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통행금지

 


1. 개요
2. 대표적 사례
2.1. 조선의 사례
2.2. 한국의 사례
2.2.1. 내용
2.2.2. 예외
2.2.3. 통행증
2.2.4. 여담
2.3. 해외의 사례


1. 개요


밤에 허락받지 않은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는 제도. 현대까지도 밤에 치안이 좋지 못한 곳은 있고 과거엔 더 심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 범죄율을 강제로 낮추고자 과거에 많이 시행했던 규범이다. 또, 그 당시에는 어차피 횃불이나 초롱불 외에는 '''조명이 없고''' 해 떨어지면 일반인들이 할만한 야외활동이 거의 없어서 별 반발이 없었다.[1] 거추장스럽게 횃불 들고 놀 것도 아니고.
영어로는 'curfew'(커퓨)라고 부르며 어원은 프랑스어로 '불을 덮어서 끈다'는 뜻인 'couvre-feu'이다. 중세시대 영국에서 오후 8시가 지나면 화재 예방을 위해 강제 소등과 통행금지를 명령한 게 유래라는 이야기가 있다.
현대에는 공항에서의 야간 이착륙 금지를 뜻하기도 한다. 주로 활주로에 조명이 고장나거나 항공기 자체의 야간식별 장비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심 가까이 있어 소음 피해가 예상되는 경우가 있으며, 도심에 있어서 소음 문제로 커퓨를 거는 공항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김포국제공항[2] 현재 야간 이착륙 가능한 공항은 인천국제공항, 청주국제공항이 있다. 이때 커퓨는 항공기 야간 이착륙 제한 시간대를 지칭하는 단어로도 쓰인다.

2. 대표적 사례



2.1. 조선의 사례


조선 시대에도 인정이 울린 뒤에는 남성들은 의원을 부르거나 상을 당하는 등 특별한 사정이 있거나 군인같이 특별한 직업이 아닌 이상 밖에 나다닐 수가 없었다. 통금이 시작되는 시간을 인정, 끝나는 시간을 파루라고 하는데 태종 때부터 초경 3점(오후 8시)부터 오경 3점(익일 오전 4시 30분)까지 금지였고, 세조 때 이경(오후 9시)부터 오경(익일 오전 3시)까지로 완화되었다. 원래는 명나라의 법을 따라서 파루 때만 종을 쳐서 알렸으나, 통금을 잡는 순관과 통금 시간이다 아니다 마찰이 있었는지 세종 때부터는 인정 때도 통금을 알리는 종을 쳤다.
통금이 지난 이후에 사정이 있어 통행을 하려면 경무소에서 허락을 받아야 했다. 허락 없이 이를 어겼다가 잡히면 파루까지 경무소에서 밤을 보내다가 다음날 아침 곤장을 맞고 풀려났다. 초경(저녁 7시) 이후 돌아다니면 10대, 이경 이후로는 20대 하는 식으로 시간당 10대가 추가되었다.
단, 유교적 문제로 바깥 활동을 자제해야 했던 여성들에게는 바깥일을 볼 시간을 준다고 초경부터 이경이 되기 전(저녁 7시~9시)에는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했고, 남자들의 통행은 금지하였다. 한 외국인이 조선에 와서 남긴 기록에 따르면 보통 길거리에 여자는 하나도 없는데, 종이 땡 치면 남자들이 싹 사라지고 여자들만 다닌다고 신기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음양오행설과도 연관이 있으며 남성을 양, 여성을 음으로 보아 양기가 충만한 낮에는 남성이, 음기가 넘치는 밤에는 여성이 활동하기 좋다는 논리였다.
태종 때까지는 통금 시작을 알리는 종을 치지 않았기에 황당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사헌 이원이 몸종과 밤에 길을 가다가 순관 윤종이 검문을 했는데, 통행금지 위반으로 몸종을 체포해 간 것이다. 이원은 삐져서 태종에게 사실상 윤종을 처벌해 주기 전에는 출근하지 않겠다고 상소를 올렸다.
고작 순관에 불과한 윤종보다는 대사헌인 자신의 편을 들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겠고,[3] 통금을 어긴 죄를 물어봐야 곤장 10대였으므로 쉽게 생각한 듯 하다. 태종은 증인이 없는 상황이라 내가 결론을 낼 수 없으니 그냥 출근하라고 했는데 이원의 삐짐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자 태종은 이원을 파직했으며 덤으로 윤종도 몸종만 체포하고 대사헌이라고 봐준 죄로 파직되었다.

