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수

 


서봉수
徐奉洙, Seo Bong-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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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바둑기사
소속
한국기원
생년월일
1953년 2월 1일
국적
[image] 대한민국
출신지
충청남도 대덕군
(현 대전광역시 대덕구)
학력
배문고등학교
입단
1970년
단급
九단
한큐바둑 닉네임
seobs01
1. 개요
2. 상세
3.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
4. 기풍
5. 인터뷰 및 어록
6. 여담
7. 주요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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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둑이란 나무판 위에 돌을 늘어놓는 것이다."
- 서봉수 九단.[1]

한국의 프로바둑기사.

2. 상세


독학으로 바둑을 배워서 프로 정상급까지 올라간 천재기사. 엘리트 코스를 밟아 정상에 오른 조훈현과는 대조적이다.
어릴 때 독학과 내기바둑으로 바둑을 배우면서 입단하는 데 성공한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바둑책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현현기경"도 제대로 읽지 않고 입단한 것이라, 나중에 입단하고 한참 후에 "아, 이런 좋은 책이 있었구나!" 하면서 탄식했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바둑계에서는, 지금도 그렇지만 내기바둑은 철저히 금기시되었다.[2][3] 특히 초보자의 경우 더욱 그렇다.[4] 사사로이 뭔가를 걸면서 승부를 한다는게 초보자들의 심성에도 좋지 않고(특히 바둑계에 입문하는 초보 프로들은 보통 10대 초중반이다), 내기바둑은 손쉬운 승리를 위한 꼼수를 자주 쓰게 되므로 바둑의 깊이가 약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네기원의 바둑 기력은 천차만별이고 마치 영화 타짜처럼 상대방에게 자신의 기력을 숨기기 위해서 그럴듯해보이는 떡수를 일부러 둔다든지 그런 심리적 기술을 많이 쓴다. 더 좋은 수를 찾아낼 수 있는데 상대방에게 마치 조금만 더 잘 두면 이길 수 있겠다는 착각이 들게 아슬아슬하게 이기는 것이 내기바둑에서는 최강자이다. 내기바둑을 두는 상대방 입장에서 이기지 못할 상대라는 것을 알게 되면 바둑을 두고 싶겠는가. 그렇다보니 딱 동네기원들을 돌아다니면서 평정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이후로 더 이상 실력이 늘 수가 없는 것이다. 바둑 실력을 더 키워서 더 좋은 바둑을 두는 것 자체보다 아슬아슬하게 이겨 상대가 계속 도전을 하도록 만들어서 더 큰 돈을 따내는 것이 훨씬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프로기사급과 아마추어가 대국을 둔다면 한집이나 반집으로 이길지, 반집으로 져줄지 그 수준까지 상수가 원하는 대로 국면을 끌고갈 수가 있는 게 바둑이다. 계속 반집으로 이기는 국면을 만들면 하술할 것처럼 한판 한두수만 잡으면 이길 것 같은 게 사람 심리.
내기바둑에 맛들이게 되면 그 내기 스케일도 장난아니게 커진다.[5] 당시 서봉수는 집안이 가난해서 내기 바둑을 일종의 생계수단으로 삼다시피 한 것인데, 그 경험조차 실력으로 승화시켰다. 무슨 경험을 하든 그것을 독으로 마시느냐 약으로 마시느냐는 본인의 기량에 달려있음을 보여주는 일례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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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제4기 명인전 도전기 대국상황. 왼쪽은 대국수 조남철, 오른쪽이 서봉수. 서울 대원호텔에서 개최되었다.
