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클라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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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2004)
줄여서 C.클라이버라고도 한다.
1. 생애
오스트리아 출신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의 아들이다.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 역시 당대의 명지휘자였다. 에리히 클라이버가 베를린 국립 오페라의 지휘자로 재직하던 1930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베를린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이름은 독일식인 Karl이었다. 풀 네임은 Karl Ludwig Bonifacius Kleiber. 당시 베를린은 에리히 클라이버 외에도 필하모니의 푸르트벵글러, 시립오페라의 브루노 발터, 크롤 오페라의 클렘페러가 활동했던 음악의 중심지였다. 에리히 클라이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상당한 금수저 집안이라 카를로스 또한 어릴 때부터 최상류층으로서 매우 유복하게 자랐다.
힌데미트 사건(1934년) 이후, 1935년 에리히 클라이버는 베를린 국립 가극장 지휘자를 그만둔 후 이탈리아, 소련, 아르헨티나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활동했고, 카를로스는 어머니, 누이와 함께 스위스에서 거주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아르헨티나에 있던 에리히 클라이버는 스위스에 있던 가족을 신속히 아르헨티나로 피신시켰다.[1] 아르헨티나로 이민간 이후 Karl이라는 독일식 이름을 Carlos라는 라틴식 이름으로 고쳤다. 아르헨티나에서 에리히는 대저택을 구입했고 여기서 풍족하게 자랐다. 아르헨티나로 이민간 덕분에 동시대의 불운했던 유럽의 청소년들과 달리, 10대 시절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아르헨티나에서 상류층 교육을 충실히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에리히 클라이버는 뉴욕의 토스카니니의 제의를 받아들여 NBC 교향악단의 수석 객원 지휘자가 되었다. 뉴욕에는 불과 몇 주만 머무르면 되는 조건이었지만 에리히는 내심 공석이 된 뉴욕 필의 차기 상임지휘자 자리를 노릴 겸 아들 교육을 시킬 겸 겸사겸사해서 뉴욕에도 집을 마련했고 아들 카를로스를 불러 미국 최고의 부호들의 자제들이 다니는 기숙사립학교인 뉴욕의 '리버데일 컨트리 스쿨'에 진학시켰다. 참고로 이 학교는 요즘도 세계에서 학비가 가장 비싼 고등학교로 선정되었다. 뉴욕 ‘리버데일 컨트리 스쿨’ 학비 수준 세계 1위.
덕분에 1948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년을 재수하여 1949년 스위스의 명문 대학교인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화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2] 당시 같은 나이대의 유럽 학생들이 전쟁으로 인해 중등교육을 정상적으로 이수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거져 진학할 수 있었다. 참고로 클라이버보다 한 살 많은 1929년생은 모두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독일에서 공식적으로 징집되어 전쟁에 참전했었다. 그보다 어리더라도 히틀러 유겐트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서 군사교육을 받고 실전에 투입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실제 연합군에 수많은 독일의 어린 소년병들이 포로로 잡혔다. ETH의 경우 취리히에 있지만 실제로 독일 유학생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학교였다. 당장 ETH가 자랑하는 동문이 전부 독일 출신이고 스위스 출신은 없다시피 할 정도다.[3]
아버지 에리히는 힘들게 지내왔던 만큼 아들이 음악을 공부하는 데 대해서 극심한 반대를 했다고 알려진다.[4]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를로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48년 아버지가 지휘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콜론 극장 오케스트라에서 팀파니 단원으로 연주자로 데뷔하게 된다. 데뷔공연에서 연주한 곡은 무려 리하르트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이다.
1949년 아들이 취리히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아버지 에리히도 당시로서는 괜찮은 연봉을 주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 가극장을 그만두고 유럽으로 돌아왔다. 사실 에리히 클라이버는 뉴욕에서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뉴욕 필의 차기 상임지휘자를 내심 노리면서 3년여 동안 뉴욕에서 활발한 객원 지휘자 생활을 했지만 NBC에서 나가리되고 1949년 뉴욕 필마저 스토코프스키가 차기 상임지휘자 자리에 오르면서 에리히 클라이버는 더이상 뉴욕에 있기 어렵게 되었다. 때마침 뉴욕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들이 취리히로 유학가는 것이 결정되었고, 유럽에서도 베를린 봉쇄로 전운이 감돌던 상황이 때마침 해소되었기 때문에 겸사겸사 아메리카 대륙 생활을 청산하고 유럽으로 발길을 돌리게 된 것이다.