대사헌(大司憲) 이원을 파직하였다. 이원이 통행시간을 어겨 집으로 가는데, 순관인 호군(護軍) 윤종이 이원의 근수(根隨, 몸종)을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이튿날 이원이 본부에 가서 윤종을 탄핵하고 수일동안 출근하지 않았다. 임금이 직접 출사하라 하였으나,

"전일에 신이 초경 3점 전에 집으로 돌아가는데, 순관 윤종이 통행시간을 어겼다 하여 신의 근수를 잡았습니다. 윤종이 초경 3점 이전에 검문하였다면 윤종에게 죄가 있으며, 신이 통행시간을 어겼다면 신에게 죄가 있으니 이 일을 판단해 주기 전에는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경이 출사하였으면 한다. 경의 말은 이치에 맞으나 내가 그 일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이원이 출사하지 않자 사간원에서 상소하기를,

"대사헌 이원은 남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위치이건만 통행시간을 어기고 돌아다니다가 검문 당하기나 하고, 윤종도 순관으로서 죄를 지은 사람을 봤으면 잡아놓고 심문했어야 하는데 근수만을 잡았다가 놓아주었으니, 두 신하는 모두 법보다 사사로움이 앞서니 모두 파직하시옵소서."

하여, 이를 윤허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2권, 태종 1년(1401년) 9월 21일

이처럼 조선시대에 통금은 엄격해서 고위직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였다. 누구누구가 통금에 걸렸는데 풀어줬더라고 왕에게 고발하고, 왕은 그게 사실로 드러나면 위반자는 곤장을 치고, 봐준 자는 처벌했다는 기사들이 종종 보인다.

2.2. 한국의 사례



2.2.1. 내용



표면적인 목적은 치안 유지였지만, 이 정책 때문에 통금이 시행된 약 36년간 국민들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는 권리를 제약받았다. 기간은 1945년 9월 7일부터 더글러스 맥아더의 포고령에 의해 실시되고 1982년 1월 5일 전두환 정부 시기 3S정책의 일환으로 대부분의 지역이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이 영향으로 당시 사람들이 1시에 길거리에 나와 만세를 불렀을 정도였다고 한다.[4]
처음에는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20시부터 5시까지 야간통행금지를 시작했다가 나중에 22시부터 4시로 단축되었다. 그러다 6.25 전쟁 직후부터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961년부터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된 1982년까지의 통상적 통금 시간은 '''0시부터 4시까지'''였다. 다만 1960년 4.19 혁명 당시에는 21시부터 5시까지 통금이 연장되었고 1979년 부산·마산 민주 항쟁 당시와 박정희사망으로 인한 계엄령이 발동될 때는 밤 22시부터 4시까지 통금시간을 2시간 늘린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나이 불문 전 연령 층이 통금 대상'''이었으며, 이를 어겼을 경우 거동 수상자로 곧바로 체포해 파출소 등에서 조사를 받고 다음 날 아침까지 유치장에 갇히는 경우가 많았고 이 당시에는 과장 좀 보태서 경찰 기관들이 일종의 숙박업소 역할을 했다. 물론 통금 위반 그 자체는 중범죄가 아니어서 사정을 말하거나 반성하는 모습 좀 보이면 넘어가줬으며, 이나 단위에서는 이웃집이나 마을회관, 구멍가게 잠깐 오가는 정도 등은 암암리에 봐주기도 했다. 다만 불행하게도 통행금지에 잘못 걸린 소수의 사람들은 공권력에 의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끌려가 부랑자라는 오명을 쓰고 대한청소년개척단 같은 국가폭력의 희생양이 된 사례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통행금지 바로 직전인 23~24시 사이에는 집에 돌아가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으며 이상 단위에서는 대체로 잘 지켜진 편인데, 존 위컴 장군한미연합 사령관 시절 부인과 야간에 산책을 즐기며 한밤중에 쥐 한마리 안 보일 만큼 적막하고 방해하는 사람이 없어 편했으며, 한국인들이 야간통금을 칼같이 지키는 데 늘 놀랐다고 회고한 바가 있다.
1970년대 초중반 출생자들은 자정이 되면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어렴풋이 기억할 것이다. 파출소나 동사무소에서 내보내는 사이렌 소리인데 자정이면 이미 자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이렌을 울렸다. 동장, 통장의 직권으로 주택가는 볼륨을 좀 줄이기도 했다.

