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1. 憧憬
2. 東京
2.1. 일본의 수도
2.2. 한국 역대 왕조의 동경
2.2.1. 신라 왕조
2.2.2. 발해 왕조
2.2.3. 고려 왕조
2.3. 필리핀의 왕조
2.4. 베트남 하노이의 옛 이름 동낑
2.5. 기타
2.6. 관련 문서
3. 銅鏡
4. 東經
5. 動徑


1. 憧憬


어떤 것을 간절히 그리워하여 그것만을 생각함. 또는 마음이 스스로 들떠서 안정되지 아니함. 이것에 두려움이 더해지면 외경이 된다.

2. 東京


'나라 동쪽의 또 다른 수도'라는 뜻이다. 동아시아 역사상 여러 곳에 있어 왔다. 종종 '동도(東都)'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2.1. 일본의 수도


도쿄를 한국식 한자 독음으로 읽은 것. 중장년층 사이에서는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2.2. 한국 역대 왕조의 동경



2.2.1. 신라 왕조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에 수도였던 서라벌의 별칭이기도 했다. 보통 고려시대에 사용된 경주의 별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대 기록인 산청 단속사 신행선사탑비문에서 신라의 수도 경주를 동경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고대가요처용가에서도 당시 한반도의 수도였던 서라벌을 ‘동경’으로 칭한 표현이 존재한다.
수도 서라벌을 '동쪽 수도'란 의미인 동경으로 칭한 것은 '서쪽 수도'로 간주한 곳도 존재했다는 의미인데, 이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당시 신라에서 지방 통치를 보완하기 위해 설치된 행정 구역이었던 5소경에 대응된 호칭이라는 설이 있다. 이들 5개 소경은 '작은 수도'라는 의미답게 수도의 사람과 기능을 일부 옮겨 조성했고 위치도 모두 경주보다 서쪽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소경의 이름들을 봐도 김해를 제외하면 북원, 서원, 남원, 중원으로, 동 자가 붙은 소경만 없으므로 왕도가 그 자리라는 것을 추론할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서쪽 당나라장안을 서경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대응해 신라를 중국과 대등한 문명국가로 간주해서 동경으로 칭했다는 설이 있다. 주보돈 교수는 2015년 신라의 동경과 그 의미라는 논문에서 8세기 중엽부터 신라인들이 고양된 문화의식과 자존의식 아래 그렇게 부르는 용법이 생겼으리라 추정했다. 이런 신라인의 자존의식의 예시로 황룡사 9층목탑의 의미, 태종 무열왕묘호 분쟁, 김헌창의 난 때 장안국을 칭한 것을 예로 들었다.
아무튼 동경이란 이름을 쓴 적이 있는 건 확실하지만, 이 시기 경주는 수도였기 때문에 굳이 동쪽 수도라는 의미의 동경보다는 경(京), 왕경(王京) 등 수도 그 자체로 더 많이 불렀다.