카를로스는 ETH에 입학은 했지만 졸업은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5]
이후 대학교에 재학 중인 1952년 뮌헨의 오페레타 극장인 겔트너 프라츠 극장의 무급 견습 지휘자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음악공부를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간동안 몰래 독학으로 버텨왔다고 한다(...) 이 때부터 지휘를 시작했다. 1954년 포츠담에서 Carl Millöcker의 오페레타 Gasparone을 지휘하며 데뷔했다. 데뷔 당시 Karl Keller라는 가명을 썼다.[6] 이때 아버지는 어떻게 알고 전보를 쳐 축하해줬다고(...)[7]
위와 같은 내용이 인터넷에 널리 알려져 있고 본 문서에 그렇게 써져 있었다. 실제 과거 음악 잡지나 서적에도 이런 내용들이 실려 있었으나 인터넷의 루머치곤 상당히 공신력 있는 일화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카를로스가 아버지 몰래 가명으로 지휘 데뷔를 했으나 아버지가 어떻게 알아내서 축하 전보를 보내줬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카를로스 클라이버 자서전에 따르면 "지휘자 데뷔시 Karl Keller 라는 가명을 썼는데 이는 '''아버지의 권유'''였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사실 아버지 에리히는 자식 교육에 무척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으며, 당시 20대 초반의 나이에 수입도 없었고 유럽에 연고도 없었던 카를로스는 아버지와 같이 살았던 기간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카를로스가 데뷔했던 1954년 당시에 에리히는 베를린 국립 가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동베를린에서 당이 제공해준 집에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에리히는 카를로스를 포함한 가족들과 함께 동베를린에 살았던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베를린의 위성도시인 포츠담에서 데뷔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그의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숨겼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베를린 봉쇄의 여파로 당시 서독 시민권자나 서방 국적자들은 포츠담에 마음대로 갈 수도 없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동독 영토인 포츠담에서 지휘자로 데뷔한 것은 그가 이미 동독 시민권자 혹은 영주권자 내지는 최소한 거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그가 아버지와 함께 동베를린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실제로 카를로스는 당시 동베를린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황상 당시 동독 음악계의 최대 거물인 '''아버지가 당에 힘을 써서 카를로스가 포츠담에서 지휘자로 데뷔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하지만 1955년 3월 아버지 에리히는 당과의 갈등 끝에 베를린 국립 가극장 음악감독을 다시 사임하고 가족들과 함께 동베를린을 탈출했다. 이후 1956년 1월 아버지 클라이버가 취리히의 한 호텔에서 자살했다.
어쨌거나 1954년 동독 포츠담에서 데뷔한 카를로스는 지휘자로서 경력을 차츰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1956년부터 뒤셀도르프(뒤스부르크)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1958년에는 뒤셀도르프와 뒤스부르크의 Deutsche Oper am Rhein에서 카펠마이스터로 승진하여 1964년까지 일했다. 이어 1966년 슈투트가르트 가극장에 first Kapellmeister로 취임한 이후 60년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6년 슈투트가르트 오페라가 야심차게 준비한 보체크의 영국 에든버러 해외공연에서 클라이버가 공연을 무단으로 펑크낸 바람에 슈투트가르트 극장 경영진이 격노하게 되었다.[8] 클라이버가 공연 시작 40분 전에만 알려줬어도 오페라 극장의 다른 지휘자인 라이트너가 대타 지휘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클라이버의 펑크 때문에 슈투트가르트 가극장측은 이미 객석을 가득 채운 청중들에게 전액환불을 해줬을 뿐만 아니라 애든버러 페스티벌 측에도 위자료를 물어야 했다. 가극장측은 클라이버의 처신에 대해 크게 분개하여 그와 계약을 종료하려고 했지만, 클라이버는 오히려 노동법을 들먹이면서 극장 경영진들을 조롱했고, 결국 1973년 계약 만료일까지 자리에서 버텼다. 슈투트가르트 가극장과 계약이 종료된 이후(1973년) 클라이버는 고정된 악단 없이 자유롭게 지휘하러 다니는 프리랜서 지휘자로 남은 여생을 보냈다.
1973년 음반사 DG에 영입되어 마탄의 사수, 베토벤 교향곡 5번, 7번을 녹음했는데 이 음반들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사실 DG에서 베토벤 교향곡이 출시되기 전에 클라이버는 해외에서는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 해외의 유명한 클래식 평론가들도 이 음반으로 클라이버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시 영국의 저명한 한 평론가는 클라이버의 베토벤 교향곡 5번 LP를 접하고 두번 놀랐다고 한다. 우선은 이런 듣보잡이 어째서 세계적인 음반사 DG에서 무려 빈 필을 지휘하여 데뷔 음반을 냈냐는 것으고, 두번째는 틀어서 들어보고는 연주 퀄리티에 놀랐다고 한다.
1974년에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데뷔했다. 클라이버 본인이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하고 싶다고 볼프강 바그너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1974년부터 76년까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총 16회 지휘했다.[9] 하지만 클라이버는 1976년 페스티벌 도중 3회차 공연이 끝난 직후 잠적했고, 급히 호르스트 슈타인이 땜빵으로 투입되어 남은 공연을 소화했다. 무슨 문제로 잠적했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사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로서 바이로이트에서 그의 커리어는 끝이 났다.
80년대에는 뮌헨의 유서깊은 바이에른 국립가극장(바이에른 슈타츠카펠레)가 그의 활동 중심지가 되었다. 이미 70년대부터 바이에른 슈타츠카펠레와 자주 공연했고 80년대에는 여기서 공연하는 빈도가 늘어 사실상 클라이버의 주활동 무대가 되었다. 클라이버는 뮌헨 인근에 집을 마련하여 거주했고, 바이에른 슈타츠카펠레에는 클라이버의 개인사무실과 개인용 라커도 있었다.[10] 바이에른 국립가극장의 경영진과 음악감독 볼프강 자발리쉬도 클라이버를 물심 양면으로 각별히 지원해줬다고 한다.