2.2.2. 예외


예외 지역이 있었는데 도서 지역인 제주도울릉도는 1964년에, 충청북도는 1965년에 해제됐다. 그 외 주요 고속도로석탄, 시멘트 등 산업이나 생필품을 운반하는 트럭 등 수송수단과 경주시(구 월성군 제외), 온양(구 아산군 제외), 해운대구 등 관광지, 경기도-충청남도 지역을 제외한 전 도서지역은 1966년에 해제됐다.
덕분에 유일하게 바다와 접해있지 않은 도(道)였던 충청북도는 접경 지역에 사는 거주민들이 술 마시다가 자정이 가까워질 것 같으면 시/도 경계를 넘어서 충북 지역[5]에서 더 마셨으며, 1970년 쯤에 나온 유머 모음집에는 '어디로 데이트 갈까?'라는 물음에 통금이 없으니까 충북으로 가자는 말도 있다. 이외에도 농촌 지역에서는 면 소재지의 경우 사이렌을 울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정 날짜가 되면 그 날만 일시적으로 풀어주기도 했다. 주로 경사스러운 날에 주로 해제해줬는데 부처님오신날, 크리스마스신정 연휴인 1월 1일~3일이 있었다.[6] 또한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날 역시 임시공휴일로 지정하고 통금을 풀어주기도 했다. 전 세계가 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특히 한국에서 크리스마스가 흔히들 '''커플들의 날'''로 인식되는 데에는 통금이 어느 정도 영향을 줬다. 크리스마스 새벽 때 통행금지를 풀어줘서 밤 늦게까지 마음 놓고 놀 수 있던 몇 안 되는 날이라 통금이 사라진 그 전통이 훗날 1982년에 폐지된 이후에도 지금까지 이어진 것.
전국이 아닌 일부 '''특정 지역'''만 '''일시'''에 해제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여의도 지역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거기서 치렀던 국풍81이나 빌리 그레이엄 목사 대성회 등이 열리던 날은 대형 행사의 여파로 일시적으로 인파가 몰림에 따른 귀가불편 고려 및 정부의 행사 진흥 지원 목적으로 그 지역만 일시에 해제시켜주는 경우가 있었다.

2.2.3. 통행증


합법적으로 야간통행이 필요한 경우, 야간통행 허용 스탬프를 찍어주기도 했다. 자정을 넘어 역에 도착하는 열차편이나 고속버스 막차를 타고 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사람들이 주로 적용되었는데, 이 경우엔 해당 역/터미널의 관리 직원이 하차한 승객들에게 찍어주었다.
  • 다른 야간 통행증[* 어느 한 목사가 강진경찰서에서 발급받은 야간 통행증으로 유효기간 및 유효 장소는 1974년 5월 21일 ~ 1975년 5월 31일까지 강진군에 한해서 유효했다.]
그 외에도 심야에 환자 등이 발생할 경우는 예외로 전화기가 부의 상징이던 시절이라 어지간한 집에는 전화기도 없어서 직접 환자를 데리고 병원에 가거나 소방서 등에 뛰어가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던 시절이라, 이런 때는 단속 다니는 경찰에게 요청하거나 아예 파출소로 직접 가서 사정을 말하면 경찰이 직접 119를 불러 주거나 처음 단속한 경찰이 다른 경찰에게 굳이 사정 설명하느라 귀찮지 않게 즉석에서 야간통행증을 발급해서 면책했으며 공무원, 의사, 기자, 목사 등의 일부 직업 한정으로 즉석이 아닌 장기간 효력이 있는 야간 통행증이 발급되었다.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쩌다가 통행증을 얻게 될 일이 있으면 챙겨뒀다가 다른 날 심야에 경찰에게 보여주고 넘어가려다가 날짜가 들켜서 치도곤을 치루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2.2.4. 여담


