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역사

 





1. 개요



이 문서는 러시아역사를 다룬다.
유럽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사방으로 세력 확장을 갈망하는 패권주의 국가였다. 이 때문에 영국은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했다.(그레이트 게임) 영국은 러시아의 흑해·지중해 진출, 중앙아시아 진출, 극동 진출을 각각 크림 전쟁,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러일전쟁에서의 일본 지원으로 저지하였으며, 윈스턴 처칠의 경우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중앙 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몰아내기 위해 소련군을 전면 공격하는 언싱커블 작전(Operation Unthinkable)을 계획할 정도였다. 또한 나폴레옹, 히틀러 같은 패권주의적 지도자들은 이러한 인식을 러시아를 침공하는 명분으로 적극적으로 악용했다. 오늘날 컴퓨터 게임이나 영화에서도 '러시아가 유럽/미국을 침공한다'는 종류의 시나리오를 가진 게임이 꽤 많은 것에는 이러한 역사적인 인식이 어느정도 작용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러시아는 사방으로 진출하려는 의지를 자주 보여왔다. 가령 19세기에는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면서 슬라브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발칸 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였으며, 기독교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고 있는 구 콘스탄티노플의 해방을 명분으로 오스만 제국에 전쟁을 걸면서 흑해·지중해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또한 소련 건국 이후에는 공산주의 전파라는 명목으로 전 세계들의 공산주의 정부 수립을 지원했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 동유럽 국가들에는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으며 이 때문에 동유럽에서는 러시아와 전통적으로 친했던 세르비아나 불가리아 같은 나라를 제외하면 오늘날까지도 반러 감정이 꽤 있는 편이다. 특히 소련 시절 탄압받은 기억을 가진 국가들(대표적으로 발트 3국)은 적극적으로 서방에 협조, 러시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하고 있다. 러시아 연방 수립 이후에는 기독교(정교회)의 수호자, 사회적 보수주의, 내셔널리즘의 수호자의 이미지를 내세움과 동시에 유럽 극우 정당에 지원하면서 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고 있다.
반면 러시아 국민들은 서방의 인식과는 반대로 자국을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다. 러시아가 표트르 1세의 개혁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하는 18세기 이전까지는 국력이 허약해 몽골, 폴란드-리투아니아, 스웨덴, 크림 칸국과 같은 외세들에게 시도때도 없이 공격당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개혁으로 어느정도 국력이 강해진 뒤 이전부터 자신들을 공격했던 주변 국가들에게 복수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본격적으로 세력 확장을 시도하자 영국, 프랑스와 같은 유럽 국가들이 경계하였는 데, 이에 대해 러시아는 자기네들도 해외 영토를 식민지로 삼고 타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세력 확장에 골몰하면서 왜 우리가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반대하냐면서 그들의 이중잣대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란의 역사 속에서 광대한 시베리아를 포함하여 세계에서 가장 넓은 국가를 건설해 낸 러시아인들의 조국에 대한 사랑은 엄청나며, 이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단어가 ''''어머니 러시아(Матушка Россия)''''다. 단순히 위대한 조국을 넘어서 마치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는 뜻. 러시아 혹은 소련, 특히 독소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나 영화, 게임과 같은 매체 뿐만 아니라 현대 러시아 사람들의 언어 관습에서도 어머니 러시아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2. 루스 카간국


