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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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에드워드 1세 (Edward I)
'''출생'''
1239년 6월 17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사망'''
1307년 7월 7일 (68세)
잉글랜드 왕국 컴벌랜드 브러프 바이 샌즈[1]
'''장례식'''
1307년 10월 27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재위'''
잉글랜드 왕국의 왕
1272년 11월 20일 ~ 1307년 7월 7일
'''배우자'''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1254년 결혼 / 1290년 사망)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1299년 결혼)
'''자녀'''
엘리너, 조안, 알폰소, 마거릿, 메리, 엘리자베스, 헨리, 에드워드 2세, 토머스, 에드먼드
'''아버지'''
헨리 3세
'''어머니'''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
'''형제'''
마거릿, 베아트리스, 에드먼드, 캐서린
1. 개요
2. 생애
2.1. 태자 시절
2.2. 내정
2.3. 외정
2.4. 사망
3. 평가
4. 그 외
5.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6.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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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왕인 헨리 3세의 아들이며 에드워드 2세의 아버지로, 잉글랜드 중앙집권화의 기반을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잉글랜드 의회를 창설하여 그 기초를 닦은 명군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웨일스스코틀랜드의 입장에서는 잔혹한 침략자이며 학살자이다.
키 188cm로 당시에는 엄청난 키였고, 현대에도 상당한 장신이다. 그래서 '''꺽다리 에드워드(Edward Longshanks)'''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졌다. 한편 에드워드 1세는 숙적 스코틀랜드를 크게 격파하고 스코틀랜드 독립을 위해 활동한 윌리엄 월레스를 붙잡았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인들의 망치(Hammer of the Scots)'''라는 별명도 있다.

2. 생애



2.1. 태자 시절


그 유명한 존 왕손자이자 헨리 3세의 장남으로 헨리 3세 때에는 할아버지 존 왕이 치세 시절에 일으킨 갖은 사고로 인하여 마그나 카르타가 수립된 이후 왕권과 신권이 충돌하던 시대였다. 게다가 해외의 국가들과의 사정도 좋지 못했고 내분도 심하게 일어나 잉글랜드의 국력은 무척 쇠약해져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에드워드 1세는 태자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내어[2]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던 부왕 헨리 3세를 도왔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중 가장 큰 위기는 귀족이었던 시몽 드 몽포르가 일으킨 2차 바론 전쟁에서 부왕을 도와 국왕군에 참전했으나 패배했던 일이었다.
프랑스 혈통의 귀족인 시몽 드 몽포르는 헨리 3세에게 있어 당대 최고의 정적으로[3] 헨리 3세의 왕권 강화책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그 힘을 바탕으로 왕을 압박하여 옥스퍼드 조례를 인정하도록 굴복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헨리 3세는 옥스퍼드 조례를 지킬 생각이 없었기에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를 번복하려 하자 시몽 드 몽포르는 분노하여 귀족 세력을 규합하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헨리 3세는 국왕군을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나 오히려 루이스 전투(Battle of Lewes)에서 시몽 드 몽포르와 귀족들이 이끌던 군대에게 그야말로 탈탈 털려버리고 말았다(...).[4] 결국 에드워드 1세는 부왕과 함께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했으며 결국 옥스퍼드 조례가 통과돼버리고 잉글랜드 의회가 소집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는 복수하기 위해 탈출을 감행하여 글로스터 공과 함께 국왕군을 결성, 이브샴에서 다시 한번 시몽 드 몽포르의 반란군과 싸웠으며 마침내 이브셤 전투(Battle of Evesham) 반란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5] 시몽 드 몽포르는 이 싸움에서 전사했고 에드워드 1세는 자신에게 큰 굴욕을 주었던 그의 시체를 찾아내 오체분시하고 난자해 복수를 마쳤다.
이브샴에서 승리한 이후로 에드워드 1세는 왕세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부왕이었던 헨리 3세 이상의 영향력과 권력을 손에 쥠으로써 잉글랜드의 실권은 사실상 에드워드 1세의 것이 되었다. 그 후 에드워드 1세는 명성을 더욱 드높이고자 1271년에 제8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으나 동행했던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일찍 죽고, 명목상의 예루살렘 왕이었던 키프로스의 위그 3세는 바이바르스와의 휴전을 선언해버렸다. 에드워드 1세는 이 휴전에 반대했지만 이슬람 측에서 보낸 자객에게 부상을 입어 건강이 크게 악화되자[6] 여러 악조건에 부딪혀 귀국하였다. 그 와중에 헨리 3세는 잉글랜드에서 병사하였고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로 돌아오자마자 왕위에 올랐다.