여하간에 프로에 입단한 직후 조남철 九단(당시 八단)을 물리치고 명인 타이틀을 차지했는데, 이 때 단수가 二단. 요즘이라면 初단이나 九단이나 실력 차이가 크다 보기 힘들고, 성적을 꾸준히 내거나 국제대회 우승을 하면 저절로 승단하지만 저 당시는 승단대회의 권위가 강력했다. 이마저도 대회 결승에 오를 때는 初단이었고, 결승 5번기 도중 승단대회를 통과해서 二단 승단한 것이다. 당시 조남철 九단은 '서봉수가 三단만 되었어도...'라고 탄식했다고. 입단에서 첫 우승까지 1년 8개월 걸렸는데,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기록이 박영훈 (당시)二단의 2년이다. 이후 명인위를 5연패하면서 서명인으로 불리게 된다.[6] 서봉수의 명인위 쟁취에 이어서 조훈현국수전을 우승하면서 한국 바둑의 개척자 조남철 九단과 김인 九단, 윤기현 九단 등 일본유학파 1세대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조국수vs서명인의 장기집권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후 조훈현 독주시대에 서봉수가 이긴 경기가 조훈현이 이긴 경기의 반도 안될 정도로 전적에서 크게 밀림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도전자이자 '라이벌'로 불렸다. 1970년대부터 20여년간 조훈현과의 타이틀 매치(결승전)만 대략 150여차례 이상 겨뤘는데, 이는 당시 국내에 조훈현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프로 기사가 서봉수 뿐이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서봉수 바로 아래급인 '도전 5강 - 서능욱, 강훈, 김수장, 장수영, 백성호'은 10여년간 끊임없이 도전했으나 일단 서봉수에게 막히고, 정말 어쩌다 서봉수를 넘어서도 조훈현에게는 무참히 박살났다. 심지어 도전 5강은 1985년 조훈현과의 이벤트 치수 고치기 10번기에서 정선과 두 점을 왔다갔다하는 굴욕을 당하기까지 했다.[7][8] '동등한 대결로는 조훈현에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이 판명된 굴욕적인 수치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 당시 대한민국 바둑계에서는 서봉수 외에 조훈현과 싸움이 되는 기사가 아예 없었다. 덕분에 대부분의 타이틀 매치는 조훈현vs서봉수의 구도가 되었고, 이 조국수vs서명인 시대는 결국 1990년대 초 이창호, 유창혁이 등장할 때까지 10년 이상 이어진다.
한국 최초로 1000승을 달성한 프로기사이기도 하다. 조훈현은 대부분 대회의 타이틀 홀더였기 때문에 당시 도전기[9] 대회 방식이 많은 특성상 도전기를 제외하면 공식전을 치를 일이 많지 않았고, 덕분에(?) 조훈현에게 지면 다음 대회 본선으로 떨어지고 대부분 결승까지 올라갔던 서봉수는 조훈현에 비해 훨씬 많은 대국 수와 더 많은 승수를 쌓았고 조훈현보다 먼저 1000승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조훈현의 일본 기원 기록이 한국 기원에 인정되지 않은 점도 있다.
혹자는 1996-97년 제 5회 진로배 국가대항전[10]을 서봉수의 진정한 절정으로 꼽기도 한다. 이창호의 독재로 조훈현마저 밀려나는 와중에 서봉수는 완전히 뒷전으로 몰렸고, 모두가 "서봉수는 끝났다."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제4회 진로배에서는 국가대표로 뽑히지도 못하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1996년 이창호는 국내 8관왕에 국제 2관왕을 기록하는 독재자였고, 유창혁은 SBS연승전과 테크론배, 응씨배를 우승했으며, 조훈현도 패왕전과 기왕전을 우승하며 버티던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1997년의 진로배 국가대항전, 한국의 4장(두번째 주자)으로 나선[11] 서봉수는 중국과 일본의 기사들을 9연승으로 쓸어버리며 한중일 삼국을 충격에 몰아넣었다.[12]서봉수의 9연승을 앞둔 당시 연합뉴스 기사[13] 무려 15명이 출전한 올스타전에서 열린 대국은 고작 11국, 중국의 5장 위빈이 거둔 2승[14]을 제외하면 나머지 대국은 모두 서봉수의 것이었다. 국가대항전 9연승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은 전무후무한 대기록.[15] 이 대회에서 서봉수는 우승상금, 대국료, 연승상금을 포함해 1억4천만 원의 거액을 챙겼고, 한 판도 안 둔 조훈현, 유창혁, 이창호는 2500만원의 우승상금을 챙겼다. 오죽했으면 후배인 나머지 셋은 그렇다 치고 공짜로 2500만원 먹은 동갑내기 조훈현이 서봉수한테 맛있는거 샀느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을 정도. 당시 이미 전성기가 지났던 서봉수가 일본과 중국의 국가대표 9명을 연이어 박살낸 것은 말 그대로 센세이션이었다. 서 명인의 9연승에 대한 더욱 자세한 내용은 이곳을 참고
