 함장인 어니스트 에반스는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선두에 서서 구리다 함대를 향해 돌격했고, 구축함 호엘과 히어만, 호위구축함 사무엘 B.로버츠도 그 뒤를 따랐다. 이 돌격이 없었다면 구리다 함대는 단숨에 태피 3을 분쇄하고 레이테 만에 돌입했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침몰할 때까지 용감하게 싸운 덕에 태피 3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 USS 히어만의 전설. 그리고 야마토의 도주
USS 히어만은 무모하게도 일본군 전함 3척을 상대로 혼자 도전했다. 일본에서는 상당한 수훈함에 속하는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 일본의 자랑이라는 16인치포 탑재전함 나가토, 그리고 세계 최대의 전함 야마토를 상대로 이것은 자살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구축함이 전함을 상대로 어뢰공격을 하기 전에 전함의 부포가 먼저 구축함을 박살내도록 설계되기 때문이고, 이걸 알기에 일본군이 뇌격전용 구축함 시마카제의 양산을 취소한 것이다. 수뢰전을 좋아하는 일본군조차도 전함 상대로 구축함이 승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히어만은 야마토와 나가토를 전장에서 쫓아냈다! 하루나는 히어만의 공격을 피했지만 이후 전과를 올리지 못했음을 감안하면, 히어만은 일본 전함 3척을 혼자 물리친 셈이다. 특히 기함 야마토가 도망가는 바람에 구리다 제독은 효과적으로 함대를 지휘할 수도 없었고, 전황 파악도 그만큼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는 야마토가 어뢰를 피한 후 다시 싸웠다고 주장하지만 제대로 싸웠다고 볼 수가 없는 게, 야마토가 제대로 싸웠으면 태피 3은 순식간에 전멸했다.
이후에도 히어만은 일본 함대의 선두에 선 중순양함들과 격전을 벌였고 존스턴을 비롯한 동료 구축함들이 침몰하는 와중에도 계속 싸웠으며, 구리다 함대가 진격을 포기하고 후퇴할 때까지 다른 태피 3 함선과 함께 버티면서 전선을 유지해냈다. 일개 구축함이 전함과 중순양함들을 상대로 끝까지 버틴 것은 놀라운 일이며, 히어만이 야마토를 쫓아내는 순간 레이테 만 해전의 승패가 결정되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 태피 1, 2, 3의 막강한 항공전력
일본군 입장에선 태피 3를 본대로 착각한 건 과대평가였지만, 태피 1, 2, 3의 실제 항공전력은 결코 과대평가가 아니었다. 세 부대는 총합 400기 상당의 항공기#를 날려보내는 상황이었다. 태피 3의 항공 전력은 너무 급한 나머지 제대로 무장을 장착할 시간도 없어서 큰 타격을 주지 못했지만, 태피 1,2의 항공 전력은 당연히 제대로 된 무장으로 일본군을 타격했고 시간을 더 지체한다면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을 건 불보듯 뻔했다.

4.6.6. 구리다 턴


"저 망할 놈들이 도망간다!!"

- 클립튼 A.F. 스프레이그 소장

구리다 함대에 (구리다)함대의 후방에서 적함대를 발견했다는 통신이 날아들었다. 실제로도 구리다 함대 후방에 38.1 임무전대가 전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38.1 임무전대의 첫 공습은 11시경에 이루어졌으므로, 9시 20분에 시전된 구리다 턴의 이유가 될수는 없다. 그래서 일본쪽에서는 오보라는 이야기가 주류이다. 다만, 구리다 함대는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통해 도망가면서, 실제로 해당 미군 부대의 에식스급 항공모함 3척으로 부터 대공습을 당했기 때문에, 옳은 판단을 했다는 확신은 들었을듯 하다.
게다가 구리다는 오자와가 3함대 본대를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오자와는 홀시의 3함대를 낚으면 무전으로 이 사실을 알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실제로 오자와 제독은 구리다 제독에게 무전을 여러 번 날렸다고 주장했는데, 공교롭게도 구리다 함대의 그 누구도 이 무전을 받지 못했다.
결국 전황도 불분명한 상황에, 오자와는 연락이 없고, 후방에 적함대가 나타났다는 소식까지 날아드니, 구리다는 함대가 포위당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함대는 철수하기 시작하고, 덕분에 요단강 익스프레스 탈 위기에 처했던 태피 3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태피3는 구리다 함대가 반전한 이후에도 계속 도망갔고, 킨케이드 제독의 지침에 따라 레이테 만에서 먼 방향으로 도망가기 위해 동진하다가, 본대인 토마스 스프레이그 제독의 태피 1, 태피 4와 랑데뷰하는 20시가 돼서야, '''진짜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된다.
사마르 해전은 레이테 만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교전이었으며, 이 기회를 놓친 일본군은 승리할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반대로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근성을 보여준 한판이었다. 당장 스프레이그 제독부터 '''던질 수 있는 것은 문고리까지 던질 지경'''이라고 회상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미군 참전자들의 회상에 따르면 진짜 이제는 죽는구나 싶은 순간 갑자기 일본 해군이 퇴각하는 걸 보고 어안이 벙벙했지만, "쟤들이 갑자기 왜 후퇴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살았다!"라는 안도감이 들었다고 한다. 수병중 일부는 포 사정거리안에 있을때 그냥 보내지 말고 쏴서 격침시키자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구리다의 철수 명령은 후세에 '''구리다 턴'''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엄청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구리다 턴에 대한 내용은 아래의 '구리다 턴은 올바른가?' 항목 참조.

4.6.7. 카미카제


[image]
제로센의 카미카제에 맞은 세인트 로가 유폭하는 순간
구리다 함대가 퇴각한 뒤, 태피 3은 오전 10시 13분에 카미카제 공격을 받아 호위항공모함 USS 세인트 로[79]에 화재가 발생한다. 결국 오전 11시에 배를 버린다. 세인트 로는 '''역사상 최초'''로 카미카제에 격침된 배로, [80] 세키 유키오 대위는 카미카제로 적함을 격침시킨 첫 파일럿으로 기록된다.

4.6.8. 미 해군의 피해


In no engagement of its entire history has the United States Navy shown more gallantry, guts and gumption than in those two morning hours between 0730 and 0930 off Samar.(미 해군 역사를 통틀어 미 해군이 사마르 앞 바다에서 7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아침 2시간 동안 보여준 용맹, 배짱, 진취성보다 더한 것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사무엘 엘리엇 모리슨,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ume XII, Leyte

돌격했던 미군 구축함들은 USS 히어만 단 한 척을 제외하고는 죄다 대파당하거나 격침당해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USS 히어만은 전사자가 6명만 나왔지만 히어만이 구리다 함대의 전함과 중순양함 다수를 상대로 싸워 이긴 것부터가 기적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카미카제하고도 대비되는 게 이건 전적으로 아군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아예 첫 개돌을 감행한 어니스트 에반스 함장의 존스턴은 '''명령도 받지 않고 돌진했다.''' 이 행동은 일본군이 평소 강조하던 근성과 정신력과 일치했으며, 그걸 빼더라도 어찌나 용감해 보였는지 USS 존스턴 같은 경우 침몰해서 수병들이 바다에서 표류할 때는 일본 수병들이 찾아와서 경례까지 해주었다고 한다. 구출은 하지 않았지만 엄연히 일본군이 도망가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구조를 안 한 것을 비난하기는 힘들다. 상대편 해역에서 후퇴하는 경우엔 아군조차 버리고 가는 경우가 흔했다. 애초에 구조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판단했으면, 아마도 나머지 미 함대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예우를 해줬다는 이 부분은 이설도 있어서, 많은 생존자들이 일본 함대가 지나가면서 단장기총으로 자신들을 쏘았다고 회고했다. 이는 일본 해군 측에서도 공통적으로 나오는 회고이며, 다만 대부분의 배에서 함장이나 포술장이 착란과 복수심에 빠져 생존자에게 난사하는 수병들을 제지하는 식으로 중단되었다. 적어도 유키카제와 야하기 전우회에서 출간한 책에서는 일관되게 같은 이야기, 즉 수병들이 사격하는 것을 사관들이 제지하는 내용이 나온다. 두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공식적으로는 미군 수병들에게 예의를 갖추긴 했지만 소수의 수병들이 우발적으로 사격을 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태피 3 모두가 겁먹고 도망만 다녔으면 오히려 몰살당했을 것이며, 레이테 섬에서 한참 전투 중인 미 육군도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미군과 일본군 모두 우연히 만난 상황에서 어니스트 에반스 함장이 과감하게 나서지 않았으면, 구리다가 먼저 전투 준비를 마쳤을 것이고 당연히 압도적인 화력에 하나하나씩 사냥 당했을 것이다. 과감하게 나선 3척의 구축함과 1척의 호위구축함 중 2와 1척과 호위항모 갬비어 베이의 희생, 그리고 과감하게 나선 4척의 함선 중 생존함인 구축함 USS 히어만과 남은 태피 3 함선들이 분전과 다른 아군 부대의 항공지원에 힘입어 살아남았다. 그야말로 생즉사 사즉생(生則死 死則生)을 제대로 보여준 셈.

4.7. 1차 다호 작전


연합함대는 5번째 양동함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1차 다호 작전은 레이테 만 해전과 병행해서 실시된 작전으로, 원래 구리다 함대에 소속될 예정이었던 아오바, 키누, 우라나미의 3척으로 구성된 16전대가 이 작전의 주역이 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수송선단을 호위하여 레이테 섬의 오르목 만[81]에 진입, 레이테 섬에 증원병력을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구리다 함대가 레이테 섬의 미군 상륙함대를 괴멸시키면, 16전대가 상륙시킨 일본군 증원병력이 레이테 섬의 일본군과 함께 미군을 몰아낼 예정이었다.
그러나 10월 23일, 기함 아오바는 미군 잠수함 브림의 어뢰 공격을 받아 2번 기관실이 피격되면서 대파되었고, 16전대 사령관 사콘조 제독은 경순양함 키누를 새 기함으로 삼은 후 아오바를 마닐라로 회항시킨다. 아오바는 대파되어 6노트밖에 못 내는데도 불구하고, 살아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인 24일, 16전대는 시부얀 해전에 휘말렸고, 38.3 임무전대의 에식스와 렉싱턴이 공습을 해온다. 그 결과 지근탄을 맞아 키누에서 74명, 우라나미에서 25명의 승조원이 사망한다.
그러나 16전대는 3함대가 북상한 사이에 기어코 키누, 구축함 우라나미, 수송선 5척을 거느리고 레이테 섬으로 진입하여, 사마르 해전이 벌어진 25일에 무사히 병력을 양륙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임무를 끝내고 귀환하던 중인 10월 26일, 사마르 해전의 복수를 위해 벼르던 77.4 임무전대의 호위항공모함들로부터 공습을 당한다. 키누와 우라나미, 수송선 2척이 침몰했고 사콘조 제독은 수송선 1척에 타고 귀환했다. 그러나 남은 수송선 2척은 별개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격침당했다.
그러나 16전대의 고생은 헛수고로 돌아갔다. 레이테 섬의 미군 상륙함대를 괴멸시켜야 할 구리다 함대가 임무를 포기하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리다 함대는 16전대가 괴멸된 덕에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살아남았는데, 미 해군 함재기들 중 일부가 16전대를 공격하느라 전력이 분산된 덕에 구리다 함대에게 가해진 압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해인 1945년 7월 15일, 일본의 패망을 앞두고 미 해군의 잠수함 구조함 챈트클리어(Chanticleer)가 격침된 경순양함 키누에 관심을 보인다. 키누는 좌현 90도로 누운 상태였고, 함교 바로 뒤의 갑판에는 큰 구멍이 나 있었다. 키누의 잔해는 잠수부들이 침입하기에 최적의 상태로 놓여있었고, 미 해군의 잠수부들은 별다른 손상을 입지 않은 함교로부터 다수의 기밀문서와 4개의 암호기계를 챙겨 돌아간다.

