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카페
1. 기원
한국에서 9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존재했던 곳. 말하자면 클럽의 프로토타입.
'''절대로 록밴드가 라이브로 연주하는 클럽이 아니며. 하드록 카페[1] 와도 햇갈리지 말자.'''
1980년대 들어서, 신군부가 집권하고 난 뒤 일종의 "대중 유화정책"으로 대중문화에서 많은 부분에서 숨통이 트이게 된다.[2] 이러한 상황에 힘입어 야간통행금지가 철폐된다. 다시 말해 밤 12시가 넘으면 조용히 잠을 자던 도시가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대부분의 업소는 "야간영업"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3]
가장 호황을 맞은 것은 나이트클럽을 비롯한 야간 주점들이었다. 분류상 유흥업소에 해당하는 이러한 주점들은 밤문화를 즐기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무궁무진한 놀거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고삐가 너무 갑자기 풀려서인지, 1983년을 기해서 다시 유흥업소를 비롯한 모든 업소의 야간영업은 금지된다. 대부분의 나이트클럽을 비롯해서 다방, 술집 등 모든 술집이 12시부터 4시까지 영업이 제한된 것.
하지만 밤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은 놀고 싶었고, 업소의 업주들은 이러한 젊은이들이 뻔히 다 '''돈'''으로 보이는데 이를 지나칠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일부 업소들은 비밀리에 야간영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살아남은 것은 "크게 투자해서 크게 벌 수 있던" 대형 나이트클럽들뿐이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언제나 새로운 공간을 원했고 새로운 음악을 원했다. 이러한 수요에 맞추어 암암리에 신종 소규모 업소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2. 역사
90년대 들어서면서 당국의 유흥업소 탄압이 강화되고 높은 세금이 책정되면서 중소형 나이트클럽이 문을 닫게된다.[4] 7~80년대부터 나이트클럽은 대형화, 기업화 되었고, 웬만한 돈으로는 나이트클럽을 세울 수 없게 된 것. 이러한 문제 때문에 편법으로 등장한 나이트클럽이 락카페다.
락카페는 높은 세율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일반적으로 유흥업소에 끼어드는 조폭등의 이권개입을 피하기 위해, 경찰의 지속적인 개입과 간섭을 피하기 위해 일반음식점으로 분류가 되어있었다. 때문에 경찰단속이 뜨면 실내등을 켜고 음악을 잔잔한것으로 바꾸고 모든 손님들이 순식간에 착석하는 기적(...)을 볼 수 있었다. 영화 비상구가 없다에 잘 나와있다.[5] 허가는 일반 음식점으로 받았기 때문에 음악과 조명을 끄면 실내는 식당이나 주점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스테이지도 없기에 손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사이에서 춤을 췄다. 춤 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식탁과 의자는 작고 가벼운 것을 많이 썼다.
또한 락카페는 나이트클럽과 달리, 새로운 음악을 공급하는 첨병 역할을 했고, 나이트처럼 과도한 부킹을 하는 일이 없이 '''알아서'''놀고 알아서 어울리는 서양식 분위기였기 때문에, 트렌드에 민감한 청춘남녀들의 해방구 역할을 했다. 당시 아직 국내에는 생소했던 갱스터 랩이나 하우스, 트랜스음악은 락카페에서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초창기 락카페에서 가장 많이 틀었던 노래가 당시 혜성같이 나타난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였다는 사실은 락카페가 어떤 성격인지 짐작할 단편이라 하겠다.
3. 사건/사고
1996년 9월 29일 밤, 신촌의 락카페 롤링스톤즈[6] 에서 화재가 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클럽이나 락카페는 위험천만한 곳으로 낙인찍혔고, 당시 막 태동기에 들어선 한국 인디음악 씬에 큰 충격이 되기도 했다.[7]
이 사건으로 당시 조금씩 생겨나던 클럽에 대해 소방안전 단속이 강화되었고, 락카페와 클럽의 실태가 당국에 의해 파악되었다. 그리하여 일반음식점으로 분류된 클럽에 대해 현실과 맞지않는 법조항 적용이 문제시 되었다. 사실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공간으로서의 락카페는 나이트클럽과 별 차이가 없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나이트클럽은 이미 90년대가 되면서 '''테이블을 잡고 가요에 맞춰 부킹을 하는''' 공간으로 완전히 고정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음악이 좋아서, 춤이 좋아서 나이트클럽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한 기존 나이트클럽에 반발하여 새로운 트렌드에 민감한 청춘들은 락카페라는 새로운 장소의 출현에 열광한 것. 이러한 상황에서 "그럼 락카페도 나이트처럼 유흥업소 등록하고 영업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한다면 "그러면 종업원들 다 등록시키고 세율적용 받고 때마다 벌어지는 사회정화 캠페인에 된서리 맞고 별의별 태클이 다 들어오는데 버겨날 수 있느냐"라는 문제가 존재했다. 사회가 급격히 변화하던 90년대에 있었던 시대의 단편이랄까...