2.2. 내정


태자 시절부터 대담한 활약을 보인 에드워드 1세는 왕위에 오른 이후 강력한 군주로 군림하였으며 왕권을 강화하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초석을 다지기 위해 이전의 왕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법률을 제정하였으며 덕분에 '잉글랜드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라는 별명도 얻을 정도였다고.
기존의 관습법을 정비하여 국법의 불합리하던 점들을 해소시키기도 했지만 또한 법령을 통해 강력한 교회의 권력을 억눌렀으며[7] 영주들이 지닌 땅을 재분배하여 그 권력을 분산시켜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양모와 와인의 생산을 장려하여 국가의 재정을 확충시키는 등 잉글랜드의 중앙 집권화를 착실히 이루어 나갔다. 사실상 잉글랜드 봉건 제도의 종말을 알린 왕으로, 봉건시대 유럽에서 강력한 권력을 누리던 영주들과 교회를 끝없이 견제하고 약화시켰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물론 봉건제는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또한 노르만 귀족 계급과 앵글로색슨족 평민 계급을 하나로 뭉쳐 단결력을 높이기 위한 취지에서 의회를 운영함에 있어서도 제법 공을 많이 들였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 프랑스어를 사용했던 잉글랜드의 귀족과 왕족들에게 영어의 사용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비록 태자 시절에 꺾었던 정적 시몽 드 몽포르를 증오하기는 했지만 그의 의회 운영법만큼은 적극적으로 본받았으며 문화적, 정치적으로 상하 정치 계급의 화합을 이루어 강력한 결속력을 이끌어 내려고 노력했다.
특히나 의회를 통해 지속적인 과세징수를 추구했는데 특히 1295년에 연 모범의회에서는 다수의 귀족, 모든 주교와 대주교, 각 주에서 기사 2명, 소도시들에서 대표 2명이 참석하는 등 광범위한 지역과 계층에서 대표를 보내도록 하여, 중앙통치에 도움이 되도록 의회의 권위를 높혔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를 통해 후에 있을 하원, 상원 체제 역시 어느 정도 구축했다. 오늘날 오랜 의회 전통으로 유명한 영국의 의회정치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2.3. 외정