5. 결과


일본군은 이 해전에서 동원할 수 있는 함선이란 함선은 다 동원해서 미군을 공격했으나 미군은 이미 압도적인 물량으로 인해 더 이상 일본군이 상대하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어있었다. 특히 미군은 압도적인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반면에 일본군은 그렇지 못해서, 함포사격시대를 방불케 하는 구시대적 함대결전으로 밀어붙여야 했다. 그러나 그 마지막 도박조차 실패했고, 그 뒤의 일본군에겐 더 이상 미군을 막아낼 여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일본군의 도박이 성공해서 구리다 함대가 레이테 만을 성공적으로 공격했더라도 일본 해군이 모든 것을 날려먹는다는 결과에는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의 공격 목표는 미 해군이 아니라 레이테 만의 상륙부대였고, 해상에서의 교전 역시 미 해군 함대를 격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이미 일본 연합함대는 모든 가용 전력을 동원해도 미 해군 격멸은 고사하고 미군 상륙부대에 포격 한 번 하기에도 모자란 상태였던 것이다.[82][83] 홀시 역시 이런 점을 생각해서 해협 방비를 7함대에 맡겨도 된다고 봤었다. 이것은 니미츠가 내린 기본 명령에 위반되며, 홀시는 이 일로 평생까임권을 획득하여 두고두고 씹히게 된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인명경시사상을 상징하는 카미카제도 이 전투에서 처음 등장했다.[84] 사실 이건 그 정도로 일본군의 항공전력이 미군보다 열세였기 때문에 나온 고육지책이었던 셈이지만, 도덕적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전략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도저히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후 태평양 전선에서는 이런 광경이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오랜 세월동안 일본 해군을 지배하던 함대결전사상이 헛소리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 해전이다. 일본은 미국과 역사상 최대규모로 미증유의 대결전을 치렀고, 그 해전에서 무려 항공모함 4척, 전함 3척, 순양함 10척이 침몰하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전쟁수행의지를 꺾지 않았다.

6. 해전 이후의 이야기들



6.1. The world wonders


1차적으로는 니미츠가 홀시에게 전달한 내용과 다르게 문건이 전달되었으므로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홀시가 당시에 내뱉은 욕설이 뭐였냐는 질문을 받고 얼굴이 시뻘개지면서 스스로의 행동을 수치스러워했던 점과, 주변인들도 저주했다(curse)라고 에둘러 말한 것으로 보아 니미츠와 홀시 사이에 있었던 오해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뿐이다. 이는 최고 지휘관 사이를 심각하게 이간질한 것에 해당했으니 당연히 사후 조사가 들어갔다.
앞뒤의 더미 문장을 넣은 태평양 함대 사령부의 통신장교는 '그냥 생각나서 그랬다(popped into my head).'라고 진술한다.
함대를 점검한 결과, 모든 함이 니미츠가 의도한대로 통신문을 받아서 전달했다. 오로지 홀시의 기함인 아이오와급 전함 뉴저지의 통신요원들만이 뒷부분의 더미 문장을 함께 전달했다. 사령부는 뉴저지의 통신장교들을 심문했고, 아래와 같은 답변을 들었다.

but the trailing phrase looked appropriate and he seems to have thought it was intended and so left it in before passing it on to Halsey

하지만, 뒤쪽의 (더미) 문장은 적절해보였고, (통신장교가 생각하기에) 의도된 것이었고, 그래서 홀시 제독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에 남겼다.

이제 잊혀진 앞쪽 더미 문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TURKEY TROTS[85]

TO WATER

칠면조가 물가로 뛰어간다.

당시의 사마르 해전을 생각해보면, 뒤의 더미 문장은 물론, 앞의 더미 문장까지도 홀시의 행동을 비꼬려는 의사가 있는 것으로도 해석이 된다. 하지만, 홀시 제독에게는 앞뒤의 더미 문장이 전달되지 않을 것이므로, 비겁한 이들이 제독을 조롱하는 문장을 읽지 못할 것이었다. 뉴저지의 통신 요원들은 그 사실에 분개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사령부의 통신장교가 어떤 생각으로 저 문장들을 넣었는지는 알 길이 없는 것도 사실이며, 뉴저지의 통신 요원들이 벌인 일은 결과적으로 홀시와 '''죄없는''' 니미츠 사이의 오해와 갈등을 유발했다.
또한 뉴저지의 통신요원들은 이미 전술했듯이, 산 베르난디노 해협의 스펠링도 틀렸다. 그래서 통신요원들이 아직 미숙했다고 평가할 여지도 있었다.
해당 통신장교들은 이후 직위에서 잘렸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애초에 The world wonders 사건의 레퍼런스는 홀시의 자서전 하나다. 단지 그것이 다른 배의 통신 담당자들의 증언으로 너무 많이 교차 검증돼서 실제 있었던 사실로만 인정될 뿐.

6.2. 홀시의 북상 결정에 대한 논란


홀시의 결정에 대한 논란은 생각보다는 복잡하고, 또 팽팽한 편이다.
일단, 홀시의 결정으로 인해 7함대는 위기에 처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당사자인 클립튼 스프레이그 소장과 킨케이드는 공적인 보고서에서 조차 홀시의 행동에 대해 신랄한 평을 남긴다. 킨케이드는 전후에는 홀시와 사이가 크게 벌어진다.

In the absence of any information that this exit was no longer blocked, it was logical to assume that our northern flank could not be exposed without ample warning.

더 이상 출구가 막혀있지 않다는 정보가 없다면, 우리 함대의 북쪽 측면이 충분한 경고 없이 (적에게) 노출될리가 없다고 간주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해설 :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방어하는 부대가 없다는 것을 몰랐기에, 7함대의 북쪽으로 적이 올 줄 몰랐다.

클립튼 스프레이그 제독이 후일에 회고함.

38.1 임무전대의 매케인 제독 역시 홀시의 결정이 옳지 않다고 비판했고, 나중에는 홀시를 저격하며 발목을 잡는다.
34 임무부대의 윌리스 리 제독 역시 '전함에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는 불필요한 논평을 했는데, 일반적으로는 34 임무부대가 구리다 함대를 저지하는 것이 사마르 해전 당시의 전함의 의무였고, 그에 따른 피해는 마땅히 감수해야했으나, 그에 응하지 못했다는 불만을 에둘러 말한 것으로 여겨진다.

No battle damage was incurred nor inflicted on the enemy by vessels while operating as Task Force Thirty-Four.

34 임무부대로 활동하면서, 어떠한 전투 손실도 발생하지 않았고, 적의 수상함으로부터 타격을 받지도 않았다.

34 임무부대의 보고서 : 1944년 10월 26일 ~ 11월 3일.#

여기까지는 홀시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당대의 제독들이 남긴 의견이다.
이제 이 논란을 해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의 관점으로 바라보자면, 가장 잘 알려진 다수설은 미 해군에 복무했던 하버드 대학 교수 새뮤얼 엘리엇 모리슨이 1947년부터 1962년까지 저술한 역작,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의 관점이다. 이 책에 따르면, 킨케이드, 니미츠는 홀시의 예상치 못한 전장 이탈에 당황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었므로, 홀시는 '''북상하지 말고 제 자리를 지켜야 했으며''', 아침이 되면 구리다 함대와 교전을 해서 저지했어야 했다. 사마르 해전은 미군에게 행운이 따랐으나, 만에 하나 77.4함대와 77.2함대가 뚫리고 방어선이 무너졌을 경우 상륙병력은 적의 공격에 노출되었을 것이며, 이는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올 것이었다.
그리고 모리슨은 오자와가 홀시를 낚았다고 해석했다.[86] 오자와 지사부로가 홀시를 낚았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일본의 전쟁사 연구자들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모리슨의 저작은 권위가 있었고, 일본에서도 비슷한 시선으로 바라보므로, 한국에도 이 시선은 자연스럽게 수입된다.
하지만 해당 저술에서 나오지 않은 사실들, 해석들이 5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하게 추가되었고, 이제 아래와 같이 이에 도전하는 소수설들이 출현한다.