일본 투어에도 나서서 꽤 성공했다. 일본의 유수 음악잡지에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천문학적인 개런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본 투어만큼은 정말 즐거워했다.[11][12] 클라이버의 마지막 오페라 공연인 "장미의 기사" 공연도 94년 일본에서 열렸다.[13]
1989년에는 빈 신년 음악회를 이끌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 공연은 CD[14] 와 DVD 둘다 구할 수 있다. 물론 클라이버가 빈 신년 음악회를 다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클라이버는 리허설 과정을 참 힘들어했으며 특히 공연 마지막에 전통적으로 연주하는 라데츠키 행진곡에서 관객들이 박수를 치는 관습을 정말 못마땅해했다고 한다. 1987년 빈 신년 음악회 영상에서 카라얀은 관객들을 향해 노구를 돌려 관객들의 박수를 지휘하는 전통을 따르고 있지만, 클라이버는 몸을 거의 돌리지 않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90년대에는 오페라(장미의 기사나 박쥐 등 본인 장기)와 교향곡 위주로 활동했다. 1992년에는 다시 한 번 빈 신년 음악회를 맡아 또다시 각광받았다.[15] 기벽도 유난했던 시기로, 천문학적인 콘서트 개런티와 더불어 아우디 A8까지 달라고 했다고 한다.[16]
90년대 중반부터는 연주회 횟수가 현격하게 줄었다. 95년에는 아예 공연이 없었고, 96년에는 단 두 차례 공연만 지휘했는데 그중 하나는 클라이버 자신이 원하는 사양대로 제작한 아우디를 받는 댓가로 아우디공장이 있는 잉골슈타트에서 아우디 근로자를 위한 콘서트를 지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파파라치에 의해 이것이 들통나면서 언론에 보도되고 말았다.[17]
그리고 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아내가 먼저 죽자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이 악화, 2004년 7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2. 이야기거리
2.1. 지휘 방식
그의 지휘는 개성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혹자는 강력하게 몰아붙이며, 오케스트라 장악력이 뛰어나면서 유연하고 역동적인 해석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그의 지휘를 개성적인 지휘로 많이 볼 것이다.[18]
클라이버의 지휘는 지나치게 신체적 근력과 민첩한 스냅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젊은 시절 매우 역동적인 연주를 들려주었지만, 서정적인 곡에서는 한계를 노출하는 경우가 많았고[19] , 나이가 들면서 신체적 근력과 민첩성이 떨어지면서 점차 지휘 역량이 떨어졌다는 평가[20] 가 있다.
2.2. 완벽주의 및 무대 공포증
완벽주의자 기질이 있어서 리허설에는 굉장히 엄격했다.[21]
클라이버는 자신에게 한번이라도 비판적인 평을 한적이 있는 곳에서는 결코 다시 연주하는 일이 없었다. 런던이 대표적인 경우다. 런던 심포니와의 첫 공연에 대해 악명 높은 런던 비평가들이 역시나 비판적인 리뷰들을 쏟아냈는데, 이에 격분한 접한 클라이버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런던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이는 런던에서도 만만찮은 파문을 일으켰는데, 좋든 나쁘든 비판적인 평론만 쏟아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었던 런던의 평론가들에 대해 자국 애호가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던 차에 클라이버가 런던에서 공연을 거부하자 평론가들 때문에 음악애호가들이 클라이버의 연주를 들을 기회를 빼앗겼다는 비난 여론이 쏟아졌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비판적인 리뷰를 썼던 평론가들 대부분이 클라이버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또 런던의 비평가들은 클라이버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클라이버에 대한 찬양 리뷰들을 양산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라이버는 두번 다시 런던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런던의 사례가 있은 후 전세계 누구도 감히 클라이버에 대해 비판적인 공연 리뷰를 쓰지 못했다.
무대 공포증[22] 이 있었다. 극복하고 싶어서였는지,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지나친 리허설로 악단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 데 능했다. 특히 베토벤 교향곡 4번 2악장 리허설 장면[23] 만 봐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리허설은 기본이 3주였다.[24] 심지어는 공연 당일에 취소해버리기도 했다. [25] 당일 취소를 하더라도 한 시간 전에라도 알려주면 대리 지휘자라도 구할 수 있는 경우가 있는데, 클라이버는 말그대로 공연 시작 직전에 취소해 버렸기 때문에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을 그냥 돌려보내야 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곤 했다.
클라이버의 완벽주의와 무대공포증은 기본적으로 최고를 지향하는 본인의 성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로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를 객원지휘하러 온 클라이버를 맞이하여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던 하이팅크[26] 에 따르면 클라이버는 세계 최고의 유일무이한 지휘자로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했다고 한다. 또,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에 비해 자신이 작품의 이해도와 지휘력이 떨어진다는 일종의 컴플렉스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혹자는 이 컴플렉스 때문에 그 수많은 무대취소가 발생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클라이버는 개런티에 있어서도 항상 세계최고의 대우를 원했는데, 이미 80년대에 베를린 필에게도 카라얀보다 높은 캐런티를 요구했다. 베를린 필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카라얀이 클라이버의 베를린 필 지휘를 방해했다는 풍문이 퍼져있는데, 실은 클라이버의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 때문에 베를린 필의 매니저 슈트레제만이 포기한 것이었다. 빈 필 신년음악회를 지휘할 때는 최고수준의 개런티 이외에도 아우디 등을 요구했다고 한다.
2.3. 레퍼토리
그의 레퍼토리는 상당히 한정되어 있는 편인데 나이가 들수록 더 좁혀진 편이다. 주요 레퍼토리로는 베토벤 교향곡 4, 5[27] [28] , 7번[29] , 브람스 교향곡 2, 4번[30] , 모차르트 교향곡 33, 36번, 슈베르트 교향곡 3번, 마탄의 사수 서곡 등이 그의 레퍼토리의 대부분이다.[31] 특히 브람스 교향곡 4번, 베토벤 교향곡 4&7번 등이 핵심 레퍼토리라 할 수 있다. 칼 뵘 추도 콘서트에서 실황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4번은 이 곡의 명반을 논할 때 항상 거론될 정도로 칭송받고 있다.
