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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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에드워드 2세와 이사벨라의 장남으로 아버지와 달리 명군이었던 그의 조부 에드워드 1세에 비견된다는 평가를 받았다.
에드워드 3세의 아버지였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는 왕위에 오른 이후로 의회와 반목을 일삼았을 뿐 아니라 실정을 숱하게 저질러 귀족들이나 다른 왕족들, 주교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결국 1314년에 배넉번 전투에서 패배하여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자 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사촌인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등을 비롯한 의회의 주요인물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는 등의 강수를 두었지만 결국 아내인 이사벨라와 그의 가신인 모티머 등이 정변을 일으켜 에드워드 2세를 끌어내리고 대신에 그 아들인 에드워드 3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3세가 즉위했을 당시에는 나이가 어려 어머니 프랑스의 이사벨라의 섭정을 받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에든버러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으로 스코틀랜드의 국왕 로버트 1세는 정식으로 왕위를 인정받았으며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모든 권리를 무상으로 포기하였다.[1] 그리고 1328년 조인된 노샘프턴 조약으로 로버트 1세와 정략 결혼을 맺어 양국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일설에 에드워드는 조부인 에드워드 1세의 유언을 생각하여 이러한 조치들을 못마땅해하였으나, 당시 세력이 강했던 그의 어머니의 압력을 받고 굴복하였다고 한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1330년 모후 이사벨라의 정부(情夫) 로저 모티머를 체포하여 처형하고[2] 이사벨라를 수도원에 유폐하였다.
2. 스코틀랜드 정벌
왕권을 강화시키는 데 성공한 그의 첫 번째 목표는 스코틀랜드였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로버트 1세가 죽고 그의 아들이자 에드워드의 매제 '''데이비드 2세'''가 즉위했는데 그의 나이가 아직 어린 데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이었다. 이를 이용한 에드워드 3세는 로버트 1세가 추방한 친잉글랜드 귀족들의 쿠데타를 지원하여 그들과 함께 더플린 무어 전투와 할리던 힐 전투에서 스코클랜드군을 격파해, 그들의 우두머리 에드워드 밸리올을 왕위에 앉히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로 망명하였던 데이비드 2세가 1341년 다시 스코틀랜드 왕위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으므로 에드워드 3세의 야망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어 한동안 잉글랜드를 넘보지 못하게 했다. 데이비드 2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막대한 몸값을 내기로 약속하고 풀려날 때까지 11년간이나 잉글랜드에서 죄수 생활을 할 정도로 굴욕을 당했다. 특히 잉글랜드의 공격으로 스코틀랜드는 국토가 초토화되면서 재정이 심하게 악화되었는데 데이비드 2세의 몸값을 낼 엄두가 안 나 잉글랜드에게 사정하여 깎아야 했고 이를 에드워드 3세가 죽을 때까지 갚지 못할 정도였다.
3. 백년전쟁
프랑스의 샤를 4세가 사망하고 카페 왕조가 단절되자 1339년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그는 필리프 4세의 외손자였으므로 왕위 계승을 주장했지만 살리카법으로 모계 계승은 인정받지 못했고 결국 발루아 왕조 필리프 6세에게 밀려 실패했다. 거기다가 데이비드 2세가 프랑스로 망명하자 프랑스 플랑드르 무역의 침해에 간섭하여 백년전쟁을 촉발시켰다.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의 활약으로 크레시 전투에서 대승하였고 같은 해 칼레를 점령하여 프랑스 침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1355년 재차 개전, 이듬해의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하고 아키텐을 얻었다. 이후 1369년 재차 개전하여 또 승리를 거두었지만 잉글랜드군의 만행에 질려 했고 무엇보다 나라를 지키려는 강력한 프랑스 국민주의에 압도되어 대륙에서 철병했다.
1341년 프랑스 침공을 두고 손수 영국 해군함을 사전 검열했는데 이것이 세계 첫 관함식이다.