네온불이 쓸쓸하게 꺼져가는 삼거리 / 이별 앞에 너와 나는 / 한없이 울었다 / 추억만 남겨놓은 젊은 날의 불장난 / 원점으로 돌아가는 '''0시'''처럼~

배호의 0시의 이별은 가사에 통금 시간에 이별한다는 내용이 있어 금지곡이 되었다.#
야간통금 덕분에 직장인들의 귀가 시간이 빨랐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는 않았고'''[7] 오히려 외박의 빌미가 됐다. 야근시키다가 통금 시간 넘어가면 회사 건물 내의 숙직실에서 자게 하면서 일을 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 점을 역이용해 몇몇 직장인들은 집에 야간 당직이나 야근이라고 뻥치고 밤새 놀다, 여관에서 투숙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여친이 있는 경우에는 일부러 마시다가 '''깜빡한 척 하고 통금을 넘겨버렸다'''. 그리고 '''어쩔 수 없잖아, 여관이라도 가자'''라며 꼼수를 발휘하기도 했다. 덕분에 여인숙이나 여관 같은 서민형 숙박업이 높은 수익을 올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술집은 23시 30분이 되면 영업을 마쳤으며 TV방송도 23시 30분에 정규방송을 끝냈다. 라디오의 경우, FM은 익일 새벽 1시까지, AM은 익일 새벽 2시까지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도 야간통행금지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는데 아들과 딸에서도 등장인물들이 길에서 울려 퍼지는 통금 사이렌을 듣고 귀가를 서두르는 장면이 몇 번인가 나온 적이 있다.
어린이나 청소년의 경우에는 통금의 영향으로 비행 청소년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되겠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야간통행금지로 인적이 없으니까 오히려 더 활개친 면도 있다. 폐건물 등에 숨어서 노숙을 하거나 심지어는 친구 집에서 외박을 하기도 했고, 순찰이 없는 인적 드문 곳에서 탈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야간통행금지가 만약 현재까지 있었다면 야간자율학습이 불가능했거나 가능하더라도 밤 10시 이전에 끝내고 귀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의도가 한창 개발되던 때인 1971년에는 서울시에서 서울시청 이전 계획과 함께 여의도 지역을 서울 유일의 통행금지 해제지역으로 선정하겠다고 계획안을 내놓은 적이 있으나, 무산되었다. 그리고 야간통금이 해제된 현재도 대규모 전염병 확산, 전쟁 발발 등의 비상사태 한정으로 임시적으로 해당지역의 민간인에게 야간통행금지을 발령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1996년에는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하여 강릉 지역에 한정적으로 실시되기도 했으며 2011년에는 연평도 포격 사태 영향으로 연평도 지역에 실시되었다. 그리고 '''대성동마을은 0시부터 5시 30분까지 2024-04-18 21:49:54 현재도 야간통행금지가 유지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대성동마을 문서 참조.
그리고 1982년에 야간통금이 풀리기 전에 북한이 남한을 이러한 야간통행금지 제도를 들먹이며 비난하기도 했는데 이미 북한은 1955년에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었기 때문이다. 2021년 현재 북한이 여행증 없이 북한 내의 다른 지역으로 통행을 못하는 점을 보면 아이러니.
야간통행금지를 시행해도 어떤 일을 작정하고 저지를 사람은 낮이어도 아랑곳않고 저지르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을 야간통행금지를 통해 원천적으로 막는 것은 어렵다.