클라이버도 전통적인 독일의 오페라 지휘자 코스를 밟아왔기 때문에 오페라에 정통한 지휘자였다. 이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사실이 독일의 지휘자가 양성되는 제도 자체가 콘서트가 아닌 오페라 음악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커리어를 시작하는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오페라극장의 견습 및 보조 지휘자부터 시작해 제2카펠마이스터-제1카펠마이스터 식의 수순을 밟기 때문이다.[32] 실제로 그의 전생애를 걸친 공연에서 오페라 공연 횟수가 교향악 콘서트보다 훨씬 많다. 젊은 시절에는 꽤나 다양한 오페라를 지휘하였는데[33] 오페라 쪽도 점차 레퍼토리를 줄여나갔다.[34] 디스코그라피에 남아있거나 후기에 주로 공연한 오페라는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박쥐", 베버 "마탄의 사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장미의 기사" 등이다.
2.4. 다른 지휘자들과의 관계
클라이버가 음악적으로 가장 좋아했던 지휘자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있다.
카라얀[35] 과 절친한 사이였으며[36] , 그가 죽고난 뒤 밤에 무덤에 가서 흐느껴 울었다고 전해진다.[37] 평소에 다른 음악가들에게 카라얀의 리허설 방식에 대해서도 자주 물어봤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카라얀의 방해로 클라이버가 카라얀 생전에 베를린 필을 한번도 지휘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80년대 초에 베를린 필 이사회가 클라이버를 객원지휘자로 초빙하기로 결정했고, 카라얀도 이를 허락했다. 그러나 클라이버는 베를린 필 측에게 상임지휘자 카라얀보다 높은 개런티를 요구했고, 이는 전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베를린 필의 경영진은 클라이버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결국 클라이버의 베를린 필 객원 지휘는 카라얀이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를 사임한 이후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스토코프스키의 사운드를 무척 좋아하여 스토코프스키와 공연한 경험이 있는 연주자를 만날 때 마다 스토코프스키가 어떤 방식으로 리허설을 했고 어떻게 그런 사운드를 낼 수 있었는지 캐물었다고 한다. 스토코프스키가 사용하던 독특한 방법 중 하나는 현파트의 자유 운궁법(Free bowing) 사용이다. 스토코프스키는 자유 운궁법을 종종 사용하는 지휘자였지만 아주 자주 사용한 것은 아니고 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자유 운궁을 쓸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그때그때 달랐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이러한 자유 운궁의 사용이 스토코프스키 사운드의 중요한 요소라고 여겼는지 자주 자유 운궁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클라이버는 자유 운궁을 곡 전체에서 사용하지는 않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패시지에서만 사용하도록 지시하였다. 또 스토코프스키가 연주자에게 완전히 자유롭게 보잉을 하도록 맡긴 것과는 달리 클라이버는 풀트마다 직접 보잉을 지정해 주었다. 클라이버의 자유 운궁 사용은 일부 오케스트라와 마찰을 빚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베를린 필이 클라이버의 자유 운궁 요구를 거절하자 클라이버가 연주회를 취소해 버린 경우가 있었다. 한때 클라이버가 활발히 교류했던 시카고 심포니와의 관계가 단절된 것도 자유 운궁의 사용 때문이다. 클라이버가 리허설에서 자유 운궁을 지시하였는데, 첼로 수석이였던 플랭크 밀러가 강력하게 반발했어도 클라이버가 뜻을 굽히지 않자, 밀러는 공연 전에 단원들에게 몰래 통일된 보잉을 지시하였고, 공연 후에 이를 알게된 클라이버는 바로 짐싸서 시카고를 떠나고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시카고 심포니를 지휘하지 않았다(...).
훗날 과거 자신이 멕시코 순회공연 때 지휘한 콜리올란 서곡 동영상을 보고 '그 땐 아직 스토코프스키의 연주를 알지 못했던 때라 (내) 연주가 썩 좋지 않았다. 지금도 만족스럽지는 않지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음반을 들어보면 스토코프스키만의 독특한 다이나믹[38] 을 클라이버가 일부 모방하고 있다.[39]
반면 첼리비다케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클라이버는 "토스카니니가 보내는 서한"이라는 글을 직접 작성하고 신문에 투고하여 공개적으로 첼리비다케를 까고 카라얀을 추켜 세운 적이 있다. 첼리비다케는 성격이 안 좋은 걸로 유명해서 공개적으로 유명 지휘자들을 까고 다녔는데 클라이버도 깐 적이 있다.
2.5. 음반
클라이버의 정규녹음은 많지 않다. 80년대초 DG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녹음하다가 분노하여 뛰쳐나온 이후 더이상 스튜디오에서 정규 음반을 녹음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니버설 뮤직에 남겨진 모든 녹음과 영상물을 동원해도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 모든 관현악곡 및 오페라 녹음이 디 오리지날로 재발매 되기도 하였고 이후 컴플리트 레코딩이라는 이름으로 전집이 재발매되기도 하였다. 본인의 완벽주의 및 한번 비위에 거스르면 평생 척을 지는 성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 것 같다.
일각에는 클라이버가 좋은 조건에서 녹음하지 못했다는 주장[40] 을 펼치는 이가 있기도 한데,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클라이버는 누구보다도 좋은 조건에서 녹음했는데, 자신이 원하는 곡, 오케스트라, 가수를 맘대로 선택하여 녹음할 수 있는 지휘자는 클라이버와 카라얀을 제외하면 음반 역사상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카라얀도 만년이 되기 전까지는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41][42] 클라이버의 전속사였던 DG는 클라이버에게 이례적일 정도로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는데 교향곡 데뷔 음반을 무려 빈 필과 녹음하게 해줄 정도였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DG에서 남긴 마지막으로 남긴 녹음인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경우, 음반사가 이례적으로 오케스트라 리허설로만 열흘을 잡아줄 정도였다. 녹음 세션 이외에 별도 리허설을, 그것도 열흘씩이나 잡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나, 클라이버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당시 동독에 속해 있어 음반 녹음 기회가 많지 않았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를 기용한 덕분에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유례없는 사전 지원을 해줬건만 클라이버는 녹음 중에 계속 음반사측의 지원이 미흡하다고 불만을 표출하다가, 마침내 타이틀롤인 테너 르네 콜로[43] 와 싸우고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잠적해 버리는 바람에 녹음 세션은 영구적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이미 한달이 넘는 녹음 세션을 진행하면서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부었던 DG는 클라이버의 리허설 세션 음원을 짜집기하는 등 갖은 노력 끝에 가까스로 음반을 출시했다.[44] 음반이 출반되자 클라이버는 음반사가 자신의 동의 없이 음반을 출반했다면서 깊은 빡침을 표현했고 평생 DG와 그 이사진을 비난하고 다녔다.[45] 이것은 클라이버의 마지막 스튜디오 정규 음반이었다.
