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훈

 

'''조치훈
趙治勳, Cho Chikun
[1]'''
'''第二十五世本因坊 治勲'''[2]
'''직업'''
바둑기사
''' 소속'''
일본기원
''' 생년월일'''
1956년 6월 20일
''' 국적'''
[image] 대한민국[3]
''' 출신지'''
부산광역시
''' 가족'''
슬하 1남 1녀[4]
''' 입단'''
1968년
''' 단급'''
九단
''' 누적우승경력'''
'''75회'''(역대 일본 기사 중 '''1위''')
''' 훈장'''
은관문화훈장(대한민국, 1980년)
자수포장(일본, 2019년)
'''타이젬바둑 닉네임'''
reedo
'''일본기원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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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생애
3. 여담
4. 기풍
5.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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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목숨을 걸고 둔다'''

趙治勳, 二十五世本因坊治勲, 名誉名人
조치훈, '''25세 혼인보 치쿤''', '''명예명인'''.[5]
일본기원소속의 프로바둑기사. 소속은 일본기원이나 국적은 아직도 대한민국이다. 본가는 풍양 조씨로 한국 역사상 최초로 고구마 재배에 성공한 조엄과 같은 집안이다.[6] 또, 후술하겠지만 대국수 조남철 九단의 조카이다.
'''일본 바둑계에 전설로 불릴 만한 족적을 남긴 위대한 기사이자 살아 있는 전설'''로 그가 이룬 업적들이 정말 후덜덜하다.
  • 일본기원 남성 기사 최연소 입단 : 11세 9개월.[7]
  • 일본 7대 기전 그랜드 슬램 최초 달성 : 1987년 천원 타이틀을 따내며 달성. 당연히 커리어 그랜드 슬램이다.[8]
  • 대삼관(大三冠) 3회 달성 : 일본 7대 기전중에서도 서열 최상위인 기성&명인&혼인보를 한해에 모두 우승한 기사에게 붙여지는 칭호.[9] 1983년에 조치훈이 역대 최초로 달성하고, 1996년에 잃었던 기성전 타이틀을 탈환해 쭉 방어하며 2년 연속 대삼관 & 통산 3회 달성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10]
  • 사상 최장 타이틀 홀더 : 1989~1998년까지 10회 연속 혼인보 타이틀 획득.[11]
  • 25세 혼인보 : 혼인보 10연패(1989~1998)로 즉시 자격 획득.
  • 사상 첫 명예 명인 칭호 : 1980~1984년 5연패를 달성해 조건을 충족.[12]
  • 사상 최다 타이틀 획득 : 75회[13]
  • 사상 최다승 : 1518승[14]
  • 일본기원 사상 최초 1500승 달성 : 2017년 4월 달성.[15]
  • 입단후 최단기간 1200승 & 1300승 & 1400승 & 1500승 달성
  • 한국 기사 최초 입신(入神) : 1981년 4월에 九단에 승단하며 달성.[16]
참고로 일본 7대 기전 타이틀 획득의 상세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 기성(棋聖) : 총 8회(1983, 1984, 1985, 1994, 1996, 1997, 1998, 1999)
  • 명인(名人) : 총 9회(1980, 1981, 1982, 1983, 1984, 1996, 1997, 1998, 1999)
  • 혼인보(本因坊) : 총 12회(1981, 1982,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 천원(天元) : 총 2회(1987, 1988)
  • 왕좌(王座) : 총 3회(1976, 1994, 2001)
  • 기성(碁聖) : 총 2회(1979, 1986)
  • 십단(十段) : 총 6회(1982, 1988, 1989, 2005, 2006, 2007)
'''폭파전문가'''라는 별명이 있다. 상대의 모양 속에 뛰어들어 도저히 살 수 없을 듯한 돌을 날카로운 타개로 살리는, 즉 상대의 집과 좋은 모양새를 깨뜨리는 격렬한 행마를 빗대는 별명이다. 동시대를 풍미하여 '살인청부업자'라는 별명이 붙은 가토 마사오와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