루스 카간국은 현대의 역사학자들이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 ~ 중반까지 오늘날의 유럽 러시아지역에 존재했던 정체(政體)를 가리키는 말이다. 류리크 왕조키예프 루스의 전신이며 현재의 러시아의 북부에 있는 국가 또는 도시 국가이다.
루스라고 불리는 자들과 노르드인(Northmen) 또는 바랑기아인이라고 불리는 스웨덴인들이 건국한 국가이다. 카간은 고대 투르크어로 왕이라는 뜻이다.
바이킹의 일파인 루스(Rus)족[1]이 라도가 호수변[2]에 건설한 요새에서 시작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대략 바이킹 등의 북유럽[3]들과 슬라브족의 이동당시에 이주한 현지 슬라브인이 나라를 세운 것으로 전한다. 오늘날의 나라 이름인 러시아(rus+sia)도 루스족에서 유래했다. 이때쯤 남하했던 그 북유럽 노르만인들은 주로 교역에 목적을 두고 왔기 때문에 독립적인 세력을 키우고자 하는 의지는 별로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이들은 현지인(슬라브인, 추드인, 크리비치인, 메레인, 벱스인)들에게 무리하게 공물을 받으려 해서 그들을 바다 너머로 내몰았다. 그럼에도 현지 부족들은 서로 간에 싸움을 멈추지 않았고, 그들(바랴기)을 찾아가 자기들 대신 통치하여 질서를 잡아주기를 청하였다.(원초연대기에서 발췌.) 초기에는 현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를 중심 도시로 했으며, 노브고로드 공국, 폴로츠크 공국, 체르니고프, 야로슬라블, 로스토프, 할리히-볼히니아 등의 여러 공국들이 성장하였다.
다만 노르드설은 러시아 역사가들에겐 부정되고 있으며 러시아에서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민감한 주제다. 2차 대전 당시 게르만의 또다른 일파인 독일이 이 노르드 루스설 및 동방식민운동과 같은 여타 역사적 사례를 들먹이며 쳐들어왔기 때문.

3. 키예프 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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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번영했던 도시인 키예프를 중심으로 루스 최초의 나라가 생겼다. 현대의 중심지인 모스크바 쪽은 소공국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황금의 고리) 아직 루스 공국들 사이에서도 변방이었다. 당시 키예프 공국은 '여러 루스 도시의 어머니'로 불리며 대부분의 루스를 영향권 하에 두었고 이곳의 지배자는 대공이라 불렀다. 정교회를 받아들인 블라디미르, 최초의 법전을 편찬한 야로슬라프 대공, 야로슬라프의 종손 야로슬라프 모노마흐 등 위대한 대공들의 황금시대가 10세기를 전후해서 100년 정도 이어졌다. 키예프는 대도시로 번영을 누렸으며, 농민은 농노 신분이 아닌 자유민 신분으로 민회에서 참정권까지 가졌다.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서유럽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것이 없는 시대였다[4]. 예를 들어보자면 프랑스 국왕 앙리 1세 왕비였던 키예프 대공녀 안나(1024~1075)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 '''프랑스의 집들은 음침하고, 성당은 초라하고, 풍습은 혐오스러운 야만적인 나라'''로 평가했을 정도였다. 프랑스가 그 당시 서유럽에서 그나마 좋은 편인데, 이런 평가를 받으니 다른 나라들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실제 역사상 대공녀 안나는 결혼 서약서에서 유창하게 서약서를 썼지만 그녀의 남편인 앙리 1세는 정작 쓸 줄 아는 글자가 X자 하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문화 면에서도 앞서는 면을 보였는데 블라디미르가 통일된 종교를 수용하기 위해 기독교로 결정하고 신하들을 동로마 제국신성 로마 제국으로 두 그룹씩 보냈다.
신성 로마 제국으로 간 신하들은 가톨릭 미사를 보았지만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고 보고한 반면, 동로마 제국으로 간 신하들은 정교회성찬예배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아 자신들이 신계에 있었던 건지, 지상에 있었던 건지라고 그 감동을 그대로 보고했다. 이후 블라디미르는 정교회로 종교를 통일하고 학교를 세워 학문진흥에도 힘을 썼다. 이후 대공으로 즉위한 야로슬라프는 <루스카야 프라우다>란 이름의 루스 최초의 고대법전을 창립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키예프 루스의 황금시대는 동로마 제국서유럽 사이의 무역로 덕분에 가능했다. 지중해의 무역이 아랍 해적들에게 방해받은 탓에 흑해에서 드네프르 강을 타고 키예프 지역을 통해 발트 해로 둘러가는 무역이 성행했던 것. 아울러 블라디미르의 손녀 가운데 한 명은 프랑스 왕, 또 한 명은 헝가리 왕, 셋째는 노르웨이 왕과 각각 결혼해 서유럽과 많은 연결선을 유지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을 전후해서 사라센 해적들이 약해지고, 베네치아 등의 지중해 무역국가들이 성장해 직항로를 트게 되면서, 상인들의 발길이 뜸해지며, 아시아 유목 민족인 플로프치족(혹은 쿠만족)이 스뱌토슬라프와 블라디미르가 쳐놓은 방어선을 뚫고 들어와 1095년 키예프를 점령했다. 이로써 루스의 황금시대는 끝나고 키예프도 몰락한다. 이후의 공국들은 끊임없이 갈라지고 쪼개진 상태였으므로 나라다운 나라라고는 노브고로드 공국, 블라디미르-수즈달, 할리히-볼히니아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으며 본격적으로 멸망하는 것은 후술할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서 시작되었다.

