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규

 


출생
1855년 4월 20일
평안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1]
사망
1920년 11월 29일 (향년 65세)
경기도 경성부 서대문형무소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국적
조선대한제국일제강점기 조선
본관
금천 강씨(衿川 姜氏)[2]
별칭
자(字)는 찬구(燦九), 호(號)는 왈우(曰愚)
직업
한의사 → 독립운동가
가족
강중근(아들) 강영재(손녀)
종교
유교(성리학)→개신교(장로회)
의거
사이토 마코토 암살 미수 사건

"단두대상에 홀로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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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이자 한의사. 본관은 진주, 호는 왈우(曰愚).[3]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55년 7월 14일(음력 6월 1일)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친누나 집에서 성장하였고 친형에게 한학과 한의학을 익혀 생활의 방편으로 삼았지만 전통적 학문으로는 개항 이후 점증하는 사회의 근대화 요구를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점차 개화 사상으로 기울어졌고 개신교 장로회에도 입교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집안 어른들과의 갈등도 생겨 1883년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이주하였으며 홍원 읍내 남문 앞 중심지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이를 기반으로 읍내에 사립 학교교회를 세워 신학문을 전파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등 계몽 운동을 전개한다.[4]
1910년 8월 강우규는 경술국치로 인해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한다. 1911년 봄 북간도 화룡현 두도구로 망명하였고 이후 만주연해주 일대를 순방하면서 박은식, 이동휘, 계봉우 등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 방도를 모색하여 갔다. 1915년 우수리강 대안의 지린성 요하현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북만주에 위치한 이 곳은 남만주와 연해주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강우규는 이 곳에 한인 동포들을 불러모아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신흥동(新興洞)이라고 명명하였다.[5] 돈을 많이 모은 강우규는 광동 학교를 세워 청소년의 민족 의식을 고취하려 노력하였고 군자금 조달에 주력하기 위해 박은식이 조직한 '노인동맹단'에 가입한다.
1919년 전국적인 3.1운동이 일어나고 강우규 역시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갖지만 세계 열강으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승인받지 못하고 1919년 5월을 넘기며 점차 소강 상태에 빠져들자 위기감을 느낀 강우규는 당시 일제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식민 정책을 변경하고자 조선 총독을 교체하는 것을 보고 새로 임명될 제3대 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러시아 군인으로부터 영국에서 제조하였다는 수입 폭탄을 구입한 다음에 몰래 휴대하여[6] 입국한다. 당시 일본은 입출국하는 사람들을 검문했지만 강우규는 60세가 넘는 노인이었기에 검문을 받지 않고 입국할 수 있었다. 8월 초부터 서울 안국동 김종호의 집에 머무르면서 신임 총독의 부임 정보를 탐문하던 강우규는 신문 보도를 통해 8월 12일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신임 총독에 임명되어 9월 2일 부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신문에 난 사이토 마코토의 사진을 오려 가지고 다니면서 그의 얼굴을 익혔다고 한다. 사이토 마코토 부임 전인 8월 28일부터 남대문역[7] 부근의 여인숙으로 거처를 옮겨 매일같이 역전에 나아가 지형지물을 면밀히 답사하면서 투탄 위치를 탐색하는 등 주도면밀하게 거사를 준비하였다.
거사일인 9월 2일 남대문중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한 강우규는 남대문역에서 미리 보아둔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오후 5시 부임식을 마치고 관저로 떠나는 사이토 마코토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다. 그러나 폭탄이 빗나가 뒷차를 맞히면서 일본인 취재 기자 2명을 포함한 3명이 사망하고 정무총감인 미즈노 렌타로, 뉴욕시장의 딸이었던 해리슨 부인, 만주 철도 이사장인 쿠보, 호위 군경, 조선총독부 관리 등 37명에 중경상을 입혔다. 정작 사이토 마코토는 두꺼운 해군복의 혁대 덕분에[8] 파편 몇 조각이 혁대에 박혔을뿐 부상을 입지 않았다.[9] 일본 경찰들은 강우규를 체포했다가 '설마 노인이...'라는 생각에 풀어줬다고 한다. 혼비백산하는 군중들 사이로 빠져나온 강우규는 안국동의 김종호, 사직동임승화, 가회동장익규 집으로 옮겨다니면서 다시금 의거를 계획하지만 9월 17일 목격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장익규의 집에서 친일 경찰 김태석에 의해 체포된다.
1920년 2월 25일 강우규는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사형을 언도받은 이후 자신의 폭탄에 휩쓸린 취재 기자들에 대해 폭탄의 위력을 몰랐다고 항변한 그는 아들에게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라는 말을 남기고서 1920년 11월 29일 66세를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다. 강우규는 사형 집행 당시 감상이 어떠하냐는 일제 검사의 물음에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라는 시를 남긴다.

3. 기타


박경리의 소설 토지 2부에서 등장한다. 의료 활동을 했던 행적을 따라서 '강 의원'이라고 등장하며 토사곽란에 시달리는 주갑이를 치료해주고 주갑이는 강우규를 따라서 만주의 독립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작중 유일한 실존 인물이기도 하다.
광복 이후 남한에 정착한 가족으로 장남 강중근, 손녀 강영재가 생존해 있었으나 1985년 12월 강영재가 후사없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현재 남아있는 후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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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구(舊) 서울역 광장에 강우규 의사 동상이 건립되었다. 이 때문에 강우규 의사가 구 서울역사를 배경으로 의거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실제로 강우규 의사의 의거 당시인 1919년 구 서울역사는 건평 15평 수준의 조악한 목재 가건물이었고 구 서울역사는 의거 이후인 1922년 착공되어 1925년 준공된 건물이다. 이외에도 그가 독립운동 활동을 했던 것을 기리기 위해 활동지였던 서울역 인근의 서울역버스환승센터(02-007) 정류소 명칭을 '서울역버스환승센터.강우규 의거 터'로 병기한다.참고

4. 관련 자료



[1] 진주 강씨 인헌공파 집성촌이다.[2] 진주 강씨 인헌공파라고도 한다. 조상인 강감찬이 탄생한 낙성대가 금천(시흥)에 속했기에 강감찬의 후손만을 금천 강씨라고도 한다.[3] 간혹 일우(日愚)라고 표기되어 있는 곳도 있으나 왈우가 맞다.[4] 이는 "우리 집에서도 몇 차례 이동휘 선생을 모셨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는 손녀의 기억에도 드러나듯이 당시 관서관북 지방민들의 존경을 받던 이동휘의 영향이 컸다.[5]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은 이 곳에서 한민족을 새롭게 발흥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6]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산으로 오는 선편에서 폭탄을 기저귀처럼 다리 사이에 차고 들어왔다고 한다.[7] 현재의 서울역. 서울역의 이름은 경부선 철도가 개통될 때인 1900년 남대문역으로 출발하여 1923년 경성역이 되었다가 1947년 서울역으로 변경되어 지금에 이른다.[8] 일본 해군복의 혁대는 다른 군복과 달리 두꺼운 편이라 웬만한 물체도 뚫기 어려웠다.[9] 훗날 사이토 마코토는 조선총독 재임 후 1932년 일본 총리대신 자리에 오르지만 1936년 2.26 사건으로 파시스트 청년 장교들에게 살해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