2. 생애


[image]
1962년 일본에 가는 조치훈, 옆에 있는 남자는 숙부 조남철 九단.
어릴 때 일본으로 넘어가 기타니 미노루 도장에서 공부했다. 한국 바둑계의 대원로이자 대국수라는 칭호까지 받은 조남철 九단의 조카로 집안 전체가 바둑 가문인[17] 명문가 출신인데다가 천재성이 있어서 어릴 적부터 주목받았다. 그 때문에 공부를 등한시한 데다가 어릴 적에 일본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따돌림을 많이 당해 발전이 다소 늦었다. 훗날 라이벌이 된 고바야시 고이치가 한참 하수였는데 어느새 자신을 앞질러 먼저 입단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정진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18]
실력을 갈고 닦은 뒤 본격적으로 일본내 기전에 뛰어들어 1976년 20세 5개월의 나이로 왕좌(王座) 타이틀을 따냈는데, 당시 기준 역대 최연소 7대 타이틀 보유자라는 진기록도 세우게 되었다.[19] 그리고 1980년, 오다케 九단을 꺾고 명인 타이틀을 획득하여 자신이 일본에 오기 전에 한 "명인위를 얻기 전 한국에 오지 않겠다."라는 말[20]을 증명하며 금의환향한다. 이 일로 바둑인 최초로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으며 병역면제 자격까지 받았다. 단, 이 내용은 조치훈 기사의 자서전 '목숨을 걸고 둔다(1981)'#의 내용과 다르다. 자서전에는 도일하고 13년 뒤에(조치훈 기사 19세, 1975년) 집안에 일이 있어서 잠깐 다녀왔으며, 병역면제는 국민학교 입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어쨌든 1980년 명인전 우승 이후 병역면제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똑같이 일본기원에서 한국 이름을 드높인 신인 조훈현도 병역면제 이야기가 나왔지만 거절되고 결국 조훈현은 귀국해 병역을 마쳤다. 조훈현은 구 일본 신인왕전 타이틀은 있었지만, 7대 타이틀을 따지 못했기 때문에 병역 면제를 못 받았다.
[image]
1980년 명인전 결정국 계가 직후의 상황. 오른쪽이 조치훈 , 왼쪽이 오타케 히데오 기사. 이때의 대국이 일본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조치훈은 스타덤에 오른건 덤이다.[22]
이어서 1983년 기성(棋聖)전에서 후지사와 슈코를 이기며 기성·명인·혼인보 타이틀을 동시에 차지해 '''일본 바둑계 최초의 대삼관(大三冠)을 달성'''했다. 이 기성전에 기가 막힌 에피소드가 있는데, 후지사와 九단은 "나는 1년에 4번만 이기면 된다."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기성전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기사로 유명했다.[23] 그런데 조치훈이 20대 젊은 나이에 일본 기사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아래 발언들은 각주가 본심으로 당시 일본 바둑계의 성향에 어울리는 트래쉬 토크 신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치훈 군이 그렇게 센가? 내가 한 번 찾아가봐야겠군.[24]

1983년 당시 조치훈이 7대 타이틀 중 명인 하나만 갖고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이 남은 하나를 빼앗아주겠다며 도전장을 던졌다. 조치훈도 이 언급을 듣곤 다음과 같이 받아쳤다고 한다.

대선배님을 오시게 할 수 있습니까? 제가 찾아뵙겠습니다.[25]