에드워드 1세는 내정으로 잉글랜드의 통치력을 단단히 다지는 한편 대외적으로도 잉글랜드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였다.
잉글랜드의 역대 국왕들은 명목상 웨일스를 제후로 두었지만 그곳에서 발휘할 수 있는 실권은 거의 없었고, 잉글랜드의 왕들도 웨일스에서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은 웨일스의 통치세력에게 그리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까지 웨일스는 사실상 독자적으로 놀았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의 독자적인 세력을 제압하고 그곳에서도 실질적인 통치력을 발휘하고자 하였다. 때문에 친히 원정을 나가서 직접 통치에 반발하는 웨일스의 토착 영주들과 싸워 이겼고 이들을 복속시켜 잉글랜드 국왕이 웨일스에서도 실권을 발휘하도록 하였다.[8]
한편 북쪽 스코틀랜드에서는 던켈드 왕조의 왕이었던 알렉산더 3세가 1286년 3월 18일 뜻하지 않은 사고로 사망했다. 그날 밤 알렉산더 3세는 연회를 베풀고 술에 만취한 상태로 부인을 만나러 간다고 말을 타고 갔다가 신하들과 떨어진 상태에서 낙마사했다. 알렉산더 3세는 원래 헨리 3세의 딸 마거릿과 사이에서 자식들을 뒀으나, 딸 마거릿 하나 외에는 모두 요절하면서 후계자가 없었다. 알렉산더 3세의 유일한 혈손으로 딸 마가렛이 노르웨이 왕 에이리크 2세와 결혼해서 태어난 외손녀인 마거릿이[9] 있었고 마가렛을 생전에 후계자로 지명했기에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마가렛이 스코틀랜드 차기 여왕으로 지목되자 에드워드 1세는 마가렛을 자신의 아들 에드워드 2세와 혼인시켜 스코틀랜드까지 집어삼키려 했다. 하지만 마가렛이 갑자기 어린 나이에 병사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10]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기회를 노리다가 스코틀랜드 귀족들 사이에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자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자신을 스코틀랜드 왕으로 인정하는 이에게 스코틀랜드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제안하였다.
이때 존 발리올이라는 영주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의 강력한 군사적 지원에 힘입어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되었으나 정작 그에게 실권은 전혀 없었고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허수아비 왕에 불과할 뿐이었다.
1293년, 어린 조카를 대신해 파이프 백작위의 계승권을 주장한 스코틀랜드 귀족 맥더프가 잉글랜드 왕의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스코틀랜드인들 사이에 일어난 분쟁을 잉글랜드인 재판관이 심리하게 된 것이다. 이는 스코틀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 1290년 버갬 조약을 에드워드 1세가 멋대로 위반한 것...이라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주장했다. 하지만 사실 1292년 발리올이 에드워드 1세를 상왕으로 인정하고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스코틀랜드 왕국을 대표하여 그에게 신서를 한 시점에서 이전의 조약은 무효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음해 에드워드 1세가 발리올과 스코틀랜드 귀족들에게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할 것을 요구했을 때 갈등은 정점에 달했다. 결국 1295년 2월 존 발리올은 에드워드 1세에게 바친 신서를 파기한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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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콘의 돌을 가져가는 에드워드 1세.
그러자 에드워드 1세는 반역자 발리올을 왕국으로부터 추방한다는 판결과 함께 그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비롯한 모든 재산의 몰수를 공표했다. 그리고 1296년 군대를 일으켜 대군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인들을 도륙했고, 발리올을 사로잡아 폐위시켰다. 그리고 아예 스코틀랜드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고 나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왕임을 선포하며 스코틀랜드를 합병했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왕권의 상징이었던 '운명의 돌'[11]과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성 마거릿의 검은 십자가상마저 1296년에 빼앗아 런던 웨스터민스터 사원으로 가져가버렸다.[12] 이 때문에 후에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의 왕을 자칭하며 독립을 선언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식민지가 되어 왕도 없이 몇 년을 지내야만 했다. 물론 스코틀랜드 왕실과 귀족들은 엄청난 굴욕을 당한 터라 에드워드 1세를 증오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의 잔혹한 학살에 증오심을 품게 된 스코틀랜드인들은 독립을 요구하며 거세게 저항했다. 이에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에게 호의적인 몇몇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뇌물과 권력으로 달래어 포섭하는 등 회유책을 쓰면서도 반항하는 도시와 마을들을 가차없이 짓밟고 해당 지역 사람들을 귀족 시민 가릴 것 없이 무차별 학살하는 등 더욱 잔혹한 통치를 일삼았다. 하지만 이러한 잔혹한 학살은 역효과를 불러와 스코틀랜드 귀족과 백성들의 원한과 증오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기에 나타난 윌리엄 월레스는 스코틀랜드 민중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저항군을 조직하여 수차례 잉글랜드 군대를 패퇴시켰다. 특히 스코틀랜드와 가까운 잉글랜드 북부의 도시와 마을들까지 공격하여 약탈하는 대담함까지 보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에드워드 1세는 토벌군을 파견하여 폴커크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했으며 결국 윌리엄 월레스를 붙잡아 사지를 찢어죽여서 본보기를 보였지만 끝내 스코틀랜드 저항군은 항복하지 않았다.