조훈현과는 사이가 영 좋지 않다. 조훈현이 귀국해서 군생활을 마치고 한국 바둑계에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사이가 분명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어느 새 사이가 많이 나빠져서 복기도 제대로 하지 않고 공식석상에서도 별로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16] 시간이 흘러서 이창호가 정상에 서고, 조훈현-서봉수가 뒤로 밀려나서 둘이 어느 정도 화해했나 싶었더니만 다시 관계는 악화일로. 바둑계 관계자들도 정확한 원인은 모른다고 한다. 서봉수는 자신이 특별히 싫어한 건 아니고, 조훈현이 자신을 멀리하다보니 자신도 자연스레 조훈현을 멀리하게 됐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 둘의 관계에 대해 조훈현은 본인의 자서전인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에서 승률 90%에 달하던 자신에게 패배해도 전혀 무뎌지지 않고 사냥개처럼 집념을 보이며 자신을 꺾는 그의 모습에 언제부턴가 어긋나기 시작했고, 복기는 한 번 안 하게 되자 계속 안 하게 되어버렸으며[17] 그 무렵부터는 사석에서 만나는 일도 뜸해졌고 일부러 더 확실한 패배감을 안겨주기 위해 다 이긴 경기에서도 독수를 두곤 했다고 고백했다. 독기는 서봉수 9단이 더 하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아서, 특별히 악감정이 없는 상대에게도 승리하기 위하여 일부러 적개심을 고취하는 방식으로 승부욕을 태웠다고 발언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애증 관계는 과거의 일이며, 조훈현은 환갑이 넘은 지금은 멀리서 그를 응원하지 서로 간의 악감정은 전혀 없으나 그 둘의 과거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또 서로가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거리를 두는 게 현명할 거라고 판단했다고 둘의 관계를 언급했다.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에서 조 국수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 기원에서 만났을 때는 또래라 금방 친해졌다고 한다. 짜장면 내기 바둑을 수없이 두었는데, 일본에서 바둑을 두고 온 입장에서 '사범이나 선생도 없이 월간 바둑만 죽어라 읽으며 내기 바둑으로 성장한' 서봉수는 조훈현에게 '흙탕물에서 글러브를 끼고 이종 격투기를 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사이가 갈라지기 시작한 것은 1974년 6기 명인전에서 조훈현이 서봉수에게 3대1로 패하고 난 뒤로, 이때부터 피 튀기는 진검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조훈현이 76년 왕위전에 이어 78년 명인위까지 빼앗으면서 상술한 대로 서먹함이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고. 그러나 조 국수는 '서 명인에게서 승부사의 기질과 투쟁 정신을 배웠다', '그가 있었기에 내 칼날이 무뎌지지 않았다', '요즘 기사들도 서봉수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했으며 서 명인 또한 '조 국수는 내 바둑의 은인이다'라고 한 인터뷰에서 훈훈하게 평가했다. 감정적으로 상해 얼굴을 안 보는 사이가 아니라 그저 둘의 성향이 너무 다르기에 서로 거리를 두는 것일 뿐인 셈.
2000년대 이후로는 조훈현 九단에 비하면 비교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커리어가 추락했다. 주요한 원인은 2003년의 이혼으로 인한 심리적 충격으로 보이며 이혼 후 성적이 급속도로 추락하는 모습을 보이나, 이미 이혼 전부터 성적은 하강해 이세돌, 이창호 등의 일선 기사들과 비교하기엔 좀 무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일견 유창혁 九단과도 비슷한 케이스로 보인다. 최근에는 큰 대회 본선에서는 보기 힘들고, 시니어 기전에서 우승권을 다투는 정도다. 한국바둑리그에서 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바둑 관계자들은 엘리트 코스를 밟은 유학파 조훈현과 대조시켜 '순국산 바둑', 나아가 '된장 바둑'이라고 불렀는데 서봉수는 "내 바둑은 된장처럼 밋밋한 바둑은 아니고 고추장 바둑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된장 바둑은 이창호가 된장 바둑이지..."