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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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art Dynasty'''
1. 개요
2. 상세
3. 특징
4. 역대 왕
4.1. 스코틀랜드 왕
4.2. 잉글랜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
4.3.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의 왕
4.4. 계보


1. 개요


영국의 역대 왕조 중 하나.

2. 상세


스튜어트 가문의 시조는 프랑스 브르타뉴귀족 출신으로 11세기 노르만 왕조 윌리엄 1세잉글랜드 침략 때 브리튼 섬으로 건너온 앨런 피츠플래드(플래드의 아들 앨런)다. 앨런은 잉글랜드의 헨리 1세에 의해 영지를 수여받아 잉글랜드의 귀족이 되었다. 11세기 브르타뉴는 인접한 노르망디와의 교류를 통해 노르만 문화에 동화된 켈트인들이 더러 있었고, 노르만 침공에서 공을 세워 영지를 수여받기도 했는데 앨런이 바로 그 경우였다.
이렇듯 앨런의 후손들은 잉글랜드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으나, 12세기 스티븐 왕과 마틸다 공주 사이에서 일어난 내전 시기에 마틸다를 지지했다가 스티븐이 1차적으로 승리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스코틀랜드로 망명하게 된다. 이후 스코틀랜드 던켈드 왕조의 국왕 데이비드 1세와 친분을 맺은 앨런의 증손자 월터(Walter)가 스코틀랜드의 세습 최고시종장[1]으로 임명되면서 비로소 스튜어트 가문이 성립하게 된다. 스튜어트라는 이름의 유래는 월터가 수여받은 직위에서 따 왔다.
스튜어트 가문은 최종적으로 스코틀랜드에 정착하였고 왕실과의 혈연으로 유력 귀족가문 중 하나가 된다. 스튜어트 가문은 원래 왕실의 친척이긴 해도 왕위계승서열이 그리 높지는 않았는데, 더 높은 순위의 왕위계승권자들이 연달아 후사가 끊기거나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유력한 국왕 후보로 올라서게 된다. 독립영웅이자 브루스 왕조의 이었던 로버트 1세의 뒤를 이은 데이비드 2세가 1371년 끝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로버트 1세의 외손자이자 월터 스튜어트의 아들 로버트 스튜어트가 로버트 2세[2]로 왕위에 오름으로써 드디어 스튜어트 왕조가 개창되었다.
잉글랜드와는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전통적인 적인 프랑스와 유대관계를 맺어 잉글랜드를 견제했다.[3]
그 뒤로 로버트 3세, 제임스 1세, 제임스 2세, 제임스 3세, 제임스 4세, 제임스 5세까지 부자계승으로 이어진다. 이 도중에 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왕 헨리 7세의 장녀 마거릿 튜더가 제임스 4세에게 시집 가서 제임스 5세를 낳았다. 제임스 5세는 프랑스 기즈 가문 출신인 마리 드 기즈와 결혼해 메리 1세(스코틀랜드)를 낳는다. 그러나 제임스 5세가 메리 탄생 후 불과 6일 뒤에 사망해 메리는 신생아 때 여왕으로 즉위한다.
1558년 메리는 훗날 프랑수아 2세가 되는 프랑수아 왕세자와 결혼했고 이로써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결합이 완성되는 듯 하였으나 유달리 병약했던 프랑수아 2세는 즉위 18개월 만인 1560년 12월에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요절하고, 사별한 메리는 스코틀랜드로 돌아감에 따라 이는 무산되었다. 메리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유명하지만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알려진 이야기는 상당히 엘리자베스 1세성공회 교도 시각에 치중한 기록이고 의외로 본토에선 메리에게 호의적인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대중적인 차원에서 메리의 비극적인 삶과 화려한 개인사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은 거지, 진지한 역사적 평가로는 스코틀랜드에서는 오히려 더 잉글랜드보다 악평가 하면 악평가하지, 좋게 봐주진 않는다. 사실 암군에 가깝다. 차라리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남의 나라의 문제 많은 비극의 여군주" 수준으로 담담하게 볼 수 있지만, 스코틀랜드 본토 입장에서는 기본적으로 문화적, 가치관적 차이도 굉장히 컸고, 실질적으로는 외국인이나 마찬가지인 주제에 종교적 문제로 사사건건 충돌했으며, 거듭 된 실정으로 인하여 대내외적 정치적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메리 시대를 기점으로 해서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핵심 계층은 예전부터 약했던 왕실에서 클랜 대귀족-개신교 성직자-자치 도시민 중심의 과두정으로 확실하게 넘어간다.
메리는 친족 4살 연하의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 결혼한다. 단리 경은 스튜어트 가의 분가인 "단리의 스튜어트 가문"의 당주 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와 마가렛 더글라스의 아들이다. 마가렛 더글라스는 6대 앵거스 백작 아치볼트 더글라스와 마거릿 튜더의 딸로 이 마거릿 튜더는 위에서 나온 제임스 4세의 아내로 메리의 할머니인 그 사람이다. 마거릿 튜더는 1513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4세가 사망한 후 아치볼트 더글라스와 재혼했고 1527년 아치볼트 더글라스가 사망하자 다시 메스번 경 헨리 스튜어트와 재혼했다. 그러니까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의 어머니 마가렛 더글라스는 메리의 아버지 제임스 5세의 이부 여동생으로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는 결국 메리와는 사촌지간이 된다. 즉 단리 경은 엘리자베스 1세의 친척으로 역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이 있었다. 사실 엘리자베스 1세 이후 튜더 왕가 혈족은 거의 남지 않았고 헨리 8세의 핏줄은 명맥이 끊길 예정이었기 때문에 헨리 7세의 혈통으로 계승자를 찾을 처지라서 단리경은 잉글랜드 왕위 유력 계승자였다. 메리는 프랑스 궁정에 자란 데다가 어머니 쪽 기즈 가문은 프랑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골수 가톨릭이라서 가톨릭 교육을 받았고 친프랑스 성향이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를 찬탈자로 보았고 자신을 적법한 잉글랜드 계승자로 주장했었다. 당연히 잉글랜드에선 두 사람의 결혼을 처음엔 반대했다.