4. 몽골-타타르의 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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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본격적으로 전환기에 들어선 것은 몽골 제국의 침략에서 시작되었다. 키예프 공국이 위치했던 드네프르 강 일대의 평원은 토질이 매우 비옥한 평야 지대여서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으나, 특성상 제대로 방비하지 못할 경우 유목민의 침략에 취약했다. 한마디로 키예프 공국의 위치는 양날의 검이었던 셈이고 몽골 제국은 키예프 공국이 제대로 방비할 역량이 부족했던 시점에서 침략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키예프 공국을 위시한 수많은 공국들은 몽골에게 있어서는 불쏘시개나 다름없었다. 사준 사구라 불리는 8장군의 일원이던 제베와 수보타이가 돌아가던 중에 살짝 툭 치고 간 것만으로도 빈사상태에 빠졌고 제대로 갈아엎으며 지나가자 저항 한 번 못해보고 대부분의 공국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운 좋게 침략을 면한(봄의 해빙기에 몰려왔던 몽골 기병들이 뻘투성이가 된 땅에 질려서 철수) 노브고로드 공국과 그 외 살아남은 공국들은 키예프처럼 완전한 멸망은 면했지만 대신 동시대 고려원 간섭기와 비슷하게 몽골에게 상납금을 바치는 속국 신세로 전락했는데, 이들 중에서 모스크바 공국이 상납금을 모아 바치는 역할을 하면서 모인 돈을 적당히 떼먹으면서 성장했다. 몽골인들은 직접 러시아를 관리하는 것보다 적당히 공물을 징수하다가 트집을 잡고 쳐들어가서 노예를 잡아오는 편을 선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키예프에 있던 정교회 대주교가 모스크바로 주교좌를 옮기게 되면서 종교적 중심지의 역할까지 수행하게 된다.[5]
러시아의 역사가들은 1480년 모스크바 공국군과 킵차크 칸국이 대치하다 그대로 전투없이 철군한 우그라강 전투 때를 기점으로 러시아가 몽골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본다. 루테니아와 러시아 일대에서 몽골 세력의 위상은 14세기 초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팽창으로 인하여 급속히 추락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마침내 1483년 이반 3세는 킵차크 칸국과 맺은 조공계약을 불태워 버리면서 전쟁을 걸었고, 러시아 정교회 주교들이 모스크바를 도우라고 열변을 토하자 거의 모든 공국들이 서방의 십자군 비스무리한 연합군을 결성한다. 그리하여 싸움 끝에 몽골군을 몰아내면서, (그리고 말 안 듣는 공국들을 때려 잡으면서) 현재의 러시아가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해방됐지만, 몽골-타타르의 멍에라는 그 이름처럼 러시아에게 가혹했던 몽골의 지배로 인해 키예프 공국에서부터 예로부터 내려온 민회적 전통 등은 거의 다 사라졌다. 특히 세금을 체납하던 농노에 대한 무차별적인 체벌 같은 악습이 남았으며, 속령 러시아와 루테니아의 농노들은 크림 타타르인들에게 노예로 잡혀가느니 차라리 농노로 사는 게 났다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농노의 권리보장은 시대가 지날수록 퇴보했다. 이러한 몽골의 격렬한 파괴의 반작용으로 독재와 압제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모스크바의 경쟁자였던 노브고로드 공국은 민회의 권한이 강했는데 이반 3세가 이런 말과 함께 멸망시킨다.

"내 세습 영지인 노브고로드에 민회의 종은 필요 없다. 내가 온 나라를 지배한다."