물론 80년대 이후로도 음반을 남기긴 했는데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것은 없다. 정식적인 계약으로 만들어진 녹음은 아닌 공연 갔을 때 누가 그걸 몰래 녹음하여 만들어낸 해적음반이 많다. 음질은 어느정도 들어줄 정도로 양호하지만, 정식반의 음질에 턱없는 퀄리티[46] 그런 음반들 밖에 없기 때문에 팬들은 그 음반을 해적음반인 것을 알면서도 마구 질렀다고 전해진다.
가장 자신이 있어야하는 몇 곡만 녹음으로 남겼기 때문에 몇 장의 음반만으로 클라이버를 명지휘자로 평가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클라이버의 한계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이다. 이 곡은 클라이버가 거의 지휘하지 않은 곡이지만 그의 사후에 음원이 해적판으로 출시되었다. 안타깝게도 이 음반은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클라이버도 이 연주회 이후로 더이상 전원을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클라이버는 베토벤 교향곡 중에서 4번, 5번, 7번 세 곡만 녹음하여 모두 찬사를 받고 있지만, 만약 클라이버가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녹음하였다면 평가가 상당히 달라졌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2.6. 금전적 측면
냉장고 드립 등으로 세간에는 돈에는 초연한 듯한 이미지가 퍼져 있지만, 노먼 레브레히트 등에 따르면 실제 클라이버는 금전적인 면에 매우 밝고 철저한 사람이고 말하고 있다.
클라이버가 최고수준을 뛰어넘는 초고액의 개런티를 원한 것은 공연계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클라이버가 베를린 필에 처음 데뷔한 것은 1989년이었다. 이때문에 카라얀이 클라이버의 베를린 필 지휘를 방해한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사실은 클라이버의 베를린 필 데뷔가 늦어진 것도 그가 카라얀보다 높은 개런티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베를린 필로서도 이것 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카라얀이 베를린 필에서 물러난 1989년에야 클라이버의 베를린 필 데뷔가 이루어졌다.
노먼 레브레히트가 소개한 일화에 따르면 클라이버는 89년 신년음악회의 음반판권을 조금이라도 더 높은 가격에 팔려고 전화기 세 대를 동시에 잡고 DG, 소니, EMI와 협상했다고 한다. 심지어 클라이버는 신년음악회의 음원과 영상의 판권을 쪼개어 각기 다른 음반사에 이중으로 파는 기발한 아이디어까지 생각해냈고 이를 정말 실천에 옮겼다.[47] 클라이버는 1992년 신년음악회 때도 빈 필 측에도 초고액의 개런티는 물론 추가로 아우디A8까지 요구했다.
하지만 클라이버는 자신의 이런 금전욕과 물욕을 대외적으로는 숨기면서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했다. 클라이버의 초고액 개런티 요구 사실은 일반 청중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1996년에 파파라치에 의해 아우디 스캔들이 터지자 클라이버는 이를 매우 수치스럽게 여겼고 자신의 대외적 이미지가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하고 사실상 은퇴에 들어갔다.
명문대[48] 출신이었던 클라이버는 경제적 희소성의 개념을 가장 잘 이해한 지휘자였다. 공연 횟수를 줄일수록, 음반녹음을 줄일수록 그의 공연과 음반의 가치는 치솟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80년대 이후에는 전세계에서 초청이 빗발쳤으며 특히 자금력이 풍부했던 미국 오케스트라들은 거의 스토커수준으로 매달렸는데, 그가 거절할때마다 더 고액의 개런티를 제안했다.
클라이버가 자신있는 소수의 레퍼토리만을 녹음하여 자신의 브랜드 이미지를 실제 이상으로 높이는 데 성공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의 사후에 Orfeo에서 베토벤 전원 교향곡 실황이 발매 예고되었을 때의 센세이션한 기대감, 그리고 발매 후 실망감으로 인한 후폭풍 등을 봤을 때, 생전의 그의 전략이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2.7. 사생활
아내 스틴카가 죽은 지 불과 몇 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아내의 죽음을 슬퍼한 애처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상은 클라이버의 끊임없는 바람기와 복잡한 여자관계 때문에 그의 아내는 평생 불행한 삶을 살았다. 애초에 클라이버는 결혼식을 주변에 알리지도 않았고, 결혼식 당일에도 식이 끝나자마자 리허설을 하러 가버리는 바람에 첫날부터 결혼생활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전기에는 스스로 클라이버의 연인이었다고 밝힌 KD[49] 라는 여성의 증언이 실려 있는데, 벤치에서 우연히 처음 만난 날 바로 점심식사까지 같이 했을 정도니 작업스킬도 수준급. 환갑이 다돼서도 매년 여름 휴양지에 데리고 오는 여자가 바뀌었다는 것이 그의 전기에 나와있는 지인들의 증언이다. 당시 음악계에서 여자 밝히기로 아주 유명했다고 한다.