튜더 왕가와 스튜어트 왕가 후손으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왕위계승권이 있는 두 사람의 결합은 당연히 정략적이었고, 신하들의 권유로 한 것이다. 정략결혼으로 애정은 없었으나 1566년 6월에 제임스 6세를 낳았다.
한편 스튜어트 집안끼리의 결혼이었지만 왕조의 이름이 살짝 바뀌었다. 단리 경의 가문은 비록 스튜어트 혈족이었지만 스튜어트가가 스코틀랜드 왕가가 되기 전에 분가한 집안이라 친가로는 거리가 있지만 단리 경의 증조모 엘리자베스 해밀턴은 제임스 2세의 손녀였기 때문에 부계로도 어느 정도 가까운 혈족이었다. 다만 단리의 가문은 한때 조상이 프랑스 궁정에 머물 때 철자를 Stuart 라 고쳐서 기존 스코틀랜드 왕실 이름(Stewart)과 좀 달랐다. 아들대인 제임스 6세(잉글랜드 제임스 1세)시절부턴 Stuart를 쓴다. 단리 경은 스튜어트 왕가의 혈통이었기 때문에 King Consort 직위를 하사받았다.
그러나 메리 여왕이 이탈리아 출신 남자 시종을 총애하면서 추문이 생기자 부부는 곧 별거하게 된다. 그러다 1567년 봄에 화해하여 여왕이 별장으로 불러 단리 경과 오붓한 시간을 보냈는데, 여왕이 공교롭게 외출한 사이 별장은 폭파되고 단리 경은 교살당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실은 자신이 총애하던 시종이 살해당한 뒤 여왕은 새로운 정부(情夫)로 야심만만한 보스웰 백작과 바람이 났었고, 여왕의 복수와 국서(King Consort)를 살해하여 실권을 쥐고 싶어한 보스웰 백작의 합작이었다. 그래서 단리 경과 화해한 척하며 살해한 것이었다. 단리 경 살해의 배후자 보스웰 백작 제임스 햅번은 이후 메리를 동거에 들어갔고, 결혼까지 한다. 메리는 곧 임신까지 하고 만다. 그런데 '''더군다나 여왕의 정부 보스웰 백작은 바람이 났을 때 이미 유부남이었다.'''[4] 아무리 왕이라해도 아내가 정부와 간통하여 남편을 모살한 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할 파급력이었고 당시 존 녹스가 종교개혁으로 도덕적으로 엄숙한 청교도 신앙이 이미 스코틀랜드에 깊게 퍼졌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완전히 무너져버린 여왕은 자기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버림 받았다. 여왕은 남편 살해 공모자로 의심받는 데다가 남편 살해 용의자인 보스웰 백작 제임스 햅번과 결혼했다는 사실 때문에 메리의 지지자인 가톨릭 교도들까지 여왕의 해명을 요구하기 이르렀고, 결국 메리는 반란을 일으킨 신하들에게 붙잡혀 감금됐고 양위를 강요당해 결국 생후 10개월밖에 안된 아들 제임스에게 양위하고 폐위당했다. 감금 중에 보스웰과 가진 아이를 유산한 메리는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탈출하고 군사들을 끌어 모아 반란한 신하들에게 맞서 다시 왕위를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결국 패배하고 스코틀랜드를 떠날 처지가 된다. 