딘 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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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딘 헤스 (Dean Hess)
'''본명'''
딘 엘머 헤스 (Dean Elmer Hess)
'''출생'''
1917년 12월 6일, 오하이오주 마리에타
'''사망'''
2015년 3월 3일, 오하이오주 후버 하이츠
'''국적'''
미국 [image]
'''복무'''
미합중국 공군
'''군 복무 기간'''
1941 ~ 1969
'''최종 계급'''
대령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1. 개요
2. 한국과의 인연
3. Operation Kiddy Car Lift
3.1. 당시의 이야기
3.2. 쓰린 뒷 이야기
4. 전후


1. 개요


'''대한민국 공군의 양아버지'''
미국공군 장교로,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공군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 중 한 명이며, 한국 공군의 F-51D 머스탱 18번기 '''신념의 조인'''기의 주인이기도 하다.
그는 목사 출신의 공군 파일럿으로, 이미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유럽 전선에서 P-47 썬더볼트P-51 머스탱(이후 F-51로 형식명 변경)을 몰았던 베테랑이었다.
1969년 대령 계급에서 예편하였다.

2. 한국과의 인연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계기는 다름아닌 6.25 전쟁. 전쟁 이전에는 이승만 정권의 호전적인 태도를 우려하여 무리한 군사원조 요구에 소극적으로 응했던 미 정부는 일단 전쟁이 발발하자 본격적으로 지원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1] 그리고 한국 공군을 '''지원'''할 제6146군사고문단을 창설하면서 그 책임자로 임명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 6146군사고문단은 대한민국 공군 재건을 위한 작전을 한판 승부(Bout One)라 이름짓고 부대명도 이 이름을 따서 "바우트 원 대대"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초기 군사고문단과 한국 공군의 상황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으나 딘 헤스 소령은 부하들을 설득해서 이 바우트 원 대대를 끝까지 키워내고 말겠다고 결의했다.[2]
그러나 상황은 날로 악화되었고, 결국 미군은 바우트 원 대대를 해체시켜서 미 공군에 전속시킬 것을 결정한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탈 비행기가 없어진다면, 저희들은 육군에 입대해서 조국을 위해 싸울 겁니다"라고 말하는 한국 공군 조종사들의 애국심에 감동받아 상부에 부대의 존속을 결사적으로 주장했고, 그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바우트 원 대대는 존속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모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직접 한국 공군 조종사들과 함께 250여 회의 출격을 했다.[3] 특히 기수에 '신념의 조인'이라는 노즈아트가 그려진 18번기를 조종함으로써 한국 공군의 역사로 남게 되었다. 딘 헤스 소령 이외의 조종사들도 머스탱을 타고 출격했었고 그중 한 명인 딘 크로웰 대위가 실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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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공군의 전설적 기체. 딘 헤스 소령 전용 18번기 '信念의 鳥人'[4]

3. Operation Kiddy Car Lift


이하의 자료는 'Korean War Children's Memorial'이라는 사이트의 'Kiddy Car Airlift'#부분의 내용들을 기반으로 작업되었다.