어머니와 사이가 매우 안좋았다. 젊은 시절부터 어머니는 아들 공연을 관람하고 싶어했지만 카를로스는 부담이 된다면서 어머니에게 오지 말라고 했고 이 일로 항상 싸웠다고 한다.
클라이버 본인은 지인들에게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했지만, 실상은 클라이버와의 불화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8. 일본
일본을 무척 좋아했다. 일본에서 공연도 여러차례했는데 관현악 콘서트는 물론 심지어 94년 빈 국립 오페라 원정공연도 했다. 물론 당시 세계 2위였던 일본의 막강한 자금력 때문에 가능했던 일. 일본에서 클라이버에게 지급한 개런티는 역대최고로 알려져 있다. 클라이버는 일본에서 초청할 때마다 또 개런티가 올랐다고 자신이 받은 막대한 개런티를 주변에 자랑하기도 했다. 때문에 클라이버의 방일 공연의 티켓값은 엄청난 고액이었는데, 1994년 도쿄에서 빈 국립가극장과 공연한 장미의 기사 공연의 티켓값은 당시 한화로 64만원에 달하는 기록적인 액수여서 각국 해외 토픽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클라이버는 공연이 아니더라도 사적으로 일본에 자주 여행을 갔는데 직접 차를 렌트해 일본 시골까지 몰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한번은 일본 여행에서 돌아오던 길에 마침 일본 공연을 마치고 오던 뮌헨 필과 첼리비다케와 같은 루프트한자 비행기를 타게 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50] 일등석에 첼리비다케와 클라이버 둘만 있었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다고. 그러다가 뮌헨 필 단원들이 독촉해서 첼리비다케가 클라이버에게 가서 몇마디 대화를 나눴는데 별로 우호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한다.
3. 평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지휘자 중 한명이고, 한국에서의 인기도 매우 높다. 음반 수가 많지 않아서 그렇지, 음반 수까지 많았다면 명성은 역대 최고 지휘자 수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명성이 더 실추했을 수도 있다.)
클래식 지휘자이면서도 마치 대중음악 가수나 아이돌같이 팬덤까지 형성된 지휘자이다보니, 이리저리 논쟁도 많다. 최고의 찬사와 동시에 까임을 동시에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개되지 말았어야 할 녹음인 베토벤 교향곡 제6번 "전원"[51] 처럼 클라이버의 단점이 명확히 드러나는 연주도 있다. 다만 여기 써져있는 텍스트 그대로 읽고선 무턱대고 "이 녹음은 쓰레기"라고 할 수만은 없다. 클라이버는 베토벤 6번을 녹음하고 싶어하지 않아했고, 그에 따라 마스터 녹음본이 없는 상황에서 그의 아들이 카세트 레코더로 녹음한 것을 리마스터링해서 음반으로 낸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방송용 녹음은 훼손이 너무 심해서 어떠한 최신기술로도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딸이 차에서 들으려고 복사해둔 테이프가 굴러다니는 것을 찾은 것이다. 따라서 음질을 논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 더불어, 질질 끌지 않는 클라이버의 느낌따라 전원을 텐션있게 연주한 것을 좋아하는 감상자도 있으니, 그냥 자신 듣기에 좋으면 그만인 것이다. 일단 음반 내지에서는 베토벤이 원래 의도했던 템포라고 설명하고 있고,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들어본 상당수의 사람들도 호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팬이든 아니든 1악장이 너무 조급하다는 것에는 평가가 일치한다.
[1] 에리히 클라이버가 유태인으로 오해받기도 하는데 그는 유태인은 아니다. 다만 에리히 클라이버의 아내 Ruth가 유태인의 피가 섞인 미국인이었다. 때문에 에리히 클라이버가 유태인 혈통이 섞인 아내 때문에 아르헨티나로 도피했다는 식으로 많이 설명되어 있다. 하지만 Ruth는 미국시민권자기 때문에 유태인이어도 박해대상이 아니었다. 에리히 클라이버는 유태인이 아니었는데도 전쟁 기간 동안 해외에 피신했기 때문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에리히 클라이버를 조국을 버리고 도망간 사람으로 여기는 분위기도 있었다.[2] 명문 취리히 ETH Zurich 바로 그곳 맞다. 세계 최고의 명문 공대 중 하나로, 아인슈타인 폰 노이만 폰 브라운 뢴트겐 등 여러 저명한 학자들을 배출한 곳이다.[3] 위에서 언급된 아인슈타인, 뢴트겐, 폰 노이만, 폰 브라운 모두 독일 출신이다.[4] 지인에게 아들 이야기를 하면서 "원 우리 애가 음악적 소질을 타고났지 뭔가"하며 한탄했다고 한다. [5] wiki:"칼 뵘" 은 아버지께서 음악공부에 대해서는 기본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만 반대를 했다. 하지만, 그는 음악에 대한 꿈을 접지 않고, 아버지의 바람대로 법학 박사학위를 따고 목적은 달성했다는 생각에 그대로 지휘자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wiki:"먼치킨" 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칼 뵘이 받은 것은 phD.는 아니라고 한다. 다만 의사나 법학 학위를 가지고 있으면 세계적으로 일반적으로 doctor라고 부르는 것을 인정해 준다.(한국에서 의사면허를 따면 바로 미국에서 생물학 박사후 과정을 밟을 수 있다.)[6] Keller는 독어로 지하실이라는 뜻이다.[7] 전보의 발신인은 '늙은 keller'라고 되어 있었다고 한다.[8] 클라이버의 첫 공연 취소인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찌됐건 아직 30대에 불과한 애송이 지휘자가 공연취소를 한 것은 대단한 스캔들이었다. 