4. 클럽으로의 이전
결국 2000년, 2007년 법조항의 개정을 통해 일반음식점에서도 음악을 연주하거나, (크게) 음악을 틀거나, 조명을 설치[8] 할 수 있고 손님들이 일어서서 춤을 추는 것이 허용되었다.
락카페는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조금씩 클럽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갔다. 애초부터 락카페가 국적불명의 단어였기 때문에... 실제 락카페와 나이트클럽에서 활동하던 DJ나 업주가 클럽을 차리는 경우도 많았으며, 아예 락카페를 클럽으로 바꿔서 운영하기도 하였다.
5. 유명한 락카페
당시 서울 시내에 유명한 락카페로는 이태원의 헤비메탈, 홍대앞의 황금투구, 강남역의 벤츄리, 신촌의 블루멍키즈, 롤링스톤즈, 스페이스등이 있었다.
백스테이지도 락카페에 가까운 업소였다. 이쪽이야말로 록 음악을 위주로 플레잉하니 어쩌면 진정한 락카페였을지도 모른다.
- 1997년 강남역 벤츄리의 모습, 당시 인기끌었던 어지간한 90년대 가요들이 플레잉되고있다.
6. 관련 문서
[1] 록 음악 컨셉으로 인테리어를 잡은 세계적인 패밀리 레스토랑 프랜차이즈.[2] 물론 근본적인 문제인 검열이나 관련 법안은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채, 젊은이들로 하여금 "먹고 마시면서 즐겨서 복잡한 현실에서 눈을 돌릴 수 있는" 부분은 과감하게 규제가 풀렸다. 이 시기에 등장한 것이 한국형 에로영화와 성인소설, 만화등이다. 한국의 창작물에서 성애 묘사가 조금 더 과감해 진 것도 이 시기부터다.[3] 물론 1970년대에도 야간영업을 하는 업소가 있었다. 그러나 "철야영업" 허가를 받은 업소는 소수였고, 야간통금이 있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밤새 클럽에 갇혀서 아침이 될 때까지 나가지 못하는 희한한 풍경이 펼쳐졌다(...).[4] 지금은 상상이 안 가지만 80년대에 경제부흥이 시작되면서 유흥업소도 우후죽순으로 늘어난다. 당시에는 별 다른 규제가 없던 시절이라, 주택가에까지 소규모 나이트클럽이 파고들 정도였다. 이를 막기 위해 행해진 것. 그러나 결과는 대형 나이트만 남기고 작은 나이트는 개점이 어렵게 되는 괴상한 상황을 만들어냈다.[5] 당시 일반음식점은 내부에 화려한 조명을 설치하거나, 손님들이 춤을 출 공간을 만들거나, 손님들이 일어서서 춤을 추면 안된다고 식품위생법에 명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항은 '''아직까지 일부 남아 있다.''' 현재의 클럽은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에 따라 별도의 안전기준과 시간을 명시하면 영업이 가능하게 된 일종의 편법을 통해 영업하고 있다.[6] 현재에도 존재하는 공연장 롤링스톤즈와는 다른 곳으로, 이곳에서 다뤄지는 락카페와도 다른 음악감상 전문 카페이다. 이후 벌어지는 락카페와 클럽의 단속에 있어 중요한 사건이기에 언급함.[7] 사망자 중에는 한국 최초 트랜스젠더가 나온 영화 마스카라를 감독한 감독 이훈(1963~1996)이 있었다. 차기작 로드런너를 준비중이었지만 결국 영원히 무산되버리고 말았다. 한편 자우림의 김윤아는 화재가 있던 날 롤링스톤즈에서 지인들과 모임을 갖기로 했지만 하필 읽던 책을 다 읽느라 약속시간에 늦어버려 화재를 피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8] 무대에 한정된다. 댄스플로어 설치는 여전히 불법. 그래서 관객석 조명장치 등이 있는 나이트클럽의 경우 유흥주점으로 등록해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