2.2.2. 발해 왕조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발해 5경(京) 중 하나. 3대 문왕의 시대에[1] 상경에서 동경으로 옮겼고, 성왕이 즉위해 다시 상경으로 천도할 때까지 발해의 수도였다. 다른 이름으로는 책성부(柵城府)라고도 불렸고, 삼국사기태조왕이 동쪽으로 책성을 순시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신당서에는 예맥의 땅이라고 가리키고 있다.
조선 국학자들은 동경용원부의 위치를 찾기 위해 당의 가탐이라는 사람이 쓴 <고금군국현도사이술>이라는 기록에서 "발해국의 남해, 압록, 부여, 책성 4부는 모두 고구려 옛 땅인데, 신라의 천정군(泉井郡)에서 책성부까지는 무릇 39역이다"[2]라고 했던 기록에 주목했다. 정약용이나 류득공은 이 기록에 따라 신라의 천정군 즉 함경도 덕원군[3] 기준으로 39역(1,170리) 되는 거리에 위치한 육진종성군 또는 회령군이 발해의 동경용원부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현재는 지금의 중국 지린성 훈춘시(琿春市)의 반라성(半拉城) 혹은 팔련성(八連城)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는 팔련성설도 설득력을 잃고 있는데, 동경 용원부는 고구려의 책성이었다는 기록이 복수의 사서에 분명히 남아있기 때문에, 이곳이 동경 용원부라면 책성이었던 고구려 시기의 유적이 확인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팔련성에서는 고구려 유적이 확인 된 바가 없으므로 해당 문제를 지적받고 있다.
북한 학자들은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부거리의 토성을 발굴한 후 여기를 발해 동경용원부라고 비정하고 있는데, 북한 학계에서 팔련성을 동경용원부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해당 주장은 북한의 채태동, 장국종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연변대학교 서일범 교수에 의해 1998년 한국에 소개되었다. ##
  • 요사 지리지에는 동경용원부가 "둘레 20리에 달하는 석성이었다"고 하였는데, 팔련성은 토성일 뿐 아니라 둘레도 7리 밖에 되지 않는다.
  • 신당서 발해전에는 동경용원부가 "용원은 동남으로 바다에 면하였는데 일본도(日本道)이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팔련성은 바다로부터 200여 리나 떨어져 있는 지점에 있다.[4]
  • 삼국사기 지리지에 "발해의 책성부와 신라 천정군 사이에 39개의 역참이 있다"고 하는데, 역과 역사이의 거리가 70, 80, 90리 되는 것도 있기에 덕원에서 팔련성까지 39개 역이 있다고 해서 그 거리를 일관되게 '1,170리'라고 계산할 수는 없다.
  • 발해와 일본의 교섭 기록을 보면 겨울철에도 사신이 오갔는데, 팔련성에서 가까운 항구인 모구위(毛口威)[5]는 겨울철에 어는 항구이므로[6] 이곳을 통해 사신을 파견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면서 부거리 토성이 동경용원부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 부거리성은 발해의 성으로 확인된 석성이다.[7]
  • 부거리성은 동남쪽으로 바다에 곧장 닿아 있다.
  • 부거리성이 위치한 지역은 인근에 부동항인 용제항과 여진항을 끼고 있다.
  • 조선 시대의 역참제도로 미루어 볼 때, 이곳은 강릉에서부터 39개 역의 거리에 있다.
하지만 북한 정권 특성상 외부 학계와 교류가 적다보니[8] 신뢰성이 얼마나 있는지도 알기 힘들다. 또한 북한측이 주장한 근거에 대해서도 반박이 나와 있는데,
  • 북한이 팔련성을 동경용원부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제시한 요사 지리지의 원문은 정확히 다음과 같다.

開州 鎭國軍節度本濊貊地 高麗爲慶州 渤海爲東京龍原府 有宮殿 都督慶鹽穆賀四州事 故縣六 曰龍原 永安烏山壁谷熊山白楊皆廢 壘石爲城 周圍二十里

개주(開州)는 진국군의 절도를 받는다. 본래 예맥의 땅이다. 고려에서 경주(慶州)를 설치하였고, 발해에서 동경용원부로 삼았다. 궁전이 있으며, 경, 염, 목, 가 4주를 도독하였다. 예전에는 현이 여섯 개였다. 용원, 영안, 오산, 벽곡, 웅산, 백양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돌로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0리이다.