후지사와의 언급을 인용해 그가 가지고 있는 기성 타이틀에 도전하겠다고 맞불을 놓은 것이다. 이후 조치훈이 도전자 결정전에서 이겨 두 기사간의 기성 타이틀전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후지사와는 기성전 전야제에서 "딱 네 판만 가르쳐주겠다."[26]라고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조치훈도 물러서지 않고 "딱 세 판만 배우겠습니다."[27]라고 대답했다. 당시 바둑계는 도전자의 건방지고 패기가 넘치는 발언에 놀랐는데 관록인지 진짜 1년을 다 투자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후지사와 슈코가 내리 1~3국을 이기며 3:0이 되었다. 그런데 귀신같이 4국부터 내리 조치훈이 다 이긴다. 일본 바둑계에 길이 남을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리버스 스윕. 훗날 조치훈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명인 타이틀 보유자라는 명예가 있는데 4:0으로 지면 꼴사나우니 나중에 지더라도 1승 이상은 따보자.'는 생각으로 제4국에 초집중하여 임했는데 이게 잘 먹혔다고...
우승 인터뷰에서 조치훈 9단은 "후지사와 선배님의 기성 타이틀이 이번으로 '''마지막'''일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찢어집니다." 하는 희대의 도발적인 드립을 쳤다. ''' 그리고, 정말로 후지사와 슈코 9단은 이 패배 이후로 죽을 때까지 기성 타이틀을 따기는커녕 타이틀 도전기에도 올라오지 못했다.'''[28]
1987년 천원전에서 고바야시 고이치를 이기며 위에 언급된 7대 타이틀을 최소 1번씩 차지하여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일본기원의 첫 기사가 되었다.
바둑 내적으로 치열할 뿐만 아니라 대국에 임하는 태도도 본받을 만하다. 조치훈의 "목숨을 걸고 둔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태도 앞에서 모두가 숙연해지곤 했다. 대표적으로 1986년 기성전이 꼽히는데, 제1국이 열리기 며칠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을 다치는 전치 3개월 중상을 입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저녁까지 바둑 공부를 하고 배가 고파서 야참을 사먹으러 나갔다가 자신이 몰던 자동차와 어느 오토바이의 가벼운 접촉사고가 났다. 그런데 조치훈이 차에서 내려 오토바이 운전자를 일으켜 세우는 와중에 갑자기 다른 차가 나타나서 그대로 두 사람을 치어버렸다.[29] 진짜로 머리(뇌)와 오른손을 제외하고 전신이 너덜너덜해지는, 말 그대로 목숨만 겨우 건진 수준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때 기성전 도전자로 고바야시 고이치가 올라온 상태였는데, 기성전은 봉수를 통한 이틀치 바둑을 둘 만큼 체력소모가 심한 대회인 터라 중상을 입은 조치훈이 참여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무리였다. 그런데 그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머리가 있고, 또 오른손이 있다." 말하며 사고 후 겨우 열흘만에 기어이 휠체어에 앉아 고바야시 고이치와의 타이틀 도전기에 임한다.[30] 이것이 바로 일본 바둑계 전설중 하나로 불리는 '''『휠체어 대국』'''. 일본기원 규정은 천재지변 정도가 아니면 대국이 연기되는 일은 없으며, 참여한 기사가 사고로 부상을 입더라도 대국 연기는 절대로 안되고 기권패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조치훈이 휠체어 대국을 감행한 투혼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감탄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2승 4패로 타이틀 방어에는 실패했지만, 모든 사람이 타이틀을 획득한 고바야시보다 '그 상태로 2승이나 거두다니 대단하다'라며 조치훈에게 갈채를 보냈다. 특히 조치훈이 완승한 제3 국은 도저히 그런 중상을 입은 사람의 바둑으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명국으로 불렸다니 그의 투혼과 집중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1] 그 자신의 '목숨을 걸고 둔다.'는 말이 실제로 증명된 장면이라 하겠다. 실제 사진을 보면 눈이 번쩍번쩍 하는 느낌이다.
이 때문에 고바야시는 기성 타이틀을 획득하고서도 모두가 고바야시의 4승이 아닌 조치훈의 2승을 칭송하는 아웃 오브 안중상태가 되어버린다. 고바야시는 조치훈에 필적할 만한 엄청난 기사였고 상대전적도 비슷하게 가져갔지만, 이후의 도전기들에서는 조치훈에게 처절하게 털렸다. 3국에서 조치훈에게 지자, 고바야시는 자기는 역시 의자에 앉지 않고, 정좌한 채로 두겠다고 주장. 4국 이후로는 주최측의 조정으로 고바야시는 무릎을 꿇고, 조치훈은 휠체어에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고바야시도 조치훈의 투혼에 굴하지 않고 진지하게 승부에 임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여담으로 조치훈과 고바야시는 매번 7대 타이틀전에서 붙었던 터라 세간에서 라이벌로 불렸고 실제로 사이가 나빴으나, 서로 전력을 다한 이 도전기를 통해 크게 호전되었다고 조치훈은 회고했다. 자세한 것은 고바야시 고이치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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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를 타고 대국에 임하고 있는 조치훈 九단. 반대편에 머리를 깎은 사람이 고바야시 九단이다.[32]
이 교통사고와 기성전 타이틀 방어 실패 이후 잠시 동안 정상권에서 멀어지리라...생각되었으나 '''곧 기량을 회복''', 기성(碁聖) 타이틀과 천원(天元)타이틀을 획득하고 89년 혼인보전 도전기에서 다케미야 마사키를 4-0으로 발랐다. 혼인보 타이틀을 획득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정상권에 복귀, 혼인보전 10연패를 비롯 엄청난 커리어를 쌓아올리며 다시금 전성기를 내달렸다.[33]
또한 위의 각주에 언급된 10연패 조건을 충족해 즉시사용의 권한이 생겨 '''25대 혼인보 치쿤(治勲)'''이 되었다.[34][35]
본격적으로 세계대회가 열렸을 때 조치훈은 이미 전성기를 어느 정도 넘겨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살 위인 조훈현처럼 간간히 나타나 활약하였다. 1991년 후지쯔배도 우승하면서 소소하게 활약하다 2003년에 대이변을 일으키는데, 제 8회 삼성화재배에서 주최측 와일드 카드를 배정받아 원성진, 조훈현 등의 강자를 꺾고 결승에 올라 박영훈에게 첫 판을 내주고 2-1 역전 우승을 거두었다. 2018년 기준 '''세계대회에서 와일드카드 출전자가 우승한 것은 조치훈이 유일무이'''하다. 삼성화재배 한다고 한국에 와서 원성진 당시 五단한테 보여준 '''예쁘게 사는 희생타의 묘수'''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아무도 예상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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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일본 기성전 6국에서 도전자 신분으로 기성 야마시타 게이고한테 계가를 하는 장면. 6국에서 미세한 접전 끝에 조치훈이 이겨서 7국까지 갔는데 7국에서 조치훈이 패해 타이틀 찬탈에 실패했다. [36]
현재는 일본 7대 타이틀전에서는 뚜렷한 성적은 못내고 있으나, 시니어 기전에서는 상당한 활약을 보여주고 계시다. 2017년에는 한국시니어바둑리그에 출전하면서 한국 기전에 나서기도 했다. 부산 출신이라 2017 한국시니어바둑리그에서 고향팀인 부산 KH에너지 소속으로 뛰었다. 정규리그 6승 1패를 기록하였고 챔피언 결정전에서도 활약하며 시즌 MVP를 수상했다. 한국에 받은 첫 상이었다. 어떻게 나가게 되었는지는 항목 참조.
2018년에도 부산 KH에너지 소속으로 한국시니어바둑리그에 참가, 작년과 마찬가지로 대활약하시며 리그 2연패에 공헌했다. 또한 일본바둑계에서 전설을 쓴 위대한 기사이자 현재도 대단한 기량을 선보이고 있는 조 九단과 한 수 둬보고 싶어하는 한국기사들이 줄을 설만큼 인기가 대단하다. 시니어 리그 일정 때문에 일주일에 2~3일은 한국에 머물고 있는데, 리그일정을 소화하는 1일을 뺀 나머지 시간은 한국기원 소속의 후배기사들과 수십판의 복기 + 대국을 한다고(...) 일본기원에서는 아무리 자기가 원로겸 개그 캐릭터로 불리지만 마음대로 다니지는 못하는데, 한국기원은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보니 오히려 정감간다고 한다.
2019년 제9회 마스터스 컵에서[37] 고마쓰 히데키 九단을 꺽고 아주 오랜만에 개인전 우승을 차지했다.
2019년에도 부산 KH에너지 소속으로 리그에서 13전전승을 기록하면서 통합 3연패의 일등공신이 되었다.선수 최대보유연한이 3년이라 내년부턴 다른 팀에서밖에 뛸 수 없게 되었는데, 인터뷰 소감에서 팀내 형, 동생들과 헤어져야 하는 것도 그렇고, 일정때문에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것도 고령이라 부담이 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다음 시즌에도 또 시니어리그에서 볼 수 있을지는 불명.
아쉽게도 2020시즌은 코로나 19 여파로 인해 불참을 결정했다. 일본내 시니어 기전이나 타이틀전 입회인으로 간간히 얼굴을 비추는 중.