메리는 그나마 왕래가 있던 엘리자베스 1세의 잉글랜드로 망명했으나, 죄수 신분으로 전락해 약 19년간 감금 생활을 하다 결국 1587년 처형되었다.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는 어머니의 양위로 생후 10개월 만에 스코틀랜드 왕으로 즉위했는데, 1603년에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자 그 후계자로 지정되어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이는 엘리자베스 1세의 사망으로 헨리 8세의 직계가 모두 단절되었기 때문에 헨리 7세의 후손을 찾아야 했고 헨리 7세의 딸이 스코틀랜드 왕비가 되어 그 후손이 제임스였기에 가능한 일 이었다. 사실 엘리자베스 1세가 죽기 수십 년부터 엘리자베스 여왕은 후계 지명 이야기만 나오면 벌컥 화를 냈지만 혈통상으로 제임스가 가장 우선인 건 그당시 신하들이 매우 잘 알고 있었고 현실적으로 개신교 제왕 중에 잉글랜드와 가장 밀접하고 종교개혁을 잉글랜드보다 더 철저히 한 곳이 스코틀랜드라 잉글랜드의 신하들도 납득을 했다.
이렇게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위까지 얻게 되면서 최초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양국의 통합 왕조가 되었는데 그가 영국의 제임스 1세이다. 거기에 웨일즈와 아일랜드까지 얻어 제임스 1세는 브리튼 섬과 그 일대 전체의 왕이 되었다. 제임스 1세의 조상들은 몇 명이나 잉글랜드와의 싸움에서 전사했는데 황당하게도 그 후손에게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셈이다.
찰스 1세 때는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으로 일시적으로 영국에서 쫓겨나기도 했으나, 찰스 2세 시대에 복위하였다.
하지만 제임스 2세가 딸 메리 2세와 사위 윌리엄 3세에게 명예혁명으로 쫓겨나면서 직계가 단절되고, 메리 2세의 뒤를 이은 앤 여왕이 죽으면서 영국에서의 스튜어트 왕조는 역사에서 퇴장하게 되었다. 그 뒤를 이은 왕조는 독일계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왕조.
사실 프랑스로 망명한 제임스 2세의 후손들이 루이 14세의 지지 하에 영국의 왕위를 요구하며 자코바이트 운동을 일으켰지만 이쪽도 결국 단절되면서 애매모호하게 끝났다. 다만 스튜어트 왕가가 단절됐을 뿐 이와 별개로 찰스 2세의 서자들은 공작 작위를 받아 현재도 그 후손들이 영국 스튜어트 가문의 맥을 잇고 있다. 단지 서자의 후손인 관계로 왕위계승권이 없어서 자코바이트 왕위 요구자로 간주되지 않을 뿐이다.
다만 왕조로서의 스튜어트 가문은 단절되었지만 스코틀랜드 클랜의 특성상 분가가 매우 많아 가문의 혈통은 적서 모두 포함해서 계속해서 내려오고 있다. 스튜어트 전체를 대표하는 가문의 수장은 왕조의 단절 이후 따로 존재하지 않지만, 현재는 갤러웨이의 스튜어트 가문이 최선임으로 여겨진다.