우선, 홀시가 북상하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만 바라보자.
우선 홀시의 지위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3함대 제독은 태평양함대 사령관보다 격이 낮긴 하나, 3함대는 자신의 재량에 따라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제대 단위였다. 거기에 더하여, 홀시와 스프루언스, 킨케이드같은 최상급 지휘관들은 어니스트 킹 제독이나 체스터 니미츠 제독에게 태평양 전쟁의 전략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87] 홀시가 이 지위를 이용하여 북상을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북상을 하기 위해 전략적인 내용들을 고려할만한 자리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런 생각을 하는게 주제넘은 행동도 아니었다.
그럼 실제로 전략적으로 고려한 내용들이 무엇인고 하니, 홀시는 항공모함이 치명적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 배들을 전부 배제하는 것이 태평양 함대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일단 적 항공모함 세력을 일소하면, 미 일간의 균형추는 미국으로 완전히 넘어갈 것이고, 일본 해군의 전술적인 승리는 미 해군에게 의미있는 역습 내지는 치명적인 일격은 되지 못할 것이었다. 이 생각은 실제로 태평양 함대 사령부에서 지배적이었으며, 과달카날 해전을 시작으로 그 이후로 이어진 일련의 해전을 통해서 엄연한 사실로 증명되었다.
모리슨은 이미 이 주장에 대해 비판한바 있는데, '''오자와 함대는 이미 껍데기였다'''는 주장이 모리슨의 비판이다. 이것은 사실이긴 하나, 태평양 함대는 알 도리가 없었다. 홀시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오답이긴 했으나, 바로 그 순간 북상을 결정한 것이 잘못된 것인가? 모리슨의 주장은 결과론인데다가 전후에 알게된 지적인 우위를 이용한 비판이고, 1944년 10월의 홀시에게 그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부당할 수 있다.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 항공대가 사실상 재기 불가능할 타격을 입었고 미군도 전투 후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고 부를 정도로 일본 해군 항공대에 큰 타격을 입혔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레이테 만 해전 당시 일본 항모가 껍데기인 것을 진작 알았을 수도 있지 않냐고 반론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홀시, 리, 메케인, 미처 제독같은 제독들과 미군 참모들도 상술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홀시에게 이거 깡통으로 하는 낚시 아닐까요? 하고 건의를 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 역시 항모 자체가 실존하고 있고(그것도 진주만을 때리러 온 철천지 원수) 일본이 그 사이에 본토에서 훈련시킨 다른 해군 항공대를 채워왔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었다.(실제로 미국은 일본의 완전 항복 전까지 승기를 잡았다는 확신은 해도 방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홀시에게의 건의 중 확신에 찬 건의는 하나도 없고 모두 추측성 건의였다.[88]
두 번째로는, 필리핀 해 해전에서 레이몬드 스프루언스는 대공 요격에 전념하여, 공격의 근원지인 항공모함을 발본색원하지 않은 것으로 많은 비판을 받은 상황을 든다. 스프루언스는 비판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이 통쾌하겠지만, 위험을 감수할 순 없었다.'라고 해명한다. 스프루언스는 어니스트 킹 제독과 체스터 니미츠 제독으로부터도 사적인 자리에서 판단이 옳았다는 격려를 받았다. 자신을 저지한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울화통을 터트린 마크 미처 제독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석에서 참모장 알레이 버크 대령과 식사를 하며 '뒤돌이켜보니 스프루언스 제독이 옳은 판단을 한 것 같다.'고 자신의 돌출 행동을 후회했다.
하지만 이들은 공개석상에서 언급하지 않았으며, 홀시는 이런 비난, 즉 사령부를 뒤덮다 못해 제독들에게까지 압박을 주는 그 시선들을 의식할 수 밖에 없었다. 사령부에서, 제독들은 참모들과 다른 제독들의 의견을 경청해야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자기 확신이 있다 한들 그렇게까지 다수의 비판에 몰리면, 스프루언스 제독같이 돌부처 같은 사람조차도 자신이 독선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해명을 하기 위해서라도 궁색한 변명이나마 내놓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두번째 지적에 따르면, 홀시의 북상은 홀시의 실수가 아니라 태평양 함대 사령부의 집단적 의사 결정이 잘못된 것이며, 문제의 원인은 니미츠가 스프루언스의 옳은 결정을 옹호해주지 않는 대신, 사령부 전체의 불화를 가라앉히는 선택을 한 것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89]
세 번째로는 왜 이 전쟁을 시작했느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본이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진주만 공습이었다. 미 태평양 함대의 베테랑들은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진주만 공습에서 지인을 잃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새로 들어온 신병들도 전부 진주만 공습에 분개해서 들어왔다. 즈이카쿠를 격침시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태평양 전쟁 그 자체가 미 해군 장병에게 있어서는 감정의 문제였고, 남들이 비판을 하던 말던 간에 그들도 기꺼이 인정했다. 둘리틀 특공대도 그런 면이 있었고, 전함 웨스트 버지니아는 순전히 감정의 문제 때문에 건져내서 대개장한 것이었다.
거기서 한발 물러선채로 거기에 동참하지 않고 즈이카쿠를 돌려보낸[90] 스프루언스는 함대 장병은 물론 미국 언론으로부터도 또 욕을 먹었다.[91][92] 홀시는 그것을 의식한 것은 아니었고, 되려 거기에 동감하는 축에 속했다. 그리고 홀시와 의견을 같이한 사람들이 태평양 함대 장병의 절대 다수였다.
심지어는 사마르 해전 이후, 구출된 태피 3의 장병들은 홀시가 자신들을 버렸다는 사실에 분개했으나, '''즈이카쿠를 잡으러갔고, 격침시켰다'''는 설명을 듣고는 홀시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전쟁을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부대의 사기가 중요하고, 사기와 감정은 떼어놓을 수 없으므로, 즈이카쿠를 격침하는 선택은 태평양 함대 수뇌부가 언젠가는 해야할 선택이었다. 레이테 만 해전 이후 일본 해군의 주력함은 거진 틀여박혀 있었으므로, 즈이카쿠의 격침은 이 해전이 마지막 기회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1944년 이후, 태평양 함대는 카미카제로 피해를 입으면서, 함대 장병들의 사기를 유지하지 못해 많은 곤란을 겪은 것도 사실이고, 그 결과 프린스 오브 웨일즈리펄스의 보복을 하기 원했던 영국 태평양 함대의 참전을 허락해야 했다.
네 번째는 홀시가 의도하지 않은 것이지만, 카미카제 문제다. 일본의 항공모함을 모조리 일소하면서, 일본의 자살 항공기가 날아올 방향은 뻔하게 되었고, 함대 방공망의 배치도 단순한 원형진이 아니라 육지쪽을 더 촘촘하게 구성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미카제는 평범하게 돌입하는 뇌격기, 급강하 폭격기보다 더 막기 어려웠다. 그런데 만일, 적에게 경항공모함이 남아있었다면?... 네번째 지적은 상상의 영역이긴 하나, 첫번째 지적과 맥이 닿아있다. 일본의 항공모함 세력은 몰락하였으나, 완벽하게 파멸한 그 해전에서 써먹을 구석이 등장한 아이러니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6.3.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대한 논란


어찌되었든 '''북상을 할 수도 있지'''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그 다음으로 나오는 논쟁거리가 이것이다.
홀시가 처음 밝힌 구상에서는 34 임무부대로 틀어막고, 38.4 임무전대가 항공지원을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문제는 구리다 함대가 새벽 3시에 해협을 통과했다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구리다 함대와 34 임무부대의 포격전은 아무리 늦어도 새벽 3시 이전에 시작되므로, 당일 항공 지원이 시작된 아침 6시 30분까지는 최소 3시간 30분 동안 구리다 함대가 포격전을 벌일 기회가 있다. 3시간 반도 사실 많이 양보한 것이며, 상식적으로 4~5시간 동안 야간 포격전을 벌인다는 이야기인데, 이쯤되면 대부분의 해전은 결말이 나온다.
그 말인즉슨, 38.4 임무전대를 남겨두고 가봐야 잉여가 되며, 홀시는 차라리 모든 항공모함을 이끌고 오자와를 치러가는게 이득이 된다. 게다가 전후에 홀시는 실제로 같은 취지의 발언, 즉 오자와를 때려잡으려면 모든 항공모함을 끌고 가야했다는 변명을 해서 불에 기름을 붓게 된다.
어쨌든, 그렇게 해전이 전개된다면, 미 해군의 고속 전함은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미 해군이 사마르 해전이 벌어지기 전에, 최선의 방식으로 구리다 함대를 저지하려면, 항공 우세를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개방하고 구리다 함대를 아침 항공 작전이 가능해지는 새벽 6시 반까지 자유롭게 풀어주며 감시한 뒤 공습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 된다.
미군의 시나리오는 이렇게 구리다 함대를 가지고 놀 정도로 전지전능하게 흘러가기는 커녕 그 근처에도 오질 못했다. 그런데 태피 3이 일본 함대의 공격에 휘말린 것을 제외하면, 구리다 함대는 결과론적으로 별 차이가 없는 시나리오로 미 7함대의 반격을 받은 것이다. 이는, 사마르 해전이 거기에 휘말려든 개개인들을 외면하고 큰 그림에서 바라볼때, 미 해군에게 있어 과연 최악의 결과였는가? 라는 의문까지 이어진다.
거기에 덧붙여서, 홀시가 3개의 항모 전단을 데리고 올라가겠다고 했을때, 38.1 임무전대를 즈이카쿠를 잡는데 데려가지 않겠다고 의사표명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홀시가 구리다 함대를 처음으로 발견하고 매케인 제독에게 명령한 시점에 즉시 출항했다면, 38.1 임무전대는 태피 3이 구리다 함대와 조우할 시점에, 매케인 제독의 항명과는 별도로 일본 함대를 즉시 공습할 수 있는 최상의 위치에 전개하게 되고, 구리다 함대는 항공기가 날아오는 북쪽 방향의 산 베르난디노 해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하를 강요받아 77.2 임무전대와 반드시 교전을 해야 했다.
홀시가 이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매케인 제독은 홀시의 명령을 꽤 어긴 편이었고, 그중 하나 둘만 준수했어도 사마르 해전의 구도가 상당히 달라진다. 그렇다면 잘못한 사람이 홀시 만이 되는가?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어떻게 틀어막냐에 대한 논의는 오로지 IF 떡밥 내지는 말장난으로 가득하며, 위에 소개한 내용은 그중 일부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지만,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고를 칼같이 단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라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 더 언급하자면, 홀시는 구리다 함대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했으므로, 이곳을 아예 막지 않았다고 했다. 몇가지 변수가 바뀜으로서 결과가 바뀔순 있겠지만, 홀시 본인이 오판한 사실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홀씨가 평생까임권을 받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불필요한 리스크를 만들었다는 것 때문이다. 설사 일본군 오자와 함대를 때려잡는게 괜찮은 판단이었다 해도, 자신이 방어하던 곳을 두고 전 전력을 이끌고 북상한다면 최소한 그걸 명확하게 전파했어야 했다. 홀시가 보낸 전문은 누가봐도 1개 전단은 놔두고 간다는 의미로 보이지, 1개 전단은 보급하러 가서 없으니 가용한 3개 전단 모두를 이끌고 간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일본 항공모함 함대 격멸보다 상륙부대 보호가 우선이라는 니미츠의 기본 명령이 있으면 더더욱.) 또한 그렇게 모든 전력을 이끌고 간다면 산 베르난디노 해협 방어는 누가 할 것인지 논의가 있었어야 했다. 왜냐하면 일본군의 움직임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일본군 구리다 함대가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노리고 진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홀시는 이미 일본군 구리다 함대는 퇴각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겠지만, 어쨌든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이고 고위 지휘관의 잘못된 판단 하나가 전쟁의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치는 생각하면 이는 충분히 까일 요소가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하다. 이런 저런 홀시 옹호가 나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구리다 함대에게 산 베르난디노 해협이 뻥 뚤렸음에도 태피3 의 기적적인 분전으로 그나마 피해가 적었기 때문일 뿐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IF 식의 얘기를 한다면, 만약 그 자리에 태피3 가 아닌 정규함모와 최신전함이 모여 있다가 구리다 함대의 기습을 받고 개박살이 났다면? 만약 구리다 함대가 태피3 를 무시하고 곧바로 레이테만으로 진입해서 미군 상륙부대에게 멘붕을 선사했다면? 그런 가정이 너무 비현실적이라면, 반대로 홀시가 산 베르난디노 해협 방어 임무를 7함대에게 이관할 수 있게 조치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7함대에서 정찰기나 어뢰정 띄워서 감시했을 거고 구리다 함대는 일찍 발각되어 태피1,2,3 에서 띄운 항공기에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을 거라는 것이 너무 지나친 추측일까?

6.4. 태풍 코브라


레이테만 해전 이후, 12월이 되었지만, 홀시와 3함대는 필리핀 탈환전에서 항공 지원을 계속한다. 하지만 함대에 MIT 출신의 기상학자를 예보관으로 두고 있었음에도, 태풍이 다가오는 해역에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함대의 급유를 진행했다가 큰 비전투손실을 보았다. 그 결과 구축함 3척이 침몰, 다수의 함선이 손상, 함재기 146대가 손·망실, 약 79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인명피해까지 있었다. 코브라(태풍)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 피해 규모가 그 당시까지 태평양에서 벌어졌던 주요 전투에서 입은 개별 전투손실 및 인명피해와 맞먹거나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홀시는 사마르 해전, 태풍 코브라, 그다음 해에 코브라와 달리 함선 침몰 같은 피해는 없었지만, 태풍 코니에 3함대가 또 비전투손실을 보게 되어, 자신의 군 생활에 흠집으로 남게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이에 대한 합리화와 반론이 있었다고 한다.