2.4. 사망


비록 스코트랜드의 지도자 윌리엄 월레스를 잡아 죽이긴 하였으나[13] 스코틀랜드인들의 저항은 날로 심해졌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귀족과 평민들의 추대로 스코틀랜드 국왕이 된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선포했다. 에드워드 1세는 로버트 1세와 싸우기 위해 직접 스코틀랜드로 원정을 나가 로버트 1세의 스코틀랜드 저항군과 싸워 그들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패배한 로버트 1세는 아일랜드로 도주했다.[14] 하지만 에드워드 1세는 이 원정 도중에 병을 얻어 진중에서 68세로 일생을 마쳤다.
끝내 스코틀랜드를 평정하지 못했던 에드워드 1세는 최후까지도 이를 원통하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죽기 전에 '내가 죽거든 시체를 화장해서 남은 잿가루와 뼈를 부대 자루에 넣고 병사들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진군하라. 그리고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평정한 후에 나를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도 한다. 정말 지독한 노인네다(...).

3. 평가


중세 잉글랜드인에게는 '''명군'''이지만, 스코틀랜드인에게는 '''악마'''의 현신 그 자체.
잉글랜드를 발전시키고 중앙 집권화의 초석을 쌓았으며 대외적으로도 큰 활약을 펼친 위대한 명군으로 손꼽힌다. 전략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는데[15] 수많은 전투를 치렀음에도, 루이스 전투 외의 패배를 겪어본 바 없고,[16] 그나마도 이때는 자신이 총사령관이 아니었다. 또한 장궁의 도입을 권장했는데 이는 훗날 백년전쟁에서 연승의 요인이 된다.
한편으로는 성품이 대단히 완고했고 적에게는 무자비하다 못해 잔혹하였다. 시몽 드 몽포르윌리엄 월레스와 같은 정적들에게는 사지를 찢어버릴 정도로 냉혹하여 이 때문에 폭군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게다가 상술한 유언을 남길 정도의 전설이 있을 정도로 성격이 지독했다고도 한다. 상술한 내용처럼 머리도 좋고 군사적 능력도 굉장히 뛰어나서 기술과 자원이 훨씬 발전했던 후대 15세기, 16세기 잉글랜드의 왕들도 평정하지 못한 스코틀랜드를 거의 집어삼킬 뻔 했고, 역사학계에서도 조금만 더 오래 살았으면 여전히 입지가 불안하고 조직력이 엉망이었던 로버트 브루스의 군대도 격파하고 진짜 스코틀랜드를 석권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많다. 만약 이렇게 되었다면 먼 훗날 동군연합에 먼저, 그 다음에 광범위한 자치권과 동등한 대표권을 인정받으며 연합왕국에 서서히, 스코틀랜드 고유의 문화와 민족 의식을 지키면서 통합된 것과 달리 일찍부터 상당히 강압적으로 통합되어 지금 우리가 아는 스코틀랜드와는 크게 달랐을 것이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숙적 잉글랜드의 군주들 중에서도 이렇게 자국 역사에 가장 큰 위협이 되었던 이 왕을 공포와 경외심을 같이 담아 '''스코트인들의 망치'''(Hammer of the Scots)라고 부른다.
다만 스코틀랜드인들과 싸우는 와중에도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몇 차례 입었으며, 이를 해결하려고 계속해서 새로운 세금을 매겨 막대한 전쟁 비용을 충당하려 했다. 이는 당연히 잉글랜드 귀족들과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돈이 많았던 유대인 상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하였다. 때문에 말년에는 민심에서 멀어졌으며 잉글랜드 상공업에서 큰 영향력을 지녔던 유대인 상인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추방되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잉글랜드 경제에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이 점은 후대에도 큰 실책으로 손꼽힌다. 스코틀랜드의 경우 에드워드 1세의 개입 탓에 분쟁이 생겼지만, 그는 이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후대의 문제로 만들었다. 특히 에드워드 1세와 귀족들 간의 갈등은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 2세 때로 접어들면서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오점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1세가 무수한 업적을 남긴 뛰어난 왕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지금까지도 잉글랜드인들에게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기에 충분한 편이다. 그야말로 잉글랜드의 초석을 다진 왕으로 평할 만하다.