게다가 해외공연이었기 때문에 그 파장은 더 컸다. 클라이버는 이 스캔들 이후에 오히려 자신을 발탁해주었던 극장경영진들을 비난했고 심지어 그들이 자기를 해고하고 싶어도 노동법상 그럴 수 없었다고 조롱하기까지 했다.[9] 이 공연의 해적판 실황음반이 열악한 음질로 남아있다.[10] 클라이버는 사실상 은퇴에 접어들 무렵인 95년까지 이곳의 개인사무실과 라커를 사용했다.[11] 유튜브에있는 영상에서 보면 유럽 등지에서 지휘할 때보다 정말 행복해하는 지휘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12] 클라이버는 일본에 갔다올때 마다 거기서 받은 엄청난 개런티를 지인들에게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13] 이것은 동년의 빈 국립가극장의 프로덕션을 그대로 일본으로 공수해서 공연한 것이었다. 천조국 미국에서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기획인데 당시 버블호황 끝자락에 있던 잽머니의 위력을 보여준 공연으로 국내를 비롯한 전세계의 화제를 모았던 공연이었다. 티켓값도 엄청나서 당시 한화로 약64만원에 달해 해외토픽에 실렸다.[14] Carlos Kleiber conducts Strauss[15] 반응이 정말 좋아서 다시 한 번 해보지 그러냐는 매니저의 말에 "너 같으면 하겠냐?" 라는 말투로 정말 싫다고 표현했다(...)[16] 여가 시간에는 자기 집에 있는 뮌헨과 연결된 아우토반에서 자신이 지휘한 브람스 교향곡 4번을 틀고 달리는게 취미였다고(...간지 작렬)[17] 클라이버 본인은 대중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자존심의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18] 개성적이기 때문에 연주에 대해 싫어하는 사람도 많이 있는데, 그 사람들 중에는 처음에 듣기 좋았다가 나중에 잡기 꺼려진다고 하는 부류가 가장 많았다.. 아니 의외로 그렇게 된 사람이 절반.. 지금까지 계속 듣는 사람이 전체 청취자의 절반이라고 알려져있다.[19] 클라이버의 레퍼토리는 상당히 역동적인 곡이 많으며 서정적인 곡을 거의 지휘하지 않았지만, 일생에 단 한번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6번 녹음에서 그의 단점이 잘 나타난다. 그 밖에도 베토벤 교향곡 5번의 2악장을 비롯해 느린 악장의 연주만 떼어놓고 보면 의외로 경직되어 있는 편이다.[20] 여러 녹음이 남아있는 베토벤 교향곡 7번이나 4번을 보면 가장 젊은 시절의 녹음이 퀄리티가 좋고 나이가 들수록 퀄러티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21] 칼 뵘도 무대위에선 호랑이 밖에선 아버지였다지만.. 근데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그렇지 못했다.[22] 런던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실황이 라디오로 중계된다고 하자 지휘자실에서 나오지 않은 유명한 사건 뒤로는 맘에 안들면 밑도끝도없이 공연 안한다고 퇴짜놓는 고질병이 되었다.[23] 이 곡이 씌어질 당시 베토벤 애인이 테레스였다면서 2악장 시작부 바이올린 선율이 마치 "테레스, 테레스"같이 들리게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수시로 연주를 중단시키며 "테레스 테레스"가 아니라 "마리 마리"같이 들린다고 지적한다. 당연히 바이올린 연주자 한 명이 빡쳤고, 지휘자에게 대드는 음성도 나온다.[24] 3주 내내 "마리 마리" "테레스 테레스" 해대다가 그마저도 맘에 안들면 공연을 없었던 일로 해 버리기도 했다.[25] 우리나라에서도 90년대 초 비제의 wiki:"카르멘"을 지휘하기로 되어있었다. 당빠 취소했다. [26] 하이팅크는 로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였다.[27] 5번은 용두사미라는 평가가 있다. 뒤로 갈수록 집중력을 잃는다는 혹평이 있는데, 1악장은 리듬감이 죽이기 때문에 1악장만 듣고 치운다는 사람이 제법 많다.[28] 1981년 멕시코실코황은 영상의 퀄리티가 매우 떨어지지만 연주는 DG반보다 낫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꼭 클라이버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면, 미하엘 길렌과 바덴바덴과 프라이부르크 남서독일 방송 교향악단의 1997년도 실황이 좋은 대안이 될 수도 있다.[29] DG의 녹음은 그의 브람스 교향곡 4번과 다른 의미로 호불호가 심하게 갈린다. 일부 클라이버빠들이 DG녹음 탓으로 매도하고 있지만 금관이 많이 약한 탓에 하이브리드 SACD로 발매된 오르페오의 82년도 실황을 많이 찾는다. 클라이버가 빈 필 과 녹음한 모든 DG음반들의 금관들이 약한 편이다. 이후 1986년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와의 도쿄 실황영상에서는 이 문제가 나아졌다.[30] DG의 80년도 녹음은 DG에 남긴 마지막 녹음인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전에 녹음한 마지막 교향곡 녹음이다. 그래서 그런지 앞의 녹음들에 비하면 완성도가 높은 편이다. 문제점은 브람스의 느낌이 안느껴질 정도로 개성적이라 호불호가 갈린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비교적 이완된 96년도 영상물을 찾는 애호가들이 많다.[31] 이외에도 초창기 하이든 등 지휘한 녹음은 일부 있으나 만년으로 갈수록 베토벤과 모차르트, 브람스의 교향곡만 자주 지휘했다.[32] 정명훈을 제외한 그나마 오페라를 좀 다룰줄 아는 국내 지휘자인 최희준, 구자범, 지중배 등도 모두 극장의 카펠마이스터 출신으로, 위의 과정을 거친 지휘자들이다[33] 60년대만 하더라도 지휘할 수 있는 오페라가 120여개였다고 한다.