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전투
1. 개요
금강을 끼고 벌어진 대평리-공주 전투 이후인 1950년 7월 19일부터 20일 사이 미 24사단이 대전광역시 일대에서 북한군 3, 4사단 및 105 전차사단에 대응해 펼친 지연전.
2. 전투 경과
7월 19일 북한군들이 대전 외곽까지 진출하였다. 일단 북한군 제3사단은 유성구까지 진출해 대전~옥천 일대를 장악해 나갔고, 4사단도 유성을 공격하는 한편, 1개 연대를 금산 방향으로 우회시켰다.
이 와중에 미 24사단의 위기를 감지한 미군 측에서는 33명 가량의 육군 특공대를 급파해 윌리엄 F. 딘 사단장을 빼내려 했고, 이를 위해 김재현 기관사와 부기관사(보조조사 현재영, 본무조사 황남호) 일행이 오후 6시경 특공대와 함께 증기기관차 미카 3-129호에 올라타 이원역을 출발, 대전역까지 올라갔으나 특공대들이 발견 가능성이 없다고 해 돌아오던 중 세천역 부근 구랑터널에 매복중인 북한군들의 집중사격을 받아 운전석에 있던 김재현 기관사가 순직했고, 나머지 이들 역시 상당수가 사상당했다. 참고로 이 야습으로부터 무사히 생환한 이들은 황남호 본무조사와 중경상을 입은 현재영 보조조사, 미군 3명까지 총 5명이라고 한다.
7월 20일 새벽 3시, 공격준비사격 후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갑천에 방어선을 구축한 미 34연대 1대대와 19연대 2대대가 허겁지겁 보문산으로 철수하였다. 하지만 북한군은 시가전으로 야기될 피해를 우려해서인지 주력을 대전 시내로 들이지 않고 오전 6시경 포격 지원 속에 전차 몇대만 시내로 보냈다.[1]
한편 갑천의 부대로부터 보고를 받지 못한 미 34연대장과 윌리엄 F. 딘 미 제24사단장은 일부 병력과 전차만이 대전 시내에 들어온 것으로 판단하고 반격을 진두지휘해 수색중대와 공병중대의 3.5인치 로켓포로 8대, 야포로 2대를 파괴시켰다. 이 무렵 북한군은 금산과 옥천으로의 퇴로를 차단하고서야 주력을 시내로 진입시켰고, 이제서야 북한군의 진의를 파악한 딘 사단장은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철수 명령을 하달했다.
이후 충북 옥천으로 철수하던 미 24사단은 세천터널에서 매복중인 북한군의 기습으로 차와 장비를 버리고 산기슭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고, 이 과정에서 딘 사단장도 부상병에게 줄 물을 뜨러 가다 길을 잘못들어 실종되고 만다.[2]
3. 의의
미 24사단 입장에선 전력의 30%(3,933명 중 1,150명 사상)를 손실하고 사단장까지 실종된 것에 비해 겨우 이틀만 벌어준, 득보다는 실이 많은 전투였다. 그래도 군단에서 요구한 이틀을 버텨줬기에 아주 헛되지만은 않았다.
이후 미 24사단은 22일 옥천에서 수습 후 충북 영동에서 미 1기병사단과 임무교대를 했으나, 딘 사단장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해 존 H. 처치(John H. Church) 장군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