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민란
1. 개요
東京民亂
1190년부터 고려 경상도 동경에서 여러 차례 일어난 반란.
1170년에 무신정변이 벌어짐에 따라 고려 내 정상적인 국가 운영은 멈추게 된다. 이러한 전국의 혼란한 상황을 틈타 고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특히 과거 신라 본토였던 경상도 일대에서도 연이어 반란이 터졌는데 1190년에 경상도 동경에서 신라 부흥을 기치로 내건 백성들의 반란이 시작됨에 따라 전면적으로 고려에 대항하는 신라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6, 7차에 걸쳐서 반란이 진행되었으며 반란 지도자였던 이비와 패좌가 주도하는 무리가 가장 강한 세력을 자랑했다.
이에 당시 무신정권의 집권자인 최충헌은 대장군직문하 김척후를 초토처치병마중도사로, 대장군 최광의를 좌도사로, 섭대장군 강순의를 우도사로 삼아 신라부흥운동 반란군 세력을 진압하도록 했다.
이에 반란군 세력들은 운문·울진·초전의 무리를 모아 3군을 편성, 스스로 정국병마(正國兵馬)라 칭하고, 관군을 위협하면서 해를 넘겨가며까지 치열히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김척후 대신에 새로 임명된 중도사 정언진이 지휘하는 관군에 의해 기양현(基陽縣: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패하면서 기세가 한 풀 꺾였다.
그리하여 성황에서 기도 중이던 이비가 정언진의 꾀에 속아 체포되었고, 운문산으로 피신해 기회를 노리던 패좌 또한 대정, 함연수, 강숙청 등에게 잡혀 목숨을 잃음에 따라 신라부흥운동은 사실상 좌절되다시피했다.
이 난의 실패를 계기로 이전에 고려 3경 중 하나로 꼽혔던 신라의 옛 수도 동경(東京)의 이름이 지금까지 쓰이고 있는 경주로 격하되었고 주변 군현에 상당히 많은 영역을 빼앗기게 되면서 규모마저 대폭 줄었지만 1219년에 금방 동경으로 복권되고 다시 기존의 군현을 거느리게 되었다.
2. 같이보기
- 김사미 · 효심의 난
- 무신정권
- 신라부흥운동
- 이비
- 이비·패좌의 난
- 패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