하지만 이 부분이 당시 상황에서 퇴보라고만 볼 수는 없다. 키예프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류리크 가문이 혈족들에게 땅을 균등분배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 중앙집권적인 측면보다는 지방분권적인 정치체제였기 때문인 면이 크다. 키예프 러시아가 좋은 발전 조건을 가지고도 그 이상의 확장이나 발전을 못한 이유가 아직 국가로서의 기틀이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브고르드의 경우에도 민회의 권한이 강했던 이유가 상인들의 힘이 강했기 때문이지 어떠한 민주적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며, 전성기였던 11~12세기 이후에는 소수의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두정의 측면이 강해지며 정치적 혼란이 증가했다.
반면, 모스크바 대공의 경우 프랑스의 카페 왕조처럼 지속적으로 후계자를 낳으며 계승구도를 확실히 했다. 모스크바 공국 발전 초기에는 대공계승에 적장자라는 계승자가 확실히 있었기에 이전 키예프 러시아처럼 형제상속이 아닌 자연스럽게 장자상속으로 옮겨 갈 수 있었다. 모스크바의 지리적 이점과 더불어 이러한 정치적 안정이 있었기에 모스크바 대공국은 다른 루스계 공국과는 달리 힘을 길러서 킵차크 칸국을 물리칠 수 있었다.[6] 이후 이반 3세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딸과 결혼하면서 자신을 차르, 곧 황제로 호칭한다. 그의 손자가 유명한 이반 뇌제이다. 이후 차르의 전제정치는 오랫동안 쭉 이어진다.
물론 몽골 제국으로 러시아의 권력구조가 대대적으로 바뀌면서 러시아가 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러시아가 대제국이 됐다는 말은 몽골 지배의 장점만을 보고 말하는 것이다. 우선 몽골 제국으로 인해 러시아의 문화는 키예프 시대에 비해 완벽하게 퇴보했다. 러시아가 다른 기독교 국가들과의 교류가 사실상 차단당한 상태에서 이런 퇴보는 더욱 악화되었다. 몽골의 침략으로 인한 문화적 피해를 복구하기까지 러시아는 몇 백 년이 걸렸으며, 러시아 제정 말기까지도 군사적인 면을 제외하고 러시아가 다른 유럽 국가에게 앞서는 것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또한 러시아가 대제국이 됐다는 점은 오직 영토가 커짐을 보고 하는 말이다. 러시아의 동방 개척은 모피 외에는 수출할 게 별로 없었던 그리고 동방 유목민으로부터 적극 영토를 방어해야 했던 러시아로서는 어쩔 수 없는 수 없는 생존 방식이었다.
속령 러시아 시절 러시아의 국력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스웨덴을 친다는 것은 말도 안 됐다. 또한, 러시아의 가장 큰 수출품은 모피였는데, 이 모피를 얻을 수 있는 동물 자원이 계속 고갈되면서 어쩔 수 없이 동진을 한 것이다. 당시 러시아에게 이 땅들은 아직은 탐험의 대상이었을 뿐이지, 지나치게 추운 날씨와 농경의 어려움 때문에 자신들의 영토로 생각하는 경우는 적었다. 러시아 제국동방의 중요성을 깨달은 시기는 제국주의 시대로, 그때에 이르러서야 러시아는 자국민을 동방으로 이민보내기 시작했다. 또한, 러시아가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하게 된 것은 표트르 대제 시절 지도 제작 때부터이다. 러시아가 위상과 군사력으로 대제국이 된 시기는 몽골 제국 덕이 아닌 표트르 대제의 개혁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표트르 대제의 개혁 이전에 러시아는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별다른 우위를 보이지 못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위키 게시판에서 토론된 바 있으므로, 이곳을 참고할 것. 그리고 모스크바 대공국 등의 문서에도 이에 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으므로 참고할 만하다.

5.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는 루스계 제후국들을 통합, 복속시키면서 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고,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이반 뇌제는 기존의 대공이라는 명칭 대신 차르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루스 차르국을 선포한다. 이반 뇌제는 강력한 전제정치를 바탕으로 러시아의 국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한다. 모스크바 대공국1552년 카잔 칸국을 정복하고 1556년 아스트라한 칸국을 점령한다. 1583년에는 코사크 부대가 시비르 칸국[7] 중심지 시비르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반 뇌제가 정신줄을 놓은 틈을 노리고 크림 칸국모스크바를 불태우고 수만 명을 노예로 잡아갔으며, 뇌제는 일을 이것저것 벌려놓고 죽어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뇌제의 뒤를 이은 표도르와 그의 후계자이자 이반 뇌제의 아들이었던 드미트리가 드미트리, 표도르 순으로 죽으면서 류리크 왕조에서 정식으로 이을 후계자가 아예 없어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물론 방계가문은 많았지만 이 당시 러시아에서는 방계가 왕위를 계승한다는 개념 자체가 익숙하지가 않았다.

