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다 노리모토

 


'''요다 노리모토
依田紀基 / Yoda Norimoto
'''
[image]
'''직업'''
바둑기사
''' 생년월일'''
1966년 2월 11일
''' 국적'''
[image] 일본
''' 소속'''
일본기원
''' 출신지'''
홋카이도 이와미자와시
''' 입단'''
1980년
''' 단급'''
九단
''' 누적우승경력'''
36회
''' 한큐바둑 닉네임'''
tiger
일본기원 요다 노리모토 소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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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2회 NEC배[1]에서 우승할 때의 리즈 시절. 이 때까지만 해도 머리숱이 많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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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모습. 이 분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머리에서 빛이 나신다!'''
1. 개요
2. 상세


1. 개요


일본의 프로 바둑 기사. 고바야시 고이치, 조치훈 등이 수놓던 80년대를 이어 90년대를 대표한 일본 기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90년대를 기점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일본바둑의 최후의 보루라고도 여겨졌던 기사. 요다 노리모토 九단이 나이가 들면서 쇠퇴하자, 일본 바둑은 본격적으로 갈라파고스화되어버렸다. 그러다가 대만 출신 장쉬 九단의 LG배 우승 이후로 일본 바둑은 세계 무대에서 완전히 도태되어버렸다.

2. 상세


1980년 14세의 나이로 입단했고 1983년 신인왕전 우승, 1986년 신예 토너먼트전 우승, 1992년 NEC배 우승 등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일본 바둑계의 주목을 받았다. 1993년 NHK배 우승으로 九단으로 승격. 기풍은 유연하고 발 빠르고 사석작전에 탁월하다.[2] 장작패기로도 유명한데, 바둑돌을 세게 놓는 습관을 묘사한 별명이다. 과거 농심배에서 목진석과의 대국이 있었는데, 그때 첫수를 천원에 놓다가 바둑돌을 놓쳐 또르르 굴러갔다고 한다(...). 요다가 "아! 스미마셍."이라 말하고 다시 착점...
일본 바둑 기사 중에서 대한민국에 특히 유명한데, '''전성기를 달리던 1990년대 이창호 천적'''이었기 때문. 국제 기전에서 이창호와 만나기만 하면 한때 상대전적이 80%를 넘을 정도로 이창호 킬러로 불렸다. 물론 2000년대 이후로는 이창호 바둑만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강동윤 같은 이창호 잡는 '''기계'''가 나오기도 했지만, 1990년대 이창호의 적수가 없던 시절에 요다 九단은 이창호의 천적이라 불릴 정도로 이창호에게 유독 강했다. 1998년 이창호가 요다 九단을 보고 "요다는 내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길 수 없을 거 같다."라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저 인터뷰 다음 해 춘란배 16강전에서는 이창호가 요다를 반집 차이로 이겼다.[3] 서로 엎치락 뒤치락 한 결과, 현재는 공식전 기준으로 8승 8패다.[4]
전성기 이창호에게 유독 강했던 이유에 대해 요다가 직접 말하길, '''"이창호가 출전한 모든 기보를 어떻게든 구해서 몇 번이고 복기했다."'''라고.(...) 이창호의 대국은 2천국이 넘고, 이걸 다 복기해서 패턴을 숙지했다고 할 정도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참고로, 제 7회 농심신라면배에서 불패를 달리던 이창호에게 첫 패배를 안김과 동시에 이 대회 유일한 일본의 승리를 가져오기도 했다.[5] 이쯤 되면 천적 확정.
반면에 1999년 삼성화재배에서는 안조영에게 완패당해 본선 첫판에서 탈락하기도 했고, 2002년 토요타 덴소배 본선에서는 한국의 여류기사 박지은에게 패하는 등, 비교적 약체로 분류되는 기사들에게 종종 덜미를 잡히기도 했다. 심지어 1997년 제2회 LG배에서는 독일 대표로 나온 한스 피치[6]에게 반집패를 당한 적도 있었다.
일본 국내 기전에서는 1996년~1998년, 2003년~2005년 기성(碁聖)전 3연패, 1998년~2000년 NHK배 3연패, 2000년~2003년 명인전 4연패 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국제기전에서는 1996년 삼성화재배 우승,[7][8] 후지쯔배응씨배 준우승과 상술했듯이 농심신라면배 일본 우승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90년대 후반부터 국제기전에서 맥을 못추던 일본바둑의 구세주 역할을 한 셈.
2014년 3월 바둑 프로그램 Crazystone, Zen과의 4점 접바둑에서 각각 2집반 패, 불계승을 거두었다. 2015년 3월 조치훈이 바둑 프로그램 돌바람, Crazystone과 각각 4점, 3점 접바둑을 뒀을 때 해설을 맡아 조치훈, 바둑 프로그램을 모두 디스했다. 조치훈은 돌바람과의 대국에서 지도대국 같은 느낌으로 두다 포석이 약한 대신 중후반과 사활에 강한 돌바람에게 당해 30집 이상 불리한 상황이었고, 컴퓨터 프로그램은 팻감 활용 등에서 가끔씩 이상한 수를 뒀기 때문이다.

[1] 일본 바둑 인구 감소로 인해 NEC배는 2012년 폐지됐다.[2] 1994년 월간바둑에서는 요다 九단의 기풍에 대해 '질서정연한 초반, 균형감 있는 중반, 이창호 만큼은 안 되지만 치밀한 후반'으로 평한 바 있다.[3] 요다가 마지막 초읽기에 몰려 끝내기 순서를 틀리는 바람에 한 집 손해 본 것이 컸다.[4] 비공식 대국을 포함한 전체 성적은 이창호 기준으로 10승 11패.[5] 전 대회인 6회 대회가 소위 일컬어지는 상하이 대첩임을 생각한다면 충격과 공포...[6] 독일 출신의 일본기원 소속 프로 기사. 2003년에 바둑 보급 활동을 위해 방문한 과테말라에서 강도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7] 덧붙여 삼성화재배 초대 우승자이자, 이는 현재까지 일본 국적 기사의 유일한 삼성화재배 우승 기록이다. 일본기원 기사로는 2003년 삼성화재배 조치훈 九단의 전무후무한 와일드 카드 우승이 있다.[8] 당시 유창혁 九단과 응씨배 결승 5번기, 삼성화재배 결승 3번기로 연달아 맞붙었는데, 유창혁 九단이 응씨배를, 요다 九단이 삼성화재배를 가져갔다. 우승 상금도 각각 40만 달러로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