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로즈
Tokyo Rose
유일하게 알려진 도쿄 로즈 아이바 토구리의 방송[1]
1. 개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라디오 프로파간다 방송인 '라디오 도쿄'의 여성 진행자들의 별명으로 한 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는 일본에서 도쿄 로즈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없고 방송을 들은 미군들이 붙인 별명. 그런데 이 명칭이 워낙 유명해져서 그냥 아래 나오는 '제로 아워' 방송을 의미하는 말로도 많이 쓰였다.
라디오 도쿄에서는 적군인 미군들을 대상으로 한 선전용 영어방송을 송신하였는데, 이 방송의 여성 진행자들은 특유의 나긋나긋하고 애절한 목소리로 미군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대략 '방송은 병X같지만 여자 목소리는 좋네' 느낌. 방송의 내용은 미군들에겐 코웃음이 나올 정도로 설득력이 떨어졌지만, 이를 방송하는 여성 진행자 자체에 대해서는 애증에 가까운 호의를 나타내는게 보통이었다. 당시 도쿄 로즈를 생포해서 본 모습을 보기 위해 일본을 때려잡으려는 병사들도 많았다고.
유명한 사례로는 대만 항공전 직후 '''항모 19척, 전함 4척, 순양함 7척, 함종 불명 15척을 격침 및 격파했다'''는 도쿄 로즈의 대본영발표에 대해 윌리엄 홀시 제독이 '''그 함대는 바다 속에서 인양되어 "적을 향해 후퇴 중"'''이라고 맞받아친 전설적인 사례가 있으며 그외에 스틸웰의 후임으로 중국에 온 미국 참모장 앨버트 웨드마이어에게 이제 웨드마이어는 크리스마스 만찬을 인도에서 즐기게 될 것이라고 조롱한 방송 등이 있다.
태평양 전쟁 참전 미군들에게는 매우 유명해서, 1946년에 도쿄 로즈라는 이름의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고, 미국의 많은 매체에서 등장하거나 패러디되기도 했다.
2. 제로 아워
The Zero Hour
도쿄 로즈들이 진행한 프로파간다를 내보낸 방송. 라디오 도쿄 방송(현재 NHK 월드라디오 일본)에서 오후 6시에 내보낸 방송으로 원래 60분짜리 방송이었으나 1943년 말에 75분으로 연장되었다. 방송 순서는 오프닝 테마곡, 포로 메시지, 고아 앤의 음악 방송, 미국 국내 뉴스, 외국 단신 뉴스, 군가 1곡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밑에 나오는 아이바 토구리가 이 방송에서 진행을 맡은건 20분 정도로, 그녀의 방송시간에는 연합군 포로들이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주거나, 미국 유행곡을 틀어주고 노래를 소개하는 정도의 소소한 잡담만을 진행했다. 아이바 토구리는 위에서 나오는 윌리엄 홀시의 일화와 같은 중요한 소식을 알려주는 뉴스 진행자는 아니었으며 프로파간다성 멘트도 거의 말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전문적인 아나운서 교육을 받지 않았고 그저 목소리가 좋아 보여서 채용한 것으로 그냥 음악 방송 DJ에 더 가까웠을 뿐. 프로파간다나 허위성 뉴스는 뉴스 시간에 집중되었고 이때는 전문적인 아나운서가 진행을 맡았으며, 아이바 토구리와 그녀의 프로듀서인 연합군 포로들은 뉴스진행자들과 서로 만난적도 없다고 한다.
때문에 그녀도 도쿄 로즈인건 맞기는 한데 사람에 따라서 도쿄 로즈는 아니라는 말도 있다. 이게 무슨말이냐면 도쿄 로즈란 말은 미군 병사들이 임의로 부른 별명이지 공식명칭이 아니다보니 의미도 부대마다 병사들마다 제각각이라 제로 아워의 여성 진행자 전부 혹은 이 방송(제로 아워)까지 포함해서 의미하는 경우도 있고(이게 일반적), 뉴스 소식을 전해주거나 프로파간다 방송을 하는 여성만을 의미하기도 하며, 사람에 따라서는 일요일 저녁 6시 진행자[2] 만을 도쿄로즈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진짜 프로파간다 방송을 진행한 여성들은 따로 '마담 도조', '난징의 나이팅게일'등의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그 중에는 일본 첫 여성 영어 아나운서이자 캐나다계 일본인인 제인 스야마가 유력하게 거론되지만[3] 1949년 음주운전을 하던 미군 병사에 의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그대로 오리무중. 그 밖에 푸르미 사이쇼, 루스 하세가와 등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정확한 정체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전쟁 중에는 실종된 미국의 여성 비행사인 어밀리아 에어하트가 도쿄 로즈라는 루머도 돌았으나 당연히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3. 아이바 토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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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a Toguri D'Aquino (영어)
アイバ・戸栗・ダキノ (일본어)
도쿄 로즈는 진행자가 14명에 이르지만, 유일하게 알려진 인물은 1916년생인 아이바 토구리라는 '''일본계 미국인''' 여성이었다. 일본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941년 7월에 친척의 간병을 위하여 일본을 방문했다가 곧바로 발발한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귀국이 불가능해졌고, 일본군에 의해 미국 국적을 포기하라는 '''협박과 심한 감시'''를 받았으며, 결과적으로 미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아 마지막 선택지로 연합군 포로로 구성된 '라디오 도쿄'의 영어방송 진행자로 일하게 되었다.