이 요사 기록에서 개주는 길림 지역의 개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랴오닝 성 지역의 개주, 즉 지금의 봉황성을 가리킨다.[9]
  • 팔련성이 2,800m 정도의 작은 성이라고는 하지만, 발해 평지성 가운데 상경성을 제외하면 이 정도 규모의 큰 성을 찾기도 어렵다.[10] 또한 부거리 석성에서는 팔련성과는 달리 궁궐의 터가 확인되지 않았다.[11]
  • 『신당서』 발해전에서 “동남쪽으로 바다와 면해 있고 일본도이다”고 적었기는 하지만, 바닷가에 면해 있다면 굳이 동남쪽이라는 방향을 제시할 필요가 없으며, 용원이 바닷가와 일정한 거리가 있었기에 그 구체적인 방위를 제시한 것이고 ‘일본도’에 대해 적은 것은 일본도에서 바다로 나가는 부두를 가리켜 지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 『신당서』 직관지에 의하면 30리가 한 개 역이 되는데 이것은 보편적인 거리를 말한 것이며, 개별적으로 역과 역 사이의 거리가 30리가 아닌 것을 예로 들면서 39개 역 1,170리와 가까운 노정에 위치한 팔련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 확실히 모구위는 제일 추운 12월 이후면 얼지만, 발해에서 일본으로 배가 떠난 시기는 알 수 없고 일본에 도착한 시간을 일본측의 기록에 의해 알 수 있는데 겨울에 일본에 도착한 차수는 채태형의 통계에 의해도 몇 번이 안된다.[12]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 겨울에 일본으로 떠나야 할 때 라진항을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이마저도 팔련성이 동경용원부가 아니라고 부정될 결정적인 근거는 되지 못한다. #

2.2.3. 고려 왕조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 고려 초중기의 3경(京)[13] 중 하나였을 때 이름. 비록 신라는 멸망했지만 그 과정에서 왕건은 신라의 구 세력을 그대로 포용했고, 옛 신라의 수도 서라벌은 동경으로 개칭되어 고려 초중기 동안에는 계속 중요한 도시로 남아있었다. 사실 수도 개경에도 황룡사 9층 목탑보다 높은 건물은 없었을 정도니[14] 신라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고려시대에도 개경 사람들이 놀러와도 우와 할 정도는 될 만큼 크고 화려한 도시였다.
그러다 이후 신라부흥운동의 성격이 있었던 동경민란의 진압 이후 경주로 격하되어[15] 3경에서도 빠지고 남경(서울)이 추가되었고, 몽골 제국군의 침략으로 황룡사 목탑이 불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곧 동경으로 복권되어 원간섭기 이후의 외왕내제 체제가 붕괴되기 전까지 여전히 고려의 주요 대표도시로 기능했다. 흔히들 고려 후기에 3경에서 동경(경주)가 빠지고 남경(서울)이 그 자리에 들어갔다는 식으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고려 후기 충렬왕 34년(1308년) 때 남경과 동시에 각각 계림부와 한양부로 격하되었다. 즉 고려의 3경제도가 끝날 때까지 경주는 동경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최상급 행정기관인 5개 부(府) 중 하나였을 정도로 위상은 상당했고, 경상도 여러 대도시와 더불어[16] 경상도 내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거기다가 당시에는 경상도 자체가 인구가 많다 보니 전국으로 치더라도 손꼽히는 대도시였다.[17] 일제강점기 초반에도 전국 도시들 중에서 최상위권에 위치할 정도로 위상은 여전하였으나 부산, 대구광역시가 경주를 역전하여 전국 대도시의 위상을 뺏겼다. 나아가 대한민국 시대부터는 오히려 옛날에 경주 주변의 외항으로 경주에 장 보고 문화생활하러 오던 옆동네 포항, 울산한테도 밀리는 지방 소도시로 전락하게 되었다(...).
개의 품종 중 하나인 동경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조선 헌종 때인 1845년에 나온 경주지역 지리지 이름도 동경잡기(東京雜記)다.

2.3. 필리핀의 왕조


필리핀의 톤도 왕조 (900s–1589). 명나라 시절때부터 '톤도' (東都)라고 일컬어졋다.

2.4. 베트남 하노이의 옛 이름 동낑


동낑(Đông Kinh)은 東京을 베트남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 베트남 후 레 왕조 시기에 하노이를 부르던 옛 지명이었으며 지금의 베트남 북부지방을 가리는 의미로 확장됐다.
서양인들이 동낑을 통킹(Tonkin)이라고 부르며 통킹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통킹만 사건 같은 경우.