3. 여담


  • 대국을 하다 실수가 나오면 자신에게 용서가 없다. 상대의 응수를 보고 실수를 깨달으면 "이 멍청이!" 하면서 크게 외친다든가,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세게, 정말 세게, 쾅쾅 소리가 날 정도로 때린다든가 하는 자학(?)이 심한 기사이다.링크 참고.[38][39] 이러한 성격 탓에 습관이 별난 기사라고 일본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다른 버릇으로는 수읽기를 하면서 성냥개비를 똑똑 부러뜨리기가 있다. 지면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 일본으로 건너가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귀화 권유를 여러 차례 받았음에도 아직도 한국 국적이다.[40] 한국어 또한 계속 연습하는 모양이라, 김성룡이 아직 어린 시절 세계대회에 계시를 하러 나갔는데, 외국 기사들에게는 영어로 초읽기를 하기가 관례라 조치훈에게도 영어로 초를 읽었더니 또렷한 한국어로 "한국말로 부탁합니다."라고 말해 상당히 놀랐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다만 말을 약간 더듬는다고 하는데 어릴 적 일본 아이들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국말로 이야기하다 일본 아이들이 못 알아 먹는 기색이 역력하자 아차할 때마다 말을 멈추어서 그 영향으로 한국어를 더듬는다고 한다.
  • 원래 동생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 조치훈의 이름은 항렬에 맞게 조풍연이었는데, 어느 지나가던 스님이 "개명하지 않으면 엄마가 죽을 것이다. 그러나 개명을 하면 본인이 어릴적부터 물 건너에서 큰 이름을 날리게 되지만, 대신 동생이 죽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결국 조치훈으로 개명한 후 그 말 그대로 동생은 영아 시절에 사망했다고... 나중에 조치훈이 일본에서 성공한 후 조치훈의 아버지가 그 스님을 찾기 위해 신문에 광고까지 게재했으나 찾지 못했다고 한다.
  • 상대 전적에서 장쉬에게 약하다. 그의 장인인 고바야시 고이치를 먹이로 삼았던 것을 생각하면 재밌는 관계...라고 적혀 있지만 사실 조치훈과 고바야시의 상대전적은 66:63으로 대등한 수준이다. 도전기에서 조치훈이 7번 연속으로 타이틀을 차지한 것을 포함, 주로 타이틀전으로 치러지는 7번기 승부 총 10번중 조치훈이 8승 2패로 압도적으로 앞서 있기 때문에 이미지가 그렇게 되어버린 것. 조치훈은 이에 방송에서 장쉬를 "빨리 사라져주면 한다."로 표현했다. 문제의 방송장면(니코동 계정 필요) 장쉬가 약해지고 이먀마 유타가 자신의 기록을 차례차례 갱신하자 이제는 이야마를 디스하는 쪽으로 넘어갔다.
  • 골프를 좋아한다고 한다. 위의 이야기에서 떠들어댄 것도 있지만 골프를 칠 준비를 위해 평상복이 골프웨어라고... 골프에서 많은 걸 배웠다고 한다. YTN과의 인터뷰에서 "조훈현 씨한테는 바둑은 못 이기지만 골프는 이기는 것 같아서, 골프 꼭 해야 되는데..." 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 7번기 타이틀전(기성棋聖, 명인, 혼인보전) 통산 29승 9패. 특히 3연패 후 4연승을 3번 달성한 7번기의 귀신이다.[41] 1983년 혼인보전에서 린하이펑에게 3연승 후 4연패하며 대삼관을 달성한 지 얼마 못 가서 이를 내려놓은 적도 있다.