아이바 토구리는 적국인이다 보니 일본에서 전시배급표를 받지 못했고 결국 먹고 살기 위해 라디오 도쿄의 타이프라이터로 취업했다. 1943년 11월 일본군은 연합군 포로들에게 강제로 이 방송의 진행을 담당케 했는데 여기에 발탁된 것이 호주군 소령 찰스 쿠젠스와 미군 대위 월렌스 인스, 필리핀군 노르만 레예스 중위 등으로 이들이 프로듀스를 맡았고 아이바 토구리가 진행자로서 발탁되었다. 아이바 토구리는 종전 직전인 1945년 8월 14일까지 방송을 진행했으며 방송이 없을때는 여전히 타자를 치기도 했다.
그녀는 방송 이름으로 '앤'을 사용했고 조금 뒤에는 '고아 앤'(미국 만화 '고아 앤'에서 가져온 것)으로 스스로를 불렀다. 한 달 월급이 150엔 밖에 안됐는데 쓰고 남은 돈으로 미군 포로들을 위해 의약품과 식량을 사서 밀수했다고 한다. 종전 뒤에 미국 FBI와 미국 정보기관인 CIC가 그녀를 조사했으니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종전 뒤에 다른 도쿄 로즈들은 어차피 일본인이라 미국 국내법으로 처벌할 수도 없고, 대단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라서 미국 정부 기관에서는 적극적으로 도쿄 로즈들의 정체를 캐내려 하지 않았다. 물론 미국 기자들은 라디오 도쿄에 도쿄 로즈의 정체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방송국에서는 그녀들이 전범으로 처벌받을까 두려워해 끝내 정체를 밝히지 않아서 지금까지도 누군지 확실치 않다. 다만, 아이바 토구리는 전쟁이 끝나고 무일푼이었던지라 미국 언론사인 INS와의 독점 인터뷰로 2000$를 받기로 했는데 이게 드러나면서 유일하게 알려진 도쿄 로즈가 되었다.(이 돈은 체포당하면서 결국 못받았다) 그런데 아이바 토구리는 다른 도쿄 로즈들과는 달리 미국 국적을 유지했으므로 미국 국내법상의 반역죄 혐의가 적용된 것이었다. 도쿄 로즈만 때려잡은 건 아니고, 미국은 나치 독일 밑에서 영어 방송을 진행한 여성 아나운서 밀드레드 질라스, 마사 스튜어트 등도 모두 체포해서 반역죄로 징역형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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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종전 직후 미군에게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당시 공산당 때려잡기의 기수로 막강한 힘을 행사했던 방송인 월터 윈첼의 압력 때문에[4] 1948년에 다시 체포되어 반역죄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고, 갓 결혼했던 남편과도 강제로 이혼당한 채 6년 동안 형기를 살다가 1956년에 석방되었다. 반역죄가 들어간 이유는 앞서 설명했듯이 아이바 토구리는 미국 시민권자이므로 적국인 일본의 선전방송을 했다는 것 자체가 반역죄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아이바의 반역 혐의에 대해 증인들이 거짓 진술을 했다는 것이 밝혀져서 1977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사면 및 복권조치를 내렸다. 위에 언급되었다시피 그녀는 음악DJ였지 프로파간다 발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석방 후 본인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41년의 일본 방문은 아버지의 강권(사실상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고, 자신은 정말로 일본에 가기 싫다고 했으나 아버지의 강요를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41년 당시 미일관계가 심히 험악해져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애비가 원수다.
이후 평온하게 살다가 2006년 9월 90세로 사망했다. 사망하기 바로 전인 2006년 1월 미국 2차대전 참전용사회는 그녀에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식량과 의약품을 포로들에게 전해주었고 끝내 미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용기를 보여준 것을 이유로 시민상(Edward J. Herlihy Citizenship Award)을 수여했다. 그녀는 이것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고 밝혔다고 한다.#
4. 플라잉 타이거즈와의 에피소드
플라잉 타이거즈와 도쿄 로즈의 악연도 유명한데, ''''일본제국의 뛰어난 조종사들이 플라잉 타이거즈를 남김없이 섬멸할 것입니다''''고 선포한다든지, 전쟁범죄자로 매도하든지[5] 플라잉 타이거즈 소속 전투기들이 격추된 것을 보도한다든지(물론 수를 과장해서) 했다. 참고로 물론 이때는 아이바 토구리가 방송하기 전이며 방송 시간도 60분이었다.