5.1. 혼란 시대 후, 로마노프 왕조의 시작


이때를 기점으로 러시아에는 자신을 차르라 주장하는 이가 여러 명 등장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폴란드와 스웨덴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침범하면서 혼란이 가중되는 '혼란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러한 동란시대는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가 귀족회의를 통해 로마노프 왕조를 열면서 끝나게 된다. 비록 류리크 왕조는 사라졌으나 그 가문과 결혼한 사이였다는 이유로 로마노프 왕조가 생길 정도로 류리크 왕조가 만든 차르 전제정권은 강력했다. 귀족회의를 통해 올라왔다고는 하지만 차르의 권위는 여전했으며, 오히려 귀족들이 혼란 시대를 통해 세가 약해지면서 로마노프 왕조는 다시 긴 기간동안 강력한 전제정치를 이어가게 된다. 로마노프 왕조의 역대 차르와 간략한 역사는 항목 참조.

6. 러시아 제국



6.1. 표트르 대제의 개혁


키예프 루스 당시에는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잘나갔던 러시아는, 이후 몽골의 침입으로 인한 초토화와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문화의 발전이 정체되었다. 러시아는 동방 정교회 문화권인 반면 당시 발전하던 서유럽은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일색이었던 것도 서유럽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많은 제한 상황을 만들었다. 또한 모스크바 대공국이반 3세4세를 시절 성장한 직후 일어난 동란시대로 러시아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며 큰 위기를 겪었다. 이렇게 여러가지가 맞물려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될 무렵의 러시아는 이웃국가들에 비해 국가 발전이 상당히 미흡했다.
하지만 로마노프 왕조(1613~1917)의 표트르 대제(1672~1725)의 적극적인 서구화 개혁 및 북방전쟁의 승전으로 인한 영토확장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표트르 1세는 1721년 러시아 황제의 명칭을 임페라토르로 바꾸고 러시아 제국을 선포하였다.

6.2. 러시아 제국의 본격적 팽창: 폴란드 분할, 크림 칸국 병합, 카프카스·핀란드 진출


이 시기에 러시아에는 두 가지 행운이 겹쳤다.
첫 번째 행운은 유럽의 군사력이 급격한 변혁기를 일단락하고 안정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기술을 외부에서 도입하는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유럽의 군사기술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거대 국가로서의 이점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으므로 빠른 속도로 강대국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다.
두 번째 행운은 때맞춰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7년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 결정적으로 반목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러시아가 스웨덴을 격파하고 동유럽에서의 세력균형을 무너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견제할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는데, 이는 한 나라가 강성해지면 주위의 다른 나라들이 연합해서 끌어내리는 것이 역사의 기본 패턴인 유럽에서 정말로 드문 현상이었다.[8]
덕분에 러시아는 주변의 여러 지역들을 잇달아 병합하면서 거대한 규모로 팽창할 수 있었다. 군사 기술이 향상되자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 정복과 진출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또한 1773년과 1795년에는 폴란드 분할에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했고, 1783년에는 크림 칸국을 병합했다.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도 공세를 시작해서 1792년에는 동으로는 카프카스 지방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서로는 드네스트르 강에 이르렀다. 북으로는 1790년에 스웨덴을 격파하고 핀란드로 진출했다.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사활동으로 가장 큰 덕을 본 것은 프로이센도 영국도 아닌 러시아였던 셈이다.
이후 러시아의 팽창에 제동이 걸린 것은 프랑스 혁명기에 들어서였다. 혁명으로 인해 프랑스의 군사력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면서 러시아의 확장은 일단 저지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나폴레옹러시아에서 수십만 대군을 털리고 알거지가 되는 바람에 마침내 러시아는 유럽에서도 최강국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프랑스가 균형을 잡아주지 않으면 러시아가 그 앞잡이인 프로이센(적어도 메테르니히의 생각으로는 그랬다)을 앞세워서 독일 지역과 유럽의 패권을 장악할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이는 빈 체제에서 프랑스를 짓밟지 않고 오히려 프랑스의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적극적으로 인정한 이유 중 하나였다.