  • : 2015년 니코니코 초회의에서 쇼기계 입담꾼 카토 히후미 九단과 서로 지도대국을 두면서 잡담을 하는 코너이다. 사회자가 옛 NHK 아나운서 출신인 요시카와 세이이치여서 원활하게 진행되었고, 총 2시간 반 동안 진행되었으며, 지지율 95% 이상일 정도 니코동에서도 이례적으로 좋은 평을 받은 기획이었다.
  • 2015년 7월 26일 현대 바둑 70주년 기념 조훈현과 대결했다. 무려 13년만의 대결이고, 경기시간은 1시간이라고 한다. 결과는 시간패했지만 대국내용은 매우 흥미로우니 관심이 있다면 다시보길 바란다. 그로부터 약 6개월뒤인 2016년 1월 23일 '한국바둑의 전설'[42] 개막전에서 다시 만나 조훈현 九단에게 211수 만에 흑 불계승으로 승리하며 특별대국 당시 시간패를 설욕했는데 그 뒤에 2월 13일 열린 유창혁 九단과의 대국에서 시간패를 당했다.[43][44]
  • 2016년 11월 19일부터 일본의 인공지능 '딥젠고'와 맞바둑 세 판을 뒀다. 이세돌-알파고 대결처럼 각자 제한시간 2시간이었다. 대국 1국서 223수만에 흑 불계로 이겼다.# 하지만 다음날 2국에서는 백으로 패했다. 그리고 최종 3국에서 흑으로 승리하여 2:1로 2회 전왕전을 승리로 마감했다.
  • 인터뷰에서의 기행이나 톡톡 튀는 언변을 보면 상당히 유머러스한 사람인데 평소에도 코미디를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어에 좀 더 능숙하고, 바둑을 업으로 삼지 않았으면 코미디언이 되었을 거라고.#인터뷰

  • 현재 일본바둑계 최강으로 불리는 이야마 유타 九단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기사라고 한다.
  • 조치훈이 가장 좋아하는 바둑기사는 김지석 九단이라고 한다. 바둑 내용도 깔끔하고, 수도 잘 보고, 언변도 좋고, 결혼도 했고, 바둑기사 중에서 호감형 외모이기 때문이라고. 한 마디로 요약해서 제가 부러워하는 것만 다 가졌어요.라고 했다...
    • 사실 조치훈도 결혼은 했는데, 배우자인 소가와 교코(결혼 후 조치훈의 성을 따랐기 대문에 한자를 그대로 한국식으로 읽은 조경자라고도 표기한다) 여사께서 2015년 췌장암으로 별세하였다. 슬하엔 1남 1녀가 있다. 자녀는 모두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고 한국 국적은 없다. 조치훈이 국적만 한국이지 한국에서 주민등록이 말소된 지 오래된 상태라 아버지가 한국인이라 해서 한국 국적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 음치다. 자기가 노래를 부르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다 웃는다고. 예외로 이마가와 기사가 조치훈의 노래를 한참 듣다가 울었다는데, 알고보니 2절까지 들어서야 자기 애창곡을 부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서라고.[45] 딥젠고와의 제3국을 해설하던 이야마 유타도 조치훈의 노래실력은 잘한다, 못한다를 초월한 무언가라고 평했다...
  • 일본 쪽 기전에서 해설을 하거나 인터뷰를 하면 1인칭 대명사로 보쿠를 사용한다. 참고로 현재 일본에선 연배가 있는 어르신들이 편하게 말하고 싶을 때 고르는 대표적인 인칭 대명사이기 때문에 이상하게 보지 않아도 된다.
  • 한국 국적을 유지한 것과는 별개로 한국기원 소속 선후배 기사들과 어울리게 된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인데, 여기에는 몇가지 사연이 있다. 1980년 조치훈이 명인 타이틀을 얻고 한국으로 귀국했을 당시 정치인들이 사적인 자리에서 자신과 조훈현을 두고 대국을 해보라고 권했는데, 이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문을 박차고 나가버리는 바람에 높으신 분들한테 찍혀서 사실상 한국기원과 관련된 기전이나 행사에는 얼굴도 못비추게 되었던 것.[46] 또 하나는 조훈현과의 기념 대국을 두었을 때[47] 팬들이 조훈현 九단만을 응원하고 자신은 일절 응원하지 않아 자신의 국적은 한국이지만 사람들은 일본기사로 생각한다 여겨 한동안 거리를 뒀다고 한다.[48][49]