라며 촌평. 다만 몇 번이나 몰락했다가도 몇 번이고 다시 부활해서 일선의 기사들과 겨루고, 지금도 일선 기사들에 비해 모자람이 없는 조훈현 九단에 비해 서봉수 九단이 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철저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은 조훈현 九단에 비해 기본기 없이 독학으로 배운 바둑의 한계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 아니냐고 분석하기도 한다.
2004년 재혼을 했는데 상대가 베트남인이라 바둑계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18] 한국 바둑계의 명예를 훼손시킨다는 비난이 일부 있었던 것인데, 인종차별적 편견이 들어간 비난이였기 때문에 오히려 역으로 비판받고 묻혔다. 당사자는 자신의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밝힌 바 있으며, 이후에는 부인의 고향인 베트남을 종종 방문해서 바둑 보급 활동도 하고 있다. 부인의 친정에 생계수단으로 쓸 작은 배 한 척을 마련해 주는 것이 목표라고, 그리고 실제로 사준 듯하다.베트남 간 서봉수-2007.02.15
독설가로 유명한데, 남에게 어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그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어서 그런 것. 가장 유명한 얘기로는 "바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을 때 다른 기사들은 "인생"이니 뭐니 하고 대답했는데 서봉수는 "판때기에 돌 놓는 게임"이라고 대답하여 질문자를 벙찌게 만든 바가 있다. 그런데 '바둑은 예와 도'라고 간주하던 일본식 현대바둑의 패러다임이 국제무대에서 끊임없이 도전받고 박살나왔음을 생각한다면, 이 촌평은 오히려 바둑의 본질을 과격하지만 날카롭게 통찰하는 발언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2001년 컴퓨터 인공지능 바둑 붐이 일자 서 九단과 '가로수 닷컴 바둑대회' 우승 프로그램인 고메이트가 9점 접바둑을 둔 적이 있다. 서 九단은 이 바둑에서 첫 수를 '二의2'에 두어 컴퓨터를 멘붕시켰다(...). 컴퓨터가 실수를 계속 거듭하자 손쉽게 바둑 국면을 장악했다고 한다. 상식적인 대국자는 첫 수를 여기에 두지 않고,[19] 당시 인공지능 개발 수준으로도 대응 방법이 입력돼 있지 않은 경우였기 때문 그의 기발함과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그때 서 九단이 평가한 해당 프로그램의 기력은 9급.
허나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후 어떤 인공지능 프로그램한국 최강급 바둑기사를 무참히 쓰러뜨리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이로 인해 20년 전 그가 남긴 "바둑의 신이 있다면 그의 눈에는 승부수니 기세니 하는 애매모호한 말은 전부 가소로운 것들로 비춰질 것이다. 신의 눈에는 오로지 정수와 악수 밖에 없다."는 말이 재주목을 받았다. 이 경기를 본 본인도 굉장히 경악한 반응을 보이며 그 때의 발언과 비슷한 취지의 말을 남기기도. 공교롭게도 그 4국째에서 이세돌 또한 예상치 못한 신의 한 수로 알파고의 실수를 이끌어내면서 역전의 발판을 쌓을 수가 있었다.
2018년 9월 4~5일 삼성배 32강전에 노장 선수로 출전했지만 퉁멍청-천쯔젠에게 패해 탈락했다.
2019년에도 다시 삼성화재배 시니어 예선을 통과하고 출전했는데, 이번엔 중국의 젊은 기사 궈신이를 이기고 16강에 진출했다! 후지사와 슈코 九단의 63세 응씨배 4강 기록과 조훈현 九단의 50세 삼성화재배 우승 기록을 깰 수 있을지 주목받았지만, 구쯔하오에게 지면서 8강에는 가지 못했다. 현재 서봉수 九단은 66세이다.
2019년 12월 26일, 시니어 바둑리그 챔피언결정전 1경기에서 조치훈 9단에게 불계패하면서 한국기사 중 최초로 통산 1000패(...)를 기록하였다. 물론 그만큼 긴 커리어를 유지했다고 보면 되겠다. 이날까지 서봉수의 전적은 무려 2695 대국 1692승 3무 1000패, 통산 승률 62.85%, 우승 30회(국제대회 3회 포함) 준우승 67회로 최다 대국 2위, 최다승 3위, 최다 우승 공동 4위이다.
최근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는 등 계속해서 도전을 이어나가고 있다. 링크