6.3. 러시아 제국의 쇠퇴


그러나 겉보기에는 최신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모습과는 달리 경제수준은 계속 몇 세기 뒤를 달렸고, 여기에 서유럽의 군대가 다시 적극적으로 변혁을 받아들이게 되자 러시아는 또다시 빠른 속도로 뒤떨어지게 되었다. 당대 최강 무능장교들의 집합이었던 크림 전쟁(1853~1856)에서도 한 수 위의 무능함을 자랑하면서 연합군에게 패하여 러시아의 후진성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다 러일전쟁(1904~1905) 당시 일본에 패배하면서 전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물론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고 일본 1년 국가예산의 5배에 달하는 예산을 써가며 전쟁을 치른 탓에 국가파산 직전까지 몰렸고 러시아는 장기전 치른다면 이길 수 있었지만 피의 일요일 사건 등의 국내 정치 혼란으로 전쟁에서 발을 뺐기에 정작 일본이 승전국임에도 별로 얻은 것은 없다고 하나, 그 모든 점을 고려하더라도 러시아가 일본에 패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또한 실질적인 손익을 무시하고 당시에 만연한 인종주의적 시각으로 볼 때 그래도 '백인 국가'인 러시아가 '황인 국가' 일본에 패했다는 것 역시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그래도 만나기만 하면 펄펄 나는 상대가 있었으니 그것은 한창 막장 테크를 열심히 타던 오스만 제국(1299~1923)이었다. 거의 틈만 나면 오스만을 털어먹는 탓에 다른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을 살려두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다.[9]

6.3.1. 제1차 세계 대전: 계속되는 전투에서의 패배


제1차 세계 대전(1914.7~1918.11) 당시의 러시아군은 막장인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상대로는 비교적 잘 싸웠지만 정작 동맹국 의 주력인 독일군에는 압도적인 병력을 밀어붙이고도 처참하게 관광을 다니며 밀리기에 바빴다. 인민들은 오랜 전쟁에 지치다 못해 분노해 2월 혁명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러시아 제국은 무너지고 러시아 공화국(러시아 임시정부)이 잠깐 생겼지만, 전쟁을 계속하는 바람에 오래가지는 못하였고 다시 10월 혁명이 터져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산국가(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독일을 이길 수는 없었고 결국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어 엄청난 영토를 내주는 등 사실상의 패배로 전쟁을 끝내고 말았다.
이 혼란 속에 러시아 제국 아래 있던 비러시아계 민족들은 독립하고자 했고, 국내 반공세력과 외세도 첫 공산주의 국가를 두려워해 혁명을 저지하고자 무력 간섭(백군)을 벌여 러시아 내전(적백내전)이 터졌다. 이때 러시아 제국 영토 내에 젤레나 우크라이나,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 쿠반 인민 공화국 같은 여러 미승인국들이 생겨나고 소멸하였다. 백군은 초기 단결하지 못하고 1918년 말에서야 전러시아 임시정부를 조직해 하나로 뭉치지만, 결국에는 적군이 승리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뜯긴 영토를 일부 회복(?)하였으며, 이들을 구성국으로 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을 건국했다.