6.5. 미 해군의 사마르 해전에 대한 논공행상과 이면의 어둠


태피 3의 사령관 스프레이그 제독은 사마르 해전에서의 전공으로 해군십자훈장을 수여받았으며 미 해군이 물량만으로 전쟁에 이긴 게 아니라는 산 증인이 되었다. 또한 자발적으로 가장 먼저 돌격하고 격침 되기 전까지 지휘하다가 전사한 USS 존스턴의 함장 어니스트 에반스는 미군 최고 훈장인 명예 훈장이 추서됐다. 사실상 혼자서 일본의 결전함대를 막아낸 USS 히어만의 함장 아모스 T. 해서웨이는 해군십자훈장을 수여받는데 그쳤지만[93] 히어만은 미국과 필리핀 양국으로부터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으며, 어니스트 에반스와 달리 살아서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광에도 그림자가 있었으니, 태피3의 생존자들은 사마르 해전 이후 이틀이 지난 10월 27일이 지나서야 구출받았다. 중간에 항공기가 이들을 발견하고 좌표를 보냈으나, 틀린 좌표였다. 상당수의 생존자들이 탈진, 갈증과 상어떼의 공격으로 사망한다. 마침내 78.1.2 임무분대의 상륙함(LCI)가 이들을 발견해서 건져낸다. 그나마도 아래의 일화를 보듯이, 이들을 찾아온게 아니라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배가 오는걸 봤는데, 우리 주변을 선회하기 시작했어요. 함교에 어떤 사내가 서서 메가폰을 들고 소리를 질렀죠.

''너희는 누구냐? 너희는 누구냐?''

우리는 다함께 ''사무엘 B 로버츠요!'' 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배는 여전히 선회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 사람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다시 묻기를,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게 누구냐?'' 라고 물었죠.

우리는 다함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라고 외쳤죠.

그러자 배의 엔진이 멈추고, 배 옆에 우리가 기어올라갈 수 있는 그물이 펼쳐졌습니다.

우린 그렇게 구출되었죠.

설리번 5형제에 이어, 미 해군은 또다시 물에 빠진 전우들을 구출하는 임무를 망각한다. 원래대로라면 이것을 바로잡을 군기반장 노릇을 하는 사람이 홀시 제독이었으나, 익히 짐작할 수 있듯이 홀시는 그럴 처지가 되지 못했다.
태평양 함대는 전쟁 이후로 질적, 양적으로 엄청나게 확대되었으나, 그 이면에는 대부분의 징병제 군대가 그렇듯이 리더십과 책임감이 부족한 장병들이 적지 않게 유입되는 문제를 겪었다. 홀시의 입지가 좁아진 이후에는 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이 문제는 결국 눈덩이처럼 커졌고, 그 화룡점정으로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이 이끄는 '''5함대의 기함'''이었다가. 카미카제 공격을 받은 이후 복귀하여 '''핵무기 운반 임무'''를 맡은 태평양 함대의 엘리트였던 포틀랜드급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가 격침 이후 구조 받지 못하는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이 터진다. 태평양 함대의 지휘관인 니미츠 제독과 인디애나폴리스를 기함으로 삼았던 스프루언스 제독은, 목매달 책임자를 갈구하는 여론 앞에서 전전긍긍해야했고, 함장 맥베이 대령의 무죄를 주장하지 못한채 형집행을 사면하는데 그치게 된다.

6.6. 미 전함부대 VS 구리다 함대


이 VS 놀이는 주로 일본에서 즐겨 이야기하는 떡밥이다. 여기서 구리다 함대가 이길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구리다 턴에 대한 평가를 바꾸기 때문인 점도 있고, 야마토, 나가토가 미국 전함과 교전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인 점도 인기있는 떡밥인 이유이다. 이 주제의 미국 버전은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라 봐도 좋은데, 해협을 막는 주제는 전함간 VS 놀이와는 달리 인터넷 상에서는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다.
구리다와 교전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미군의 전함부대는 총 3개였으며, 각각의 함대가 보유한 전함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구 34 임무부대
3척의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1척의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77.2 임무전대
3척의 개장된 표준형 전함 : 콜로라도급 전함 웨스트 버지니아, 테네시급 전함 2척
3척의 표준형 전함 : 콜로라도급 전함 메릴랜드, 뉴멕시코급 전함 1척, 펜실베이니아급 전함 1척
34.5 임무전대
2척의 아이오와급 전함
구 34 임무부대는 산 베르난디노 해협에서 야간전을 벌이게 되며, 77.2 임무전대는 레이테만으로 돌입하면 오전에 교전하게 되고, 34.5 임무전대는 태피 3에 대한 추격을 더 지속했을때 오후에 교전하게 된다.
구 34 임무부대와 34.5 임무전대는 16인치 SHS를 운용하는 전함들이므로 야마토와도 피해를 주고받을 수 있다. 77.2 임무전대는 사정이 좀 다른데, 유이하게 16인치 포탄을 운용하던 콜로라도급 전함들 조차도, 전함의 주포가 야마토의 주장갑을 쉽게 관통할 수 없었다. 테네시급 전함 캘리포니아는 수리가오 해협에서 포격을 하다가 포탑의 양탄기가 고장난 것이 있었다. 올덴도르프 제독의 함대는 수리가오 해협에서 교전한 탓에 탄약과 어뢰의 재고도 가장 적었으나, 교전에 필요한 양만큼은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근처에 탄약 보급함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 외에는, 미 해군의 전함들은 야마토를 제외한 모든 일본 배들에게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었고, 개장받지 못한 표준형 전함 3척을 제외하고는 일본 전함들보다 먼저 레이더 관제 사격을 개시할 수 있었다. 77.2는 호위항공모함 2개 전단(태피 1과 4)의 항공지원도 받을 수 있고, 34.5는 34.1 임무전대의 에식스급 항공모함의 항공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 이후는 개인의 상상의 영역이라 볼 수 있겠지만, 구 34 임무부대는 초반 뇌격전과 야간 레이더 사격으로 판도가 결정될 것이고, 일본 함대는 지나가는 선택을 하던, 승패와 무관하게 도망가는 선택을 하던 간에 3함대 휘하 '''4개 항모 전단의 보복 공습'''을 받을 것이다.
77.2는 숫적으로 우세한 미군 전함이 질적으로 압도하는 순양함, 구축함들의 포격과 뇌격 및 태피 1, 4의 항공 지원, 그리고 미군 전함의 더 뛰어난 전자 장비를 이용하여, 일본 해군의 수뢰전 시도와 그 이후에 힘으로 밀고 들어올 야마토와 나가토를 저지할 수 있느냐 여부가 될 것이다.
34.5와 구리다가 교전하는 것은, 구리다 함대가 보급을 마치고 돌아와서 전개한 34.1 임무전대의 공습을 버티면서 필리핀 해에서 숨바꼭질을 한다는 뜻이므로 가능성도 낮고, 공습의 주 목표는 십중팔구 나가토와 야마토가 될 것이다.
실제 보듯이 77.2가 제일 승산이 있는 상대로 보이므로, 일본에서 야마토로 VS 놀이를 할때는 '''구리다 턴을 하지 않고 레이테 만으로 돌입했다.'''는 전제를 즐겨쓰게 된다.

6.7. 오자와 지사부로가 홀시를 낚았는가에 대한 논의


정리하자면, 홀시를 낚은 것은 오자와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함대를 거기에 배치한 일본 해군의 지휘부였다. 일본해군병학교 72기 홈페이지 나니와 회에 게재된 증언에 의하면 오자와 함대에는 작전 개시 때부터 '''전멸을 각오하고 적 기동부대를 북방으로 유인해 구리다 함대에 대한 공습을 경감시켜라'''라는 명령이 내려와 있었다. 출처
이는 오자와 스스로도 레이테 만 해전에 대해 전후 미군의 심문을 받을때, 동일하게 답변한바 있다.출처
Q. How, principally were you to support KURITA's mission; by delivering an air attack with your remaining planes, or by acting as a target, or how?
A. Exactly those two ways, sending out what planes I had and also to be a target for your attack. A decoy, that
was our first primary mission, to act as a decoy. My fleet could not very well give the direct protection to KURITA's force because we were very weak, so I tried to attack as many American carriers as possible and to be the decoy or target for your attack. I tried to let KURITA's fleet have little attack from you. The main mission was all sacrifice. An attack with a very weak force of planes comes under the heading of sacrifice of planes and ships.
심문자 : 구리다 함대의 작전을 지원하는 주 방식은 무엇이었는가. 남은 항공기로 공습을 하는 것이었나, 혹은 표적이 되는 것? 아니면 다른 것이 있었나?
오자와 : 엄밀하게 말하자면 두 가지였고, 내가 가진 함재기를 날려보내는 것과 미군의 공격 목표가 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미끼가 되는 것이 더 우선적인 임무였다. 우리 함대는 전투력이 약해서 구리다 함대의 방공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고, 그래서 가급적 많은 미군 항공 모함을 공격하면서, 미군의 공격을 뒤집어쓰려했다. 나는 조금이라도 구리다 함대가 미군의 공격을 덜 받게 하려 했다. 미끼가 되는 임무는 함대를 희생시키라는 뜻이었다. 미약한 항공세력으로 공격한 것도, 배와 비행기를 희생시키는 임무의 일부였다.
(이후 미군 심문자는 오자와에게 카미카제에 대해 캐묻고, 오자와는 하나도 몰랐다고 답변한다.)
Q. Who was responsible for this idea of using the fleet as a lure; was that your plan or Admiral TOYODA's?
A. Basically it was TOYODA's idea.
심문자 : 함대를 미끼로 쓰는건 누구의 아이디어였나. 당신의 계획인가 아니면 도요타 제독인가?
오자와 : 기본적으로 '''도요타의 생각이었다.'''
Q. What made you feel that you could successfully lure our Task Force in this fashion? The only previous precedent was the battle of the MARIANAS, and in the MARIANAS our Task Force stayed very close to the Invasion Force and did not come forward to attack Japanese forces at an early time; therefore, what made you think you could successfully lure us?
A. I had not much confidence in being a lure, but there was no other way than to try.
심문자 : 미군 임무부대를 꾀어내는데 성공했다는 확신은 어떻게 할 수 있었나. 선례는 마리아나 해의 교전뿐이었고, 마리아나에서는 임무부대가 상륙부대 근처에 머무르며 일본 함대를 향해 한번도 이동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미군을 유혹하는데 성공했다고 알아챌 수 있었나.
오자와 : 난 미끼가 되는데는 별 자신이 없었고, 그냥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6.8. 노출된 야마토급 전함


이 해전에서 야마토급 전함 야마토와 무사시가 촬영된다. 미 해군은 일본 해군의 다른 배들과 촬영된 사진을 바탕으로 야마토급의 크기와 배수량을 추론해냈으며[94], 일본의 신전함이 정보부의 16인치일 것이라는 예상을 뛰어넘은 18인치급 주포를 장착한 것을 알게 된다.
해전 이후 무사시가 격침된 것을 알았으므로, 미국 해군에게 있어 야마토가 부담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다만 사후에 해당 전함의 존재를 알게된 전함파 제독들이, 이에 가장 확실하게 대항할 수 있는 탈조약형 고속전함인 아이오와급이나 사우스다코타급을 전부 이끌고 북상한 항공파 제독 홀시의 결정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미 해군 내부에서는 이 전함을 항공기로 확실하게 끝장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소모적인 갈등이 생긴다. 뇌격으로 처리해야 했던 전함이라면 차라리 잠수함에게 맡기는게 낫지 않을까? 항공 주특기 장교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폄하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이후 오키나와 해상에서 일본 해군의 야마토 특공을 맞딱뜨리게 되자, 마크 미처 제독과 알레이 버크는 자신들이 먼저 항공세력으로 공격하겠다고 주장하여 스프루언스 제독의 동의를 얻어낸다.[95] 하지만 스프루언스는 5함대 전체로부터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사우스다코타, 인디애나, 메사추세츠와 아이오와급 전함 뉴저지, 미주리, 위스콘신, 도합 총 6척의 고속전함을 전부 모으고, 총 11척의 순양함 중에서 알래스카급 대형순양함 알래스카와 괌을 포함한 탈조약급 볼티모어급 중순양함, 클리블랜드급 경순양함 등의 7척의 순양함, 그리고 총 54척의 구축함 중에서 21척의 구축함을 동원한 함대결전급 전력을 집결시켜 항공 작전이 실패했을때 수상함 교전을 벌일 준비를 한다.
결과적으로 야마토는 5함대의 고속전함들이 기다리는 오키나와 해상까지 가지 못했고, 규슈 남쪽 100킬로미터 해상에서 굉침된다. 수상함, 잠수함, 항공의 세 주특기들간의 자존심 경쟁 끝에 트로피를 거머쥔 것은 항공이었다. 하지만 미 해군 항공 주특기 장교들의 투쟁은 이제 막 시작이었고, 제독들의 반란으로 이어진다.