[34] 리허설 과정이 너무 힘들다 보니 본인 스스로가 지쳐 레퍼토리를 줄여버렸다.[35] 하도 카를로스가 공연을 자주 안하자 "쟤는 꼭 냉장고가 빌 때만 포디엄에 서는 군"하며 빈정댔다고 한다. 사실 이 드립은 클라이버가 카라얀에게 직접한 말이다. - 냉장고 드립은 첼리비다케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드립이 유명해져서 여러 사람들이 이 말을 사용한 것 같다.[36] 카라얀과 서로 편지를 자주 주고받는 사이였다. 서로 존중하는 사이로 음악에 관한 토론을 자주 나눴다.[37] 참고로 부친 에리히 클라이버와 카라얀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사실 에리히 클라이버의 성격이 지랄맞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음악계에 적이 매우 많았다. 게다가 에리히 클라이버는 유태인이 아닌데도 전쟁 기간 동안 아르헨티나에 피신했는데, 이 때문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대중들은 에리히 클라이버가 전쟁이 두려워 조국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여겨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종전 후에 빈에 복귀했을 때, 빈 여론은 싸늘했고, 당시 연주 금지 상태에 있었던 다수의 독일 지휘자들도 에리히 클라이버를 좋지 않은 얘기를 했다. 카라얀조차도 이때 에리히 클라이버를 비난했는데, 리처드 오스본에 따르면 카라얀이 다른 지휘자를 비난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38] 스토코프스키는 악보의 해석에서 벗어나 자의적인 해석을 덧붙이는 지휘자로 유명하다.[39] 이러한 방식의 해석은 다른 지휘자들의 음반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40] 클라이버의 지휘를 신의 기술이라고 칭송한 한 지휘전공자의 주장이다.[41] 카라얀은 1975년 폴리도어와 포괄적 재계약을 채결하기 이전에는 자신이 원하는 곡을 마음대로 녹음할 수는 없었다. 카라얀은 50세가 될때까지 EMI에서 월터 레그가 원하는 곡을 녹음해야 했기 때문에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 장난감 교향곡, 발라키레프 교향곡 등 자신의 레퍼토리 밖에 있는 곡들도 다수 녹음할 수 밖에 없었다. 카라얀은 월터 레그의 스케줄에 의해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을 녹음한 후 '녹음전에는 이곡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연주하다 보니 괜찮더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이 녹음은 그라모폰의 리코맨디드 레코딩으로 추천받고 있다. DG로 이적하고 난 후에도 1975년 전까지는 오페라, 브루크너 교향곡,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비롯한 일부 레퍼토리의 재녹음 등을 원했지만 DG측의 거절로 녹음할 수 없었다.[42] 뒤트와는 자신이 프랑스 전문 지휘자로 알려진 것을 한탄하면서 자신이 프랑스 곡만 녹음한 것은 음반사가 그렇게 요구했기 때문이었며, 자신은 베토벤을 가장 녹음하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43] 르네 콜로는 76년 카라얀과 EMI에서 로엔그린을 녹음할 때도 카라얀과 격렬한 언쟁을 벌여 결국 녹음이 중단된 전례가 있다. 이때 콜로가 카라얀에게 "로엔그린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전세계에 다섯명이 안되지만, 로엔그린을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 말고도 1000명(500명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은 된다."라고 한 드립은 유명하다. 중단된 이 녹음은 5년 후인 81년에야 가까스로 재개되어 완성되었다. 당시 로엔그린 녹음이 중단된 바람에 많은 제작비를 투자했던 EMI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카라얀과 EMI가 거리가 멀어지게 된 한 원인이 되었다. 또 이후 EMI가 오페라 녹음에 소극적이게 된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44] 녹음 세션 전에 열흘이나 사전 연습 세션을 할당한 덕분에 가능했다.[45] 클라이버는 이후 DG사를 X같은 회사라고 불렀는데, 슈투트가르트 가극장 스캔들과 더불어 은혜를 원수로 갚은 예라 할 수 있다.[46] 가끔씩은 마이크 주변에 뭐가 부딪혔는지 틱틱거리는 소리도 들린다.[47] 그 결과 89년 신년음악회는 음반은 소니, 영상물은 DG에서 발매되게 되었다. 때문에 이 두 회사는 높은 판권료를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쟁사에서 동일한 신년음악회의 음반/영상물이 발매되는 것을 목도할 수 밖에 없었고, 다른 음반사에게 고객을 뺏기지 않기 위해 치열한 마케팅 활동을 벌여야 했다. 이 두 회사의 마케팅 경쟁 덕분에 89년 신년음악회 음반과 영상은 예년에 비해 큰 판매고를 올리게 되었고 클라이버도 예상보다 더 많은 로열티를 받을 수 있었다.[48] 취리히연방공대 출신, 유럽 최고의 공대로 아인슈타인 등을 배출했다.[49] 서로 배우자에게는 비밀로 붙이고 평생 관계를 지속해왔다고 한다. 브람스 교향곡 4번 레코딩의 한 패시지의 해석이 바순 연주자였던 그녀와의 잠자리 중에 결정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클라이버가 자주한 말은 '내 숨소리 어때'[50] 유명한 뮌헨 필의 1990년 브루크너 산토리홀 공연으로 추정.[51] 클라이버의 평전을 쓴 찰스 바버 조차도 전원 연주는 끝내 납득할 수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