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도씨
1. 개요
경상북도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성씨 집단으로, 전국의 도씨들은 대부분 성주 도씨다.[1] 시조는 고려 명종 때 전리상서를 역임한 도순이며 주로 본관지를 위시로 한 대구광역시/경북 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2. 역사
도씨의 유래로는 한무제때 복파장군 도계가 남월의 반란군 여가를 제압하여 도씨성씨를 하사받은 것이 시초가 된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도계의 후손 도조가 한나라 성제때 고구려에 건너와서, 유리명왕이 이복동생 비류, 온조의 견제를 물리치고 왕위계승을 하는데 기여했다. 즉, 고구려 개국공신의 후손이라는 것.
이후에 도씨는 한반도 전체에 퍼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백제와 신라로도 내려 간 것으로 보이는데 간간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문헌에서 도씨를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설화의 주인공인 도미와 성왕을 전사시킨 신라의 장군 도도 등.
이후에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도진이 왕건에게 개국공신으로서 논밭 800경과 성산부원군으로 봉해져서 현재의 본관인 성주를 관향으로 삼게되었다. 그러나 이후 후에 전리상서를 지낸 도순 이전의 세계(世係)를 분실하여 도순을 시조로 삼게 되었다.
이후에 고려대에는 자주 재상을 배출하는 명문집안이었으나 고려 말기에 이성계의 측근이었던 도응[2] 이 역성혁명을 반대하면서 조선 초에 고려대보다 가세가 기울었다.[3] 친고려적 성향은 조선 중기까지 계속 되었고 이에 조선왕실의 눈밖에 나게 되면서 고려대에 비해서는 고위관직은 커녕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수도 눈물나게 적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본관인 성주나 대구, 경북, 논산 일대에서는 이름 높은 선비집안이었다.[4] 조선 후기에는 다시 왕실의 신임을 얻어 정계에 재진출하기도 했으나 흥선대원군에게 서원철폐령 등의 제재로 인하여 몰락했다. 광복 이후에는 성주군, 대구광역시 인근에서 문중의 서원등을 복원하여 정기적으로 향례를 치르고 있다고 한다. 1981년 도응의 후손인 청송당공파의 종중 문서 일괄이 보물 제 724호로 지정되었다.
3. 항렬
4. 실존인물
4.1. 24세손
4.2. 25세손
4.3. 26세손
- 도승회 - 교육인.
4.4. 27세손
4.5. 28세손
4.6. 29세손
4.7. 30세손
4.8. 32세손
4.9. 33세손
4.10. 34세손
5. 기타
손씨와는 과거 혼인을 금하였는데, 병자호란 당시 낙음공파의 시조인 도경유가 경상감사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전투에서 머뭇거린다는 이유로 휘하에 있던 박충겸이란 자를 참하였는데, 이에 그의 아들이 앙심을 품어 손씨 자객에게 암살을 의뢰하여 살해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로 중재가 있기 전까지 가문들간의 앙심을 품은 암살과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1] 사실상 성의 한자가 도읍 도이면 성주 도씨이다.[2] 두문동 72현 전설의 일원이다.[3] 그러나 태조 2년부터 6년까지 도응이 이성계에게 계룡산일대의 땅을 하사 받은 것으로 보아 양인이나 천민 계층으로 몰락할정도로 기울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이성계는 건국 직후 도응에게 상장군을 내려줄 정도로 매우 친했고, '''참고로 하사받은 땅은 그당시 새로운 수도자리를 놓고 한양과 경쟁했던 명당인 곳이고, 그 토지 문서 일괄은 지금 보물로 지정되었다.'''[4] 애초에 조선 건국 이전부터 대대로 성리학을 연구하는 집안이었다. 다만 조선 시대에는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보다 지역 유지로써 유학을 공부하려는 성향이 강했다.[5] 도상록은 함흥시에서 출생했다, 1년먼저 태어난 도상봉이 함흥시 바로 옆에 있는 홍원군 지재공파 집성촌 출신이므로 지재공파라고 유추할수있다.[6] 야인시대의 김천호, 연개소문의 연남산의 배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