6.9. 일본군


1차 다호 작전은 성공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1차라는 이름이 붙은데서 알 수 있듯이, 그 이후로 다호 작전이 계속 입안되어 실행된다.
구리다 제독은 오판으로 일찌감치 철수한 것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그 때 너님이 상륙부대 있는 곳까지 처들어갔으면 더글러스 맥아더를 고기밥으로 만들 수 있었을 거임!"이란 이야기를 들으며 두고두고 씹혔다. 이게 오판인지는 아래에 있는 '구리다 턴은 올바른가?' 항목을 참조하자.
오자와 지사부로는 성공적으로 미끼 작전을 이끈 후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되지만, 그가 이끌 함대가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함대 없는 사령관으로 패전을 맞게 된다.

7. 양측의 피해


이 전투의 의의는 홀시가 낚였느냐, 구리다가 오판을 했느냐 정도가 아니다. 이 전투로 인해서 일본군은 해상전력이 사실상 와해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입은 손실은 아래와 같다.
반면 미군의 손실은 다음과 같다.
  • 인디펜던스급 경항모 프린스턴
  • 카사블랑카급 호위항모 갬비어 베이, 세인트 로(카미카제 특공으로 인한 격침)
  • 플래처급 구축함 호엘, 존스턴
  • 존 C. 버틀러급 호위구축함 새뮤얼 B. 로버츠
일본해군은 그 동안 누적된 피해와 더불어 이 해전으로 인해 받은 치명상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고, 이후 제대로 된 해상 작전을 벌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전함 6척, 경/중순양함 10척을 포함한 일본의 일부 수상함들은 미군 지휘관 홀시의 오판에 힘입어 격침되지 않고 퇴각하는데 성공했으나,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의 수상함 전력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일본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도요다 소에무 제독이 전후 미군 조사관에게 한 다음의 진술에서 드러난다.
만일 일본이 필리핀을 상실하게 되면, 일본 본토와 남방의 자원지대는 완전히 분리될 수 밖에 없다. 이 경우, 함대가 본국에 있는 경우 연료를 공급받을 수 없고, 남방 해역에 있을 경우 본토로부터 탄약 및 기타 보급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필리핀을 상실하면서 함대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이 전투 이후 살아남은 일본 함정 대다수는 항구에 정박해 있는 상태에서 차례차례 미군의 공격으로 파괴된다. [96] 또한 미군은 더 이상 일본 해군의 활동을 두려워할 필요 없이 자유롭게 작전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 전투는 미군의 필리핀 상륙을 막지 못한데다,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니 '''전략적(미군의 필리핀 탈환을 저지)으로도 전술적(레이테 만에 상륙한 맥아더의 6군에게 함포사격) 으로도 일본군의 완전한 참패로 끝났다.'''
그런데 연합함대는 (전투에 참가한 부대원들의 과장된 보고를 그대로 믿고) 자신들이 7척의 미군 정규항모를 격침시켰다고 발표하고는, 레이테 섬에 병력을 증원하기 위해 수송작전을 개시하게 된다. 일명 오르독 만 전투(다호작전)으로, 이 작전에 참가한 함선들은 당연히 살아남은 미군의 공격으로 큰 손실을 입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피해자 1호인 아오바(중순양함) 문서 참조.

8. 구리다 턴은 올바른가?


구리다 함대의 지휘관이었던 구리다 제독은 레이테 만에 진입하지 않고 함대를 철수시켰기에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이 사건은 진주만 공습 당시에 나구모 제독이 3차 공습을 포기한 것과, 사보섬 해전에서 미카와 군이치 제독이 미군 수송함대를 공격하지 않고 퇴각한 것과 함께 두고두고 일본인들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구리다 턴은 희대의 오판인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8.1. 야마토가 히어만을 물리쳤다면?


야마토가 사마르 해전 초기에 미군 구축함 USS 히어만을 격침시켰거나 몰아냈다면 태피3은 순식간에 전멸했을 것이다. 전함 상대로 호위항모와 구축함이 포격전으로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사마르 해전을 하느라 낭비한 시간이 고스란히 레이테 만 습격에 배당될 것이고, 레이테 만을 불바다로 만들고 탈출할 시간이 생겼을 것이다. 맥아더의 상륙부대가 사태를 눈치채고 대비할 시간도 크게 줄어들게 되므로, 공격이 성공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졌을 것이다. 현실은 전함이 구축함한테 구축당한 초유의 사태였지만.

8.2. 진입했어야 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군은 무조건 레이테 섬을 지켜야 했다. 레이테 섬을 빼앗기면 곧바로 필리핀 상실로 이어지고, 이는 일본의 패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걸 막기 위해 일본군은 오자와 제독이 지휘하는 항공모함 즈이카쿠, 치토세, 치요다, 즈이호 4척과 항공전함 이세, 휴가로 편성된 항모전단을 미끼로 사용했다. 일본군에게는 다행하게도, 홀시의 3함대는 미끼에 낚여서 북쪽으로 사라졌고, 레이테 섬은 진공상태가 되었다. 태피 3 같은 호위항모로 구성된 부대가 있었지만, 홀시의 3함대보다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16전대가 호위한 수송선들이 레이테 섬에 성공적으로 도착해서 병력을 내려놓았으니, 남은 건 구리다 함대의 일격 뿐이었다.
그렇다면 무조건 레이테 만에 진입을 해야 했다. 작전 성공이 코앞이었기 때문이다. 진입하지 못하면 필리핀 상실은 필연적이고, 그렇게 되면 일본은 멸망하니만큼 무조건 작전을 성공시켜야 했다. 구리다 함대가 그 당시 일본군의 전함과 중순양함을 모조리 긁어모은 최상급 부대였으니만큼, 태피 3 같은 시시한 부대 따위는 단숨에 밀어버리고 들어갔어야 했다. 사마르 해전이 끝났을 때, 태피 3은 큰 피해를 입고 있었으므로 힘으로 밀고 들어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맥아더의 상륙부대가 저항하겠지만, 야마토 같은 강력한 전함은 그들에게 없었다. [97]
일본 함대가 치른 막대한 희생도 돌입을 시도해야 할 이유이다. 금쪽같은 항공모함 4척을 보유한 오자와 함대는 무시무시한 홀시의 제3함대를 꾀어내기 위해 미끼가 되었고, 기함 즈이카쿠를 포함한 항공모함 4척이 모두 격침당했다. 니시무라 함대도 훈련함으로나 쓸만한 고물인 후소급 전함 2척을 주축으로 돌입을 시도했다가 올덴도르프 함대에게 괴멸당했으며, 그 덕분에 레이테 만으로 향하는 입구는 활짝 열린 상태였다.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르면서 만든 기회라면 당연히 써먹어야 했다. 돌입하면 구리다 함대도 큰 피해를 입겠지만, 어차피 돌입하지 않으면 일본은 망하고, 남겨진 함대는 전리품으로 전락할 뿐이다.

8.3. 진입했으면 전멸했다


구리다 함대가 레이테 만 진입에 성공한다고 해서, 상륙부대를 괴멸시킬 거란 보장은 없다. 제공권이 미국에 있는데다가 맥아더도 그런 상황이 되면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결사적으로 싸울 것이고[98],(이미 상륙으로부터 5일이 지났기에 대부분의 부대는 상륙지를 벗어났을 상황이었고, 아무리 못해도 티거 전차를 구축함과 경순양함이 씹어먹었던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보다는 더 나은 성적을 거둘 것이다.) 수리가오 해협 전투에서 일본 함대를 아작내버린 올덴도르프의 포격지원함대도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함대는 수리가오 해협 전투에서 많은 포탄을 소모했지만 구리다 함대와 마주쳤으면 화끈하게 한판 뜰 정도의 포탄은 남아있었을거로 추정되고 [99] 전함의 수도 더 많았다. 이 함대의 전함들은 구식전함들이었지만[100] 구리다 함대의 전함들도 아먀토를 제외하면 구식 전함들이었으니 미해군이 쪽수로 우세를 점했을 거로 추측된다. 구리다가 맥아더의 상륙부대를 괴멸시키기 전에 올덴도르프의 포격 지원 함대가 도착하면 구리다 함대는 포위당한 채 싸워야 할 거고,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흐르면 홀시의 3함대도 돌아올 것이니 일본 함대는 전멸했을 것이다.
여기서 고려해야 할 일본군의 고질적인 문제가 있다. '''일본군은 지휘관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것을 요구할 뿐 정작 그러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정보를 수집하고 공유하는데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쉽게 말해 미드웨이에서 나구모 주이치가 겪었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는 거다. 레이테에서의 구리다는 일본군의 다른 함대와의 통신도 두절되었고 미군의 상황을 정찰할 수단도 없었으므로 올바른 판단만을 내리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리한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남은 건, 자기가 가진 정보에 입각하여 최선의 판단을 하는 것이고 그 결과가 구리다 턴이었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는데, 위에 언급된 코야나기 토미지 제2함대 참모장의 발언을 다시 한 번 들어보자.

"그렇습니까. 연합함대 장관이 그만큼의 결심이라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돌입작전은 간단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적 함대는 전력을 기울여 이를 저지하려 할 겁니다. 따라서, 호불호를 묻기 이전에 적 주력과의 결전 없이 돌입작전 실현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구리다 함대는 명령대로 수송선단을 목표로 적 항만에 돌진하지만 만에 하나 도중에 적 주력부대와 대립해, '''양자를 택일해야만 할 경우 수송선단을 버리고 적 주력의 격멸에 전념합니다.''' 지장 없겠습니까?"

