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증권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

 


1. 개요
2. 상세
3. 역대 우승자


1. 개요


대한민국 한국기원 주관, 동양종합금융증권 후원의 국제 바둑기전.
'동양증권배'라는 줄임말로도 유명하다. 한국 국내 최초의 국제기전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깊은 기전.

2. 상세


한국이 1988년 응씨배 우승이라는 고무적인 성과를 이룩한 뒤 한국내에서 바둑 발전에 대한 열망은 깊어졌다. 이런 맥락에서 응씨배후지쯔배와 같은 국제기전 또한 국내에서 유치되었으면 하는 열망 또한 고취된 시기. 이런 열망에 힘입어 동양종합금융증권사(현 유안타증권)의 1억원이라는 우승 상금을 후원받으며 대회가 개최된 것이 유래였다. 이는 최초의 한국기원 개최의 세계대회로서, 훗날 삼성화재배LG배 등의 한국기원의 국제 기전 개최를 견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대회 초기의 구조는 그다지 순탄치는 못했다. 특히 1,2회 대회의 경우는 참여 선수층이 국제기전이라 칭하기 어려울 정도로 척박했으며, 사실상 국내의 선수위주로 진행되어 양재호가 이런 수혜를 받으며 우승을 맛보기도 했다.[1] 그러다 3회들어서 선수층의 풀이 넓어지면서 국제기전으로서의 인지도가 격상되면서 한국기원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노릇을 맡아오기도 했다. 당시 존재했던 국제기전인 응씨배, 후지쯔배, 그리고 해당 동양증권배를 석권하면 그랜드슬램이란 칭호를 받았을 정도.[2]
이창호로서도 의미깊은 기전인데, '''그의 최초의 국제기전 우승''' 기록이기 때문. 이전까지는 스승을 꺾는 포스를 보였음에도 승리기록은 국내기전에만 국한되어있어 '국내용'이란 오명아닌 오명을 받곤 했으나, 3회에서 거물급 기사였던 린하이펑[3] 꺾고 우승을 차치한 뒤로 각종 세계기전서 우승을 쓸어담으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게다가 7회대회서 세계적인 원탑 마샤오춘을 꺾은것도 의미깊은 기록. 전기 대회 우승의 위엄이었던 마샤오춘을 상대로 위태로운 반상위에서 축머리 묘수로 단번에 역전시켜 마샤오춘을 슬럼프로 몰아버리고 그 뒤로 마샤오춘은 이창호를 상대로 단 한판도 이기지를 못한다.
그러다 1998년, 외환위기로 인해 동양증권이 화의(현재의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대회의 폐지가 결정되어 최초의 한국 세계대회는 막을내리게 되었다. 그래도 동양증권의 바둑 후원 움직임은 계속되어 '동양종합금융증권배한중일국가대항전', '동양증권배 타이젬 왕중왕전'으로 명맥을 이었다.

3. 역대 우승자


  • 단급은 당시 기준.
'''회차'''
'''년도'''
'''우승자'''
'''전적'''
'''준우승자'''
'''1'''
1988 - 1989
양재호 七단
3:1
장수영 八단
'''2'''
1989 - 1990
서봉수 九단
3:1
이창호 五단
'''3'''
1990 - 1992
이창호 五단
3:2
린하이펑 九단
'''4'''
1992 - 1993
이창호 六단
3:0
조치훈 九단
'''5'''
1993 - 1994
조훈현 九단
3:1
요다 노리모토 九단
'''6'''
1994 - 1995
마샤오춘 九단
3:1
녜웨이핑 九단
'''7'''
1995 - 1996
이창호 七단
3:1
마샤오춘 九단
'''8'''
1997
조훈현 九단
3:0
고바야시 사토루 九단
'''9'''
1998
이창호 九단
3:1
유창혁 九단

[1] 그래도 마냥 폄하하기 어려운 성과인것이 그리 많지 않았던 일본기사를 꺾고 달성한 성과였기에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상대는 왕관전 15연승에 빛나는 야마시로 히로시. 우승후 결혼은 덤.[2] 이 3가지 우승으로 처음으로 달성한 인물이 바로 조훈현.[3] 이창호의 유년시절에 가장 존경하는 기사였다는 멘트로도 유명하고 둘로서는 첫 대결이기도 했다. 린하이펑은 자신의 아들보다도 어린 기사를 상대하느라 부담감에 휩싸였다고. 실제로도 이창호는 당시 만16세 우승으로 국제기전 최연소 우승기록까지 갱신했다. 판팅위가 아슬아슬하게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