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하
1. 개요
발해의 왕족이자 무장.
대무예와 대문예의 종형이다. 726년에 흑룡강 하류 일대에서 살아가던 흑수말갈이 당나라의 흑수주가 되고 그 곳에 장사(長史)를 두어 발해를 견제하려 하자, 앞뒤 양면에서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을 우려한 무왕이 아우인 대문예로 하여금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대문예는 처음부터 당나라를 두려워한 탓에 이에 찬동하지 않았고, 진군 후에도 흑수말갈과의 경계지역에서 표를 올려 무모한 공격을 중단할 것을 간했다. 이에 노한 무왕이 대일하를 대문예와 교체하여 진격하게 하였다. 대일하가 실제로 흑수말갈로 진격하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대일하가 온다고 하자 대문예가 바로 내뺀(...) 점을 보면 대무예의 최측근이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순 있다.
대야발의 아들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발해고에 의하면 대일하는 무왕의 종형이라 기록되어 있고 발해고에서 대야발보다 대일하가 먼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대야발의 아들일 가능성은 없다. 대조영의 아들인 대무예의 종형이라는 기록을 볼 때 대조영보다 위에 형이 있었고 그 형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또 대야발의 4대손이 선왕 대인수인데, 대인수의 할아버지거나 종조부라는 기록이 없다는 점으로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북방 유목민족 특성상 일부다처제에 아들이 매우 많을 가능성이 높다.
2. 기타
등주에 대한 반격 이후 당은 유주의 군대를 동원하여 육로로 발해를 공격해서 마도산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것까지만 나와 있지만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 당 현종 말년 안사의 난으로 하북 일대가 전란에 빠졌음에도 발해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많은 의구심이 든다. 발해의 수도는 지도상으로 약간 동쪽에 위치하는데,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게 발전된 지역들이 아니다. 동모산은 당나라의 추격을 격퇴하고 국가 수립을 한 곳이라는 측면에서 예외이며, 평양은 후기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였다지만 신라와 국경이니까 예외다.
발해가 세운 나라의 특성상 고대부터 번성한 압록강이나 송화강 또는 더욱더 서쪽인 요하 지역으로 팽창하여야 함에도 지금의 연변 자치주 일대에 일대에 머무르고 있다. 위의 내용과 연계해 보면 당의 2차 공세로 인해 초기 발해[1] 가 더욱 동쪽으로 피했다가 당의 내란을 기회로 국력을 키웠다는 설명이 된다. 다만 사서史書들은 羅唐 연합이 폭설로 인해서 실패했다고만 나오기에 자세한 진위 여부는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