사마르 해전에서 구리다 함대는 적 주력부대(사실은 태피 3)과 마주쳤고,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적 주력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니 이제 빠져나가도 된다고 판단했다. 안 그래도 수송선단 같은 시시한 목표를 격파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기 싫었는데, 주력부대와 싸우느라 중순양함 다수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으니 탈출하고 싶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마침 우는 애의 뺨을 치는 격으로 적에게 포위당했다는 정보까지 날아왔으니, 더더욱 탈출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2함대의 군인들 입장에서도 구리다 턴이 꼭 무리한 판단인 건 아닌 게, 연합함대는 함대결전을 현장지휘한다는 본연의 임무를 방기한 채 2함대에 사실상의 카미카제를 강요했고(상술한 2함대 참모장과 연합함대 참모의 대담에서 작전 결행시 2함대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은 양 쪽 모두 인지하고 있다)그런 와중에 작전 한 달 전 빤스런을 하는 마당이었으니 2함대의 사기가 높을 리가 없다.
기함 야마토의 함교에서 전황을 파악하던 구리다 제독의 입장에서 볼 때, 비록 함선 공격용 무기를 탑재하진 않았지만 함재기들이 붕붕 날아다니면서 가뜩이나 대공무기가 빈약한 일본 수상함을 위협하고 구축함이 전함과 순양함(!!!)을 잡자고 덤비는 데다, 순양함들이 줄줄이 대파되고 기함 야마토는 미군에게 쫓겨 도망치는 상황이었으니 오판하지 않을 지휘관은 드물 것이다. 결국 사마르 해전 참전 미해군 장병들이 노련한 일본 제독을 오판하게 만들 정도로 정말 용감하게 싸운 것이 일본의 불행이지 구리다가 이 모든 책임을 다 뒤집어 쓸 이유가 전혀 없다. 거기다가 전술했듯이 구리다는 빈약한 정찰 전력과 무전 통신 능력으로 인해 사실상 전황 파악이 매우 힘들었다. 레이테 만 해전과 필리핀의 상실 여부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건 사실이나, 이를 위해서 확실치도 않은 정보들만으로 도박을 하기엔 구리다 어깨에 진 '연합함대 전체의 명운'이라는 짐은 너무 무거웠다. 홀시가 뒤에서 나타났다는 오보가 들려오고 이미 항공모함을 완전히 말아먹을 작정하고 미끼로 쓴 상태에서(그리고 예상대로 필리핀해 해전 이후 그나마 남은 일본 항모 전력은 완전히 쓸려나갔다) 만에 하나 구리다가 여기서 수상함대 마저 싹 말아먹게 된다면 일본은 그야말로 수상함,항공모함 모두를 말아먹은게 되고 사실상 연합함대는 명목상의 존재까지 레이테만 해전에서 끝났을 것이다.

8.4. 결론


일반적으로는 구리다가 실수를 했다는 평이 많지만[101] 진입했더라도 레이테 만 습격이 성공했을지, 성공하더라도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을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실제로 싸워봐야 결론이 나올 문제이고, 구리다 함대가 결국 레이테 만에 진입하지 않았으므로 정답은 누구도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태피3이 구리다 함대의 레이테 만 습격을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것이 승리로 이어졌다는 것, 그리고 함대를 전부 소진시키더라도 필리핀을 방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는 하고 있었던 연합함대의 의사결정 시스템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구리다가 까이는 배경인 ‘연합 함대 전멸을 불사한 필리핀 수호’라는 연합함대 사령부의 명분마저도[102] 그 저의가 상당히 의심스럽다. 설령 옥쇄에 가깝게 그나마 남은 수상함대마저 모두 말아먹어 연합함대 전멸과 필리핀 수호를 맞바꿨다 쳐도 과연 필리핀에서 나온 물자를 텔레포트라도 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수송할 것이며 이걸 그대로 두지 않을 미해군으로부터 호위할 함대는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103] 결국 작전의 배경과 의도 그리고 목적 그 모든 것이 그야말로 인지부조화가 따로 없었던 것이다. 잘 되면 내 탓 못하면 남 탓인 식의 전후 연합함대의 변명을 무비판적이게 수용하여 잘 한 점이 분명히 있음에도 그 부분은 의도적이게 무시당하고 마치 일본 제국 패망의 원흉인 역적으로 몰려 무조건적인 비판에 희생된 나구모 주이치, 구리다 타케오, 미카와 군이치, 기무라 마사토미 등 평범하고 능력도 어느 정도 있던 일본의 제독들을 오늘날까지 부당한 비방만을 하며 속죄양으로 삼는 일본 극우 밀덕계의 한심한 현실과 자기들이 개전의 중심이 돼 놓고 ‘에라 될대로 되라’ 식의 무책임한 명령만을 남발한 대전 말 연합함대 사령부의 답이 없는 상황을 다시 한 번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9. 기타


  • 이 전투를 기념해 에식스급 항공모함 15번함 CV-32의 이름은 레이테가 되었다. 이후 이 이름은 타이콘데로가급 순양함 9번함 CG-55에도 계승되지만 완전히 동일하진 않고 레이테 걸프(레이테 만)로 바뀌었다. 그 이전에도 USS 레이테가 두 척 있었지만 당연히 전투와는 상관 없이 그냥 필리핀의 지명으로서 붙여진 이름. 함종도 공작함이었다.
  • 홀시는 이 일로 평생까임권을 받았다. 그의 회고록은 이 사건에 대해서 분노 그 자체를 표출하고 있다. 그리고 회고록에서 책임은 킨케이드에게 있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바람에 킨케이드가 격노, 절친이었던 두 사람은 완전히 갈라서서 서로 제대로 말도 섞지 않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 홀시 제독이 즈이카쿠 등 항공모함을 잡으러 갔던 것을 들은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이 '나였으면 제 위치를 지켰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는데[104], 실제로 마크 미처 제독의 부관이었던 알레이 버크 제독은 그것을 정확히 꿰뚫었다. 그래서 남긴 말이 "즈이카쿠 저거 미끼 같은데 버리죠?"
  • 서정주의 대표적인 친일시 <마쓰이 오장 송가>의 주제. '레이테 만 그 곳에서 영미귀축 항공모함을 깨부수고 장렬히 산화했는가 아아 마쓰이 오장이여 자랑스러운 그 이름이여...' 이런 식. 근데 정작 문제의 조선인 인재웅(마쓰이 히데오) 씨는 종전 후 미군 포로수송선을 타고 인천항을 통해 귀향했다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오보였다고 한다#
  • 1990년대 유명 미니시리즈인 전쟁과 추억 원작에서 이 해전을 아주 꼼꼼히 재현하고 있다. 극화판은 제작비의 문제로 그냥 넘어갔지만 안개낀 바다에서의 풍경은 CG 없이 잘 재현했다. 주인공은 홀시의 전함군을 이끌고 있으며 홀시가 안 들을거 같아서 넘어가지만 홀시의 선택을 아주 비판하고 있다. 역시 원작 대사에서도 그러고 보니 오늘은 경기병대의 돌격일이군이라는 말이 나온다.
  • 톰 클랜시의 잭 라이언이 홀시 제독의 전기를 쓴 걸로 붉은 10월에서 묘사된다. 여기서 홀시 지지파, 나중에 라미우스 함장이 붉은 10월호에서 나도 당신의 책을 읽었소. 하지만 홀시의 선택은 잘못 된거요라고 평한다. 잠깐이지만 이 대사가 영화에도 나온다.[105] 다만, 잭 라이언이 모리슨 교수의 통설에 도전할 것이 아니라면, 애초에 이 주제를 다루지 않았을 것이다. 톰 클랜시가 이 화제를 뜬금없이 꺼낸 이유는, 라미우스가 홀시처럼 감정적인 사람이지만, 붉은 10월호의 망명처럼 과격한 행동을 할때와는 달리, 전술적인 상황에서는 견실하게 행동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 카미카제 첫 격침 전과인 세인트 로를 격침시킨 사람은 일본 해군에서도 굴지의 에이스로 이름높았던 세키 유키오 대위였다. 그러니까 에이스라서 가능했던 전과인데, 여기에 감명을 먹은 대본영조국을 위하여 산화한 구국의 영웅 세키 대위의 행적을 따라간다 따위의 기획 기사를 신문에 실으면서 카미카제 대원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하게 된다.
정작 유키오 대위는 상부의 특공 제의(=명령)를 듣고, 하루 정도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에 특공을 한다고 했지만. 이런 걸 남기고 특공을 했다. 글의 내용을 요약하면 "댁들이 특공을 하라니까 하긴 하는데, 그건 댁들같은 머저리를 위한 게 아니고 사랑하는 내 가족을 위한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라."
  • 레이테 만 해전은 일본의 수훈함들이 대거 참여한 전투였으나 이들의 성과는 엇갈렸다. 엔터프라이즈의 숙적 중 하나인 즈이카쿠는 오자와 함대에 소속되어 성공적으로 홀시의 제3함대를 꾀어냈지만 격침되었고, 솔로몬의 늑대 아오바는 16전대를 이끌고 레이테 섬에 돌입하다가 대파당했지만 휘하 16전대는 끝내 임무에 성공했다. 그러나 일본 최고의 전함 공고는 구리다 함대에 소속되어 사마르 해전에서 나름대로 전공을 올렸지만 다른 전함 3척이 전부 삽질을 한 데다 중순양함들이 줄줄이 박살나고 구리다 턴까지 나오면서 임무에 실패했고, 행운함으로 유명한 유키카제는 언제나처럼 살아남았지만 사마르 해전에 참전했음에도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 구리다 함대가 사마르 해전에서 행한 요인불명의 반전은 후세에 구리다 턴이라는 단어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용되는 곳은 주로 태평양전쟁 관련 게임. 특히 후자의 경우, 나침반땜에 보스한테 못가거나 보스 바로 앞에서 나침반 장난으로 반대방향으로 간다거나, 맵에 따라서는 실제의 구리다 함대의 반전 마냥 180도 회전해서 이동하는 경로까지 있기에 엄청난 빈도로 사용되고 있다.
  • 울펜슈타인 시리즈에서는 실제 역사와 달리 1946년 여름에 이 전투가 벌어졌다. 또한 이 세계에서는 미국 해군이 독일과 일본 해군에 의해 박살난다. 무려 미 해군 전력의 반 이상이 이 전투에서 손실되었다. 이 승전 이후 독일은 일본을 배신하여 일본, 중국, 한국을 점령하고 태평양을 장악함은 대서양에 대해서도 우위를 점하게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 작전을 개시한다.
  • 가공전기 만화 몽환의 전함 야마토에서는 역사대로 일본군이 대패한다. 역사대로 수리가오 해전때 니시무라 함대가 전멸했고 필리핀 해전에서 일본군이 승리해서 살아남은 다이호와 쇼카쿠도 레이테 해전에서 격침된다. 여기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살아남았던 히류도 격침된다. 무사시는 살아남았지만 그외 실제 레이테 해전에서 격침된 일본 함선들은 역사대로 격침되어 사실상 일본 해군은 괴멸된다. 더불어 오자와도 전사.
  • 전함소녀에서 2016년 겨울 이벤트로 구현되었다. 팔라완 해전 - 시부얀 해전 - 엔가노 해전 - 수리가오 해전 - 사미르 해전으로 구성. 일본판에서는 2017년 겨울 이벤트로 구현되었다.
  • 함대 컬렉션에서 2017년 가을과 겨울 이벤트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이후 봄 미니 이벤트에서 사무엘 B. 로버츠가 보상으로 배포되었다.
  • 2017년 11월, 무사시를 찾아냈던 폴 앨런의 샐비지 팀이 레이테 만에서 침몰했던 니시무라 함대의 잔해들을 찾아내고 있다. 현재까지 야마시로와 아사구모, 후소가 발견된 상태.
  • 기동전사 건담 디 오리진에서 그려진 루움 전역에서, 요한 이브라힘 레빌의 함대가 도즐 자비의 함대와 모빌슈트 부대에 의하여 궤멸당하는 사이, 티안무 함대가 그레이트 데긴사이드3#s-1을 눈앞에 두고 함수를 돌려 후퇴하는 장면이 구리다 턴을 연상시킨다. 원작 코믹스판에서는 이 장면이 간략하게 그려졌지만 기동전사 건담 THE ORIGIN에서는 티안무 제독이 아쉬움을 참으면서 참모들에게 후퇴를 명령하는 장면이 무겁고 긴박한 분위기와 함께 추가되었다.