3. 특징


스튜어트 왕가는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매우 친밀하였다. 스코틀랜드 왕조 때부터 잉글랜드 견제용으로 프랑스와 깊은 관계를 맺었고, 국혼은 물론이고 청교도 혁명, 명예 혁명 때는 도피처로 프랑스를 택했다.
굉장히 많이 반란, 전사에 시달린 왕조이기도 하다. 제임스 1세(신하들의 음모로 암살), 제임스 2세(잉글랜드와의 전투에서 전사), 제임스 3세(귀족들의 반란으로 살해), 제임스 4세(잉글랜드와의 전투에서 전사), 제임스 5세(잉글랜드와의 전투에서 지고 돌아와 곧 신경쇠약으로 병사), 메리 1세(귀족들의 반란으로 쫒겨남), 찰스 1세(반란으로 단두대형), 제임스 2세(귀족들의 반란으로 쫓겨남). 안습.
로버트 2세부터 제임스 2세까지 12명의 왕이 있었는데 신경쇠약으로 사망한 제임스 5세와 나름 천수를 누린 제임스 6세=제임스 1세, 찰스 2세를 제외하면 9명의 왕이 쫒겨나거나 내외적인 이유로 죽음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가 안 끊기고 꽤나 오래 이어진 것이 신기할 정도다. 진지하게 평가하면 대부분 저렇게 취약한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잉글랜드 상대로 전쟁하다 죽거나, 아니면 어설프게 왕권을 강화하려 하다 이미 16세기 중엽쯤 되면 아예 국왕 없이 나라 다스리는 것에 익숙해진 귀족, 관료 계층에게 팽당한 경우가 많다. 제임스 6세의 경우 그 취약한 왕권의 기반을 잘 알기에 장기적으로는 이를 강화하면서도 정치적 분란이 터질 때마다 유연하게 대처하여 그나마 왕관도, 나라도 잃지 않은 상태에서 제명에 곱게 죽은 거고, 찰스 2세는 영국 전역을 휩쓴 내전기 이후 지속적인 정치적 불안정에 대한 염증에 묻어간 덕이 컸다.
이렇게 험난한 역사가 이어진 가장 큰 이유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이지만, 또 다른 이유는 본질적으로 여러 스코틀랜드 귀족들 가운데서 옹립된 왕인 스튜어트 왕조는 권위나 세력 면에서 다른 귀족 가문들을 압도할 정도로 대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임스 1세에 이르기까지 스튜어트 왕가는 절대군주가 될 수 없었고 그저 대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봉건적인 권위를 가진 왕이었을 뿐이다. 애초에 중세 스코틀랜드 자체가 봉건적 관계에 기반한 스코트어로우랜드, 씨족 중심의 정치 사회구조를 유지한 게일어하이랜드와 서부 제도로 나누어져, 나라 안에 나라가 공존하는[5] 나라였다.
왕실의 상징적 권력보단 로우랜드의 귀족 가문이든, 하이랜드의 클랜이든 씨족 집단 간 연합과 대립 관계가 훨씬 더 정치적으로 중요했고,이런 문맥에서 스튜어트 왕조는 나머지 유럽 왕가들처럼 대외 전쟁을 통한 권력 신장을 노리다가 하필이면 상대가 잉글랜드란 훨씬 덩치 큰 놈이다 보니 어쨌든 결과만 보자면 실패인 도박에 실컷 꼬라박았던 것이고, 자연스럽게 로우랜드, 하이랜드를 불문한 스코틀랜드 전반에서 클랜, 귀족, 종교개혁 전후의 교회, 도시 의회의 영향력은 더 강해졌다. 권력의 기반인 스코틀랜드 자체가 이리 정치적으로 중앙 집권제가 발달하지 못한 수평적 계약-연맹 관계에 기반한 곳이었으니 결혼을 통해 잉글랜드의 왕관도 물려 받았다 한들 현지 토착 엘리트를 찍어 누를 힘이 없었던 게 자연스러웠다.
스튜어트 가문의 군주들이 딱히 특출나게 무능했다기보단 태생적인 조건 자체가 워낙 빡빡하게 수평적이고 강력한 중앙 권력이 출몰하기 힘든 정치적 환경이었던지라 소위 '절대 왕정'이라 부를 만한 권력을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기반은 중세 유럽 전체 평균으로 봐도 왕권이 유난히 불안정했던 스코틀랜드 출신 왕실인데, 막상 가문의 운명을 바꾼 로또 한방으로 상속 받은 잉글랜드는 반대로 근세 유럽 국가 치곤 정치 제도도 복잡하고, 중앙집권의 역사도 깊고, 피지배층의 역량도 강한데 하필이면 타이밍은 또 유럽 사회 전역이 개신교다 카톨릭이다 치열하게 분열되었던 종교개혁 시기. 근본적인 조건 자체가 이러하니 세습을 통해 잉글랜드, 아일랜드의 왕관을 물려받은 것도 권력을 키워주기보단 오히려 정치적 불안정 요소를 키우기만 했다. 영국식 민주주의, 자유주의의 기원이 되는 사건인 청교도 혁명과 명예 혁명이라는 두 차례의 거대한 정변의 패자다 보니 잉글랜드에서도 당연히 대중적 인식은 꿔다놓은 호구 왕실로 부정적인 평가가 많으나 제임스 6세/1세, 찰스 1세 제위 초기나마 양국의 강력한 청교도들을 정치적으로 제압했던 것만 하더라도 스코틀랜드 시절에 비하면 잉글랜드에선 어찌보면 평타라도 친 셈이다.
계속해서 이사를 다닌 가문이기도 한데, 브르타뉴->잉글랜드->스코틀랜드->다시 잉글랜드로 계속해서 거점이 바뀌었다.
딱 보면 알지만 제임스라는 이름을 좋아했다.

