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명수

 


성명
도명수(都明洙)

덕경(德卿)
본관
성주 도씨[1]
생몰
1879년 6월 19일 ~ 1976년 2월 25일[2]
출생지
함경남도 홍원군 홍원읍 남당리[3]
사망지
서울특별시
추서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도상봉은 그의 장남이다.

2. 생애


도명수는 1879년 6월 19일 함경남도 홍원군 홍원읍 남당리에서 함경남도 관찰부주사를 지낸 아버지 도진승(都鎭升)[4]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강우규와 함께 홍원 덕흥상회를 운영하여 크게 성공했고, 1919년 덕흥상회 원산지점을 점검차 들렀다가 강우규를 만났다. 강우규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하려 하니 거사 자금을 달라고 요청했고, 도명수는 500원을 주었다. 강우규는 상경한 후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도명수는 덕흥상회 수석 점원 김모(金謀)의 밀고로 홍원경찰서에 체포되어 호된 고문을 받았지만, 자신은 단지 자신을 도와준 은인이 서울 구경을 가신다기에 노자를 드렸을 뿐이라고 항변해 며칠 만에 풀려나왔다.
이후 도명수는 1919년 음력 7월부터 홍원에서 김신근(金信根)·정염구·한원칠(韓元七)·최대용(崔大鏞)·안억준(安檍俊)·김태균(金泰均) 등 동지들과 함께 군자금 27원을 모집해 북간도 국민회에 보냈다. 그러나 이 일이 경찰에 발각되면서 1921년 4월 15일에 체포되었고,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으로부터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자 항소했지만 6월 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21년 12월 22일에 출소했다. 그 후 홍원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8.15 광복 후 서울로 이주했고 1976년 2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도명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 지재공파 27세손.[2] 다만, 성주도씨족보에는 1919년 간도국민단 독립군자금 조달사건으로 투옥된 후 옥중순국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3] 성주 도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최팔용도상봉도 이 마을 출신이다.[4] 1906년 함경남도 관찰부주사 직을 사직하였다.# 1919년 5월 홍원금융조합 감사에 취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