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1. 개요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David Wark Griffith, 1875년 1월 22일 ~ 1948년 7월 23일). 보통 이름을 이니셜로 표현해 D.W. 그리피스, 간단히 그리피스라고도 한다.
밀짚모자를 쓰고 큰 메가폰으로 소리치는 영화 감독의 스테레오타입의 기본이 되고 현대 영화 기법의 기본을 마련한 감독이다.[1]
2. 생애
원래 연극 연출가였으나 당시 한창 뜨던 새로운 미디어였던 영화라는 장르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영화계로 진입 후 '최초의 극영화'[2] 로 불리는 국가의 탄생을 연출하며 유명해진다.
1915년작인 《국가의 탄생》은 토머스 딕슨의 1905년작 《더 크랜스맨》을 각색한 것인데,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금인 11만 달러를 들인 초특급 블록버스터였다. KKK단을 미화하는 동시에, 남북전쟁 이후 남쪽으로 몰려와 땅을 사재기하고 남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북부 자본가들(carpetbagger)을 까는 영화로, 작중에 등장하는 흑인들 중 백인에게 충성하는 흑인은 좋게 그려지지만 나머지 흑인의 대우는 좋지 않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만연하던 인종차별 때문인지 흑인은 캐스팅하지 않고 백인들을 분장시켰다. 그럼에도 조연이나 엑스트라는 주변의 반대에도 흑인들을 캐스팅했다.
그리피스는 이 영화를 자신의 흑인 하녀에게 보라고 티켓을 줬다가 돌아온 하녀가 화를 낸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포레스트 검프》에서도 패러디되었다.
1916년에는 《인톨러런스》를 제작했다. 흑인들을 비하한 것에 대한 사죄라고는 하는데, 대신 비하 대상이 유대인으로 바뀐 게 문제. 그래서인지 흥행에 참패해서 큰 파장을 일으키지는 못했으며, 그의 감독 생활에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4가지 스토리를 평행 구조(액션)로 보여주고, 소비에트 몽타주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영화상 걸작으로 재평가받아서 국가의 탄생보다 더 평이 좋다. 이외에도 <흩어진 꽃잎>이라던가 <풍운의 아들> 같은 릴리안 기쉬와 함께한 멜로드라마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릴리안 기쉬의 대표작들도 그리피스와 작업했던 영화들이다.
잘못된 꼬임에 빠져 재산을 여러차례 탕진했다. 그리고 대머리에 신경을 많이 써서, 특수하게 제작된 밀짚모자를 항상 썼다. 오슨 웰스 감독의 영화 《시민 케인》에 대한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대답했다.[3]
《인톨러런스》를 제작할 때는 외부단체에서 유대인들을 조금 출연시키라고 압력을 넣자, 영화사가 그리피스에게 유대인의 수를 줄이고 로마인의 수를 늘리라고 해서 필름을 불태웠다.[4] 한편 반라의 여자 노예들을 많이 등장시키라고 했지만 그리피스가 거절해서, 그 부분은 다른 감독이 촬영했다.특히 나한테서 표절해 간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어.
《인톨러런스》 실패 이후로는 묻혔다가[5] 초라하게 세상을 떠났다. 호텔 로비에 뇌출혈로 쓰러져 있는걸 발견해 실려갔다가 그대로 사망했다고. 사망 1년전에 이혼한데다 많이 잊혀진 상태였던지 장례식장에서 사람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MGM/UA영화사 중 하나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UA)영화사 공동 설립자 중 한 사람이다.
말년에 릴리언 기쉬와 라이오넬 배리모어 (드류 배리모어에겐 큰할아버지 되는 분.)가 출연한 백주의 결투 촬영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옛 스승에 등장에 릴리언과 라이오넬은 긴장할수 밖에 없었고, 결국 그리피스는 지정된 장소에 숨어서 봐야 했다.
3. 논란
국가의 탄생에서 보여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시각은 당대에도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고, 지금은 논란의 여지 없이 모두가 비판한다. 그러나 영화사에서 큰 업적을 남긴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어떤 면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극 과 극으로 갈리는 인물.
그리피스가 인종차별주의자였는지에 대해서는 영화학자들 사이에서 논의가 많다. 국가의 탄생 이외에 만든 영화들은 인종차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대표작인 흩어진 꽃잎은 차별당하는 중국인 남자에 대한 얘기고 라모나 역시 아메리카 원주민 문제를 다루고 있다. 대체로 국가의 탄생이 인종차별적인건 인정하되, 감독 본인이 일관된 인종차별주의자라기 보다는 어느 정도 의식은 있지만 생각의 깊이가 얕았고 차별적인 사회 분위기에 쉽게 물들었던 것에 가까웠다는 의견도 있다.
4. 연출작 일람
- 1908년 돌리의 모험
- 1909년 도둑들의 헌신
- 1910년 거친 도로
- 1911년 언덕 위의 사랑
- 1912년 보이지 않는 적
- 1913년 어둠의 집
- 1914년 영광스럽지 못한 메달, 학살,탈출
- 1915년 국가의 탄생
- 1916년 인톨러런스
- 1918년 위대한 사랑
- 1919년 흩어진 꽃잎
- 1920년 동부 저 멀리
- 1921년 폭풍의 고아
- 1923년 하얀 장미
- 1924년 인생은 훌륭하지 않다
- 1925년 모래 위의 샐리
- 1926년 사탄의 슬픔
- 1928년 사랑의 드럼들, 남녀의 전투(1914년판 리메이크작)
- 1929년 포장도로의 레이디
- 1930년 에이브러햄 링컨(유성영화)
- 1931년 몸부림(마지막 영화)
이외 수십편의 영화들이 있다.
[1] 영화를 감독할 때 메가폰을 쥔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리피스가 대규모 촬영을 할 때 스탭들에게 메가폰으로 소리치는 것에서 유래하였다.[2] 이전까지 여러 실험적 시도는 있었으나 그리피스에 이르러서야 20년간 찾아낸 영화제작방식을 효율적으로 종합하여 하나의 틀을 만든 것이다. 후대부터 계속 발전한 제작기술 정도만 배제한다면 그야말로 현대의 영화만드는 기초틀은 이 사람이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3] 현실은 오슨 웰스가 장 르누아르에게 받은 영감이 더 컸다고 알려져 있다.[4] 원래 영화 상영이 끝나버린 프린트 필름은 특수한 시설에서 다 소각한다.[5] 정확히는 유성 영화에 적응하려고 했지만, 기껏 만든 영화들이 흥행이나 비평 모두 실패한게 타격이 컸다. 프로듀서와의 갈등 때문에 참여하고도 쫓겨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