3.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


항목 참조.

4. 기풍


처절함과 독함. 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최철한과 조금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최철한은 독하지만 처절한 것과는 좀 거리가 있는 반면 서봉수의 바둑은 승부근성이 뛰어나고 처절한 맛이 있다. 어릴 때 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조훈현이나 후대의 젊은 기사들과는 달리, 흔히 동네 기원에서 볼 수 있는 싸움바둑, 힘바둑이다. 바둑계의 엘리트들이 걷는 정규교육과는 거리가 한참 먼 힘바둑 스타일로 정점에 선 매우 드문 기사이다. 시니어가 되어서는 단순히 힘바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공부와 유연한 사고로 다양한 유형의 바둑을 두는 편. 시니어 치고도 나이가 굉장히 많지만 여전히 시니어계에선 여포모드이다. 그래도 많은 바둑팬들은 여전히 서봉수의 바둑을 '수없이 상처가 나도 피를 철철 흘리며 끊임없이 덤벼들어 끝끝내 상대의 목을 베는' 처절한 사투로 기억한다. 특히 그 처절함의 백미를 맛볼 수 있는 대국은 미학자 오타케 히데오와의 제 2회 응씨배 결승 5국. 기세가 거의 넘어간 상황에서 초강수를 연거푸 이어가며 바둑을 혼전으로 만들었고 오타케의 실수를 놓치지 않고 대마를 역으로 잡아내며 대역전승을 거두었다.

5. 인터뷰 및 어록


기사

1970년 입단을 했는데 1년 8개월 만에 조남철 8단을 이기고 명인전 우승을 차지했다. 하늘 같은 선배들을 이긴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배운다는 생각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그래도 젊다 보니 겁 없던 시절이었고 패기가 넘쳤다. 덜컥 우승까지 하고 보니 지금도 내 별칭이 ‘서 명인’이다. 입단에서 첫 우승까지 1년 8개월 걸렸다는데 지금도 그 기록을 깬 후배가 없다. 당시로선 새파란 2단짜리가 당대 최고수를 이겼으니 바둑계에선 난리가 났다. 우승 소식이 신문 1면에 날 정도였다. 더구나 내가 순수 국내파라고 하니 주변에서 더 응원을 해줬다. 그때는 반일감정이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하던 시절이었다. 하여간 명인전 우승하고 나서 얼마 있다가 조훈현 9단이 일본 유학 마치고 귀국해서 국수전에서 우승했다. 그때부터 15년 가량은 ‘조 국수와 서 명인 시대’라고 표현하곤 했다.

"바둑에 신이 있다면 그의 눈에는 승부수니 기세니 하는 애매모호한 말은 전부 가소로운 것들로 비쳐질 것이다. 신의 눈에는 오로지 정수와 악수밖에 없다."

이 어록은 알파고의 등장으로 재평가를 받았다.

신과의 기력 차이는 두 점이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세 점이다. [20]

참고로 강철허리 린하이펑은 세 점이라고 보았다.

이창호와 2인자들간의 기력 차이는 한 집이다.

나는 영원한 학생이다. 체력이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는 계속 바둑을 배운다. 바둑은 공부할수록 계속 실력이 는다. 내 바둑도 계속 늘고 있다. 지금도 틈날 때마다 한국기원에 와서 연구생들 틈에 껴서 공부를 한다.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본다. 나이 차이가 50년은 나는 새까만 후배들이지만 실력은 수준급이니까 배울 게 있으면 배우는 거다.