7. 소련


적백내전까지 무사히 넘어갔다고 하지만, 소련의 상태는 아직 메롱이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나타난 정책이 레닌신경제정책(NEP)이다. 사유재산을 일부 도입하면서 사람들에게 근로의식을 자극했고, 그 결과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농공업은 전시 이전의 수준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은 사람들에게 이전보다는 나은 삶을 주었으나, 이는 아직 사람들의 소비량과 생산량의 차이가 문제가 불거질 정도로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으며, 이 문제점은 신경제정책의 자본주의적 성격과 결부되어 레닌 사후 소련 공산당에서 앞으로 소련 정책의 방향으로 거센 싸움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 이오시프 스탈린으로, 스탈린은 그동안 서기장#s-3.1으로서 가지고 있던 권력과 본인이 쌓아온 인맥으로 트로츠키 및 부하린을 몰락시켰으며, 제1차 5개년 공업화 계획을 발표하게 된다. 이 시점부터 소련은 러시아 제국의 모습이 사라지면서 우리가 아는 중공업,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제1차 공업화 이후 제2,제3차 공업화 계획이 진행되며 우리가 아는 독소전을 견딜 공업력을 가진 것은 덤.
제2차 세계 대전(1939.9~1945.8) 때에도 초반에는 독일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수도 모스크바가 함락될 위기까지 맞으며 막장의 전통을 이어가는 듯했다. 하필 2차 대전 직전에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이 대숙청을 벌이면서 '''쓸 만한 장교들은 죄다 죽여놨기 때문'''에, 전쟁 말기까지도 고위 장교 수급에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점점 러시아인 특유의 끈질긴 저력과 막대한 물자의 생산력, '거세되었지만 능력을 각성한 장교집단의 지휘력', 그리고 엄청난 물량 공세 전략을 발휘하며 전세를 역전하더니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11~1943.2)와 쿠르스크 전투(1943.7)의 대승리로 독일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고 결국 제3제국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되었다. 나치 점령 시절의 소련 군정청, 러시아 인민 해방 위원회, 로코트 자치국에서 활동한 군 세력이나 소수민족들은 종전 후 시베리아의 굴라그로 끌려가거나 처형되었다. 자유 러시아 군단, 카민스키 여단, 동방부대 등등.
냉전 시기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이후 세계 양대열강에 올라섰다. 이때, 당시의 소련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s-2 등의 동구권 전역을 영향하에 두고 세계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공산 진영의 우두머리였으며 우주개발 등 여러 면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륙하였다. 이 시기만큼은 오래전부터 꿈꾸던 열강클럽의 1인자 자리에 가까운 위치였다. 1957년에는 인류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렸으며 유인 달착륙 이전까지 우주 경쟁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을 선도하였고 세계의 절반을 휘어잡는 강대국으로 40년이나 군림한 점은 대단한 것.
그러나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겉모습과는 달리 원자재에 국가수입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는 등 경제체제가 워낙에 빈약한 면도 있었다. 이 시기의 소련 경제사정을 비꼬는 공산주의 유머 시리즈도 많다.
전성기를 이끌었던 개혁적, 진보적 흐루쇼프 시대 이후, 18년 동안 이어진 반동적, 보수적 브레즈네프 시대에 경제가 정체되었고, 80년대 들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국방비가 폭증하여 재정부담이 급속히 늘어났으며 석유가격이 81년 고점을 찍은 이후 폭락하면서 국가재정수입이 줄어들면서 경제가 더 침체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까지 터지면서 소련의 경제는 파탄직전에까지 이르는 혼란속에, 개혁개방의 혼란 속에 결국 옐친이 주도권을 잡으며 1991년공중분해되었다.

