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체첸-인구시 관계
1. 개요
러시아와 러시아 북캅카스 지방 중동부 내륙 안의 체첸 공화국, 인구셰티야 공화국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2. 상세
체첸인과 인구셰티야의 인구시인들은 같은 민족으로서 "나흐인"이라고 불렸다. 1828년 제정 러시아가 캅카스의 대부분을 점령함으로써 이들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점령과 지배를 받았음에도 체첸인과 인구시인은 체첸 지역에서는 다게스탄과 함께 러시아의 지배에 저항하는 주요 장소 중 하나였고, 러시아는 매번 이들을 진압했다. 체첸인들이 제일 강하게 저항했고, 인구시인은 저항지역에서 러시아의 침략을 막았다. 하지만 이들의 봉기는 러시아에 진압되었으며 1859년에도 다시 나타났다. 러시아 혁명, 러시아 내전 시기, 체첸과 인구시인은 독립하려 했을 때 종교를 탄압했던 사회주의 체제의 적군보다 백군을 지원했으나, 백군의 패배로 적군이 정권을 잡은 소련의 재배를 받았다.
레닌은 처음에 체첸-인구시 자치 공화국을 만들어 체첸인과 인구시인을 위한 자치권도 보장했지만 스탈린이 집권한 이후 이들을 탄압했고, 계속되는 저항에다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으려 했다는 사실을 안 이후 더욱 더 탄압시켰고, 대다수는 카스피 해 이동(以東)지역의 중앙아시아(소련 지배의 서투르키스탄 혹은 카자흐스탄)로 강제 이주시켜 험한 황무지 등에서 강제노동을 시켰다. 스탈린 사후에는 1958년, 호르시쵸프에 의해 다시 대다수의 체첸인과 인구시인들이 체첸-인구셰티야로 돌아왔고, 이들을 위한 자치 공화국도 다시 만들 계획도 나오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여전히 체첸인과 인구시인들에 대한 차별 및 불신이 강했고 체첸인들과 인구시인들은 더 강한, 완전한 독립을 원했었다.
1991년 12월, 소련 해체를 계기로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결심했으며, 이는 15개의 여러 공화국들, 특히 인근 캅카스 국가들이 독립된 것을 계기로 독립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져갔다. 그러나 러시아는 체첸과 인구셰티야만큼은 지리적 요충이 중요하고, 자원이 많은 것, 구 소련의 15개의 국가들과는 달리 러시아의 영역이었다는 점으로 반대를 했고, 이러한 갈등은 무장 봉기로 인한 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체첸의 저항이 매우 컸으며, 인구시인들의 인구셰티아도 처음엔 체첸을 도와주었으나, 계속되는 내전 및 일부 과격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나타나면서 1992년 12월 10일, 러시아와의 관계를 완화하기로 하여 1993년에 체첸 공화국과 러시아의 자치를 받은 인구셰티야 공화국으로 나뉘어졌다. 인구시와는 달리 체첸은 끝까지 저항해서 러시아와의 전쟁이 길어졌고,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피해와 사상자들이 나타났고, 여러 인프라 시설과 건물들, 도로가 파괴되었다.
2004년에는 친러 자치국이었던 북오셰티야에게 인구셰티야 영토 일부를 넘겨주었고, 이 때문에 인구셰티아와 체첸에서는 반발이 심했고 특히 체첸의 광신적 민족주의자들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을 일으켰다. 이전에도 대다수는 극단주의로 변질되어 비슷한 테러사건을 일으켰지만 특히 이 인질사건으로 체첸의 독립세력들에게도 안 좋은 이미지, 불신을 받게 되어 해외에서는 체첸을 돕는 일들이 더욱 줄어들기만 했다. 2005년 10월 13일에는 카바르디노발카르 공화국 수도였던 날치크에서 무장 괴한들이 동시 테러를 벌여 136명의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2007년 이츠케리아 체첸이 러시아에 항복하여 결국 망했다. 그럼에도 2008년에 완화되었지만 여전히 위험했고, 2009년에 전쟁이 끝났지만 그 이후에도 소요 사태 및 소규모 시가전, 테러 범죄 등으로 치안이 여전히 불안했고 이는 2011년 후기가 되어서야 거의 끝이 났다. 그 이후로는 전쟁과 체첸 내의 내전 등 분쟁의 후유증와 피해가 심각했기에 현재는 러시아의 자치령으로 남아있다. 다만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여전히 일부 지역에서는 무장 괴한들과의 분쟁이 지속되는 곳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