4. 그 외


  • 에드워드 1세의 시대 이전에는 잉글랜드의 왕족이나 귀족들 대부분이 프랑스의 왕족들과 혈연관계에 있었으며 사실상 잉글랜드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프랑스인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단적인 예로 제3차 십자군 전쟁 당시에 활약했던 사자심왕 리처드 1세만 해도 잉글랜드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일생동안 잉글랜드에는 단 6개월 정도만 머물렀으며 영어는 능숙하지 못했고 주로 프랑스어를 구사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 때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에 어느 정도 존재하던 잉글랜드 소유의 봉토가 크게 줄었으며 자연히 잉글랜드의 왕족들과 귀족들도 점차 현지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부터 잉글랜드의 귀족과 왕족도 프랑스어를 멀리하고 영어를 가까이 하기 시작했으며 에드워드 1세 본인도 프랑스어보다 영어를 더 유창하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 가정사는 불우한 편이다.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첫 번째 아내 레오노르를 일찍 잃었는데, 당시에 에드워드 1세는 너무도 깊은 슬픔에 잠겨서 한동안 일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레오노르는 에드워드와 10대 중반에 결혼해 40대가 될 때까지 무려 16명(4남 12녀)의 아이를 낳아주었으며, 전쟁터에도 남편을 따라나섰고 에드워드가 자객의 독검에 중독되었을 때도 간호해준 충실한 아내였다. 사망 이유는 평생에 걸친 다산과 노산(43세 출산)의 후유증일 것으로 추정된다. 에드워드는 레오노르 외의 여자에게서는 자식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저 16명 중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에드워드 2세를 포함해 5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대부분 갓난아기일 때 죽었다. 두 번째 아내 마르그리트는 에드워드가 죽고 나서 11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 1284년, 45세가 되어서야 후계자인 에드워드 2세를 얻었으나, 에드워드 2세는 아버지와는 성격차가 심해서 부자간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하였다. 에드워드 2세가 세자 시절에 친구인 가베스턴을 지나치게 감싸고 돌자 분노하여 그의 머리채를 붙잡고 손찌검을 하고는, 가베스턴을 잉글랜드에서 추방하기까지 하였다.[17]
  • 금욕적인 성격으로 음식을 절제했고 물 외에 다른 음료는 마시지 않았다.
  • 비록 냉철하고 현실주의적인 성격이었다고는 하지만 의외의 사실이 있다면, 에드워드 1세가 평생 동안 십자군 전쟁에 대단히 집착했다는 점이다. 이는 에드워드 1세 또한 중세시대 유럽인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1세는 이미 태자 시절에 8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였으나, 함께 원정길에 올랐던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가 병사하고 에드워드 본인도 자객에게 죽을 뻔하는 등의 악재에 부딪혀 큰 소득 없이 돌아와야 했다. 에드워드 1세는 이를 평생의 한으로 여겼고, 틈만 나면 중동으로 돌아가 다시 십자군 전쟁을 치르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잉글랜드의 왕으로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기 때문에 그 소원은 평생토록 이루지 못하였다.
  • 사후에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 2세가 부왕이 쌓아올린 업적을 죄다 갉아 먹었다고 손가락질받고 있다. 에드워드 2세는 부왕에 비해 확실히 왕으로서의 능력이 뒤쳐졌으며 결국 로버트 1세와의 싸움에서도 패배하여 스코틀랜드의 지배권을 빼앗겨 버렸다. 결국 에드워드 2세가 프랑스 공주 출신의 아내에게 살해당하고 권력을 빼앗기는 바람에 그녀가 데려온 프랑스 출신 가신들의 손아귀에 잉글랜드가 놀아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가 이들을 무찔러 다시 잉글랜드의 왕권을 바로 잡았다.[18]