4. 역대 왕



4.1. 스코틀랜드 왕



4.2. 잉글랜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



4.3. 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의 왕



4.4. 계보


스코틀랜드
로버트 2세
로버트 3세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
제임스 2세(스코틀랜드)
제임스 3세
제임스 4세
제임스 5세
메리 1세(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
잉글랜드(제임스 1세 이후)
제임스 1세
엘리자베스
팔츠의 조피
조지 1세
(하노버 왕조)
찰스 1세
찰스 2세
메리 헨리에타
윌리엄 3세
제임스 2세
메리 2세
앤 여왕

[1] Lord High Steward. 높은 영예를 갖는 명예직이다.[2] 월터 스튜어트가 로버트 1세의 딸 마거릿 브루스와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다.[3]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에서 그의 친구이자 살해당했던 뱅코우가 바로 그 시조. 다만 그의 후손이 왕이 된다는 예언을 받는 부분은 셰익스피어 시대 영국 국왕이었던 제임스 1세를 시작으로 하는 스튜어트를 띄워주기 위한 작가의 가필로 보인다.[4] 여왕에게 장가가려 결혼 20일 전에 이혼했다고 한다.[5] 이렇게 근대적 관점에서 보자면 '나라 안에 나라'가 속한 경우는 사실 나머지 유럽, 아니 전 세계적으로도 흔했지만, 스코틀랜드와 달리 이웃나라 잉글랜드를 비롯한 외부 유럽에서는 소위 근세라 부르는 15-17세기 걸쳐 대규모 전쟁을 통해 수도 박고 중앙에서 다스리는 왕실의 권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사례들이 늘어났고, 결국 근대적 의미로 국가라는 통치 조직 형성 과정을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