3.1. 당시의 이야기


1951년의 1.4 후퇴 때는 러셀 로이드 블레이즈델 중령[5]과 함께 전쟁고아 1000여명을 제주도로 피난시키는 일을 했다.
당시 서울에서는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이 고아원을 운영중이였고, 딘 헤스도 제5 공군의 고아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4 후퇴 당시 서울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이 고아들을 탈출시킬 방법을 찾았고, 여기에 원래는 제5 공군의 고아원의 아이들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던 딘 헤스가 합세했다.
처음에는 딘 헤스가 제어가능한 C-47을 사용해 고아들을 제주도로 탈출시킬 계획이였지만, 이후 한국군의 LST를 끌어올 수 있을것 같아 '고아들을 인천으로 이동시키고, 여기서 LST에 고아들을 태워서 탈출시킨다.'라는 계획을 러셀 블레이즈델과 함께 진행했다. 문제는 이 LST들이 흥남 철수에 동원되는 바람에 약속된 LST가 인천에 오지 못했고, LST를 약속받고 인천으로 이동한 러셀 블레이즈델과 고아들은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딘 헤스는 김포 공항에 F-51을 타고 날아왔고, 제5 공군 사령부를 방문해서 초기 계획대로 C-47을 끌어올려고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인천에 있는 수백명의 고아를 김포로 실어나르는 문제와 더불어 C-47로 고아들을 다 실어나르면 여러번 비행을 해야하고, 그게 곱게 끝나준다는 보장이 없었다.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고, 김포 공항에는 이미 고아들이 트럭과 도보로 이동해 있는 상황이였다. 정황상 블레이즈델 일행은 아닐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러셀 블레이즈델에 따르면 자신들은 다음날 늦게야 공항에 도착했고 딘 헤스를 만났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제주도에 고아들을 받을 준비가 되었고, 러셀 블레이스델이 제5 공군 사령부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헤스였지만, 당장에 비행기가 안오면 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했다.
문제를 해결해 준것은 얼 패트릿지 소장이였다. 러셀 블레이즈델이 제 5공군 사령부를 방문했을때 얼 패트릿지 소장을 통해 '내일 아침에 C-54를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아침까지 와야한다.'라는 약속을 받는데 성공했다. 이후 딘 헤스에게 전화를 시도하고, 어떻게든 트럭을 긁어모으려 시도했지만 안타깝게도 실패로 돌아간다. 이 와중에 딘 헤스와 연락이 되긴 했지만 딘 헤스는 '상황 조율이 힘들다. 조금 연기해야할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딘 헤스 측도 영 분위기가 좋지 았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뒤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 과정에서 C-54의 내용이 딘 헤스에게 전달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도 그럴것이 전송가의 기록에서는 다음날 아침까지 딘 헤스가 계속 전전긍긍한 것으로 나오는데, C-54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럴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딘 헤스는 C-54가 기적과 같이 하늘에서 내려와 고아들을 태우는 것을 보았고 전율을 느끼며 기지로 복귀했다. 다만 이것도 블레이즈델 일행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게, 블레이즈델 일행은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하던 시점에 아직 인천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블레이즈델은 약속시간이 지나서야 간신히 트럭을 징발하는데 성공했고 2시간 가량 늦게 공항에 도착했지만 다행히도 비행기가 공항에 머물러 있었다.
이후 제주도에 도착한 고아들은 안전하게 수용되었는데, 블레이즈델은 제주도로 비행하는 과정에서 제주도에 이들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을지에 대한 걱정을 했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딘 헤스가 미리 손을 써둔 상태였고,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3.2. 쓰린 뒷 이야기


이 일이 발생한 이후 미군은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을 명령 불복종으로 처벌하려고 했다. 사유는 '고아들을 구하는게 군목의 의무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은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는 태도를 고수했다. 다행히도 이 일이 기사화되면서 미국 내에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을 칭송하는 여론이 일어났고, 처벌은 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만 이 뒤에 조금 일이 요상하게 돌아갔는데, 딘 헤스가 자신의 자서전인 전송가를 쓰고 이 책이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묘하게 스포트라이트가 딘 헤스에게로 넘어갔다. 딘 헤스도 이 일에 기여를 했으니 스포트라이트를 받는건 맞지만, 이야기가 퍼지고 영화의 내용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러셀 블레이즈델을 아는 사람들이 어이없어할 정도로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졌고 오죽하면 이걸 보고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과 함께 전쟁을 치뤘던 사람이 '딘 헤스에게 항의해야하는거 아닌가요?'라고 하자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은 '수익금이 한국의 전쟁 고아를 위해 쓰인다면 그걸로 된거지'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아예 딘 헤스를 직접적으로 디스하는 글도 있을 정도다.#
이쯤 되면 딘 헤스가 블레이즈델을 어떻게 생각하고 지냈냐 싶어질지도 모르지만, 잊거나 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한 전화 통화에서 딘 헤스는 '블레이즈델을 기억하느냐?'는 질문에 '네, 그가 제5공군에게서 비행기를 얻어서 고아들을 제주도로 보내는데 엄청난 도움을 주었죠.'로 시작해서 연신 블레이즈델에게 찬사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이 편지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2000년에 모처에서 또 모든 공을 딘 헤스에게 돌리는' 기사가 나온게 시발점이었다.