4. 말년
말년에는 의회의 반대에 시달리고 정부 앨리스 페러즈와 열애하는 가운데 4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에게 정권을 농단당했다. 그의 치세는 기사도의 최후를 장식하는 시대임과 동시에 장기간에 걸친 대륙 전쟁으로 인해 봉건 군제가 퇴색하여 봉건 말기의 양상이 조야를 뒤덮고 있었다. 흑사병의 만연은 그의 치세기에 해당되며 또 정치의식의 앙양으로서는 1376년의 선량 의회가 있었고 존 위클리프의 개혁도 이 시대에 발단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전쟁 비용을 많이 써왔기 때문에 국가 재정에 대한 의회의 힘이 강해지게 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가 자기보다 먼저 사망하자 아들을 뒤따르듯 다음해인 1377년 쉰 궁에서 사망하였다.
5. 후손
당시에는 영아 사망률이 매우 높아 왕족으로 태어나도 어린 나이에 사망하는게 당연시 되는 시대였고, 이로 인해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은 많은 왕족들과는 다르게 에드워드 3세의 슬하에는 장성한 아들들이 꽤 많았다. 장성한 아들만 해도 5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의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는 부왕보다 먼저 병사했고 에드워드의 아들이자 에드워드 3세의 손자였던 리처드 2세가 왕권을 이어받아 즉위했다. 하지만 어린 리처드 2세가 즉위한 틈을 타 에드워드 3세의 나머지 자녀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왕위 계승 분쟁을 벌였다. 특히 3남 클라렌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3] , 4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5남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후손들 사이에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놓고 분쟁이 터졌으며 이는 결국 백년전쟁 종전 후 장미 전쟁으로 표출된다.
에드워드 3세의 넷째 아들인 제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John of Gaunt·1340∼1399)의 후손으로 코난 도일[4] , 베네딕트 컴버배치[5] 가 있다. 즉 이 둘은 32촌 관계인 것. [6]
6. 영어의 수호자
에드워드 3세는 처음으로 영어를 장려한 왕이기도 하다. 당시 잉글랜드 지배층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프랑스어만을 썼다. 국어가 오히려 하층민의 언어로 취급됐었던 셈. 그러나 백년전쟁을 일으키면서 대규모 군대를 소집해야 하는데 당시 잉글랜드의 군사들은 농민들로 이루어진 징집병들이 대부분이었기에 하층민들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고, 여기에 영어를 이용해 민족감정을 고취시킨 것이다. 어떻게 했는고 하니, 필리프 6세가 잉글랜드를 침략하고 민중들을 프랑스화시키며 잉글랜드인의 언어인 영어를 말살하려고 한다는 선전을 펼쳤다. 그리고 에드워드 3세는 곧바로 전쟁 준비를 위한 의회를 소집했는데, 본래는 프랑스어만 사용되던 의회에서 귀족들에게 이제부턴 공식적으로 영어를 사용할 것을 강요했고, 이게 지배층 사이에서 영어가 공식 언어로 채택된 첫 번째 일이었다.
이런 영어 장려 정책은 에드워드 3세 이후로 리처드 2세, 헨리 4세 등을 거치며 이어졌고, 마침내 백년전쟁이 끝날 때 즈음에는 완전히 영어가 잉글랜드의 언어로 굳혀지게 되었다.
7. 관련 문서
[1] 사실 모티머도 스코틀랜드를 멸망시키려고 원정을 시도했지만 웨어데일 전투에서 패하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다.[2] 특히 모티머가 에드워드 3세의 숙부인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먼드를 무고해 처형한 뒤 스스로 켄트 백작이 되었고 이사벨라는 이를 감싸면서 귀족들이 반발하게 되었다. 그래서 에드워드 3세는 모티머와 이사벨라를 숙청할 때 귀족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3]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은 사실 서른살도 되기 이전에 요절했고, 아들이 없었기에 그의 자손들은 이용당하고 휘둘리기만 하는 입장이었다.[4] 곤트의 존의 15대손[5] 곤트의 존의 17대손이자 리처드 3세의 후손[6] 실제로 7촌이 넘어가면 유전적으로도 남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