[1] The Second Battle of the Philippine Sea / Operation KING Ⅱ[2] 比島沖海戦 / フィリピン沖海戦, 捷一号作戦(しょういちごうさくせん)/ キングⅡ作戦[3] 엔터프라이즈, 에식스, 인트레피드, 호넷, 프랭클린, 렉싱턴, 와스프, 핸콕[4] [5] , , [6] 야마토, , 나가토, 공고, 하루나, , , 이세, 휴우가. 즉 '''남아있던 모든 전함들을 싹 다 끌고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전력이 '''압도적으로 열세'''였으니... [7] 아오바, 묘코, 낫치, 아시가라, 하구로, 타카오, , , , , , 쿠마노, 토네, [8] 후소급 전함으로 대표되는 일본군 특유의 가느다랗고 높게 쌓여 있는 적층식 함교.[9] 미래에도 이 기록은 깨지기가 매우 힘들다. 미국의 통상적인 항모전단 하나의 배수량이 커봐야 30만톤을 넘지 않는데, 250만톤을 넘기려면 미국의 항모전단 다수 vs. (상대적) 열세의 해군 전체 구도나 해군 대난투전이 벌어져야 한다.[10] 수리가오 해전, 엔가노 곶 해전, 사마르 해전, 시부얀 해 해전[11] 정확히 이 시점에서 미군 수뇌부가 기존에 수립했던 전략 계획을 급히 변경하여 필리핀 탈환전의 첫 시작이었던 레이테 섬 전투의 작전 기획이 시작됐고, 작전에 동원될 병력, 물자, 함선들이 집결지로 이동 시작한 시점이었다.[12] 이 두 섬은 미군이 필리핀으로 향하는 마지막 징검다리였으며 바로 비행장이 건설되어 레이테 섬까지 미군의 지상발진 항공기들이 단순한 편도비행으로는 충분히 올수있는 거리로 레이테 섬 전투(지상전)당시에 섬의 제공권을 둘러싼 공중전에서 후속 증원에 효과적으로 일조한다.[13] 미군이 무슨 군웅할거 시대의 군벌집단도 아니고 필리핀이 정치적 기반지였던 맥아더의 개인사정 때문에 전략 목표를 정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군 연합함대 사령장관부터가 전후 심문에서 "필리핀을 잃는다면 일본 본토와 동남아 자원지대는 완전히 분리될 수 밖에 없다. 이 경우, 함대가 본국에 있는 경우 연료를 공급받을 수 없고, 남방 해역에 있을 경우 본토로부터 탄약 및 기타 보급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필리핀을 상실하면서 함대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라고 말 할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 맥아더는 정치군인으로서 필리핀 바닷가를 걸어들어오는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등 이를 프로파간다로 적절히 활용했다 [14] 실제 구상에서는 구리다 함대와 니시무라, 시마 함대가 랑데뷰한뒤, 퇴각할 경로는 두 경로 중에서 임의로 고를 수 있었는데, 남쪽이 유력했다.[15]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기본적인 방침은 함대결전사상이었고, 그에 따라 언젠가 크게 맞붙을 것을 대비하기 위해 주력 전함들은 전쟁기간 내내 전력 보존을 이유로 본토나 트럭 섬에 짱박혀 있었다. 때문에 스펙이 가장 딸려 주력에서 제외되버린 공고급 순양전함들이 주력 전함들 대신 항모들과 함께 일본해군의 화력을 담당하며 태평양을 누비며 수훈함이 된 것이다.[16] 출전 :小柳冨次著「栗田艦隊 レイテ沖海戦秘録」pp51-52, 佐藤和正著「レイテ沖海戦~日米海軍最後の大激突」上巻pp93-94[17] 출전 : 2차대전 중 일본해군 지휘관을 평가한다[18] 실제로는 전함파 내부에서 수뢰전(여기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나구모 주이치)과 포격으로 파벌이 갈렸고, 조약파가 개전 이전에 대거 갈려나간걸 감안하더라도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야마모토 이소로쿠) 여전히 잔류한 조약파와 함대파 사이의 불화가 남아 있었있으므로, 대립의 구도가 그렇게 간단하진 않았다.[19] 일본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 #[20] 이것은 전함파에서도 수뢰전 파벌이나 소장파(상술한 마유즈미 하루오가 대표적)가 주장했고, 높으신 분들은 '''자기네들의 호텔이 되어야 하는''' 주력함의 투입 자체를 함대결전사상점감요격작전을 핑계삼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전함파만의 문제도 아니었고 대표적 항공파인 야마모토 이소로쿠도 동일했다.[21] 과달카날 해전의 아베 히로아키, 타사파롱가 해전 등에서 활약했지만 상층부에 반대하고 기함을 선두에 두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임된 다나카 라이조, 레이테에서의 오자와 지사부로/니시무라 쇼지, 대미개전을 반대한 유능한 행정가였지만 전쟁 말기 독박을 뒤집어쓴 야마토 특공 당시 2함대 사령장관 이토 세이이치 등이 대표적인 희생자.[22] 御田俊一『帝国海軍はなぜ敗れたか』[23] 필리핀 탈환전을 총 지휘한 최고 사령관은 맥아더였으며, 이 문서에 나오는 레이테 만 해전의 컬러 지도들은 전부 다 맥아더의 보고서에 첨부된 것들이다.[24] 여기서 붉은 선이 갑자기 반전을 하는데 이게 구리다 턴이다.[25] 뉴욕에서 기념함으로 남아있는 그 항공모함이다.[26] 이 일화는 레이테 만 해전 이후에 각 함별로 느낀 점, 개선할 점, 반성할 점을 취합하는 자리에서 버밍햄의 장교들이 제출한 것이다.[27] [image]시부얀 해전 당시 무사시의 모습을 재현해둔 프라모델이다. 당시 일본 군함들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색이 더 밝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목재갑판이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다.[28] 거기다가 영점을 잘못맞춘 덕분에 명중탄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사실 조종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공사격이 구름 사이로 들어갔을때 날아오지 않았다는 말이 있어 레이더가 아니라 육안으로 조준했다고 봐도 될것이다.[29] 레이테 만 해전에서 야마토가 1번 주포탑 옆에 폭탄을 맞는 사진이 있는데, 이 4번째 공습에서 프랭클린의 함재기가 공격한 것이다.[30] 과달카날 전역 때 공고급 순양전함 키리시마를 털어버린 그 제독이다.[31] 뉴저지에서 통신을 보낼때, 오타를 냈다. Bernadino가 아닌 Berna'''r'''dino이다. 후술할 The world wonder 건과 관련된 내용이기도 하다.[32] 일본 측의 기록에서는 24일 15시경 즈이호가 미군의 정찰기로 추정되는 항공기와 조우했다.[33] 애석하게도 스프루언스 제독은 당시 휘하에 함대가 없이 사령부와 참모진만 유지한 채 진주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5함대 사령관(사실 5함대나 3함대나 같은 함대로 사령관인 제독이 누구인가에 따라 이름만 다르게 줬을 뿐이다. 홀시가 사령관이면 3함대, 스프루언스가 사령관이면 5함대라는 식으로 구성원은 똑같았다.)으로서 홀시와 동격의 제독이였고, 필리핀 해 해전에서 연합함대를 끝장내지 못했다는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었으며 자신도 지나가는 말처럼 언급한 바람에 그의 말에 신경쓴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34] 원래는 나가토도 2전대에 소속되어 기함역할을 할 예정이었으나 취소되었다.[35] 원래 영국 해군의 카운티급 중순양함의 하위 함급인 런던급인데, 사보섬 해전에서 호주 해군의 중순양함 캔버라가 격침되자, 영국 국왕인 조지 6세가 동형함인 슈롭셔를 선물로 주었다. 원래는 이름도 캔버라로 개명하려 했으나, 루즈벨트도 건조중이던 볼티모어급 중순양함 한 척을 선물로 주면서 캔버라로 명명했고, 슈롭셔 지역은 이 배말고는 해당 지역의 이름을 딴 배가 없어서, 그 배가 개명한다는 것에 반발이 있었기 때문에 슈롭셔로 호주 해군에 가게 된다.[36] 그림자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과 일본군 모두의 레이더로도 구축함과 어뢰정을 감지하기 힘든 지형이었다.[37] 이 증언을 한 사람들 중에서 파고다 마스트에 대해 언급한 사람이 없었기에, 증언의 신뢰성에 의심이 있었다.[38] 미치시오는 추가 공격을 받고 격침되었고, 아사구모는 이후 항해 능력을 일부 수복하여 표류하면서 퇴각을 시도했으나 느린 속도로 인해 실패하고 최종적으로 격침되었다[39] 이렇게 명확히 기록된 계기가 좀 웃긴데, 올덴도르프 제독이 사격 중지 명령을 내리고 나서, 함대의 전함과 순양함의 전 포문이 침묵하는데 혼자 뿜 하고 일제사격을 해버린 것...[40] 앞서 말한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방어하기로 한 (구) 34 임무부대와 다름에 주의.[41] 전술했다시피, 아예 한 번도 함포사격을 하지 못한 펜실베이니아와 딱 한 번 일제사격한 미시시피도 있을 뿐더러, 가장 많이 사격을 한 웨스트 버지니아도 철갑탄의 절반도 안쏜 상태였다.[42] 즉, 뒤늦게 전달되었다고 변명한 것.[43] 동어 반복으로 강조.[44] 시작.[45] 수신인과 본문을 구분.[46] 끝.[47] INFO COMINCH : COMINCH는 해군장관이지만 여기선 CNO인 어니스트 킹 본인을 지칭한다.[48] CTF SEVENTY-SEVEN : 태피3는 77 임무부대에 소속되어 있었다.[49] RPT : repeat.[50] 엄밀히 말하면 니미츠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니미츠를 절대적이게 믿고 지지한 홀시 입장에서 저런 명령문이 왔을 때 그 심정은...[51] 로버트 카니 제독도 오자와 함대를 추격한 것을 반대하긴 했다.[52] 엄밀히는 니미츠가 보장한 것이다. 니미츠 제독은 전술의 총론 단계에서는 적극적으로 지휘권을 사용했으나 각론 단계에서는 부하들의 재량권을 부여했다.[53] 레이몬드 스프루언스.[54] 마크 미처, 어니스트 킹, 토머스 킨케이드.[55] 출처는 상원위원이었던 존 매케인 3세가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해 쓴 책이다.[56] 홀시가 고집을 꺾지 않았았다면, 연합함대의 다음 장관이 될 사람이 여기서 죽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57] 주어가 없으므로, 일본 해군이 항공모함의 운용 요원들을 구출하지 못하게 하고, 38 임무부대도 그들을 건져주지 말라는 이야기다.[58] of의 오타가 아니다. 사마르섬 바깥의 근해에서 벌어진 전투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59] 붉은 선의 경로를 잘 보면 어느 순간 돌아가는 걸 볼 수 있는데 이게 구리다 턴.[60] 태피3의 스프레이그와는 '''다른 인물'''이다. 골때리게도 둘 다 미국해군사관학교 1917년에 졸업한 '''임관동기'''인데, 둘 모두 태평양 전쟁에서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하며 이 레이테 만 해전, 오키나와 전투에서 활약하는등 동선이 상당히 겹치는데다 군생활도 똑같이 중장까지 달고 전역했기 때문에 라이트 밀덕들에게는 왠지 동일 인물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다. 정작 실제로는 고향도 다르고 중고딩 시절도 다른 동네 다른 학교 졸업한 생판 '''남남'''이다. 흔히 '지기(Ziggy)'라는 별명의 태피3 사령관 스프레이그 제독이 그나마 더 자주 언급되는 편.