몇 가지 유명한 에피소드가 남아있는데 1941년 12월 23일 "이틀 뒤 랑군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내줄게요."[6] 라고 방송. 그 말대로 12월 25일에 다수의 일본군 전투기와 폭격기가 랑군을 공습. 플라잉 타이거즈와 영국 공군이 이에 맞서 격추확인 27기, 미확인 포함 36기를 격추시켰다. 반면 플라잉 타이거즈의 손해는 기체손상으로 인한 불시착 2기에 그쳤고, 영국 공군 5기 손실에 불과했다.
미국이 일본에 정식 선전포고를 한 뒤에는 플라잉 타이거즈가 의용병으로 싸울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1942년 7월 4일 해체가 결정되어 미군 휘하에서 싸우게 되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도쿄 로즈는 7월 1일 플라잉 타이거즈의 기지인 헝양 공습을 예고하면서 '''"일본의 조종사들은 절대 플라잉 타이거즈를 미국 독립기념일에 평화롭게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며, 새로 조직되는 23비행대도 중국 하늘에서 쓸어버릴 거예요."'''[7] 라고 선언했다. 이에 플라잉 타이거즈는 마지막 임무로 B-25 폭격기(미 육군 항공대 11폭격대)를 호위해 일본군 비행장을 공습하는 걸로 화답했다. 이 전투에서 플라잉 타이거즈는 4기의 Ki-27을 공중에서 격추하고 한 기도 잃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도쿄 로즈는 이에 대해 침묵했다.[8]
5. 사기 저하성 멘트
"태평양의 여러분, 여러분이 타신 배는 전부 가라앉아 버렸어요. 집에 어떻게 돌아가실 건가요?"
"커다란 배를 타고 있으면 쾌적하겠죠. 그치만 곧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타깝네요. 오늘은 날씨도 좋은데 얼마나 많은 수병들이 목숨을 잃었을까요?"
"지금쯤 당신들의 아내와 연인은 다른 남자와 잘 지내고 있을 거예요."
뭐, 이런 말들을 했는데 보시다시피 병사들의 멘탈에 크게 상처입혔을 것 같지는 않다.(...) 특히 '당신 아내/연인이 다른 놈팽이와 놀아나고 있을지도 모른다'와 같은 선전 문구는 상당히 고전적인 프로파간다 클리셰(?)라서[9] 듣는 병사들에게는 진부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이 방송을 들은 참전용사들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89%가 방송을 프로파간다로 느꼈지만, 사기가 저하되었다고 말한 사람은 10%도 안되었다고 한다. 84%는 그저 재미있어서 들었다고."당신이 여우 구멍(개인호)같은 곳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 당신 아내나 연인은 분명 외로워할 거예요. 그런 여성에게는 분명 유혹자가 나타나죠. 첫 데이트에서 키스까지 했을까?"
6. 계승자
프로파간다를 운영하는 측에서는 선전방송을 적군이 듣도록 하려면 도쿄 로즈처럼 '''적군의 말에 능숙한 여성 진행자'''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에 많은 계승자와 아류가 전쟁때마다 나타나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베트남전당시 월맹에서 선전방송을 맡은 하노이 한나와 걸프전당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에서 선전방송을 맡은 바그다드 베티다. 심지어 북한군도 6.25 전쟁 중 사로잡은 미국 여자들에게 방송을 강요했는데 이때 나온 것이 "평양 샐리"와 "서울 수(Sue)".
[1] "Greetings everybody. '''This is your Number one enemy''', your favorite playmate, Orphan Ann on radio tokyo."라고 소개한다.. 유머 감각도 있었던 듯.[2] 이 경우 아이바 토구리는 아닌데 아이바는 일요일이 휴일이었기 때문이다.[3] 플라잉 타이거즈의 대원들도 이 방송을 즐겨 들었는데 이들은 프로파간다 방송을 하는 여성 앵커를 특별히 애증을 담아 '난징의 나이팅게일'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목소리와 말투로 미루어 그녀가 제인 스야마(일본명 스야마 요시에)일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4] 선전방송으로 미군의 사기를 떨어뜨린 대표적인 존재에게 아무런 형벌을 가하지 않는 것은 연합군의 최고 공헌자인 미국이 해서는 안 될 짓이라며 전방위로 압력을 넣었다고 한다.[5] 플라잉 타이거즈 소속 파일럿 로버트 스캇(Robert Lee Scott Jr.)이 15번째 격추를 기록한 것이 뉴욕타임즈에 실렸는데 도쿄 로즈는 이를 두고 전쟁범죄자로 불렀다.[6] 당시 플라잉 타이거즈가 방어하고 있던 버마 루트의 중요 도시. 결국 1942년 3월 8일 일본 육군에 의해 점령당한다.[7] Japanese airmen would not let the Flying Tigers go away peacefully on the American Independence Day, and that the Japanese would then sweep the incomimg 23rd Fighter Group from China skies.[8] 이상 출처 When Tigers Ruled the Sky: The Flying Tigers: American Outlaw Pilots over China in World War II 저자 Bill Yenne[9] 심지어 현재의 미군도 훈련하면서 이런 소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