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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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2세 (Dàibhidh Bruis)
생애: 1324년 3월 5일~ 1371년 2월 22일
재위기간: 1329년 6월 7일~ 1371년 2월 22일
1. 개요
2. 치세
3. 평가


1. 개요


중세 게일어: Daibhidh a Briuis
스코틀랜드 게일어: Dàibhidh Bruis
노르만어: Dauid de Brus
초기 스코트어: Dauid Brus
영어: David II
스코틀랜드 왕국 국왕으로 브루스 왕조의 두 번째 왕이다. 로버트 1세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생존한 아들이었다.

2. 치세


그의 아버지가 죽자 5살의 나이로 왕의 되었으나 스코틀랜드 왕위를 주장한 에드워드 밸리올(Edward Belliol)[1]에드워드 3세와 함께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자 1332년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그 후 그의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친정을 시작하였다. 백년 전쟁 당시에는 스코틀랜드-프랑스 동맹(Auld Alliance)에 의거하여 1만 2천의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하였다.[2] 그의 원정은 처음에는 제법 성공적이었으나 소집된 잉글랜드 군대 7천이 신속하게 진격해오고 있다는 정보를 듣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알게되어 맞서 싸우려했으나 양군이 만난 네빌스 크로스 전투(Battle of Neville's Cross)에서 스코틀랜드군은 우세한 병력이었지만 잉글랜드군의 모략(謀略)[3]에 참패했고[4] 데이비드 2세는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이때 그의 조카이자 왕위 계승자였던 로버트 스튜어트는 왕을 버리고 튀었다(...). 그 후 그는 11년간 잉글랜드에 포로로 수감되어 있다가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10만 마르크의 몸값을 1년에 1만 마르크씩 지불하는 협정을 맺어서야 스코틀랜드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환 직후 데이비드 2세는 황폐해진 나라를 복구시키려 애썼고 반항적인 귀족들을 제압하며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노력했다. 이후 후사가 없이 46세에 죽어 뒤를 이어 조카였던 로버트 스튜어트가 제위하여 로버트 2세[5]가 되면서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됐다. 한편, 에드워드 벨리올은 1356년까지 왕위계승권을 요구하며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오히려 데이비드 2세에게 패해서 쫓기다가 잉글랜드로 달아났다. 잉글랜드로 망명한 벨리올은 이용가치가 없어져 푸대접을 받았다. 그래도 벨리올은 잉글랜드인이 되었고 정부로부터 작은 성을 하사받아 거기서 눈칫밥이나 먹으며 살았지만 당시로 엄청나게 오래 장수한 84살까지 살았다....

3. 평가


그의 아버지만큼 재능과 능력을 지닌 인물은 아니었다는 평이 있지만 그래도 부왕처럼 온갖 역경을 회복하고 왕위를 회복한 점과 그 후 업적을 고려하면 적어도 동시대의 이 인간보단 낫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왕좌를 넘겨줄 아들을 얻지 못하며 로버트 1세의 직계는 여기서 끊어져버렸고[6] 가까운 친척으로 이어지게 된다.

[1] 1283~1367/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가 옹립한 허수아비 왕 존 밸리올(1249~1314)의 아들.[2] 프랑스 왕의 다급한 요청을 무시하고 10월까지 시간을 끌다가 잉글랜드 주력군이 프랑스에 가있어 국경 지대 방비가 약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군사를 일으켰다.[3] 소식을 못들어서 패했다는 것을 감안한 한자어이다. 모략의 뜻은 사실을 왜곡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꾸미는 꾀을 말한다.[4] 스코틀랜드군 1만 2천 명 중 3천명이 전사했고 스코틀랜드군 사령관 존 란돌프가 전사했다.[5] 로버트 1세의 딸 마저리(Marjorie)와 월터(Walter) 스튜어트 사이에서 나온 아들.[6] 정확히는 부계 단절이다. 장녀 마저리의 아들인 스튜어트 가문의 로버트 2세가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