[61] 즉, 논의만 되고 편성하지 않은 (구) 34 임무부대.[62] 후소급 전함으로 대표되는 일본군 특유의 가느다랗고 높게 쌓여 있는 적층식 함교.[63] 당시 구리다의 첩보 상태는 안습 그자체였는데 사실상 제대로 무전이 되지 않아서 두루뭉실한 명령만 믿고 작전을 개시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작전을 성공하려 했으니 구리다가 무당이라도 되지 않는 한 사실상 시작부터 패퇴가 예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64] 미드웨이 해전을 생각해보면 정확한 판단이었다.[65] 이것이 후의 포격전에서 호위항모가 피해를 입으면서도 한 척만 격침당하는 데 그치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한다.[66] 출격한 파일럿들은 적함에 최대한 손상을 입히기 위해 어뢰발사관이나 기총 사수, 기총 총좌를 노렸다고 한다.[67] 적함에서 발사된 포탄이 만든 물기둥을 향해서 접근했다. 바람, 해류, 파도 등 복잡한 주변 환경의 예측 불가능한 영향 때문에 포탄이 같은 장소에 연속해서 떨어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걸 고려한 전술이다.[68] 하지만 태피2 함재기들의 공습을 피하지 못하고 격침당한다.[69] 초카이의 대파 원인은 밑에서도 설명하겠지만 포격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 뇌격은 빗나갔고 후에 기술할 유폭을 어뢰의 명중으로 착각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당시 수병들은 이 어뢰가 명중한 것으로 여겨서 환호했고...그런데 이 포격은 구축함이나 호위구축함이 아닌 '''화이트 플레인스의 유일한 5인치 포수가 낸 것이다.''' 해당 사연은 초카이(중순양함) 참조 [70] 그 뒤 기어링급 구축함 DD-823,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호위함 FFG-58이 그 이름을 계승한다.[71] 日米全調査 決戦戦艦大和の全貌[72] 우가키 마토메, 전초록. 이 항모는 지근탄으로 기관실이 파손된 화이트 플레인즈였고 흑연은 연막 살포였다.[73] 原勝洋 '日米全調査 決戦戦艦大和の全貌' 203항[74] ' The World Wonder'd: What Really Happened Off Samar' Robert Lundgren[75] Aircraft Carriers: A History of Carrier Aviation and Its Influence on World Events: 1909-1945. Potomac Books, p.434[76] Yamato (Battleship, 1941–1945) in the Battle of Leyte Gulf[77] 심지어 이때 칼리닌 베이의 함포는 거리측정장치가 고장난 상태였다.[78] 사실 호위항공모함이라도 정규항공모함 대비 덩치가 좀 작다 뿐이지 가장 중요한 함재기 탑재량은 일본군의 정규항공모함과 거의 동급이었으니, 정규항공모함으로 착각할 만은 했다.[79] 원래는 '미드웨이'였는데 이번 해전이 벌어지기 직전에 그 이름을 신형 항공모함에 붙이기 위해 배 이름이 갑자기 바뀌었다. 열받은 수병들은 '''"배 이름을 마음대로 바꾸는 무식한 놈들이 어디 있어! 그러면 마가 낀단 말이야! 배는 분명히 2주안에 침몰할거야, 내가 장담한다!"'''라면서 분노했었다. 그리고 말이 씨가 된 건지, 진짜로 마가 낀 건지 그 말은 현실로 나타났다. 다만 같은 카사블랑카급의 CVE-57은 원래 이름이 산호 해였는데, 이것도 그 이름을 신형 항공모함에 붙이기 위해서 세인트 로 보다 먼저 함명을 안지오로 바꿨었다. 이 배는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살아남았다.[80] 최초로 '계획된 카미카제'를 당한 배는 호주 해군의 HMAS 오스트레일리아였고, 10월 21일이었다.[81] 레이테 섬의 서쪽, 즉 레이테 만 정 반대편에 있다.[82] 거기에다 레이테 만 근처에서 오래 얼쩡거렸다가는 상술한 수리가오 해전을 끝낸 후 도우러 오고있는 올덴도프의 전함 함대에 모두 고기밥이 되었을 듯.[83] 반면에 미국은 홀시와 니미츠의 구형 전투함 + 항모함대가 번갈아가며 일본 연합함대를 두들겨 패는동안 본토에서 만들어진 최신예 전투함'''들'''과 최신예 항공모함'''들'''이 일본군이 주둔한 섬들을 차례차례 버스터 콜 시켜버리는 상황이었다.[84] 이 카미카제를 한 조종사가 남긴 유서 비슷한 것을 보면 대본영은 물론이요, 덴노도 까고 있다. 자세한 건 카미카제#s-10.4.1 문서 참고.[85] Trot : 종종걸음으로, 속보로.[86] 후술하지만, 아니다.[87] 가령 스프루언스는 니미츠 제독과 함께 킹 제독의 고집을 꺾고, 영국 태평양 함대가 일본 근해에서 작전하도록 방침을 바꾼다.[88] 그렇다면 백번 양보해서 항공모함은 올라갈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러면 신형 고속전함은 왜 끌고 갔냐고 반론할 수도 있으나 이 부분도 미해군의 항모 전술을 고려하면 참작이 가능하다. 미군은 대전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 넉넉한 배수량과 떡장을 갖춰 몸빵이 가능하며 각종 대공 무기와 대공 관제 시설을 되는대로 장비할 수 있고 속도도 항모랑 함께 다니기에 충분한 고속전함들을 함대의 방패로 세워서 작전을 했다. 이들은 기동하는 항모전단 가장자리에서 레이더 관제를 하며 일본의 항공기나 수상함 세력으로부터 항모를 호위하였는데 방법만 다르지 이들은 오늘날의 이지스함과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 즉 항모전단의 대공, 대함 방어의 당당한 한 축인 고속 전함들은 항모전단과 떼어낼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즈이카쿠가 미해군에 충분히 위협이 되며 깡통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교전을 위해 북상하는 항모 전단에서 고속전함을 빼고 간다는건 마치 미드웨이에서 항모를 선두 돌격시켰다가 4척 모두 말아먹은 일본 해군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 신형 고속전함은 대부분 항모 전단 호위를 위해 가고 포격전이나 상륙 지원 업무는 굳이 빠른 기동이 필요하지 않은 구형 전함이 담당하게 되었다. 일본 해군의 돌입을 함포 사격을 통해 차단할 수리가오 해협의 올덴도르프 제독의 함대가 구형 전함으로만 구성된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89] 다만 한가지를 더 덧붙이자면, 홀시 역시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항공모함을 공격하지 않은 것이 실수라고 생각했다.[90] 2번째가 전술적인 판단에 대한 관점이라면 3번째는 말그대로 국민 감정의 문제였다.[91] 스프루언스는 인디애나폴리스가 자신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포틀랜드급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를 5함대 기함으로 삼는 기행을 벌였기 때문에, 한발 물러나서 객관적으로 전쟁을 바라봤다는 옹호조차도 하기 힘들었다.[92] 기함 선택은 함대 사령관 재량이므로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으나 저건 명백한 기행이다. 보통 기함은 함대 사령관 보호를 위해서라도 튼튼하고 정보 수집과 중계를 통한 원만한 작전 지휘와 스트레스 받으며 잠도 못자고 고생하는 참모들을 위해서라도 전함이나 항공모함같은 큰 공간을 가진 배로 선정하는 것이 맞다.(그래서 보통은 전함, 항공모함에 함대 사령관이 탑승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프루언스는 상당히 감정적인 이유로 겨우 중순양함을 기함으로 선택했고 좁아터진 배에서 고생해야 하는 참모들의 처지를 감안하면 명백한 기행이다.[93] 말은 이렇게 해도 명예훈장 바로 다음 등급의 영예로운 훈장이다.[94] 이 문서에 있는 사진들이 그 용도로 쓰였다.[95] 야마토를 노리는건 잠수함대도 마찬가지였으며, 최초로 발견하여 보고를 올린 잠수함 2척이 뇌격을 시도하나 전부 빗나간다.[96] 예를 들면 이 해전에서 겨우 살아돌아간 묘코급 묘코와 타카오급 타카오는 싱가포르까지 견인받았지만 수리하러 본토로 귀환할 수가 없어서 부양방공포대업무만 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묘코급 4번함 하구로는 싱가포르에서 보급 임무 중 페낭 해전에서 격침되었다.[97] 당시 240mm M1 블랙드래곤 곡사포 나 203mm M115 8인치 곡사포같은 중포를 다수 보유하고 있기는 했지만 전함의 화력에 비할 물건은 아니다. 중순양함만 상대한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여전한게 240mm M1은 단발 화력이야 중순양함급이지만 발사속도에서 밀리고(2분에 1발 vs 분당 3~4발) M115의 경우는 구경은 똑같은 203mm라도 탄이 더 가볍고 포구 초속에서 밀리기 때문에 중순양함의 203mm 함포와 동급으로 볼 수 없다. 게다가 함대를 보자마자 포를 다시 뒤로 돌려서 재방열하는 시간이 걸리고 함대는 고폭탄으로 갈기면 되는데 비해서 중포들은 철갑탄으로 정확하게 때려야 하는건 덤.[98] 게다가 앞서 말했듯이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많은 양의 중포, 곡사포 등 때문에 일본 함대와 포격전을 떠볼 만도 했다. 전함의 집중 방호 구역을 뚫지 못한다 뿐이지 전함을 제외한 나머지 함정들에겐 충분한 위력이고, 전함 역시 비장갑 구획의 피해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99] 이렇게 됐다면 밀덕들이 간절히 바라던 전함 야마토를 포함한 일본 전함 함대 vs. 미국 전함 함대의 드림 매치가 성사되었을 듯.[100] 신형 전함들은 홀시가 모두 끌고 갔다.[101] 그마저도 홀시가 즈이카쿠의 목을 가지러 갔다고 까이는 것처럼 결과론적인 시선에서의 부당한 비판이 상당수이다.[102] 그마저도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대체 뭘 하라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매우 두리뭉술했지만...[103] 구리다가 ‘적 주력(태피3가 너무 열심히 싸워 든 착각이지만)도 어느 정도 격파했고 우리 피해도 큰데 포위될 위기까지 처했으니 일단 후일을 기약하자’ 하는 식으로 철수한데는 이런 생각 역시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104] 애초에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이 윌리엄 홀시 제독보다 앞서 치른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 항공대, 특히 항모 기동부대가 사실상 작살나버렸다. 그래서 이 해전에서 오자와 지사부로가 이끌던 항모 부대는 항모이긴 하지만 항공대가 없는 사실상 깡통부대였다. 필리핀 해 해전을 미 해군에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 때문.[105] TV 더빙판에서는 방송사마다 번역이 약간 다르다. 예로 당신이 틀렸소, 홀시는 어리석었소 라던지. 국내 번역된 모 출판사 판 붉은 10월에서는 일본어판 중역 때문에 하루제 제독으로 나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