4. 기풍


조치훈의 기풍은 매우 치열하다. 서봉수의 처절함과는 어느 정도 통하면서도 조금 다른 맛이 있다. 모든 시간과 노력을 짜내 최선의 수를 찾아내려는 대국 태도는 뭇 기사들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하였다. "나는 대국에 졌으면서도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하는 말을 남겼는데, 조치훈도 어릴 때는 손이 빨리 나가는 편이라 꽤 고생을 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어릴 적에는 팔짱을 끼고 바둑을 두게끔 했다고. 그러면 손이 조금이라도 늦게 나가니까…[50]
그리고 바둑 기보만 보면 알 수 없지만, 입담이 상당하고 돌발행동이 많다. 위에 언급된 후지사와 슈코와의 기성 타이틀전 에피소드에서 나온 패기있는 발언이라든가, 가토 마사오 九단 추모방송에서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과 함께 과거 대국기보를 늘어놓다가 갑자기 골프 얘기를 꺼내면서 골프 치는 자세를 내보여서 바둑TV에서 제2카메라가 돌아가게 한다거나, 대국 도중에 차가 바닥나자 초시계 담당자(...) 찻잔을 가져가 마신다든가.
보수적 성향이 강한 일본바둑계에서 이런 언행을 선보이는걸 안 좋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살아있는 전설과 같은 존재이자 일본바둑계의 원로이고 항상 그래왔기 때문에 큰 문제로 취급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런 기행에서 나오는 입담 덕분에 바둑중계 보는 맛이 있다며 좋아하는 바둑팬도 많고 일반대중들 관심을 끌어주니 말릴 이유가 없으며, 실제론 매우 예의바르고 겸손하신 성격이라 까이는 일도 없다.[51]
그리고 애당초 일본 바둑계에서 안티가 형성되기가 힘든게 단순히 한국 출신 이단아가 아니라 80~90년대 일본 바둑계를 주름잡던 유명 기사들을 대거 양성해낸 기타니 미노루의 내제자라는 걸출한 출신배경이 있다. 현재 일본기원 수뇌부 혹은 원로대접을 받는 프로기사 대부분이 기타니 도장 출신이고 조치훈도 이 범주에 들어가는 원로라 엄청난 인맥이 형성되어 있는 셈. 전설적인 실적을 쌓은 인물인데다가 출신 배경 역시 일본 바둑계의 주류 of 주류고 평소 성품이 좋으니 보수적인 일본 바둑계에서도 비난받을 여지가 없는 것이다.
특히 이 입담이 빛을 발하는게 바로 바둑 해설인데, 7대 타이틀전 같은 일본내의 굵직한 기전에서는 해설로 자주 초청되는 터라 중계방송을 보는 바둑팬 + 일반인들에게 인지도가 높고 함께 해설하는 상대에 따라서는 상당한 포텐이 터져서 재미있는 해설이 나오곤 한다. 대표적인 것이 2014년에 있었던 제69기 혼인보 도전기 제3국에서의 해설(자막판)이다. 함께 해설을 맡은 여류 바둑기사인 만나미 나오(万波 奈穂) 二단이 백 6 十三을 제안하자, 맥이 안 좋다는 변명을 해대면서 시간을 버는 것을 시작으로, 만나미 二단이 계속 수를 물리면서 여러 가지를 연구하자 "실패를 인정하라." 하면서 투덜대며 같이 두다가[52], 결국 좋은 수라고 인정하는 과정이 상당히 재밌다. 여기에 클라이맥스로 이다 아츠시 八단이 정말로 6 十三에 두어서, 만나미 나오가 맞췄다면서 신나하고, 옆에서는 조치훈이 당황하면서 몇 분 동안 해설을 버벅이는 광경은 덤이다. 그 와중에도 전설답게 묘수일지도 모르는 수를 하나 제시했다.[53] 그의 기행목록 그 외
자식들과는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식들은 온전히 아내분이 신경쓰셨다고. 부인상을 당하고 독신인 딸과 단 둘이 생활하면서 대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들은 아들 나이 20대 초반에 결혼해서 이미 분가한 상태이다. 부인상을 당했을 때 처음으로 아들 얼굴을 봤다고 한다.

5. 어록


앞으로 나아가다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 나타난다면, '''그 벽에 손톱자국이라도 내고''' 물러나와야 한다.