조 국수와 내가 다른 게 또 하나 있는 데 조 국수는 이창호 9단을 제자로 키웠는데 나는 제자를 키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자를 키우려면 바둑 도장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나는 그러질 않으니까. 제자 키우는 건 아마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그저 눈감는 날까지, 체력 되는 날까지 바둑을 두면서 살다가 죽는 게 소원이라면 소원이다.

세계 바둑계는 한국과 중국, 일본이 주도한다. 세 나라가 고루 발전하며 경쟁하는 게 제일 좋다. 일본이 예전 같지 않은 게 안타깝다. 큰 바둑대회만 해도 요즘은 한국과 중국에서만 개최한다. 그건 한국 바둑계한테도 좋지 않다. 일본이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해보면 쇄국정책, 문을 열지 않아서 뒤처진 게 아닌가 싶다. 한국 바둑 역사를 나눠본다면 1대 조남철, 2대 김인, 3대 조훈현, 4대 이창호라고 할 수 있다. 5대는 아직 없다. 이세돌일지 박정환일지 아직 확신이 안 선다. 확실한 1인자가 없다. 최상위권 그룹은 형성돼 있는데 예전처럼 독주하는 사람은 없다.

바둑이란 나무판 위에 돌을 늘어놓는 것이다

바둑은 연결이다.


6. 여담


- MBC에서 제작한 3.1절 특집극 <맞수>에서 배우 정보석이 서봉수 역을 맡아 열연했다. 닮았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특유의 시니컬한 성격을 아주 잘 반영해 연기했다. 드라마의 클라이막스가 서봉수가 93년 응씨배를 우승하는 장면

7. 주요 경력


  • 1970년 프로 입단
  • 1971년 명인전 우승(당시 18세로 최연소 기록)
  • 1986년 九단 승단
  • 1987년 국수전 우승
  • 1990년 제2회 동양증권배 우승
  • 1993년 제2회 응씨배 우승
  • 1994년 통산 1000승 달성
  • 1997년 진로배 SBS 세계 바둑 최강전에서 9연승으로 한국팀 우승에 결정적 기여