5.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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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멜 깁슨이 주연과 감독을 겸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저항군 지도자였던 윌리엄 월레스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큼 희대의 악당으로 등장한다. 아일랜드의[19] 배우 패트릭 맥고한이[20] 열연했다. 재미있는 점은 에드워드 1세를 연기한 배우 패트릭 맥고한도 키가 188cm로 장신이었다는 것.
작중 묘사되는 모습은 그야말로 권모술수의 달인.[21] 피도 눈물도 없는 성격에 혈육도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계략과 술수에는 당할 자가 없는[22] 노회하면서도 교활한 왕으로 묘사되어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영화 마지막에는 결국 스코틀랜드의 저항세력을 이끌던 주인공 윌리엄 월레스를 사로잡아 처형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스코틀랜드인의 시점으로 묘사된 영화인 만큼 과장될 정도로 비열하고 잔혹하며 몰인정한 면만이 부각되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23]
영화 속에서는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런던으로 끌려온 윌리엄 월레스가 처형당하는 순간에 자신도 노환에 시달리며 죽어가다가 최후에 윌리엄 월레스가 산채로 칼로 난자당하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유(Freedom!)"를 부르짖으며 죽자 그 소리를 듣고는 숨을 거둔다. 더욱이 죽기 직전에는 며느리인 이사벨라가 윌리엄 월레스를 고통없이 죽게 해주도록 자비를 베풀 것을 애걸하자 이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며느리로부터 사실 자신의 뱃속의 아이가 왕세자 에드워드 2세가 아닌 윌리엄 월레스의 아이이며, 에드워드 1세의 혈통은 단절되었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듣게 되었으니 더욱 비참해질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는 실제 역사와는 전혀 다르다. 에드워드 1세는 윌리엄 월레스를 죽이고 나서도 2년 정도 더 살았을뿐더러, 윌리엄 월레스가 사망할 당시에 며느리 이사벨라는 어린아이에 불과하였고, 심지어 윌리엄 월레스가 사망하고 에드워드 2세가 뒤를 이어 즉위한 후에야 혼인하였다. 그 뱃속의 아이가 윌리엄 월레스의 자식이라는 것도 영화의 재미를 위한 허구에 불과하다.[24]
