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평리-공주 전투

 



1. 개요
2. 전투 경과


1. 개요


전의 전투 이후인 1950년 7월 13일부터 16일동안 미 24사단이 금강에 방어선을 구축해 북한군 2, 3, 4사단을 저지한 전투로, 금강방어선 전투로도 불린다.

2. 전투 경과


7월 13일 대평리에는 미 21연대가 금강의 지류 중 하나인 구곡천을 끼고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서쪽 공주에서도 미 34연대가 부연대장 웨들링턴 중령의 지휘 하에[1] 방어선을 구축 후 미 19연대에게 진지를 인계했다.
7월 14일 아침 미 34연대 방면을 정찰중인 항공기가 북한군들이 나룻배 2척으로 도하를 시도한다는 보고를 했으며, 이에 34연대의 대대들은 적들 수가 늘어날 때까지 침묵했다. 반면 11포병대대 A포대는 동일 항공기의 연락을 받고 155mm 곡사포 2문을 그 지점을 향해 한동안 퍼붓기도 했다. 직후 적들은 포병대대 본부를 노리고 박격포 공격을 가해 통신교환대를 박살냈다. 그런데 직후 적들은 전방의 34연대를 우회해 포병대를 노렸으며, 우선 A포대가 기습을 받았다. 그리고 오후 2시 15분 무렵엔 남쪽의 B포대도 대대급 공격을 받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독립군 출신 장철부 소령의 국군 기병중대가 돌입하기도 했으나 격퇴하지는 못했고, 대신 미군 부상병들을 말에 실어 논산으로의 후송을 도왔다.
7월 15일 대평리를 담당한 미 19연대장 멜로이 대령은 적들이 야간도하를 시도할 것으로 보고 경계를 철저히 시키면서, 강 너머의 마을들을 포격해 적들의 집결을 방해했다. 그런데 해가 지자 북한군 전차 3대가 포격 지원 속에 미군 진지에 공격을 가했고, 이에 미군도 전폭기를 요청해 한대를 격파하고, 나머지 두대는 숲속으로 도주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후에도 보병들의 도하 시도가 두차례 이어졌으나 이를 미군들이 격퇴함으로서 교착 상태가 되었다.
한편 포병들과 함께 논산으로 퇴각해 재정비중인 34연대는 이날 마구평리에 진지를 구축해 대전으로의 퇴로를 지키게 했으나 적들이 전방에 집중한 탓에 전투는 치르지 않았다. 또한 사단 예비로 물러난 21연대는 사실상 전멸 상태에서 교량과 터널의 폭파를 명령받고 11포병대대 C포대와 공병중대를 배속받은 채 옥천으로 진군했다.
7월 16일 새벽 3시 대평리의 미 19연대 진지를 뚫기 위해 Yak-9가 금강 상공에 조명탄을 투하했고, 뒤이어 무자비한 공격준비사격 속에 적들이 도하를 시도했다. 한편 미 19연대는 조명탄을 쏘아가며 이를 저지하려 했고 11, 13, 52 포병대대들도 이를 지원했다. 하지만 조명탄 지원을 전담한 11포병대대원이 고각을 잘못 조정해 쏜 탓에 20여분간 암흑이 찾아왔고, 이 틈을 타 상당수의 적들이 도하에 성공했다.
결국 오전 6시 반 무렵에 연대 방어선 중앙이 뚫리기 시작했고, 이에 멜로이 연대장은 연대 본부중대 일부와 예비로 대기중인 M24 채피, M16 하프트랙 차량들에게 1대대를 지원토록 지시한다. 그리고 이들이 시간을 버는 사이 나머지 병력들은 두만리로 후퇴하나, 이곳도 도로가 차단돼 결국 뿔뿔이 흩어져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딘 24사단장도 금강 방어선이 뚫렸고, 24사단도 여기까지 내려오며 만신창이가 되어 이 이상 결전할 여력을 상실하였다는 판단 속에 7월 19일 대전 전투를 치르게 된다.
[1] 이는 천안 전투에서 마틴 대령이 전사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