바둑에 진 사람의 제한시간이 남은 것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까 그 바둑이, 컴퓨터에게 지게 될 때, 그 때가 인류가 끝나는 날입니다. '''로봇에게 인간이 지배당하는 날입니다. 그런 때가 옵니다. 그러니까 로봇을 위해 우리가 일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뿐입니다. 맛있는 거 먹고, 즐겁게 놀고, 오늘도 즐겁게 즐기고, "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1] 일본기원에서 오래 활동하여 아예 로마자 이름이 Cho Chikun으로 알려졌고, 여권에도 일본어 발음대로, 즉 조 치'쿤'으로 개명되었다. 유사사례로 린하이펑(Rin Kaiho: 린 카이호) 九단이 있다.[2] 제25세 혼인보 치쿤. 일본기원에서 조치훈을 표현하는 표기명이다.[3] 일본 영주권을 가지고 있다.[4] 배우자인 조 교코는 2015년 췌장암으로 별세[5] 2016년에 환갑이 지나, 명예명인 호칭을 공식적으로 쓸 수 있게 되자 최근엔 이쪽으로 불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7대 타이틀 서열상 명인이 혼인보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순서는 기성>명인>혼인보... 순. 상금 랭킹 순서다. 조치훈은 아쉽게도 기성전에서는 4년 연속 우승으로 5년 연속 우승을 달성해야 주어지는 명예 기성 달성을 못했다.[6] 또한 풍양 조씨세도 정치로도 악명이 높다. 안동 김씨와 함께 세도 정치의 대표적인 가문.[7] 여류기사까지 포함하면 2019년초에 10세 30일의 나이로 입단한 나카무라 스미레가 전체 최연소 기록을 가지고 있다.[8] 참고로 이후에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기사는 장쉬 九단과 이야마 유타 九단 밖에 없다. 이중 이야마 九단은 최초의 연간 그랜드슬램 달성자.[9] 공식적인건 아니고 일본 언론에서 만들어낸 조어다.[10] 2013년에 이야마 유타 九단이 사상 두 번째로 대삼관을 달성했다.[11] 1999년 한국 출신 조선진 九단이 조치훈 九단의 11연패를 저지했다.[12] 참고로 7대 기전 5연패 이상때 주어지는 명예 OO 칭호는 만 60세 혹은 은퇴시 사용이 가능하며, 10연패에 한해서 나이에 상관없이 즉시 사용이 가능하다. 조치훈이 혼인보 10연패를 기록하자 일본기원에서 새롭게 만들어낸 규칙. 참고로 현재 혼인보 5연패(2012~2016)를 달성해 26대 혼인보 몬유(文裕)에 오른 일본바둑계 대표주자 이야마 유타 九단도 나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공식적으론 사용을 못하고 있다.[13] 2014년에 통산 73회 획득을 기록하며 역대 1위가 되었고, 현재까지 본인이 경신중에 있다.[14] 2017년 4월 1500승을 거두며 1위 기록이 되어 현재도 경신중이다.[15] 여담으로 1200승은 일본기원 사상 세 번째로 달성했고, 1300승은 일본기원 역대 두 번째, 1400승 1500승은 일본 기원 사상 최초 기록이다.[16] 한국기원에서는 조훈현이 1982년에 최초로 입신했는데, 한국인 전체를 놓고 보면 조치훈이 1년 먼저 입신한게 맞다.[17] 형 조상연은 일본기원 은퇴 七단, 외조카 최규병/이성재는 한국기원 九단.[18] 고바야시 고이치는 조치훈보다 3살 연상이다. 하지만 그가 입문 당시 접바둑 6점 정도로 치수 차이가 컸다. 애당초 고바야시 고이치는 같은 사문인 기타니 미노루 도장의 조치훈보다 나이 많은 후배다. 어린 기사들 사이에서는 한살 차이가 정말로 크고, 조치훈은 고바야시보다 시기상으로는 늦지만 더 어린 나이에 입단을 했다.[19] 참고로 이 기록은 2009년에 이야마 유타가 20세 4개월의 나이로 명인 타이틀을 따내며 경신되었고, 2019년에 시바노 도라마루가 19세 11개월의 나이로 명인을 따내면서 역대 3위 기록에 랭크 중이다.[20] 다만 2020년 인터뷰에 따르면 허구라고 한다. 본인은 비행기를 타니 신난다 하며 따라갔다고.[21] 원래 대로라면 조치훈의 패배가 맞지만, 기록자도 책임이 있었기에 입회인이 무승부로 선언.[22] 여담으로 당시 4국에서 패와 관련되어 웃지 못할 사정으로 조치훈이 반칙을 저질러[21] 초유의 무승부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자세한 전말은 패(바둑) 문서 참고. 그래도 이전에 이미 2승 1패로 승기를 확보하였고 다음 5, 6국서도 내리 이겨 조치훈이 압승을 거두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23] 다른 기전에는 나가더라도 몇십 수 두다가 돌을 던지는 등 정말 대충 임했을 정도다. 쇼기계도 비슷한데 프로기전이 여러개인 프로바둑계에서는 가장 서열 높은 대회 우승기록을 호칭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압도적으로 상금이 많은 랭킹 1위 기성전 우승자면 당연히 기성전에 올인하고 바둑계에서도 기성전 우승자 타이틀로 소개받는다. 현재 기성전의 우승 상금은 5천만 엔으로 일본 내 바둑기전 중 우승상금이 제일 많은데, 이미 저 시절도 우승상금이 5천만 엔이었다. 말 그대로 기성전만 우승하면 1년 내내 흥청망청 쓰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문제는 후지사와는 술을 워낙 좋아하고 돈을 막 써서 그걸로도 모자랐다고 한다...[24] 조치훈이 가지고 있는 타이틀전에서 도전자에 올라가야겠군.[25] 선배님이 갖고 계신 기성전의 도전자가 되겠습니다.