  • 로버트 1세를 다룬 아웃로 킹에서 등장하는데 잉글랜드 배우인 스티븐 딜레인이 맡았다. 여기서도 임종을 앞두고 아들에게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란 귓속말을 듣는다. 나름 웅대한 유언마저 깔끔히 무시당한다. 브레이브 하트 때도 그렇고 어째 죽기 전에 누군가가 그의 귀에 대고 험한 말을 하는 것이 전통이 되어 버린 듯하다...
  • 코에이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2에서 등장. 아버지 헨리 3세와 함께 영국 오프닝에서 등장한다. 정치 78, 전투 90, 지모 83에 상업, 건설, 기동, 돌격, 공성 특기를 소유하고 있는 시나리오 중 유럽 최고의 명장. 오프닝 조건은 프랑스 파리를 점령하는 것인데 파리를 함락하면 전투가 5 상승해서 더더욱 먼치킨이 된다. 시나리오 시작 시점이 1271년이라 비교적 오랫동안 활약이 가능하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가 평범한 군주이지만 좀 놔두면 필리프 3세보다 유능한 왕자인 필리프 4세가 등장하므로 그가 등장하기 전에 프랑스를 멸망시키는 게 좋다.
PK 시나리오 3인 늑대 무리들의 포효에서는 1239년 무렵에 헨리 3세가 아들을 낳으면 자동으로 에드워드 1세라고 개명되는 이벤트가 있으며 PK로 시나리오 2를 플레이한다면 프랑스를 점령한 후에 에드워드에게 양위하자. 왜냐하면 프랑스를 멸망시키기 전에 에드워드에게 양위하면 에드워드의 능력치 상승 혜택을 받지 못한다.
덧붙이자면 시나리오 2에서 카스티야 왕 알폰소 현왕의 아내로 설정된 엘레오노르(게임에서는 '엘레오노라'라고 표기된다)는 사실은 알폰소 현왕의 여동생이자 에드워드 1세의 아내이다. 에드워드 1세를 잉글랜드의 왕으로 세운 후 알폰소 현왕을 사로잡으면 사실에서의 부부관계를 재현할 수 있긴 하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튜토리얼 캠페인에서 적으로 등장. 직접 등장하지는 않고 적인 영국군을 이끄는 인물로 언급되며 플레이어는 스코틀랜드 주민들을 조종하며 에드워드 1세가 이끄는 영국군을 물리치는 것이 주 내용이다. 그리고 이후 결정판의 확장팩인 '서쪽의 군주들'에서 주인공을 맡은 캠페인이 나온다. 아들인 에드워드 2세가 아버지의 업적을 돌아보는 내용으로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것과 튜토리얼에서 스코틀랜드와 싸우는 내용으로 마무리 된다. 또한 공개된 도전과제에서 운명의 돌을 빼앗는 내용도 있다는 것이 밝혀졌고 4번째 미션의 도전과제이다.
  • 미디블2: 토탈 워 - 킹덤즈 브리타니아 캠페인에서는 잉글랜드의 후계자로 등장. 중간에 십자군 참전 이벤트도 있으며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다. 간다면 돌아올 시 템플 기사단을 위시한 십자군 병력을 많이 데려오기에 잉글랜드 유저에게는 희망을, 비잉글랜드 유저(특히 웨일스나 스코틀랜드)에게는 악몽을 선사하는 존재. 다만 암살당할 뻔 했다는 사실을 반영한 듯 갔다가 죽고 못 돌아오는 수도 있으니 주의.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당대에 따라올 자가 없는 최고의 무력군주다. 리처드 1세가 무력 19인데 에드워드는 무력 26. 난폭, 잔혹 등 인성을 반영한 트레잇이 고정적으로 붙어 있다.