4. 전후


이러한 일들로 전후인 1957년에는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Battle Hymn(전송가. 이는 그의 자서전의 제목이기도 하다)가 만들어지기도 했다.[6] [7] 또한 전쟁이 끝났음에도 수시로 한국을 방문하여 고아들을 돌보고 20년간 전쟁고아 후원금을 모금했다.
헤스 대령의 헌신적인 노력을 기려 한국 정부는 1951년과 1960년에 무공훈장을, 1962년에는 소파상을 각각 수여하였다.
그가 한국 전쟁 당시 탑승했던 F-51 머스탱 18번기에 새겨진 신념의 조인(信念의 鳥人)이란 기독교 목사였던 헤스 소령 자신의 좌우명이자 이전부터 자신의 기체에 붙였던 노즈 아트인 라틴어'Per Fidem Volo(영문으로는 I fly by faith)의 우리말식 번역이다 [8] 우리나라 공군에서 매우 드문 노즈아트 기체.[9]
영화의 원작인 그의 회고록은 국내에도 번역 출판되어 있으니 관심있으면 한번 읽어보자.yes24 링크
2015년 3월 3일에 97세를 일기로 하여 별세하였다.#

2016년 3월 4일, 대한민국 공군에서의 1주기 추모행사.
2017년 제주항공우주박물관에 딘 헤스 대령의 공적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그에 대한 만화 http://afplay.kr/m/1630
[1] 이승만 정권이 호전적인 입장을 공공연히 내비쳤기 때문에 공세적으로 운용이 가능한 무기를 제공하면 북침할것으로 판단하여 방어용 무기만 제공하고 있었다. 게다가 공군의 경우는 그나마 준 정찰기를 타고 월북하는 사고까지 터지는 바람에 '줘봐야 북한으로 튀는구만!'이라면서 더더욱 암울한 입장이 되었다.[2] 한때는 지상요원 13명과 헤스 소령을 포함해서 조종사가 2명에 불과할 때도 있었을 정도.[3] 다른 부하 교관들은 한국 조종사들과 함께 전투비행을 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했다. 물론 헤스 소령 자신도 처음엔 무척 당황했다.[4] 사진 가운데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인물이 딘 헤스 소령이다.[5] Russell Lloyd Blaisdell, (1910.9.4~2007.5.1) 지식채널e에서 소개된 바 있다. 그 역시 수많은 전쟁고아들을 제주도로 피난시키기 위해 '''명령불복종까지 감행하며''' 아이들을 구출했다.[6] 이 영화 및 자서전의 수익금은 전액 한국의 전쟁 고아를 위해 위탁되었다고 한다.[7] 이 영화 시작 부분에서 위의 얼 패트릿지 장군이 등장하여 신념의 조인 마킹의 P-51기 앞에서 영화에 대해 소개한다.[8] 이곳(만화 그대에게/BOUT-1의 작가 장우룡씨의 블로그)을 보면 자세히 나와 있다. 원 출처는 딘 헤스 본인의 자서전. 이승만 대통령이 이름을 지어줬다는 설이 유명하지만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9] 개인적인 노즈아트 기체로는 사실상 유일하고, 전체로 확장해봐도 F-4의 '방위성금헌납기', F-15K의 '枕戈待敵 刻骨延坪(침과대적 각골연평; 창을 베게삼아 누워 적을 기다리는 자세로 방위태세를 유지하며, 연평도의 일을 결코 잊지 않는다)', FA-50의 '창조경제의 나래(2014년 전력화 기념 행사 당시, 현재는 삭제되었을 걸로 추정됨)' 정도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