8. 러시아 연방


소련 붕괴 이후 소련의 구성국은 모두 독립했고, 소련의 왕초였던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 연방으로 개편되었다.
러시아 연방은 소련식 사회주의 모델을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문제는 준비되지 않는 급격한 시장경제 도입으로 인한 사회혼란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소련 계획경제의 특징은 균형개발에 있다. 한 지역에서 산업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산업을 여러지역으로 분산시켜 놓았다. 예를 들어 우크라니아에서 밀을 재배하고 벨라루스에서 이를 밀가루로 만들어 에스토니아에서 이를 반죽하고 리투니아에서 빵을 굽는 식이다. 그래서 소련이 해체되자 소비재가 넘쳐나는 공화국이 생기지만 반대로 군수품이 넘쳐나는 국가가 생겨나게 된다. 소련은 대표적인 후자기업이었고, 당연히 물자공급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니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된다. 특히 소련해제 직후 몇년간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물자를 쉽게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당시에만 한정적으로 물물교환이 주 거래 문화로 자리가 잡게 되었다. 또한 초인플레이션은 자산손실을 일으켰고, 임금수준의 급격한 하락, 복지정책 감축으로 인한 사회안전망의 붕괴, 빈부격차 심화로 인한 양극화를 초래했고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욕을 잃었다. 여기에 혼란한 정치 상황까지 겹치면서 결국 각국에 막대한 자금을 빌리고도 갚지 못해 모라토리움까지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세계적인 수준의 과학기술과 국방기술력, 그리고 중공업이 발달한 덕에 각종 무기시장에 값싼 무기들을 대량 유통시키며 짭짤한 수익을 얻은 데다 허허벌판이던 시베리아가 자원의 보고로서 각광을 받고, 유가 상승으로 크게 호황을 맞았으며 현재는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더한 산유국이 되어 전세계 에너지 자원을 쥐락펴락 하고 있다. 덕분에 그동안 외국에 있던 채무를 대부분 처리했으며(그것도 현금 박치기) 오히려 대침체 때 자국이 다시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슬란드가 부도위기에 처하자 돈을 꿔주는 채권자로 격상되었다. 2000년 넘어 1인당 GNP가 만 달러가 넘어가기 시작했으며 세계에서 국민당 백만장자수가 가장 많은 곳이다.(다르게 보면 그만큼 빈부격차 문제가 심각하다는 말도 된다.[10]) 중국이 가장 빠른 속도로 백만장자가 늘고 있지만 현재 러시아 역시 백만장자 수의 증가율이 가장 높은 축에 속하여 금방 따라잡히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다시 부강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소련 해체로 인해 축소된 영향력 회복에 골몰하고 있다. 과거에는 최전방이 수백 km 떨어진 동독이었지만 지금은 소련 시절 짓밟고 다니던 코앞의 발트 3국조차 NATO 가입국이니 러시아로서는 미치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은 러시아가 미국의 러시아 영향력 축소 정책에 더이상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것을 힘으로 보여주었다. 이에 더해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2014년에는 크림 위기돈바스 전쟁에 사실상 개입해 친서방 노선을 타는 우크라이나를 무력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자원에 의존하는 현 러시아 경제는 규모에 걸맞지 않게 자원 가격 리스크에 크게 노출되어 있으며, 2014년 셰일혁명 이후 미국에서의 석유 생산량 증가로 국제유가가 급락하면서 러시아 경제는 크게 위기를 겪은 바 있다. 부정부패가 심한데다 아직 자원이 경제 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며 사우디 아라비아가 미국의 셰일가스를 인정하는 한편 나머지 산유국들을 석유 물량박치기로 고사시키려 들기에 블라디미르 푸틴이 부정부패 척결 등을 내세운 개혁이 성공할 때까지는 한동안 침체할 듯하다. 장기적으로는 이 대안 쪽을 더 강화하고 러시아가 더 발전해야 이 문제가 끝날 듯하다.
[1] 전설에 따르면 바이킹 수장의 아들들 중 하나인 루스란 남자가 이 일족의 시조라 한다.[2]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아래에 나오듯 후대에 정책적으로 조성한 계획도시고 이때는 늪지대에 불과했다.[3] '바랴기'라고 불렸다. 동로마 황제의 호위대인 바랑기안 친위대는 여기서 나온 말.[4] 물론 이때의 서유럽이 워낙 막장이기도 했다. 바이킹의 잦은 침공과 각 나라간 다툼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서유럽이 안정을 찾은 것은 노르만의 침공이 어느 정도 끝나고 프랑스카페 왕조로 안정을 찾은 후인 11~12세기 이후이다.[5] 당시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이었던 이반 1세는 상납금을 수금받아 그 상납금을 바치면서 간간히 귀한 선물을 준비해 몽골 장군들에게 진상했고 이에 크게 기뻐한 몽골 장군들과 칸들은 이반 1세를 모든 러시아를 지배하는 권한을 주었고 상납금을 받을 권리를 주었다. 이후 이반 1세는 특유의 재산관리와 상납금을 이용해 몽골의 환심을 받았고 이후 돈주머니란 이름의 칼리타란 호칭을 얻었다.[6] 니꼴라이 V. 라쟈노프스키 작, 러시아의 역사 1 '속령 러시아' 부분 참조[7] 시베리아의 어원이 되는 나라이다.[8] 사실 영국도 러시아와 비슷하게 변두리에 있고 수비하기가 유리한 지형이어서 프랑스나 독일 등보다 상당히 유리한 조건에서 강력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은 19C~20C에 걸쳐 가장 강한 대립각을 형성한다. 또한 일본도 이런 좋은 조건이 다 갖춰져서 도움이 됐다고 평가된다.[9] 애초에 크림 전쟁 역시 이런 상황 때문에 일어났다...[10] 실제로 2013년 크레딧스위스는 111명의 부자가 러시아 국부의 35%(!)를 독점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