6. 같이보기



[1] Burgh by Sands /ˈbrʌf/[2] 16세에 가스코뉴의 영주 자격으로 가스코뉴 귀족들의 분쟁을 해결했다.[3] 아이러니하게도 시몽 드 몽포르는 헨리 3세의 여동생의 남편이기도 했다.[4] 당시 국왕군의 병력은 1만이고 몽포르의 반군은 5천으로 국왕군이 우세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에드워드 1세가 수하 병력을 이끌고 적을 선두에서 무찌르는 전공을 세웠으나 달아나는 적을 잡기 위해 전선을 이탈하는 바람에(...) 헨리 3세의 본대가 털려버렸다고 한다.[5] 이때 국왕군은 1만이고 몽포르의 군대는 5천으로 루이스 전투 때처럼 국왕군이 우세했다. 이 전투에서 패한 몽포르 군은 전사자가 4천 명이나 되어 말 그대로 궤멸되었다.[6] 협상하려고 사절을 보내왔는데 이 사절은 애초부터 에드워드 1세를 죽이려고 위장한 자객이었다. 특히 문서를 직접 주겠다고 해서 가까이 갔을 때 바로 숨겨둔 단검을 꺼내서 죽이려했다. 에드워드 1세는 무술로 이슬람 자객을 역관광시켜 죽였으나, 자객이 단검에다 독을 바른 터라 여기에 베여서 중독되는 바람에 치료를 해야 했다.[7] 특히 성직자들이 세금을 교황청이 아닌 국왕에게 납부하도록 했고 명령을 거부한 교회는 재산을 압류하여 왕명을 지키도록 했다.[8] 이때 아들 에드워드 2세를 웨일스의 영주에 임명했는데, 이후로 잉글랜드의 태자들에게 '웨일스의 군주(프린스 오브 웨일즈)'라는 별칭을 주는 관습이 생겼다.[9] 던켈드 왕조의 명군인 맬컴 3세의 부인 마거릿이 시집올 때 스코틀랜드에 선진문명을 전파하여 스코틀랜드의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사후 150여 년이 지나 1250년에 시성되어 성녀 마거릿(St. Margaret)이 되었다. 원래 서양에서는 과거 성인/성녀들이나 조상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짓기 마련인데, 그런 위대한 업적을 세운 성녀가 무려 할머니, 증조할머니라 그 이름을 안 붙여주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 정도.[10] 즉위식도 치르지 못하고 노르웨이에서 배를 타고 오던 중 죽었다. 7살 어린 소녀에겐 힘든 여행이었을 것이다.[11] '스쿤의 돌'이라고도 불리며 영어로는 'The Stone of Scone'이라 한다.[12] 이후엔 잉글랜드 및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의 대관식에 쓰였다. 1950년 크리스마스에 네 명의 스코틀랜드 학생이 이것을 훔치려다가 적발된 바도 있었고 이 돌이 런던에 있는 것에 대해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불만 또한 대단하였다. 결국 1996년에 다시 스코틀랜드로 반환. 스콘석 탈취사건은 2008년에 영화 '스톤 오브 데스티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13] 윌리엄 월레스는 북부 잉글랜드에 대한 살인과 방화죄는 인정해도 자신이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이 없으므로 스스로 반란군이 아니라고 했다.[14] 이 때문에 스코틀랜드도 전면전을 포기하고 게릴라전으로 나가야했다.[15] 실제로 마상시합과 사냥을 좋아했다.[16] 다만 프랑스와 한 전쟁에서는 변덕스러운 동맹군+불안정한 국내사정+중과부적의 여러 가지 악조건 때문에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17] 가베스턴은 에드워드 2세와는 어릴 적부터 죽을 때까지 절친한 친구 사이였는데, 그 사이가 너무도 가까워서 그가 마법을 걸어 에드워드 2세를 조종한다거나 혹은 서로 동성연인 관계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에드워드 2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즉위한 후에 추방당했던 가베스턴을 다시 불러들여 곁에 두고 다녔다. 그러나 가베스턴은 국왕의 최측근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국정을 엉망으로 하여 귀족들의 증오를 받았고 나중에 그를 증오하는 귀족들한테 붙잡혀 처형된다.[18] 사실 아들 에드워드 2세보다 손자인 에드워드 3세가 더욱 에드워드 1세를 닮은 면이 있다.[19] 아일랜드인이지만 미국에서 태어났기에 미국 국적도 가진 이중국적이었다.[20] 2009년에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21] 실제 에드워드 1세도 정치력을 보면 권모술수의 달인이다.[22] 아들 에드워드 2세와 신하들도 생각하지 못했던 전략과 정책을 생각해내어 그들이 감탄할 정도다.[23] 실제로 에드워드 1세는 폴커크에서 자신의 지략으로 영화의 주인공인 윌리엄 월레스를 꺾었으나, 영화 속에서는 이 과정을 매우 찌질하고 비열하게 묘사했다.[24] 혹자는 에드워드 2세의 동성애적 성향 때문에 그가 친아들이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에드워드 2세의 동성애 스캔들 자체는 의혹적인 면이 강하다. 더욱이 에드워드 2세는 아내인 이사벨라 외에도 정부를 두었으며 그 사이에서 사생아를 두기도 하였다. 만일 그의 동성애 스캔들이 사실이라면,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순수한 동성애자가 아니라 양성애자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