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미 · 효심의 난

 

1. 개요
2. 같이보기


1. 개요


金沙彌·孝心─亂
고려 때인 1193년 7월에 경상도운문, 초전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처음에는 김사미[1]는 운문, 효심은 초전에서 각기 유랑민들을 모아 세력을 따로 이루고 있었으며, 이 반란의 규모는 경상도 전역에 이를 정도로 상당히 컸다. 이 반란은 무신정권의 전횡과 부패로 인해 일어났고 각 고을을 노략질하면서 중앙 조정을 위협해왔다.
이 반란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면 무신집권기 발생한 민란들과 달리 서로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 상호 연대를 꾀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무신집권기에 발생한 반란들은 규모를 떠나서 특정 지역의 이해관계만을 바탕으로 일어난 탓에 여기저기서 많이 벌어지긴 해도 상호 연계가 하나도 안돼서 중앙에선 어르고 달래거나 때로는 각개격파하며 쉽게 토벌할 수 있었다.
이 반란이 일어나면서 대장군 전존걸은 장군 이지순, 이공정, 김척후, 김경부, 노식 등과 함께 반란군의 토벌에 나섰으며, 이들이 8월에 공격했지만 십팔자위왕이라는 소문에 의거해 신라를 부흥시킬 뜻을 가지고 있던 당시 무신정권의 수장 이의민이 이들과 내통했다. 또한 이의민의 아들인 이지순이 의복, 식량, 신, 버선 등을 제공하고 정보를 누설해 여러 차례의 싸움에서 전존걸이 이끄는 군대를 패퇴시켰다.[2]
또한 이들의 세력은 이지순에게 노획한 금은보화를 제공했으며, 이지순이 적과 내통한 사실로 인해 법으로 이지순을 처벌할 경우 이의민이 죽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적이 더욱 성할 것이라 탄식하면서 이들을 토벌하러 온 전존걸이 자살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러나 고려 정부는 새로 상장군에 최인, 대장군에 고용지 등을 임명하고 병력을 보충하여 다시 토벌을 시작함으로써 농민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결국 1194년 2월 점점 수세에 밀리던 김사미가 항복하여 처형된 뒤 효심이 반란을 이어갔다. 농민군은 같은 해 밀성(밀양) 싸움에서 7천명의 전사자를 내면서도 끝까지 치열히 싸웠으나, 결국 그해 12월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효심은 생포되었다고 하나 그 후의 행적을 알 수가 없다.
고려 대의 이름난 문인 이규보도 진압에 참여하였는데 종군 중에 '나무 밑에서 난 버섯을 따서 구워먹었는데 맛이 좋았다'는 기록을 남겼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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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통 '사미'는 이름이 아니라 견습 승려인 사미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대세다. 즉 성이 김이요 이름이 사미인 인물이 아니라 김씨 성의 사미라는 것. 그렇다면 김사미는 운문사 소속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2] 이에 대해서는 후대에 최충헌을 비롯한 이의민을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한 이들이 그의 결점을 부각시킬 목적으로 패전 책임을 이의민 일파에게 떠넘긴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3]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권에서 그 이야기가 나온다. 이때 저자의 지인인 스님이 교수로 있는 학인스님들의 학교에서 점심으로 표고버섯 무침이 나왔는데 이야기를 들은 저자는 그들의 생각이 나 그날은 표고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