2.5. 기타


  • : 《명사(明史)》 열전 제208#에 조선의 옛 역사를 기술하면서 고려 시대에 현 개성시에 해당하는 송악(즉 개경)이 동경이라고 잘못 기재돼 있다. 청나라[18]의 편집자들은 고려의 제2수도 평양이 서경이니 제1수도인 개경이 곧 동경이겠거니 하고 억측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서 ~경(京) 소리를 듣는 지역이 네 곳이나 있었다는 걸 모르고 동서 양경을 둔 것으로 오해한 듯.
  • 뤄양: 시안(서안, 西安)이 장안(長安)으로 불리던 시절에 낙양과 더불어 동서 양경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이랬던 시대에 낙양은 동경 또는 동도, 장안은 서경 또는 서도라고도 불렸다.
  • 동경 개봉부: 북송수도. 지금의 카이펑이다. 흔히 동경개봉부라고 칭한다. 수호지라든가.
  • 동경 요양부: 요나라금나라의 5경 중 하나. 현 랴오양 시. 금나라는 요나라와 다른 5경을 두었지만 일부는 그대로였다.

2.6. 관련 문서



3. 銅鏡


청동으로 만든 거울.

4. 東經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본초자오선의 동쪽 부분의 경도.

5. 動徑


의 위치를 나타내는 데에 있어, 기준되는 점으로부터 그 점에 그은 직선을 벡터로 한 선분. 경선벡터

[1] 신당서에는 당덕종 정원(貞元) 연간이라고 했는데, 이는 785년 정월부터 805년 8월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2] 渤海國南海ㆍ鴨綠ㆍ扶餘ㆍ柵城四府,幷是高句麗舊地也。自新羅泉井郡至柵城府,凡三十九驛[3] 지금은 함경남도 원산시에 합쳐졌다.[4] 이건 발해 당시의 해안선과 지금의 해안선이 달랐을 여지도 없지 않다.[5] 지금의 러시아 포시예트 만[6] 함경북도 선봉군 그 이북으로는 겨울철에도 바닷물이 얼기 때문에 배가 다닐 수 없다. 바닷물이 얼지 않는 라진항 이남지역에서만 겨울철에 배가 떠날 수 있다.[7] 부거리의 발해 성은 평지에 돌로 쌓은 성과 산에 의지해 쌓은 토성 이렇게 두 개가 존재한다.[8] 의외로 중국 고고학계와도 그다지 교류가 없다고 한다. 유홍준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북한 고고학자는 애초에 중국 입국비자를 안 내줘서, 만주지역 답사는 오히려 남한 학자가 더 자유롭다고 한다. 물론 남한 학자가 발해유적지를 둘러보러 오는 것은 방해한다고도 하지만, 남한 사람들은 특별케이스가 아니면 중국 비자가 거의 그냥 나온다.[9]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뒤에 그 유민들 가운데 일부를 요동 지역으로 강제이주시켰는데, 그 와중에 지금의 길림성 일대에 해당하는 발해 지명들이 요동 지역으로 옮겨진 것들이 좀 된다. 발해고의 저자 유득공이 이미 요사의 이러한 오류점을 지적한 바 있다.[10] 물론 이 점은 부거리 석성에도 해당되는 것이기는 하다.[11] 사실 부거리 성은 이미 20세기에 굉장히 황폐화되어 성벽의 기단부가 드러나 있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기는 했다.[12] 중국의 학자 왕협(王俠)은 발해 사신이 일본으로 떠난 것은 바다가 얼기 전인 가을이었을 것으로 지적하였다.[13] 개경(개성), 서경(평양), 동경(경주).[14] 개경에도 흥왕사처럼, 황룡사보다 옆으로 더 넓은 사찰은 있었다. 흥왕사는 조선의 경복궁과 맞먹는 면적을 자랑했다.[15] 고려, 조선시대에는 이런 식으로 반란이 일어나면 행정구역의 격을 낮추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16] 대표적으로 상주시, 진주시, 안동시, 성주군.[17] 18세기의 인구 통계에 따르면 5번째로 인구가 많은 곳이었다.[18] 한 왕조의 정사(正史)는 대개 그 왕조가 망한 뒤 후계 왕조에서 편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