[26] 4:0으로 이겨주겠다.[27] 세 판만 져주고 나머지 4판은 다 이기겠다.[28] 그래도 1990, 1991년 왕좌전을 2연패했다. 당시 후지사와 슈코 9단은 60대 후반.....[29] 당시 의사가 밝힌 부상 부위는 다음과 같았다. 1) 오른쪽 정강이의 두 뼈가 모두 부러지고 뼈가 살밖으로 삐져나옴. 2) 오른쪽 무릎 관절에서 퇴골(허벅지뼈)의 연골이 떨어져 나감. 3) 왼쪽 무릎 관절에서 전십자인대 파열, 후십자인대 손상, 대퇴골의 연골 골절. 4) 왼손 관절부에서 요골과 척골 골절 5) 머리의 외상.[30] 이 에피소드에서 무마취 수술을 주장했다는 설이 있는데, 그건 지인이던 요네나가 쇼기 기사가 퍼뜨린 소문이라고 조치훈이 직접 밝혔다.[31] 조치훈은 당시 3국에서 흑을 잡았고, 251수 끝에 1집반 승을 거두었다 당시 기보 보기. 바둑 역사에 보기 드문 중앙 혈전이 벌어진 대국이다.[32] 참고로 이 사진만 보면 고바야시가 조치훈의 휠체어 투지에 감명받아 머리를 짦게 깎고 대국에 임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이 대국 전에 중일 슈퍼대항전 매치가 있었다. 고바야시를 포함하여 일본 대표팀은 반드시 이기고 돌아온다고 다짐하고 나갔으나 져서 돌아온 바람에, 일본 대표선수 전원이 모두 삭발을 했기 때문이다(...).[33] 그러나 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뼈가 약해져서 의자에 앉는 평소 대국과 달리, 무릎을 꿇은 채 두는 도전기에 대비해서 수영장에서 무릎을 단련한다고 한다[34] 21대까지는 에도 시대에 역사적으로 혼인보를 계승한 인물이고, 22대 이후로는 타이틀 전에서 조건을 만족한 사람에서 주어지는 형식이 됐다.[35] 혼인보의 존칭은 선대 혼인보 처럼 이름에 '秀', '丈', '元', '昭', '寿' 등의 글자를 넣어 실명과 다른 존칭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나 조치훈은 본명 이외의 다른 이름 사용을 거부하여 본명인 치훈을 그대로 쓴다. 조치훈이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이었기에 이런 주장에 일본기원이 한 발 물러선 것이다.[36] 이 당시 야마시타는 31살의 나이인데 반해, 조치훈은 53세였다. 기성전 같은 거물급 타이틀전은 젊은기사들이 활약하는 빈도가 압도적이라는 걸 생각하면 풀 세트 접전까지 간 것도 정말 대단하다고 보는 게 맞다.[37] 일본기원 소속의 기사중 50세 이상이면서 7대 타이틀 홀더 및 경험자만이 참여하는 제한기전.[38] 링크된 영상을 보면 그림자로 조치훈 9단이 자신의 머리를 때리는 모습이 보인다.[39] 최근엔 커제가 이러한 경향을 보인다. 커제는 바둑돌까지 내던지는 쇼를 보인다. 사실 바둑돌을 던지는것은 바둑에서는 있을수 없는 일이다.[40] 이와 비슷한 케이스로는 일본프로야구 최다안타(3,085개) 보유자인 장훈이 있다. 둘다 자기의 분야에서 정점에 올랐던 선수지만 끝까지 한국 국적을 고수했다. 장훈은 하리모토 이사오라는 일본이름이 있는데 조치훈은 일본에서 조치쿤으로 불린다. 음독으로 읽은것이다. 사실 홈런왕 세계기록 보유자(868개) 왕정치도 일본이름은 오 사다하루이지만 중화민국 국적이다. 그러고보면 조치훈, 장훈, 왕정치 전부 자기분야에서 귀화를 하지 않고 전설적인 업적을 쌓은 사람들이다.[41] 1983년 기성棋聖전(후지사와 히데유키), 1984년 명인전(오타케 히데오), 1992년 혼인보전(고바야시 고이치)[42] 조치훈,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 5명의 레전드 기사가 출전해 5인 풀리그로 우승자를 가리는 대회다.[43] 대국을 하다가 조치훈 九단이 땀을 많이 흘리는 바람에 반상까지 땀이 떨어졌고 이를 닦다가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초읽기까지 시간을 지체해버리는 바람에 이 상황이 벌어졌다. 상대였던 유창혁 九단도 당황했다고 한다.[44] 조금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위에서 언급된 대로 조치훈 九단은 툭하면 자기 머리를 때리는 습관이 있는데 이 날도 어김없이 자기 뒤통수를 가격했다가 맺혔던 땀이 대량으로 튀었다.[45] 애창곡을 못 알아들을 정도로 노래가 끔찍했다는 것이다[46] 참고로 이런식의 권유는 프로기사들 사이에서 상당히 무례한 요구로 통한다. 당시 조훈현도 난감한 기색을 보이며 대국을 꺼렸다고 한다.[47] 2번을 둬서 2번 모두 조치훈 九단이 이겼다.[48] 다만 조훈현 九단은 국내에서 활동하며 확고한 팬이 있었지만 조치훈 九단은 일본에서만 활동해 국내에 팬이 없었던 것의 문제라 본다. 타 종목으로 치면 KBO리그를 거쳐 메이저리그로 진출해 국내에 확고한 열성팬이 있는 류현진과 메이저로 바로 간 추신수의 차이라 봐야할 듯.[49] 거기다가 이 당시만해도 한국바둑의 실력이 일본바둑에 못 미친다는 평이 대세라 사람들은 내심 조훈현 九단이 언더독으로 이겨주길 바랬던 것도 있었다.[50] 손이 빨리 나가는 것으로는 스포츠계 콩라인의 전설 서능욱 九단도 유명하다. 이쪽은 더 심해서 염주를 들고 대국장에 들어갔는데 하도 염주를 돌려대다가 염주가 끊어져 버렸다고....[51] 아래 언급되는 해설 에피소드에서 나오듯 오히려 후배 기사들과 재미있게 해설해보려고 망가지는 일도 자처하시는 걸 보면 대인배 속성도 보유중이라는걸 알 수 있다.[52] 그 와중에 조치훈도 한 수 물린다...[53] 실전에서는 구현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