2.3. 해외의 사례


해외에도 아직 남아있는 사례가 있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치안이나 자연환경 문제로 인해 '''미성년자에 한해서''' 야간 통금을 실시하는 국가나 지역들이 다소 존재한다. 예를 들어 아이슬란드는 만 12세 이하 어린이는 20시 이후, 만 16세 이하는 24시 이후 외출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
일본 도쿄에서도 조례로 23시부터 5시까지 18세 미만 청소년의 야간 통금을 실시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옛날 얘기로 현재에는 강제적인게 아니라 권장사항이다. 때문에 야간 순찰중인 경찰관들이 밤에 돌아다니는 청소년들을 발견하면 밤은 위험하니 어서 들어가라는 주의를 주는 수준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국의 고등학생 내지는 새내기 대학생들이 일본에 자유 여행을 와서 심야까지 돌아다니면 일본 고등학생인 줄 알고 불심검문에 걸리기 쉬운데, 이때 여권을 보여주지 못하거나 제대로 대응을 못하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긴다.
미국에서는 시위가 격화되거나 폭동이 발생할 경우 야간 통금을 실시하는데 샬럿에서 흑인 시위 때문에 야간통금이 실행된 적이 있다. 또한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는 청소년 폭동이 자주 발생하여 역시 기간 한정으로 청소년 야간통금을 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프랑스의 음악가 장 미셸 자르의 북경 공연당시 통행 금지 시간때문에 공연이 다 끝나기도 전에 관객들이 다 나가버린 일화가 있다.
남미에서는 마약과의 전쟁의 일환으로 일부 오지에서는 어두워진 이후엔 '''눈에 띄면 사살'''이라는 극단적인 야간통금을 시행한 바 있다.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으로 필리핀, 에콰도르. 리비아, 페루, 볼리비아, 파라과이, 아이티 등을 비롯한 상당수 국가에서 야간통행금지를 실시하고 있으며 미국에서도 일부 주와 지자체에서 야간통행금지를 시행하고 있다. 프랑스스페인 등의 국가에서는 3~5월중 아예 통행금지령을 내려 주간 야간 상관없이 분명한 목적이 없는 외출을 금지하기도 했으며 미국 역시 2020년 5월 25일에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흑인 폭동이 격화되었을때에는 한시적으로 뉴욕과 로스앤젤레스등 일부 도시에서 일시적으로 야간통행금지가 시행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같은해 10월 14일 프랑스에서도 코로나19의 2차 재확산으로 인해 하루에 2만명 가량 신규 확진자가 나오면서 파리를 비롯한 일드프랑스 지역, 리옹, 툴루즈, 등 주요 대도시 및 위험지역에 야간통행금지령을 내렸다. 10월 16일부터 시작하며, 이때부터 지역에 따라 4~6주 동안 오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의 통행이 금지된다.

[1] 지금도 농촌에서는 해 떨어지면 집으로 귀가하는 경우가 많다. 가로등이 많고 건물 간판이나 내부 조명 때문에 밝은 도시지역과는 달리 농촌은 가로등이 드문 드문 있기 때문에. 물론 농촌 인구가 연령층이 높아서 젊은이들처럼 야간에 잘 안 움직인다는 것도 한몫한다.[2] 제주발 항공기가 23:00 내로 착륙하지 못하면 인천국제공항으로 목적지를 변경시킨다. 김포국제공항의 커퓨는 매우 엄격해서 22:58분에 김포 최종 접근 절차를 진행 중인 항공기도 23:01분 도착이 예상되면 착륙 허가를 안 내준다...[3] 물론 대사헌이 종2품의 초고위직이긴 하지만, 윤종도 정4품 호군이였으므로 '고작 순관 따위'는 아니였다.[4] 다만, 경기도와 강원도 한정으로 휴전선에 인접한 육상/해안 지역은 1982년 1월 5일 당시에 통금해제 제외지역이었다가 1988년 1월 1일에 통금이 해제되었다.[5] 대표적으로 경기도 이천군 장호원읍에서 청미천 하나만 건너가면 나오는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으로 넘어가서 계속 마셨다는 일화가 있다. 공교롭게도 시간이 흘러 2020년도에 코로나19 유행으로 거리두기 상향이 이뤄지자,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권은 2.5단계로 21시 이후 식당 및 술집이 문을 닫았지만 충북 음성군 감곡면은 2단계로 24시간으로 완화되다보니 건너가는 사례가 보도되기도 하였다.[6] 이때는 일제의 잔재로 신정을 연휴 명절로 삼았고, 오늘날 설날인 음력 1월 1일은 '민속의 날'이라고 해서 쉬지 않는 단순 기념일에 불과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 음력을 버린 지 오래라서 지금도 오쇼가츠(일본의 설)를 양력 1월 1일로 잡는다.[7] 1989년 이전에는 주 48시간 근무제를 시행했을 때라서 토요일도 오후까지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나마도 노동법은 당국의 비호아래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