[1] 서봉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어록이다. 바둑을 기예나 심신수양같은 것으로는 전혀 생각지 않았고, 오로지 게임 그 자체로서 돈을 버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2] 실제로 라이벌인 조훈현 九단도 어렸을 적 내기바둑을 두었다가 세고에 九단에게 파문당할 뻔 했다. 한번 둬보라고 꼬드겼던 선배인 후지사와 슈코 九단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간신히 철회됐다고.[3] 한국의 경우, 개척자인 조남철 九단이 초기부터 내기바둑을 강력히 배척했기 때문에 내기바둑이 프로와 철저히 분리될 수 있었다.[4] 물론 차민수 五단의 바둑 스승이었던 한태훈의 경우 적정 수준의 내기바둑을 권장했다고는 하나 그건 매우 드문 경우로서, 그가 내기 바둑을 권장한 이유는 이긴 자가 강하다는 걸 가르쳐 주려고. 하지만 그 역시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지언정 입단을 목전에 둔 사람에게는 좋지 않다고 경고한 바 있다.[5] 과거에는 큰 규모의 내기 바둑(이를테면 쌀가마니빵, 방앗간빵과 같은)도 있었다고 한다.[6] 뒷날 국수전도 우승하여 2연패를 했지만, 지금도 서봉수를 '서국수'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시피하다. 국수를 별칭으로 달고 다니는 사람들의 위상이 워낙 넘사벽이어서 왠만한 성적으로는 명함도 못내민다. 국수(동음이의어)#s-1.2 참조.[7] 바둑을 모르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바둑은 시작전에 홀짝을 통해 흑돌과 백돌을 쥘 사람을 정하고, 흑돌을 차지한 사람이 먼저 둔다. 그런데 당연히 먼저 두는 흑이 유리하니까, 대국이 끝난 후 집을 셀 때 백에게 6집반(한국, 일본) 또는 7집반(중국)의 을 준다. 그러나 실력이 명백하게 차이가 나는 경우 무조건 하수가 흑돌을 쥐고 먼저 두고, 백에게 덤도 주지 않는다. 백돌을 쥔 고수가 핸디캡을 안고 싸우게 해서 바둑을 대등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정선이라고 하다. 그런데 둘 사이의 실력차이가 워낙에 커서 정선으로도 대등한 바둑이 되지 않는 경우, 흑을 쥔 하수가 미리 바둑돌을 몇개 깔아놓고 시작한다(이때 미리 깔아 놓은 돌의 개수에 따라 두 점 ~ 아홉 점 접바둑으로 부른다). 저 '정선과 두 점을 왔다갔다'라는 것은 그 정도의 어드밴티지를 줘야만 조훈현과 비슷한 승부가 될 수 있었다는 말이며, 한마디로 도전 5강은 조훈현보다 두세 단계 아래였다는 의미이다.[8] 보통 바둑에서 3집 반이면 역전 불가능의 수치로 본다. 헌데 6집 반을 접어주고도 죄다 역전시켰다는 소리니... 아예 상대가 안 되는 것.[9] 타이틀 홀더(전대회 우승자)는 미리 결승전에 직행해있고, 나머지 사람들끼리 대회를 치뤄서 도전자 1명을 뽑는 방식.[10] 현재의 연승전 방식의 국가 대항전인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의 전신 격인 대회라 할 수 있다.[11] 보통 연승전 형식의 국가대항전에서는 강한 기사일수록 뒤에 배치하는 방식의 엔트리를 쓴다. 당시 서봉수 뒤에 남은 3명이 이창호, 조훈현, 유창혁이었고, 당시는 이미 서봉수가 저물어 가던 시기였다. 훗날 농심배에서 이세돌이 선봉출전한 적은 있으나, 이는 개인의 강력한 희망이 반영된 출전이었고 대부분은 부장(마지막에서 두번째)이나 대장으로 출격하였다.[12] 위에서 언급했듯이 강한 기사일수록 마지막에 넣기에 서봉수는 사실상 약한 기사였다고 해도 무방했다. 근데 그 사람이 9승을 해서 올킬을 시켜버렸으니 경악할 만할지도...[13] '실성한 사람처럼 앞뒤 안가리고'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14] 한국의 김영환 四단, 일본의 아와지 九단 상대.[15] 심지어 이 9연승은 흑으로 5승, 백으로 4승을 한 것이다. 그리고 역전 반집승이 무려 세 번이나 있었다. 심지어 마지막 대국마저도 초반 완착을 두어 어렵게 흘러가나 싶었던 대국을 상대가 둔 완착을 빌미로 역전승한 것(...).[16] 실제 1970년대 중후반까지는 한국기원 대국실에서 다른 젊은 기사들과 어울려서 하루 종일 바둑 두고 복기하고 담배피고 배고프면 짜장면 시켜먹고 나가서 당구도 치고 그렇게 잘 지냈다고 한다. 근데 선배기사들을 무너뜨리고 둘이서 타이틀 매치에서 붙는 일이 점점 많아지자 어느새 멀어졌다고.[17] 참고로 바둑이 끝난 후 바둑기사들은 졌건 이겼건 그 바둑을 복기하고 아무리 진 것이 분하다 하더라도 감정을 숨기는 것이 관례이다.[18] 국제결혼 알선 관련 일을 하던 그의 팬이 소개해 주었다고 한다. 둘의 나이차는 29세.[19] 정상적인 게임에서는 첫 수를 화점에 두거나 '三의4' 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고 매우 낮은 확률로 '五의4'나 '三의3' 에 두며, 천원. 즉 한가운데에 두는 경우도 가끔 가다가 나온다. 이 외의 수는 재미로 두는 게 아닌 이상 구경하기 어렵다고 해도 좋은데, 특히 '二의2'는 그야말로 맨 구석의 위치라 집을 거의 만들 수가 없고 중앙으로 진출하기에도 도저히 여의치 않기 때문에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수다.[20] 이제 정상급 AI는 최정상급 프로기사와의 두 점 접바둑을 손쉽게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